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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로마제국 이탈리아 펠투이눔 |
사망 | 67년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39년 ~ 40년 | |
부모 |
父: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母: 비스틸리아 |
형제 | 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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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곡괭이로 적을 물리친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고대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가, 행정가.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의 오빠로, 네로에게 자살을 강요당한 제정 시대 명장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장인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와 가족관계
서기 7년 이탈리아 태생[1]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부 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서기 6년생이고 그가 당시 집정관 추천이 허락된 32세보다 많았던 30대 중반에 집정관으로 재임한 것이 확인된 까닭에, 학계 다수설은 대체로 기원전 4년 ~ 서기 1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본다.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향은 클라우디아 가도에 위치한 도시 펠투이눔이다. 이 도시는 이탈리아 아펜니노산맥 근처에 있는데, 이탈리아 남동부의 아브루초에 위치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아버지와 외삼촌 모두 법무관까지 지낸 상당한 고위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도미티우스 씨족 가문 태생으로 도미티우스 가문출신답게 프라이노멘으로 '그나이우스'를 사용했다. 젊은 시절의 기록은 풍부하지 않으나, 부모 양가와 외삼촌이 모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측근인 만큼 평탄한 삶을 보냈다.
공화정 말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분야에 있어 권위자로 손꼽히는 로널드 사임에 따르면, 코르불로의 부모와 외삼촌은 일찍부터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이었다고 한다. 동명이인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때 집안의 원로원 의석을 이어 받았고, 법무관까지 추천받은, 상당히 능력있는 원로원 의원이었다. 어머니 비스틸리아는 전직 법무관 섹스투스 비스틸리우스의 여동생으로, 원로원 가문 출신이다. 그녀의 오빠인 코르불로의 외삼촌 비스틸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의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가장 가까운 오랜 친구이자 오랜 참모였다. 그는 대 드루수스가 생전 친구라고 부른 이로, 드루수스의 양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와도 일찍이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비스틸리우스는 티베리우스 말년, 티베리우스 황제와 대 드루수스의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카프레이아 섬에 머무는 것이 음탕한 행동을 위해서 벌인 것이 아니냐는 풍자시를 지은 죄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진노를 샀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절교를 선언받고, 대 드루수스 유가족들에게 신임을 잃어, 귀족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했다. 하지만 코르불로의 어머니 비스틸리아는 오빠와 무관해 그 화를 면했고, 코르불로 일가 역시 비스틸리우스와 교류가 많지 않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어머니 비스틸리아는 상술했듯,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의 코호스 아미코룸(친구 집단) 멤버, '황제의 식탁 친구들'의 핵심인사 섹스투스 비스틸리우스의 여동생인 만큼 야심많고 고위직 진출에 욕심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매력적인 신붓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는 총 6번 결혼했고 6명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뒀는데, 코르불로는 그녀의 다섯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6번째 아이였다. 바로 아래에는 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있었는데, 이부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는 비스틸리아의 마지막 남편 카이소니우스 막시무스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2.2. 출세와 성공가도
코르불로가 본격적으로 신임을 받고, 잘 나가게 된 시기는, 이부여동생 카이소니아의 남편인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부터였다. 칼리굴라 재위 시절인 서기 39년 9월 두 집정관이 황제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서 황제가 두 집정관을 모두 면직 처리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 코르불로는 보결집정관에 취임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그가 칼리굴라의 최측근이자 친황실 세력임을 단번에 알려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코르불로는 황제에게 신임을 받아 서기 39년 집정관을 지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나이였다. 그리고 이 시기 즈음인 39년 말, 코르불로의 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칼리굴라와 연인 관계가 됐고, 곧 임신 후 정식 결혼을 올렸다. 아울러 코르불로의 여동생은 이 시기부터 아우구스타 직위를 황제에게 선사받았다.그러나 코르불로의 여동생은 이혼 후 황제와 연애 중 임신한 다음,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식 한 달 후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출산한 일로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세간에 "불륜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안 좋은 소문이 돌았고 여론은 좋지 않았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말하고 있으며, 수에토니우스의 경우에는 그녀에 대해 평가절하하며 깎아내리고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부도덕한 여인으로 서술했다.
서기 41년 1월 24일,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루푸스 등이 20명 남짓의 프라이토리아니 일부 대원들과 공모해 비무장 상태의 칼리굴라를 암살했다. 이때 코르불로의 여동생 카이소니아 역시 딸 율리아 드루실라와 함께 황궁에서 살해됐는데, 당대 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녀는 코르불로의 여동생답게 남편을 죽인 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내밀면서 용감하게 칼을 맞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칼리굴라와 카이소니아가 암살된 이후, 코르불로의 경력은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서기 47년 그를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군대 사령관에 임명할 때까지 끊겼다. 하지만 이는 그가 카이소니아의 오빠인 이유로 숙청된 탓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클라우디우스가 코르불로를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사령관에 임명할 당시, 그에게 부과된 역할과 황제, 원로원의 요구는 상당한 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르불로는 클라우디우스에게도 상당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2]
그는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이 일대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게르만족을 상대로 국경을 훌륭히 지켰다. 특히 게르마니아에서는 방어에만 치중하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라인 강 너머로 깊숙히 진격하기도 했는데, 이 외에도 쾰른을 재건하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내의 운하, 도로 등을 건설, 보수했으며 군율을 엄격히 다루고 이를 어긴 군단병 두명을 처형해 군기를 다잡았다.[3] 그러나 황제가 브리타니아 이외 지역에서의[4] 영토확장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있어서는 그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사령관 이후, 로마로 돌아와 개선 훈장을 받고 서기 52년까지 로마에서 머물렀다가, 그를 신임한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다. 그런데 54년, 그를 신임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저녁 식사 후 갑자기 사망했다.
2.3. 동방 파견
코르불로가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곳은 동방이었다. 네로가 54년 10월 젊은 나이로 황제에 오르자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 1세가 로마의 우방국이었던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자신의 이복동생인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삼았다. 동방으로 파견된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와 대도시인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키며 티리다테스를 몰아내고 친로마파 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했다.그러나 로마가 내세운 티그라네스 왕이 금세 지지를 잃고, 또 다른 장수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상황이 악화된다. 파이투스의 패배로 아르메니아 내에서의 로마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고, 이에 네로는 코르불로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파르티아와의 전면전에 돌입할 것을 명했다.[5]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한 코르불로는 유프라테스 강 너머에서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와 평화협정을 맺었고, 여기에는 티리다테스가 직접 로마로 와서 네로로부터 왕관을 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협정은 티리다테스와 볼로가세스, 네로 삼자를 모두 만족시켰는데, 우선 티리다테스는 왕이 될 수 있었고 볼로가세스 역시 파르티아 왕족이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는 결과에 만족했다. 특히, 동방의 이민족을 경계하며 내부의 토호들을 다스려야 했던 파르티아 왕은 큰 실리를 얻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에게 승리를 거둔다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명분상 로마가 파르티아 왕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른 티리다테스는 친로마로 돌아서 이후 50년 간 평화가 지속되었다.[6]
이는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고 화려한 전공을 남겨서 역사에 기록된 군인들도 많다. 그러나 이후 트라야누스 대에 드러난 것처럼 로마는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었고, 이후 세베루스 왕조에서 가해진 공세로 파르티아가 약화되면서 오히려 아케네메스 조 시절의 고토회복에 목숨을 건 사산 왕조가 출현했던 것을 생각하면 국지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힘을 과시해 파르티아와 로마 양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외교적 타협점을 찾고 장기간 평화를 유지한 코르불로의 해결책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러나 저러나 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평화를 유지하고 번영을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2.4. 베네벤툼의 음모와 억울한 죽음
아내 카시아 롱기나는 모계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 슬하에 두 딸이 있었는데 장녀인 도미티아는 비니키아누스에게 시집갔고, 차녀 도미티아 롱기나는 훗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도미티아누스와 결혼하여 황후가 된다.[7]코르불로의 맏사위 소(小)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는 가이우스 안니우스 폴리오의 손자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다. 코르불로가 장녀를 비니키아누스와 결혼시킨 이유는 두 가문의 관계 증진이 컸는데, 그럼에도 꺼림직한 부분이 있었고 이는 종국적으로 코르불로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유가 됐다.
맏사위 비키니아누스의 아버지는 전직집정관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이다.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때인 서기 31년 벌어진 세야누스 잔당 숙청 당시, 부친 폴리오와 함께 세야누스 부자와 친구라는 이유로 원로원에게 고발돼 죽을 뻔 했다. 다행히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실관계를 파악해 원로원이 보낸 고발장을 손수 파기해주면서 별 일 없이 넘어가게 됐는데, 이 사건으로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증오했고 자신을 집정관에 추천해주고 친구 대우를 해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황제 모두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코르불로와 사돈관계가 된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반란 당시 반역죄로 기소되자 스스로 자살했다.
이런 가족 배경을 둔, 코르불로의 맏사위 비니키아누스는 대략 36년생으로 일찍부터 아들이 없던 장인의 사위이자 후계자로 경력을 쌓았다. 그래서 그는 63년 말부터 장인 코르불로 아래에서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는 5군단에 복무했고, 장인과 함께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을 지휘해 이를 토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65년, 비니키아누스의 동생 안니우스 폴리오가 피소 음모 사건이라고 불린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만으로 네로에게 반역 혐의로 억울하게 처형됐다. 따라서 66년 코르불로의 사위 비니키아누스는 자신을 따르는 몇몇 청년 장교들, 원로원 귀족들과 함께 네로 암살을 기도한, 훗날 베네벤툼의 음모로 명명되는 사건을 주동자가 되어 반란을 모의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들은 네로를 암살한 뒤 코르불로를 황제로 추대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낭설로 보인다. 어쨌든 비니키아누스가 군장교들을 모아 벌인 네로 암살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실패했다. 그래서 67년 비니키아누스는 발각되자마자 자살해버린다.
이때 네로는 두 번째 그리스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리스 일대를 여행 중이었는데 마케도니아 총독 아래에 놓인 아테네와 그리스 일대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의 선심성 명령 등으로 로마민중과 원로원에게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피소 음모 사건에 이어, 베네벤툼의 음모까지 터지자 자신을 노린 또 다른 음모가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네로는 로마민중들과 병사들에게 존경받고 있던 코르불로를 강하게 의심했고, 비니키아누스가 코르불로의 사위였고 사실상 아들과 같았던 점, 코르불로 일가가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신임받고 황실과 인척관계였던 점 등을 이유로 이를 확신했다.
이 당시, 코르불로는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67년 반 로마 운동이 벌어지면서 군사적 움직임을 가져가야 할 상황에 직면한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네로는 코르불로를 자신이 있던 그리스로 소환한 다음, 즉각 자결을 명령했으며 유대전쟁을 지휘할 장군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임명해 코르불로에게 맡겨진 임무를 처리케했다. 게르마니아 사령관 2명 역시 같은 혐의로 자결을 명했다.
고대 작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소환된 코르불로는 소환 후 코린트 항에 도착하자마자, 자결을 명령받았는데 칼을 받아든 순간 자신이 결백하다며 "악시오스!"[8]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억울함과 충성심을 밝힌 뒤 자결했다고 한다.
3. 사후의 영향력
코르불로는 로마군 내에서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한 이들에게 충성스러운 행정가, 군인으로 찬사받았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67년 그가 반역 혐의를 의심받아 숙청된 사건은 피소 음모 사건으로 시작된 네로의 몰락에 큰 분기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또 네로가 군부의 지지를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를 증명하듯 1년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빈덱스의 반란 후 네로는 몰락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이후 황제가 되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비교했을 때 업적, 인망, 위상 면에서 압도적이었던 만큼 그가 살아있었으면 네로의 실각 이후에 그가 황제로 등극하거나, 그를 중심으로 정국이 빠르게 안정되어 내전을 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위명은 죽은 뒤에도 사그라들지 않아 도미티아누스가 영향력 강화를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을 정도였으니...4. 미디어
HALO에서 등장하는 사관학교의 이름이 코르불로이다. 얼핏 사관학교라 볼수 있지만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군사고등학교에 가깝다. UNSC군의 장교들이 여기를 거쳐왔고 대체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는 교육기관으로 보인다. 게임속에서는 설정상에서만 등장해왔지만 영화 여명호를 통해서 토마스 라스키가 이곳을 나왔다는걸 알수 있다.사관학교의 이름이 왜 코르불로인지는 영화 초반에 나오게 된다. 그리고 영화속에서도 그러하며 게임에서도 그러하듯이 서너 기수에 인력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코버넌트덕에 받는 관계로 사관학교는 한국전쟁 때 육사처럼 이동되어서 인재를 육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1]
남프랑스 속주 출신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생했다.
[2]
세간에 막장 황제라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칼리굴라는 그간 장애를 이유로 정계에서 배제돼왔던 클라우디우스를 집정관에 임명하고 황족 여성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황숙 대접을 훌륭히 해준 편이다. 코르불로가 칼리굴라의 인척이자 측근이라고 해서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3]
이 두 군단병은 참호 공사 중
글라디우스를 차지 않고 맨몸으로 나왔다가 적 앞에서 무기를 버린 죄로 처형당했다.
[4]
당시 로마는 브리타니아 원정 중이었다.
[5]
그것도 그냥 전권을 준 것이 아니라 동방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황제의 결재가 필요한 일도 그가 대리로 처리할 수 있는 사실상 후대의 부제와 동급.
[6]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가 충돌하는 고대 지중해의 대표적인 화약고였다.
[7]
그녀의 이후 행적은
도미티아누스 항목을 참조. 도미티아 롱기나는 유부녀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가 군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들과 결혼시켰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8]
ἄξιος, 그리스어로 '합당하다', '적합하다'라는 뜻, 당시에는 경기 우승자가 상을 받을 때 관중들이 외치는 함성이었고,
동방정교회 사제 서품식에서도 서품을 선포할 때 주교가 외치는 선언문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