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라틴어: Faustus Cornelius Su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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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아버지)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어머니) 폼페이아 마그나(아내)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아들) 코르넬리아 술라(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재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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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아들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맞섰으나 탑수스 전투 후 목숨을 잃었다.2. 생애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에 맹활약한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네번째 아내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의 성인대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다. 술라는 기원전 78년에 사망하면서 자신을 오랫동안 충직하게 따라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남은 가족을 부탁했다. 루쿨루스는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해줬으며, 그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같은 학교에서 다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가 아버지의 통치를 찬양하자 카시우스가 "네 아버지는 잔혹한 독재자였다"라며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기원전 66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호민관이 술라가 생전에 국유 재산을 횡령한 혐의로 그를 법정에 소환하려 했다. 당시 법무관이었던 키케로는 그의 변호를 맡아 민회 앞에서 연설해 재판을 시작할 이유가 없음을 증명했다. 이후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 활약했고, 아미스에서 미트리다테스 2세의 장남 파르나케스 2세가 미트리다테스의 시신과 수많은 선물을 보낸 것을 접수하여 폼페이우스에게 전달했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귀환하여 조영관에 선임된 뒤 아버지를 기념하는 검투사 경기를 개최했다.
기원전 50년대 후반기에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 마그나와 결혼하였고, 기원전 57년 로마 다신교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56년 주화를 주조하는 임무를 맡아 부친을 기리는 주화 2종류를 주조했다. 하나는 술라가 기원전 83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직후 상서로운 징조를 내린 디아나 여신의 이미지를 담았고, 다른 하나는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를 체포하여 로마군으로 끌고 오는 장면을 담았다. 여기에 장인 폼페이우스에게 영광을 돌리는 주화 2종류를 추가로 주조했다.
기원전 54년 재무관에 발탁되었고, 이부형제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샤르데냐 속주민들을 학대한 혐의로 기소되자 그를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냈지만, 스카우루스는 1년 후 다른 문제로 고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망명했다. 기원전 52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변호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고 망명하는 걸 막지 못했다. 또한 푸블리우스 추종자들이 푸블리우스의 시신과 함께 불태워버린 큐리아 호스틸리아를 재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을 낭비했고, 부채로 인해 경매에서 집과 토지를 매각해야 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훗날 그가 내전에 가담하게 된 것은 부채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장인을 따라 카이사르에 대적했다. 그는 마우리타니아 왕 보구드를 설득해 폼페이우스 편으로 삼으려 했지만, 그 전에 카이사르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후 시칠리아에서 군단을 모집한 뒤 에피로스로 간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기원전 48년 마케도니아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맞섰으며,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주력군과 합세한 뒤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했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대패로 끝난 뒤, 남은 군대를 코르기라로 모아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거점을 마련하려 했지만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에게 패배한 뒤 아프리카로 도피했다.
이후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동맹을 맺고 대규모 군대를 양성해 복수전을 준비하다가, 기원전 47년 말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지휘하에 이에 대적했다. 하지만 그가 아프리카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46년 4월 5일 탑수스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규율을 회복하려 시도했고, 우티카에서 거점을 삼고 병사 1인당 100세스테르티우스를 나눠줘서 군심을 사려 했다. 그러나 우티카 시민들이 카이사르를 따르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는 히스파니아로 망명하기로 하고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함께 1,50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해안가로 향했으나, 마우레타니아 왕 보구드의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고, 포로 신세로 전락한 뒤 며칠 후 처형되었다.
아내 폼페이아 마그나와 두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우티카에 남았다가 카이사르에게 넘겨졌지만, 카이사르는 그들을 살려주는 건 물론이고 재산도 돌려줬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이후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고,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는 서기 3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이 될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두었다. 파우스투스의 딸 코르넬리아 술라는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아내인 스크리보니아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