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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3:48:53

옥타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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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실존인물
2.1. 소 옥타비아(기원전 69/66년 ~ 기원전 11년)2.2. 대 옥타비아(? ~ 기원전 29년 이후(추정))2.3.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서기 39/40년 ~ 서기 62년)
3. 가상인물4. 기타

1. 개요

Octavia / Oktavia

고대 로마 여자 이름으로 고대 로마의 평민 가문 옥타비우스(Octavius)의 여성형 이름이다. 옥타부스(Octavus)는 옥타비우스의 원형으로 라틴어로 '8번째 탄생', '여덟 번째의'를 뜻한다. 8도 음정(Octave, 옥타브)과도 관련된 이름이다. 참고로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이란 뜻으로 변화된 남성형 이름 중 하나로 해당 문서의 여성형 이름 옥타비아 뒤에 '-아누스'가 결합된 로마인들의 입양된 남성들의 이름이다.[1][2]

로마 황제, 황후들의 이름이거나 출신 가문명인 까닭에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한 여성이름이 되어, 현대의 미국, 영국 등 영어 문화권에서 여자아이들의 이름으로 아직까지 종종 쓰인다.

2. 실존인물

2.1. 소 옥타비아(기원전 69/66년 ~ 기원전 11년)

소 옥타비아 항목 참조.

2.2. 대 옥타비아(? ~ 기원전 29년 이후(추정))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남매의 이복 언니, 이복누나다. 동명이인의 이복동생 소 옥타비아, 소 옥타비아의 증손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달리 유명하지 않아, 존재감이 크게 없는 편이다.

어머니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첫 아내였던 안카리아. 기원전 69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하며, 아버지가 신참자였고 어머니 안카리아 역시 계모 아티아와 달리 귀족출신이 아닌 평민 집안 출신인 탓에 두 이복동생들과 달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기원전 59년 객사하기 전까지는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남매와 함께 살았는지 확실치 않고, 이복동생들과 교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인 대략 15~17세 사이에 원로원 의원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와 결혼했다고 하며, 사이에서는 남편과 동명이인인 아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2세과 여러 자녀들을 낳았다. 이중 대 옥타비아의 아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2세는 어머니의 이복동생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했던 기원전 29년, 집정관을 지냈고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 측근 중 한명으로 있으면서 히스파니아,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의 대표적인 친황제파 의원이자 장군으로 활약했다. 참고로 아풀레우스 2세의 딸로 대 옥타비아의 손녀 남편이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3대에 걸쳐 노력한 게르마니아 정복전쟁을 물거품으로 만든 바루스다.

2.3.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서기 39/40년 ~ 서기 62년)

동명이인이자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 소 옥타비아의 증손녀이다. 흔히 옥타비아[4]로 불린다. 로마인들과 원로원, 황실에서 말하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직계인 카이사르 가문의 공주로 서기 53년 사촌언니 소 아그리피나의 외아들로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이 되는 아헤노바르부스(후일의 네로)와 결혼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3. 가상인물

4. 기타



[1] 왕정부터 제정 초기까지 입양된 로마인들은 입양된 집안의 성과 씨족을 부여받으면서 자신의 출신 씨족명(노멘)의 형용사화시킨 여성형 이름 뒤에 '~ 출신 사람'을 뜻하는 '-anus(아누스)'를 자신의 출생가문 이름을 약간 변형시켜 뒤에 붙였다. 일례로 아우구스투스의 장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경우,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을 뜻한다. [2] 이러한 전통은 공화정 후기 이후 점점 사라지게 됐지만, 보통의 로마인들은 여전히 이런 전통을 지켰다. 그러나 제정 중기가 되면서부터 공화정 시대 유명 로마인들의 성씨나 출신 가문 여성들의 이름이 마구잡이로 개인이름으로 애용되면서부터 이런 전통 역시 무시되기 시작한다. 이 결과, 아예 입양된 집안 이름 전체를 받거나 부모가 지어준 개인이름(프라이노멘)만 유지한 채 입양된 집안 이름과 결합해 개명하거나 입양되어 온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이나 손자가 변형해 물려받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3] 본래는 3녀이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장녀로 이복자매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클라우디아의 친모가 불륜을 벌인 것이 들통나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내 자식이 아니다"는 선언을 받아 차녀가 되었다. [4]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인 클라우디우스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