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
카시우스 카이레아 (Cassius Chaerea) |
출생 | 미상 |
사망 | 41년 |
직위 | 근위대장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근위대장.칼리굴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황제를 시해한 인물로 유명하다.( 칼리굴라 암살 사건) 서기 41년 1월 자신의 순번날, 본인을 포함한 20명 남짓의 부하들과 함께 비무장 상태인 가이우스 황제와 수행원들을 시해하고, 민중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황후와 어린 율리아 드루실라 황녀를 죽였다. 이후, 황궁 안에 가둔 클라우디우스 1세를 제거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전체를 없애려고 했으나, 근위대 통제에 실패했다. 암살 이후 혼란한 틈을 타서 황궁에 들어온 클레멘스 휘하의 부하들에게 구출된 클라우디우스 1세가 제위에 옹립된 뒤,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재치와 동료 근위대장이었던 클레멘스의 반격으로 체포된 뒤 자결했다.
2. 생애
성씨(노멘)에서 드러나듯이 로마와 이탈리아의 오래된 평민 씨족 가문인 카시우스 일족 출신이었다.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라인(레누스) 강 전선에 배치되었던 백인대장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붕어한 후 라인 강 전선에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함께 하지 않고, 폭동을 수습하려는 게르마니쿠스의 가족을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이 일로 게르마니쿠스 가족의 신임을 받아,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중 서기 37년까지 살아남은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가 새 황제로 즉위했을 때 프라이토리아니에 들어갔다.[1] 그러나 카이레아는 칼리굴라 재위 3년 313일만인 41년 1월 24일에 황제 시해를 감행했다.
그가 황제를 죽이기로 결심한 동기는 불확실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카이레아가 여성적이라면서 늘상 "계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다만, 디오 카시우스는 이 암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카이레아가 불순한 움직임을 벌였고, 개인 비리가 있었다고 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칼리굴라의 해방노예들도 연루되어 고발장이 황제에게 보고되었을 때 젊은 칼리굴라가 이 부분에서 심각성을 느꼈다고 한다.
반면 호사가였던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홍등가와 고향인 푸닉(북아프라카) 일대의 어른들이 구전으로 전한 야담에 따라, 칼리굴라는 카이레아가 경비 당직을 서는 날이면 암구호를 "계집애", "고자", "자지" 등의 온갖 모욕적인 말로 지정했고, 카이레아가 자신의 반지에 충성의 표시로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면 일부러 그 손으로 온갖 망측한 모양을 하며 눈앞에서 흔들어댔다고 전했다.
한편, 숙부와 상관인 베스파시아누스, 코르불로 등으로부터 정확한 소식을 전해들은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칼리굴라가 카이레아의 업무 성과가 좋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번 크게 질책했다고 기술했다. 한편, 현대 이탈리아의 언론인이자 재야사학자인 몬타넬리는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다혈질적인 성격이라서, 자신을 질책한 칼리굴라를 죽였다고 기술했다.
현대의 학자들은 카이레아가 암살을 단행한 건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겠지만 원로원 내 황실에 반감을 품고 공화정의 부활을 꿈꾼 인사들이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카이레아는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등 20명 남짓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을 이끌고 칼리굴라 암살을 감행한 뒤, 황궁으로 쳐들어가서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황후를 비롯한 황실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암살이 단행되기 직전에 황실에 소속된 그리스인 해방노예 칼리스투스와 일부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의 비리가 고발되었고, 증거가 명백해서 칼리굴라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로 보건대, 암살을 단행한 카이레아 등의 장병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 때문에 엄벌에 처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선수를 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서기 41년 1월 24일 암살을 단행할 당시, 20명도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비무장 상태의 황제와 그 수행원들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황제를 가장 옆에서 호위 중인 게르만족 경호대, 그리고 본영에 남아 있는 근위대장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따돌리기 위해 열연을 펼치고, 그와 공모한 원로원 인사들과 황제의 동선을 속여 혼동을 줬다. 공격을 받던 황제가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를 외치고 카이사르 가문의 노예와 해방노예들이 목봉과 부채 등을 들고 황제를 감싸면서 게르만 경호대를 호출하자 도망가지 않고 황제만 노려 총공격을 감행한 후 암살에 성공했다.카이레아는 사비누스, 루푸스 등과 함께 칼리굴라를 살해한 직후, 게르만 경호대의 추격을 피해 황궁으로 이동했다. 그후 민중들을 공포로 몰아 넣고 게르만 경호대와 클레멘스의 부하들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황궁으로 쳐들어가 황후 카이소니아를 칼로 찔러 죽였다. 아울러 칼리굴라의 조각상들을 파괴한 뒤, 암살 결행 전 황제의 명령을 이유로 감금한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남자 혈육이자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 죽이려고 했다. 이때 카이레아는 원로원 내 공모자들과 연락을 취해, 원로원을 긴급소집하도록 했다.
황궁이 혼란해짐을 눈치 챈 클라우디우스가 숨은 까닭에 이를 추적하다가, 찾지 못하자 유모와 소 안토니아의 옛 해방노예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칼리굴라의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빼앗은 뒤, 어린 황녀를 벽에 던져서 머리가 깨져 죽게 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이 과정에서 클레멘스 휘하 병사들 중 일부가 황궁 안을 뒤져 구석에 숨어 있었던 클라우디우스를 구출해 로마 외곽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데려갔다. 반면 야사에 따르면, 카이레아가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클라우디우스를 마음대로 구워삶을 수 있다고 확신해, 인질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와 요세푸스 등에 따르면 클레멘스의 부하들이 클라우디우스를 구출했고, 카이레아는 클라우디우스가 병영에 온 뒤 황제로 선포되었을 때 병영에 도착했다고 한다.
카이레아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명분이 옳다고 여겨, 프라이토리아니의 장병들도 복종하리라고 여겼다. 여기에 원로원 내 반 황제파는 유피테르 신전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한 뒤 공화정 선포를 단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산은 모두 빗나갔다. 머리 끝까지 열받은 게르만족 경호대와 황궁 내 클레멘스 휘하의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은 칼리굴라 가족과 그 수행원들의 시신이 가매장되었음을 알고 카이레아를 추격하다가 그들과 공모했다고 의심이 드는 인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민중들은 칼리굴라가 악행을 벌였다고 생각했다가 암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원로원을 몰살시키자며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따라서 겁을 먹은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 논의를 중단했고, 암살의 배후로 추정된 인물인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성난 민중들을 감언이설로 달래며, 카이레아와 그 부하들이 벌인 잘못이라고 꼬리자르기를 했다.
제4대 황제로 옹립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자신에게 충성하면 보너스를 지급하겠다며 병사들의 호응을 얻어낸 뒤, 또다른 근위대장이었던 아레키누스 클레멘스에게 암살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클레멘스는 즉시 현장에서 카이레아 등의 암살자들을 체포하여 병영에 수감시켰다. 그 후 클라우디우스 1세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 칼리굴라를 기록말살형에 처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원로원은 수도 경비대를 동원하여 맞서려고 했지만, 수도 경비대는 황제 편으로 돌아섰고, 임기를 끝낸 법무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 등은 계속해서 카이레아와 루푸스 등을 국적으로 처형하고 이들을 기록말살형시키라고 요구했다.
결국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클라우디우스 1세를 새 황제로 용인했고, 칼리굴라와 선제 티베리우스의 기록말살형 시도를 멈췄다. 이후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카이레아 등 암살자 20여 명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카이레아는 자신의 검으로 찔러 죽겠다고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고, 암살을 감행한 동기와 배후를 하나도 밝히지 않은채 죽었다고 한다.
3. 대중매체물 속에서의 모습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가 일방적으로 기술한 칼리굴라에 대한 안 좋은 기록과 이를 반영해 2,000년 간 알려진 칼리굴라의 대중적인 이미지 때문에 정의의 용사 내지 대의를 위해 거사를 결행한 열사 같은 이미지로 많이 묘사된다.로버트 그레이브스의《나는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정사에 따라 카이레아가 아들 같이 생각한 칼리굴라를 죽인 이유는 공화정을 위해 죽인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카이레아를 동정하면서, 그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1]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초기 당시, 변방에 배속된 로마군의 하급 장교가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로 임관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