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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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노무스 해전 Battle of Cape Ecno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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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256년 | |
장소 | 시칠리아 리카타 에크노무스 곶 | |
교전국 | 로마 공화정 | 카르타고 |
지휘관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
하밀카르 한노 |
병력 | 전선 330척 | 전선 350척 |
피해 |
24척 침몰 사망: 10,000명 |
30척 침몰 64척 나포 사망: 30,000 ~ 40,000명 |
결과 | 로마 해군의 승리, 레굴루스의 북아프리카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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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56년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해 카르타고를 굴복시키려는 로마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카르타고군이 시칠리아 남쪽 에크노무스 항구 앞바다에서 맞붙은 해전. 포에니 전쟁 사상 최대규모의 해전이다.2. 배경
기원전 264년 제1차 포에니 전쟁 발발 이래, 로마는 지상전과 해전 모두 카르타고군을 연파하면서 시칠리아의 패권을 거의 확보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과 이들에 협조하는 시칠리아 주민들은 탄탄한 방어력을 갖춘 해안 요새들에 틀어박혀 농성을 이어갔고, 카르타고 정부는 그들에 대한 원조를 이어가고 해군을 파견해 이탈리아 해안을 종종 습격하는 등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전쟁이 길어지자 로마인들은 피로감을 느꼈고, 결정적인 한방으로 승부를 내자는 여론이 대두되었다.그러던 기원전 256년 초, 집정관 퀸투스 카이디키우스가 급사한 뒤 보결 집정관에 오른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지금까지 건조한 모든 전함을 끌어모아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원로원과 민중은 삼니움 족을 무찌르고 브룬디시움 공략에 성공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춘 그라면 카르타고를 굴복시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 믿고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 대한 임페리움을 확보한 레굴루스는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와 함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흩어졌던 함대들에게 에크로무스 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에크노무스 항에 모인 함대의 규모는 330척에 달했다.
한편, 카르타고 정부는 각지에서 수집한 첩보를 통해 적 함대가 에크노무스 항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시칠리아 남쪽 끝자락이며 카르타고의 본토인 아프리카 해안에 인접한 에크노무스에 적 대함대가 집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에 지난날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던 한노와 테르마에 전투에서 지상전에서 로마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고 한 때 시칠리아 중부의 엔나와 시라쿠사 인근의 카마리나까지 공략했던 하밀카르에게 적 함대가 아프리카로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두 장군은 즉시 에크노무스에서 5마일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함대를 집결시켰는데, 그 수가 350척에 달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함대에 14만 명의 선원, 노 젓는 사람, 군단병이 있었으며 카르타고 함대에 15만 명이 탑승했다고 밝혔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과장이라고 간주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해전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이리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분수령이 될 에크노무스 해전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레굴루스와 불소는 가장 크고 강력한 함대를 전방과 중앙에 배치하고 각각의 측면과 후방에 2개의 편대를 추가로 편성했다. 이 4개의 함대는 집정관 본인이 탑승한 기함을 중심으로 쐐기 진형을 형성했고, 후방에는 2개의 예비 편대가 일렬로 배치되어 수송선들을 보호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이에 맞서 전체의 3/4를 우익이 바다를 향해 뻗은 형태로서 일렬로 나란히 배치했다. 나머지 1/4는 카르타고 전선의 약간 앞쪽에 비스듬히 배치된 좌익을 형성했다. 좌익과 중앙은 하밀카르가 지휘했고, 나머지 부대는 한노가 지휘했다.레굴루스와 불소는 쐐기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어서 카르타고 함대가 우수한 항해술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로마 함대가 전방을 향해 진격하자, 하밀카르는 중앙의 카르타고 전함들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적이 뱃머리를 돌려 물러나자, 로마 병사들은 적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고 있다고 여겨 추격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로마의 선두 편대가 후방의 편대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한노는 우익의 속도가 빠른 선박들을 이끌고 로마 쐐기 대형의 후방에 있는 4번째 편대를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하밀카르도 좌익 편대를 이끌고 로마의 3번째 편대를 급습했다. 또한 일부 카르타고 함대는 후방에 동떨어진 적 수송선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3번째와 4번째 편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해안쪽으로 밀렸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가까이 오는 적 함선에 코르부스를 내리 꽂아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적선에 승선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한편, 레굴루스와 불소가 이끄는 선두 편대는 후퇴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포획했다. 그러던 중 후방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추격을 중단한 뒤 뱃머리를 돌려 아군 함대를 공격하고 있는 적 함대의 배후를 찔렀다. 불소는 해안 근처에 좌초될 위기에 몰린 3번째 편대를 구했고, 레굴루스는 4번째 편대를 구조했다. 이에 하밀카르와 한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지중해 최대의 해전은 로마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로마 해군이 이 전투에서 24척을 상실한 반면, 카르타고 해군은 30척을 잃고 64척이 나포되었다. 인력 손실은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으나, 한 척 당 300명의 노 젓는 사람과 120명의 전투원이 탑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로마군은 적어도 10,000명을 잃었을 것이며, 카르타고 측은 12,500명을 상실하고 27,000명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로마보다 적은 시민을 보유한 카르타고로서는 실로 뼈아픈 손실이었다.그 후 로마군은 손상된 함선들을 수리한 뒤 아프리카로 항해해 클루페아 해안에 상륙한 뒤 아스피스 시를 단시일에 포위해 공략했다. 이윽고 겨울이 다가오자 불소는 다수의 함선들에 병력을 싣고 시칠리아로 돌아갔고, 레굴루스는 15,000명의 보병과 500 기병을 이끌고 아프리카에 머물렀다. 그는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점령지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새 집정관이 부임해서 임페리움을 회수하기 전에 자기 선에서 전쟁을 끝내 영광을 독차지하기로 마음먹고 카르타고를 향해 진군하여 아디스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