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 (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
출생 | 61년 |
사망 | 113년 |
지위 | 비티니아와 폰투스 속주 총독, 원로원 의원,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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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세기~ 2세기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정치인, 작가. 트라야누스 황제를 6시간에 걸쳐 찬양하고 도미티아누스를 폭군의 전형이라고 비난한 연설문인 <찬사>,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서한집>으로 유명하다.2. 생애
서기 61년 네로 황제 치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노붐 코뭄(Novum Comum: 현재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코모)에서 기사계급 출신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킬로와 플리니아 마르켈라의 아들로 출생했다. 태어날 당시의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킬로였고, 후일 외삼촌의 양자가 되면서 개명한 이름이 오늘날 잘 알려진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이다.이탈리아 코모에 세운 기념비를 통해 드러나듯, 위로는 형이 있었다. 형의 이름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발렌스, 푸블리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였다. 이들은 소 플리니우스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가 소년일 당시, 이미 성인이었다. 이들은 어머니 플리니아 마르켈라와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킬로의 유언 집행을 하면서, 코모 시민들을 위해 목욕용 비누 제작에 필요한 기름을 기부했다는 내용의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의 관리인이자 제작자는 "루키우스의 아들인 L.카이킬리우스 발렌스, P.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1]"라고 적어 놓았다. 동시에 이들은 로마인 중 군 경력이 있는 경우에 적는 콘투베르날리스(contubernalis)라고 하면서 형제가 (군사교육을 받기 위한) 장군의 측근 견습생이었음을 신분으로 나타냈다. 따라서 이들은 동생 플리니우스와 달리 이미 성인이었고, 못해도 20살 이상이며, 소 플리니우스의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 플리니우스의 형들 중 발렌스의 경우에는 플리니아 마르켈라의 첫 아들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은 확신 중이다. 그 이유는 이 비문 제작 당시, 발렌스의 신분이 조영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 플리니우스와 큰형의 나이 차이가 10살 정도였고, 둘째형과의 나이 차이 역시 대략 5살 정도는 났던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런 학자들의 추정처럼 실제로 비문에 적힌 소 플리니우스의 형 중 발렌스는 코모에 기념비를 세울 당시, 조영관 신분이었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생 소 플리니우스와 달리 군 경력 역시 꽤 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집정관은 경험하지 못했다. 둘째 형 푸블리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의 경우, 비문 제작 당시에는 군대 경력만 표시되어 있는데, 그 역시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동생 플리니우스처럼 집정관을 지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원로원 의원이자 대지주였던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였고, 어머니의 오빠, 즉 그의 외삼촌은 로마 해군 제독이자 중세 유럽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 박물지>를 집필한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대 플리니우스)이다. 어렸을 때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 형들과 함께 살면서 어머니의 오빠인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의 도움을 받았다. 이때 그는 그와 형들이 어머니와 함께 따로 재산관리인을 두면서, 외삼촌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았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지만 소 플리니우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고향을 떠나, 로마로 건너간 다음,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의 집에 기거했다. 이 시절, 소 플리니우스는 외삼촌의 후원 속에서 좋은 스승을 여럿 만났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2]에게 배웠는데, 로마 생활 중에는 외삼촌의 도움 등으로 퀸틸리아누스와 스미르나의 니키타스 사케르도스로부터 수사학을 교육받았다.
서기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해안 도시들이 위험에 처했다. 당시 미세눔에 주둔하던 해군 제독 대 플리니우스는 즉시 함대를 이끌고 피난민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유독가스가 선내에 흘러들어오면서 결국 질식사했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나폴리 만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사흘 뒤 삼촌의 시신과 대면했다. 그는 훗날 이 사건을 묘사한 서한을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발송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고, 유언장에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조카들 중 소 플리니우스를 양자 삼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는 일찍부터 매우 부유해, 이탈리아 전역에 많은 빌라, 별장을 보유했다. 이 모든 재산은 전부 그의 몫이 됐다. 더해 그는 형 카이킬리우스 발렌스, 세쿤두스와 마찬가지로 대지주였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도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따라서 소 플리니우스는 평생 부유했고, 이탈리아 전역에 많은 빌라를 보유했다. 이중 그가 좋아했던 곳은 고향 코모에 위치한 별장으로, 그가 " 비극"이라는 애칭을 지어준, 코모 호수 근처의 벨라지오 별장과 움브리아 페루자 근교에 있던 영지 딸린 호화 빌라였다. 이 외에도 그는 형 발렌스와 함께 로마, 오스티아 등지에 공동 명의로 된 저택, 두 형과 함께 소유한 코모 일대의 저택과 부동산 등을 여럿 소유했다.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 순직 이후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을 때, 형과 달리 외삼촌 유언장에 재산 상속 조건으로 친양자로 지명됐다. 이때 그는 로마법에 따라 외삼촌의 아들로 정식 입양되면서, 이름을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로 바꿨고, 외가를 온전히 상속받았다. 이 시기 전후를 기준으로 그는 베키우스 프로쿨루스의 의붓딸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정황상 외삼촌이자 양부 대 플리니우스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소 플리니우스의 첫 아내는 37세에 자녀 없이 병사했다.
형 발렌스, 세쿤두스와 마찬가지로, 외삼촌의 도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역시 외삼촌이 붙여준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순탄하게 공직 경력을 밞았다. 81년경 변호사로서 사법 재판에 참여해 피고인을 변호하였고, 뒤이어 시리아 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참모)로서 1년간 복무하였다. 80년대 후반에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88년 또는 89년에 황제의 검찰관으로 발탁되었다. 91년경 호민관이 되었고, 뛰어난 연설가로서 주목할 만한 명성을 얻었고 속주민들을 수탈한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지방 총독들을 직접 고발했다. 94년부터 96년까지 프라에펙투스 아레아리 밀리타리(praefectus aerarii militaris, 참전 용사 연금을 마련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재무관)를 수행했다.
98년 트라야누스가 집권했을 때 원로원에서 황제에게 찬사를 보내는 긴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문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유일한 연설문으로, 오늘날까지 6 ~ 8시간이 넘는 장문의 아부 연설로 평가받는다. 흔히 《찬가》로 알려진 이 연설은 100년 9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플리니우스가 황제 취임 승인 공표 직후 공개했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 앞에서 전임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오만하고 비겁하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반면,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을 배려하고 반대파 의원들까지 공정하게 대우하며, 숙련된 행정가이며 절제력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있고, 관대한 위대한 통치자로 추켜세웠다. 여기에 트라야누스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와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동시에 그는 이를 공표했는데, 그 내용 중 아부의 극치로 평가받는 것은 끝도 없었다. 따라서 이 대목조차 그 내용이 아부 중 약한 편이라고 평가받는다.
"숲을 돌아다니시며 굴에서 맹수를 몰아내고, 광활한 산 정상을 오르시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길을 안내해주는 이가 없이 험한 바위산을 찾고, 무엇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숲들을 찾아가시어 그곳의 신들 앞에서 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경건함을 곁들인 인물이시노라."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때 자신의 허락으로 보결집정관 신분으로 발언권을 행사해 6시간동안 듣는 동료들까지 신물이 난 나머지 질려버린 소 플리니우스의 《찬사》를 무표정으로 들어주면서, 지루해하지 않았다. 또 로마에 도착한 뒤, 매우 지친 상황임에도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던 그 연설문을 끝까지 방해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를 다 듣고, 소 플리니우스에게 감사함을 전한 뒤 곧바로 퇴장했다.
《찬사》발표 후, 소 플리니우스는 따로 이 연설문을 공포문 형식으로 남겼는데, 이 아부는 트라야누스 황제 주변에게 꽤 인상을 남겼다. 로마에 없던 때, 표면상 황제의 총애에 힘입어 기사계급의 한계를 뛰어넘고 100년 보결 집정관에 취임한 소 플리니우스가 지나칠 만큼 칭찬했지만, 전임자들과 대비된 위엄을 남기는데 큰 점수를 딴 건 덤이었다. 6시간 동안 싫은 내색없이 다 들어준 황제 역시 그랬는데, 트라야누스는 이 연설을 다 들어준 9월 1일 직후부터 강력한 권력을 의식하면서도 실질적 덕목을 갖추고 모든 아부까지 인내심 있게 참아준 점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됐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로마에 도착한 뒤부터 매일 같이 온갖 행정, 사법 사무 문제의 자문을 구했다. 이 행동은 비티니아와 폰투스에서 110~111년 총독을 지낼 때에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아부 못지 않게,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이 될 트라야누스 황제의 오랜 친구이자 인척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비열하다고 욕하고, 그를 일방적으로 모함하고 헐뜯었다. 이런 행동은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가 네르바 황제에게 누명을 쓰고 추방됐다가, 트라야누스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사면령을 내려 억울함을 풀어준 점에서, 친구를 아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노여움을 살 법 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황제는 플리니우스를 미워하거나, 그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플리니우스는 황제에게 찍히지 않았는데, 이후 그는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해, 이런 행동에도 확실히 황제 지지자로 인정받아 보결 집정관 임기 시절부터 승승장구했다.
그는 104년부터 106년까지 티베리스 강 유역의 감독관을 맡았으며, 사법법정의원을 겸임하였다. 109년 또는 110년부터 비티니아와 폰투스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고,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동방 일대 군수품 확보 등의 중책을 부여받았다. 이 시절, 그는 황제에게 매일 서신을 보냈고, 다양한 사안의 판단을 묻고 그대로 따랐다. 여기에는 당시 세가 넓어지고 있는 기독교도 문제도 있었는데, 그는 트라야누스에게 이전에 기독교도였던 사람과 익명의 고발로 기독교도로 기소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물었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법의 절차와 공정성 아래 사건을 처리하되, 이전에 기독교도였다는 과거나 익명의 고발로만 기소된 자들이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부정하거나 억울함을 밝히면, 처벌하지 말고 익명의 델라토르들을 무시하고, 이런 선례가 아주 좋지 못하므로 그런 일처리를 하면 안 될 것이라고 명을 내렸다.
소 플리니우스는 3번 결혼했는데, 상술한 대로 첫 아내는 37세에 자녀 없이 병사했다. 이후, 폼페이아 켈레리나로 알려진 상류층 규수와 재혼했는데, 이 결혼에서도 자녀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칼푸르니우스 파바투스의 딸 칼푸르니아와 다시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에서도 그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세 번의 결혼 생활 중 마지막으로 결혼한 칼푸르니아에게 애착이 강했다. 그래서 아내 칼푸르니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편지를 비롯해, 칼푸르니아가 아이를 유산했을 때 심히 슬퍼하는 내용으로 쓴 편지를 적어 남겼는데,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113년,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 속주 총독으로 있던 중, 회의를 진행하면서 업무에 몰두하다가 쓰러져 사망했다.
여담으로 그는 수에토니우스의 후원자였다. 그는 수에토니우스를 식객 내지 문객으로 두면서 자신이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 속주 총독으로 갈 때 휘하 관료로 데리고 갔으며, 총독 임기 중에는 트라야누스 황제 쪽 인사들에게 처음 소개했다. 또 정계 진출을 꿈꾼 수에토니우스가 로마에 살면서 좋은 고급 주택을 구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수에토니우스를 113년 급사하기 전까지 계속 도왔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비비아 사비나 황후를 대상으로 음란한 농담, 폄하 등을 뒷담화로 하다가 황제에게 걸려 파면되고 그를 추천한 사람들까지 공직에게 축출된 사건을 벌였다. 다행히 이 시절, 소 플리니우스는 이미 고인이었고, 슬하에 자녀도 없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살아있던 그의 친구 클라루스 등과 달리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사후 명예가 손상되지 않았다.
3. 서한집(Epistulae)
플리니우스는 14살 때 그리스어로 비극을 썼고 일생 동안 수많은 시를 집필했다고 하며, 많은 연설문을 집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트라야누스의 즉위 때 찬사를 보내는 연설문 외에는 주변인들과 주고받은 서한집뿐이다. 편지 총 247편이 현존하는데, 그의 사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정치적 문제까지 내용이 다양하다. 다만 평범한 편지치고는 강하고 도덕적인 메시지가 명백하게 드러나거니와 형식적인 문체로 쓰였기에, 많은 학자들은 소 플리니우스가 이 편지들을 모아서 9권 저서로 출간할 때 신중하게 편집했다고 본다. 서간집에는 정치적, 사법적 사건들을 종종 언급했는데,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피해를 입은 원로원 의원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내용이 있다.역사가들이 이 서한집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촌 대 플리니우스가 순직한 베수비오 화산 폭발 사건 증언이고, 두 번째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이 편지들은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와 폰투스 퐁독으로 재직할 때 보낸 것으로 법적 분쟁, 의전, 지방 재정 상태, 건축 계획, 니코메디아 수도교, 니카이아 극장, 심지어 황제의 생일이 어떻게 이 지방에서 기념되는지 등 온갖 주제를 다루었다. 플리니우스는 사소하다 싶은 문제까지 황제에게 일일이 문의했는데, 트라야누스는 이에 대해 별다른 짜증을 부리지 않고 세심하게 지시하였다. 플리니우스는 한 편지에서 자유민에게만 개방된 로마군에 입대하기를 원하는 노예들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는데, 황제는 국법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편지는 서기 110년 점차 증가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어찌해야 하는지에 관해 문의한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의 '동지애'가 비뚤어진, '절제되고 온건한' 미신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황제에게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관례적으로 저는 의문이 가는 모든 것을 폐하께 보고 드립니다. 저의 무지와 불확실함을 지도할 분이 황제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전 아직까지 기독교인들과 관련된 재판에 배석한 경험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로 그들을 처벌해야 할지 혹은 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들의 연령을 고려해야 할지 아니면 어린 자들이나 장성한 자들이나 동일하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서도 좀처럼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죄를 뉘우치는 자들을 사면해 줘야 할지, 혹은 한번 기독교인이었던 자라면 더 이상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한다고 해도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인지, 결국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범죄 사실이 없어도 처벌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그 이름과 관련된 범법 행위만 처벌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편, 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된 자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랐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면 두세 번 거듭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게다가 사형 선고의 위협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자는 사형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완고함과 강퍅한 고집만으로도 처벌받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외에도 그와 같은 광기를 보여준 몇몇 로마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전 그들을 로마로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종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이 범죄는 점점 더 광범위하게 번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몇몇 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하며 명단을 첨부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전 현재 혹은 과거 한때 기독교인이었음을 부인하는 자들이, 만일 제가 제시한 대로 우리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 - 즉, 그들이 폐하의 상 앞에 향과 포도주(이전에 전 이와 같은 목적으로 다른 신상들과 함께 이것들을 가져오라고 명했었습니다.)를 올리고 그것에 더해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욕한다면 - 그들을 석방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임을 자청하는 자들을 억지로 시켜서라도 이와 같이 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저 비통할 따름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했다가 곧 태도를 바꿔 한 때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어떤 이는 3년 전 또 다른 이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어떤 이는 20여 년 전에 그것에서 돌아섰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폐하의 상과 다른 신들의 상 앞에 제사를 드리며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단지 특정한 날 해뜨기 전에 서로 번갈아 가며 모임을 가진 게 전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신처럼 찬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맹세함으로써 자신들의 그룹을 결집시켰습니다. 이는 어떤 범죄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절도나 강도 그리고 간통을 하지 말 것을 그리고 약속을 지키고 맡겨진 재화가 요구될 때 거절하지 말고 내어줄 것을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 후 그들은 일단 헤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평범한 식사를 함께 나누기 위해 재차 모이는 것이 그들의 관례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만 두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폐하의 명령을 따라 그와 같이 폐쇄적인 모임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 저는 무엇이 과연 진실인가 더 알아내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중드는 소녀라고 불리는 두 피의자에게 고문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그리고 거대한 미신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수사를 연기하고 이제 폐하께 조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문제는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막대한 수만 놓고 봐도 분명히 자문을 구해야 할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모든 연령층과 각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미 그와 같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이 미신은 단지 도시 뿐 아니라 지방의 여러 곳까지 전염병처럼 퍼졌습니다. 그럼에도 전 아직 이 일을 억제하고 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된 자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랐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면 두세 번 거듭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게다가 사형 선고의 위협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자는 사형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완고함과 강퍅한 고집만으로도 처벌받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외에도 그와 같은 광기를 보여준 몇몇 로마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전 그들을 로마로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종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이 범죄는 점점 더 광범위하게 번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몇몇 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하며 명단을 첨부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전 현재 혹은 과거 한때 기독교인이었음을 부인하는 자들이, 만일 제가 제시한 대로 우리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 - 즉, 그들이 폐하의 상 앞에 향과 포도주(이전에 전 이와 같은 목적으로 다른 신상들과 함께 이것들을 가져오라고 명했었습니다.)를 올리고 그것에 더해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욕한다면 - 그들을 석방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임을 자청하는 자들을 억지로 시켜서라도 이와 같이 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저 비통할 따름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했다가 곧 태도를 바꿔 한 때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어떤 이는 3년 전 또 다른 이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어떤 이는 20여 년 전에 그것에서 돌아섰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폐하의 상과 다른 신들의 상 앞에 제사를 드리며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단지 특정한 날 해뜨기 전에 서로 번갈아 가며 모임을 가진 게 전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신처럼 찬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맹세함으로써 자신들의 그룹을 결집시켰습니다. 이는 어떤 범죄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절도나 강도 그리고 간통을 하지 말 것을 그리고 약속을 지키고 맡겨진 재화가 요구될 때 거절하지 말고 내어줄 것을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 후 그들은 일단 헤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평범한 식사를 함께 나누기 위해 재차 모이는 것이 그들의 관례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만 두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폐하의 명령을 따라 그와 같이 폐쇄적인 모임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 저는 무엇이 과연 진실인가 더 알아내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중드는 소녀라고 불리는 두 피의자에게 고문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그리고 거대한 미신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수사를 연기하고 이제 폐하께 조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문제는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막대한 수만 놓고 봐도 분명히 자문을 구해야 할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모든 연령층과 각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미 그와 같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이 미신은 단지 도시 뿐 아니라 지방의 여러 곳까지 전염병처럼 퍼졌습니다. 그럼에도 전 아직 이 일을 억제하고 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로마 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플리니우스의 서신은 초기 로마 제국이 기독교 문제를 어떻게 다뤄주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서신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을 기소하거나 박해하기 위해 추적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게 익명의 비난을 무시하라는 구체적인 조언을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정하지 않았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역사가 레너드 L. 톰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기독교인들은 이후로 쫓기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 정부로부터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고발되고 유죄가 확정되면,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1]
L(ucio) Caecilio L(uci) f(ilio) Valenti et P(ublio) Caecilio L(uci) f(ilio) Secundo et Lutullae Picti f(iliae)(루키우스의 아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발렌스와 루키우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
[2]
서기 68년 네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를 진압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