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Sextus Afranius Burrus) |
출생 | 미상 |
사망 | 62년 |
직위 | 근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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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근위대장. 클라우디우스 황제 사망 후 네로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친구 세네카와 손을 잡고 정국을 주도하고 네로를 좌지우지했다. 한 팔이 없었다고 전해진다.2. 생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바시오[1]에서 출생했다. 베이종 유적지에서 그의 신상명세가 적힌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Vasiens(es) Voc(ontii)
patrono,
Sex(to) Afranio Sex(ti) f(ilio)
Volt(inia tribu) Burro,
trib(uno) mil(itum), proc(uratori) Augus
tae, poc(uratori) Ti(berii) Caesar(is),
Proc(uratori) divi Claudi,
praef(ecto) pra(e)tori, orna
m(ent)is consular(ibus).
바시오의 보콤티 가문의 후원자이며 섹스투스의 아들이고 아우구스타의 프라이토리아니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는 신격화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와 전 집정관인 클라우디우스를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patrono,
Sex(to) Afranio Sex(ti) f(ilio)
Volt(inia tribu) Burro,
trib(uno) mil(itum), proc(uratori) Augus
tae, poc(uratori) Ti(berii) Caesar(is),
Proc(uratori) divi Claudi,
praef(ecto) pra(e)tori, orna
m(ent)is consular(ibus).
바시오의 보콤티 가문의 후원자이며 섹스투스의 아들이고 아우구스타의 프라이토리아니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는 신격화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와 전 집정관인 클라우디우스를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부루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의 로마인으로, 그의 아버지 또는 조부가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휘하 보조병으로 복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덕분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아프라니우스라는 성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군대에 입대하여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지낸 뒤 검찰관으로 발탁하였고,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유산 중 하나를 관리했다.
41년 클라우디우스 1세에 의해 소아시아의 부유한 속주인 갈라티아 팜필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터키의 아수(Aksu) 지역에서 발견된 비석은 그가 이 지역에서 총독으로 재임했음을 증언한다. 그는 여기서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토대로 고향을 후원하고 저명한 인사들과 사귀었을 것이다. 이때 세네카를 친구로 두었는데,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서기 51년, 클라우디우스는 두 근위대장들이 브리타니쿠스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이라고 여긴 소 아그리피나의 입김으로 두 근위대장을 해임하고 부루스를 단독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54년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뒤 근위대를 이끌어 황궁을 장악한 뒤 네로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부루스는 로마의 치안을 확고히 장악하고 물자 공급이 원활하게 유지되도록 힘썼으며, 원로원 인사 탄압은 가급적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 황제 클라우디우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르키수스 등 해방노예들을 숙청했다. 또한 세네카와 함께 황제가 예술과 음악, 시, 전차 경주에 대한 취미에 몰입하게끔 권장하면서, 모든 공식행사에서 네로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조언했다. 네로는 이로 인해 취미를 마음껏 즐겼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도 예상 못할 정도로 방종하게 변해갔다. 한편, 그들은 네로가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지나친 간섭에 부담스러워하는 걸 이용해, 소 아그리피나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네로를 자기들 입맛대로 조종하고자 노력했고, 네로가 소 아그리피나를 끝내 살해했을 때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네로는 어머니를 살해한 뒤 이전보다 더욱 방종해졌고, 주변인들을 의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루스도 네로를 축출하려 한다는 의심을 2번이나 받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외가 후손인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옹립하려 했다는 고발을 받았고, 클라우디우스 1세의 충신 해방노예 팔라스와 공모하여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즉위시키려 한다는 고발도 받았다. 네로는 고발자를 추방하는 것으로 부루스에 대한 여전한 신임을 보였지만, 그의 입지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또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하려는 네로의 계획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네로의 불만을 샀다.
그러던 62년, 그는 돌연 사망했다. 목구멍에 난 종양 때문에 죽었다고 전해지나, 일각에서는 네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네카는 부루스의 비호 덕분에 네로의 위협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지만, 부루스 사망 후 새 근위대장에 발탁된 티겔리누스가 자신을 조사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즉시 사임한다. 세네카와 부루스가 사라지자 네로는 더욱 거침없어졌고, 로마 제국은 수년간 네로의 폭정에 신음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