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라틴어: Lucius Calpurnius Pi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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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 무나티아 플란키아(어머니)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장인) 리키니아(아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처남)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양자 또는 양손자)[1][2] |
직업 |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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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할 당시, 벌어진 피소 재판으로 유명한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아들이다. 본래 이름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지만, 아버지가 유죄 판결과 함께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입안에 따른 처벌 법안에 따라,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로 강제 개명했다. 네로 시대에 벌어진 피소 음모로 목숨을 잃은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2. 생애
고대 로마에서 왕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노빌레스 명문가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i Pisones) 가문 출신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양모, 후원자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아내였던 칼푸르니아가 조부의 친척이다.2대 황제 티베리우스때,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요절하고 열린 피소 음모 재판 혹은 피소 재판의 피고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두 아들 중 장남이다. 여자형제로는 칼푸르니아가 있다. 본래 이름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다. 스페인에서 발견된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때의 피소 동판 포고문에 따르면, 아들 피소로 적혀 있는 인물이다.
"성격이 유별나게 잔인하고, 혹독하고, 고집이 세다.", "야만적이다." 등으로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일찍부터 평가받은 아버지 피소와 달리,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어머니 무나티아 플란키아처럼 주술, 점괘, 마법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게르마니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시원하다는 반응 등을 내뱉은 아버지, 대 아그리피나에게 여전히 증오심을 표현한 어머니와 달리, 동생들과 함께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했다는 말에 진심으로 추모를 하는 등의 행동을 벌여, 피소 재판이 열리기 전부터 부모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아버지 피소는 이런 장남과 차남을 크게 다그치면서, 게르마니쿠스 죽음 속에서도 그의 죽음 소식을 듣자마자 망자의 넋을 애도하기 보다는 노골적으로 기뻐하면서 비이냥거렸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이런 행동을 만류했는데, 이런 아들 피소의 행동은 피소 재판로 일가족 전체가 기소될 때,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한 민심 아래에서 형제까지 처벌이 미치지 않는 이유가 됐다.
하지만 황실 식구 중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 1세, 게르마니쿠스의 의형제, 사촌, 매부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중심으로 한 황족들은 피소의 두 아들 역시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 역시 일부 생각이 비슷했고, 원로원 의원 대부분 역시 아버지 피소를 일찍부터 좋아하지 않아, 피소의 두 아들 중 장남인 그나이우스는 피소 재판 판결 직전 아버지 피소에게 일부 유죄와 함께 사후 기록말살형이 내려질 때, 연좌제 형식으로 집안 대대로 자랑스럽게 쓰던 프라이노멘 그나이우스를 강제로 루키우스로 바꿨다. 그의 어머니는 리비아 드루실라 덕분에 처벌을 면했지만, 강제 이혼 조치 후 두 아들과의 관계가 영구 단절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러다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어머니 플란키아는 세야누스 몰락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가 게르마니쿠스 죽음, 소 드루수스 의문사 등을 재조사하는 가운데에서 자살을 강요당하는 방법으로 처형됐다.[3]
아버지 피소가 몰락하고 난 뒤, 원로원 의석 정도만 유지할 정도로 재산이 사실상 가압류된 까닭에, 이후 일가 전체가 네로 시대 이후에도 "가난하다"고 평가받는 상황에 몰렸다. 그렇지만 그는 혈연상 친척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의 딸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의 누이인 리키니아와 결혼했다. 다만, 그의 처조카이자 양자 혹은 양손자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가 피소 음모에 엮여 목숨을 부지한 대신 추방된 이유 중 핵심이 "가난하다"는 점에서 보여지듯이, 처가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 역시 로마 최고 부자였던 크라수스 사후 재산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음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자녀 중 아들은 네로 황제의 폭정 속에서 광범위한 정치 음모로 터진 피소 음모의 주동자로 유명한 중심 인물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있다.
서기 27년, 처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다.
[1]
아내 리키니아의 친조카이자, 혈연상 조카뻘 친척이기도 하다.
[2]
혈연상 본가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에 입양됐고,
네로 몰락 이후의
네 황제의 해 첫 황제
갈바에게 정치적 이유로 갈바의 양자로 선정됐다가, 오토에게 살해된 로마 귀족이다.
[3]
20세기에 발견돼, 21세기에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 피소 동판에 따르면, 피소 재판 당시 어머니 리비아가 플란키아를 유죄로 선고해 처형하려는 티베리우스를 만류했다고 한다. 따라서 현대에 이르러 티베리우스가 플란키아에게 자살을 강요해 죽인 것은 그때 하지 못한 것을 재조사 후 처벌을 집행한 형태였다는 평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