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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4:03:44

동로마 제국/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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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잔티움 제국' 용어에 대한 논의
2.1.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릴 이유가 없다는 의견2.2.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릴 이유가 있다는 의견2.3. 이유가 있어도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적 멸칭에 불과하다는 의견
2.3.1. 일부 반론 및 보론
3. 고대 로마에서 이어지는 연속성4. 당대인들의 인식
4.1. 동로마인들의 인식4.2. 외국인들의 인식
4.2.1. 서유럽인들의 인식4.2.2. 이슬람권의 인식4.2.3. 슬라브권의 인식
5. 로마인이라는 명칭의 의미 변화6. '고전 로마성 결핍' 담론의 허상
6.1. 그리스인이 다스리니까 로마가 아니다?6.2. 그리스어가 쓰이니까 로마가 아니다?6.3. 그리스 식으로 사니까 로마가 아니다?6.4. 로마의 종교를 믿지 않으니 로마가 아니다?
6.4.1. 반박
6.4.1.1. 로마의 지식인층의 일부가 그리스/로마교에 회의를 느껴가는 기류가 있었기에 그리스/로마교는 고대 로마 체제의 정체성과 상관이 없다?6.4.1.2.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허탄함에 대한 회의가 기반이 된 기독교의 확산?6.4.1.3. 고대 그리스~로마의 헬레니즘 철학이 기독교를 위한 길을 닦아놓았고, 따라서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다?

1. 개요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땅을 완전히 잃기 전 로마 제국과 갖는 연관성 및 정체성을 다루는 문서다.

2. '비잔티움 제국' 용어에 대한 논의

한국에선 과거 '비잔틴 제국'으로 호칭하던 일변도의 풍토에서 벗어나, '비잔티움 제국' 혹은 '동로마 제국'의 명칭을 혼용하고 있는 추세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이 국가에 대해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여전히 보편적이며, 정통성을 따지는 의견 외에는 굳이 '동로마 제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1] 서양 학계는 물론 그리스에서도 이 '비잔티움' 명칭을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인정하는 만큼 관습적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호칭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며, 여러 비판적인 견해가 교차하고 있다.

2.1.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릴 이유가 없다는 의견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한국사에서 신라 통일신라를 676년 기준으로 구분하듯, 연속성 있는 한 나라를 후대 역사가들이 편하게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당대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특히 이 제국의 당대 명칭은 로마니아(로마국), 바실리아 톤 로메온(로마 군주국) 등이었다.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도 더 지난 155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Hieronymus Wolf)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대 이름에 착안한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AE BYZANTINAE)" 이라는 사료 모음집을 출판한 것이 최초 용례다.[2] 그 뒤 몽테스키외를 위시한 서구 계몽사상가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중세의 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풍조가 정착되었다. 제국이 멀쩡히 살아 있던 당시에는 정통 로마에 도전하려는 서구권을 중심으로 '그리스인들의 제국'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이라는 단어가 운운되곤 했어도, 최소한 '비잔티움 제국' 이란 말 자체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인식대로 4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그럼 '고대 로마 제국'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남긴다. 330년 동로마 제국이 시작됨에 따라 고대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고 보면 서로마 제국의 설명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가 생기고, 그렇다고 330년을 기점으로 동로마 제국과 고대 로마 제국이 한동안 공존했다고 하기에는 당시 제국은 분열되어 있지 않았으며 통치자 역시 콘스탄티누스 한 명뿐이었던 사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로마 동서 분열'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해인 395년은? 그러나 실제로 이 해에도 로마가 별개의 두 나라로 공식적으로 쪼개진 것은 아니었으며, 동로마와 서로마는 서로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고, 이민족들의 침입에 상호 협력해 가며 열심히 대항했다. 게다가 소위 그 '분열'마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제위를 동로마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형식적으로 다시 합쳐진다. 그렇다면 이라클리오스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당시 제국을 줄기차게 공격하던 이슬람 세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기네들의 상대는 이라클리오스 전이나 후나 로마였을 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로마가 사라지고 비잔티움이 새로 들어섰다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위에 언급된 '분열'이라는 말도 엄밀히는 틀린 얘기다. 분열은 시초가 다른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섰다는 것인데, 동서로마는 시초가 같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으로 만들어진 통치 방법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로마 동서분열'이라는 말은 올바르지 않고 '분할통치'가 올바르다. 또한 제국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국가가 나뉘지 않았고 단순히 로마 제국 내에 통치하는 지역의 황제가 구분되어 있을 뿐이지, 한 나라다. 지역을 다스리는 각각의 정부가 있을 뿐이지, 두 지역 사이의 국방 경계도 없고 그냥 하나의 나라이다.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상위 중앙 정부와 거의 격이 비슷한 지방정부에 의한 연방제도 구조로 볼 수 있겠다. 권력 자체가 분산되어 체제의 통일성이 약한 것처럼 보일수는 있으나, 현대 국가로 쳐도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높여준다고 해당 국가가 '분열'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단일 권력구조에 대한 구심력이 약하다' 정도로 설명될 뿐. 다만 여기서 단일 권력구조에 대한 구심력이 약한 건 문제였다. 상위 중앙 정부는 동서 로마 어느 쪽인지는 법규로 정해지지 않았으며, 그때그때 선임 황제가 있는 쪽이 상위 중앙 정부 노릇을 했는데 이러다보니 간혹 동서 로마 어느 한쪽이 자기가 아래 황제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가 생겨 불필요한 내전이 생겼다. 콘스탄티누스 VS 리키니우스, 콘스탄티누스 2세 VS 콘스탄티우스 2세 & 콘스탄스, 호노리우스 VS 아르카디우스[3] 등.

옥스퍼드 대학교의 동로마 연구자 에이브릴 캐머런(Averil Cameron)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동로마 제국은 결코 중세 시대에 새로이 형성된 나라가 아니었다.(It was not a new state formed only in the medieval period.)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분할된 동쪽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라고는 불리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비잔티움을 세웠다고 여겨지는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왕인 비자스(Byzas)의 이름이 라틴어화하여 비잔티움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Byzas라는 이름은 트라키아 일리리아 지방에서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의 동로마사 석학인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is)는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 칭하며 의도적으로 고대 로마와 분리시켜놓는 서방 중심적 시각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2023년에 새로 발간한 동로마 통사(The New Roman Empire)에서 이 국가를 시종일관 '로마니아'[4]로 부르고 그 주민을 '로마인'이라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동로마의 인명을 라틴어화/영어화하여 혼용하는 학계의 풍토와 달리 당대인이 부른 그리스어 명칭으로 정리하였다.[5] 칼델리스의 입장은 '자국에서 부르는 인명을 우선시하는 풍토는 오로지 이 나라(비잔티움 제국)만 빼고 적용되어 왔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짓(nonsense)은 이제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2.2.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릴 이유가 있다는 의견

다만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이 제국이 고대 로마로부터 직접적인 연속성 있는 국가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미 정착되고 관습으로 굳어진 용어라는 점도 있고, 2200여년의 길디 긴 로마사를 지칭할 때 편리한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되는 점도 있다. 동로마와 고대 로마의 연속성이 부각된 후 역덕후들 사이에선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 자체를 일종의 어그로(고대 로마 제국과는 단절된 별개의 나라임을 나타내려는 목적)로 취급하거나, 매우 조심스럽게 제한하는 경향이 있지만[6] 이미 관습적으로 굳어진 용어라서 딱히 비하 목적 없이도 널리 쓰이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7]

그 밖에 연속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로마 제국이면서 로마가 왜 영토에 없냐?"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로마國(로마니아)과 로마市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한 오류이다. 물론 로마市가 로마니아의 정체성에서 분명히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 것은 맞고, 특히 고대-중세의 지중해 국가에서 '도읍'은 단순한 행정구역을 넘어 때로는 국가와 동일시된 것도 맞다. 최소한 동로마인들에게도 이탈리아의 로마市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옛날 도읍"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Nova Roma(새 로마)로 부르긴 했지만, 이탈리아의 로마市는 여전히 중요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로운 로마'로서 가진 권위는 역사가 진행되면서 천천히 축적되고 확고해진 것이지, 콘스탄티누스의 천도로 갑자기 뚝하고 떨어진 게 아니다. 동로마와의 관계가 상당히 험악하던 초기 신성로마제국 쪽에서 툭하면 자신들의 로마 칭호에 태클을 거는 바실리오스 1세에게 루도비코 2세의 명의(실제 저자는 로마 시민이자 로마 교회 사서였던 아나스타시우스)로 동로마에 걸던 반박도 "로마를 버린 자들이 로마를 참칭하는가?" 였는데 이미 이 시기에는 동로마가 로마市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적어도 사서 아나스타시우스를 비롯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 이탈리아의 그 로마가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이탈리아와 로마市에 (단순히 고토라는 것만으론 설명하기 힘든) 집착을 보이는 등 "로마니아면 그래도 이탈리아의 로마市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질문은 당사자들에게 심각하고도 진지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로마市상실이 아무리 로마니아의 정체성에 심각한 아픔이었다고 하더라도, 상실이 곧 '로마니아가 아니다'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사자인 동로마인들은 물론이고, 외국인인 서방인들 역시도 동로마를 분명 로마니아(로마國)로 인정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라틴 제국 역시도 국호는 '로마니아'였던 것을 보면, 서방인들 역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그 나라'를 '로마니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자면, 비잔티움과 고대 로마를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꼭 비잔티움 폄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가령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는 다음과 같이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을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비잔티움의 역사는 그 최초의 단계에서는 로마 역사의 한 새로운 시대에 불과하며, 비잔티움 국가는 옛 로마 제국의 연속에 불과했다. "비잔티움적(비잔틴)"이라는 형용사형이 내포하고 있는 뜻들은 후대에 얻어진 것으로, 이른바 비잔티움인들은 그 말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자처했고, 그들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제국이 존속하는 마지막 날까지 로마라는 이름은 비잔티움인들을 매혹했고, 로마의 국가전통들은 끝까지 그들의 정치적 사상과 의지를 지배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질적인 인종들로 이루어진 제국이었으나, 로마의 국가사상을 통해서 통합되었고, 로마의 보편사상을 통해서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규정했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의 상속자로서 이 지상에서 유일한 제국이기를 바랐다. 말하자면 일찍이 로마권에 속했고 지금은 기독교 세계의 일부가 된 모든 국가들에 대해서 지배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냉혹한 현실에 의해서 점점 부정되었지만, 로마-비잔티움 제국과 나란히 옛 로마 제국의 지반 위에서 형성된 여타 기독교권 국가들이 법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비잔티움과 동일한 층위에 자리한 것은 아니다. 비잔티움의 군주가 로마 황제이자 기독교 세계의 수장으로서 정점에 서 있던 복합적인 국가간 위계가 발전되었던 것이다. 초기 비잔티움 시대의 제국정치는 로마 제국의 영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투쟁이 주축이지만, 중기 및 후기 비잔티움 시대에는 이 이념적 지상권(至上權)의 유지가 회전축이 된다.

그러나 비잔티움이 제아무리 고대 로마와의 결속을 의식하고 있었고, 또 권력정치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이념적 이유에서 아무리 집요하게 로마적 유산을 고집하고 있었더라도, 이 사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원래의 로마적인 토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문화와 언어에서 성공적으로 그리스화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비잔티움의 실생활에서 교회의 지배력이 점점 더 강화되는 동안,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도 발전의 방향은 새로운 경제 및 사회질서가 형성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미 중세 초기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행정체제를 갖춘 새로운 국가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다._ 예전의 일반적인 의견과는 반대로, 비잔티움 국가는 아주 강력한 역동성에 의해서 발전했다. 모든 것이 이 도도한 흐름 속에 용해되고, 끊임없는 개조와 신축을 경험했으며, 그 역사적 발전의 마지막 국면에 이르러서는 비잔티움인들의 제국도 로마라는 이름과, 실현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는 전통들을 빼고는 옛 로마 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다._

그에 반해서 초기 비잔티움 시대의 제국은 사실상 여전히 로마 제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전체 생활은 로마적 요소들로 관철되어 있었다. 초기 비잔티움 시대라고도 부르고 후기 로마 시대로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시대는 비잔티움의 발전과정에 속하기도 하지만 로마의 발전과정에 속하기도 한다. 비잔티움 역사의 처음 300년은 로마 역사의 마지막 300년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중세적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행하는 전형적인 과도기로서, 고대 로마의 생활 양식들이 점차로 소멸하고 새로운 비잔티움의 생활양식이 점점 더 강력하게 관철되는 시기이다.
-Georg Ostrogorsky 씀, 한정숙·김경연 옮김,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Byzantinische Geschichte 324-1453, 9-11쪽.
문맥을 보면 알겠지만, 오스트로고르스키의 의도는 비잔티움 폄하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비잔티움을 비잔티움 그 자체로서 파악하지 않고 고대 로마의 냉장고, 화석 정도로나 파악하는 사관'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논조는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 문명을 보존했다'라는 고대 로마 애호적 관점을 넘어, 비잔티움 자체로서도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문명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와 아무런 상관없다는 말 역시도 비하적인 의도는 아니며, 단지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역사관으로 볼 여지는 있다.[8] 애당초 현대에는 고대 로마를 초기 근대 인문주의자들마냥 '국가가 응당 따라야 할 이상향' 같은 걸로 여기지 않으며, 비잔티움은 비잔티움 자체로 가치를 인정 받는다.[9]

일본의 서양사학자들 중에는 이 나라를 중세 로마 제국(中世ローマ帝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용어는 일본에서만 쓰이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긴이치(渡辺金一)가 1980년에 쓴 《중세 로마 제국: 세계사를 다시 본다(中世ローマ帝国―世界史を見直す—)》는 책이 일본 내 보급력이 좋은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이 일반인들에게 꽤 읽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와타나베가 '중세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東ローマ帝国)이나 비잔츠(비잔티움의 독일어명에서 유래) 제국(ビザンツ帝国)이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참고로 영어로 'Medieval Roman Empire'라고 하면 신성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영어로는 'Byzantine Empire'라고 쓰며 발음은 /baɪˈzæntaɪn/, /bɪˈzæntaɪn/, /baɪˈzæntiːn/, /bɪˈzæntiːn/, /ˈbɪzəntiːn/ (출처: 옥스퍼드 영어 사전)으로, 영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는 순서대로 바이잰타인, 비잰타인, 바이잰틴, 비잰틴, 비전틴으로 한다. 이 영어 표기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에서는 보통 '비잔틴 제국' 이라고 표기하나 엄밀히 말하면 'Byzantine' 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이므로 잘못된 표기이다. 'Roman Empire' 를 '로마 제국'이라고 하지, '로만 제국'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학계에서는 '비잔틴 문명', ' 비잔틴 미술' 등의 표현도 여전히 사용된다. 이는 '라티움'이라는 기본 명사가 멀쩡히 있는데도 라티움인, 라티움어, 라티움 제국을 각각 라틴인, 라틴어, 라틴 제국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2.3. 이유가 있어도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적 멸칭에 불과하다는 의견

서유럽 사학계에서 흔히 제시되는 비잔티움론의 근거는 적어도 제국 후반기의 반라틴화 내지 라틴혐오와 그리스 민족주의화에 있다. 물론 제국 후반기 라틴혐오는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며 전근대 그리스 민족주의가 이미 제국 후반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그리스 민족사관 입장에서도 채택하는 것인바, 로마 제국 특유의 문화적 관용 및 다양성과 세계시민주의가 퇴색되었음으로 이러한 그리스 제국을 로마 제국과 구분해야 한다는 비판 자체는 합리성이 있다. 로마제국이 적어도 아이네이아스의 후예인 라틴족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라틴족을 혐오하는 로마 제국이란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라틴혐오와 그리스 민족주의화는 다름아닌 서유럽인 본인들이 촉발했다는 점이다. 팔레올로고스 부흥 제국 이전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은 다름아닌 1204년의 4차 십자군이며 4차 십자군의 주축은 누가 봐도 라틴이 아니라고 하지 못할 프랑스, 베네치아 그리고 교황청이었다. 그리고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그냥 함락만 시킨게 아니라 온갖 살인 강간 약탈을 저질러 현지인들의 반감을 샀고 이는 그대로 라틴 혐오로 이어졌다. 물론 살인 약탈 강간은 중세 전쟁에 으레 따르는 것이긴 했으나, 콘스탄티노플은 제국 수도에 기독교도 도시였는데 같은 기독교도, 그것도 교회 공인 십자군이 그딴 짓을 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있었던 사코 디 로마는 란츠크네히트가 독일 깡촌 무뢰배들이었다는 변명이라도 있지... 심지어 십자군 잔존 세력을 다 쫒아내고 제국이 다시 부흥하고 난 뒤에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멸망당할 위기에서도 교황과 라틴놈들에게 조아리느니 차라리 튀르크 이슬람의 지배를 받겠다는 발언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이토록 서유럽인 본인들이 제국을 상대로 혐성짓을 해서 반동 그리스화 시켜놓고, 나중에 그리스적이니 로마 제국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화의 내력을 과장하여 서유럽인들 본인의 동로마 제국의 반동 그리스화 책임을 은폐하려는 정치적 멸칭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2.3.1. 일부 반론 및 보론

동로마의 반서유럽 감정 및 그리스 민족주의화가 서유럽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으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장이다. 일단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사건을 따져보면, 이 사건은 애초에 기나긴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도 최후반부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사건이고, 그 이전에도 서유럽과 동로마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갈등과 반목을 이어갔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함락 사건의 촉발점인 라틴인 학살도 무책임하고 정통성 없는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폭동 사태를 방치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콘스탄티노플 함락 사건은 반서유럽/그리스 민족주의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동서유럽간 갈등관계가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터져버린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3. 고대 로마에서 이어지는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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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확장하여 다양한 민족들이 로마의 시민-즉 '로마인'이 되고, 이로 인해 문화와 제도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고대 로마 시절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기술을 성장시켜 로마네스크, 로마법 대전 등으로 중세 유럽시대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15세기에 제국이 오스만 술탄국에게 멸망하자 제국의 인력이 이탈리아 등으로 건너가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고,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이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지역의 문물은 도리어 이슬람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녹색당과 청색당과 같은 시민 조직들이 황제의 폐위와 즉위에 크게 관여했다는 것은 로마가 공화정적인 전통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요 왕조 혹은 주요 황제들이 속한 왕조들도 오래 가지 못했거나, 계승 방식이 깔끔하지 못했고 변칙적인 경우가 많았다. 첫 왕조인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도 아우구스투스 사후 50년을 겨우 넘겼으며,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 간 부자상속이 한 번도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왕조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채 30년도 못 갔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채 40년도 못 갔으며, 이라클리오스 왕조도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첫 퇴위 기준으로[10] 이라클리오스 사후 50년을 좀 넘겼고, 마케도니아 왕조가 순수 기간으로는 200년 가까이 간 것 같지만, 로마노스 1세, 요안니스 1세, 니키포로스 2세 등 왕조 혈통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중간에 재위했는가 하면, 왕조 말기에는 공주 둘만 남았는데 공주들은 왕자들과 달리 단독 통치가 어려웠고 결혼을 통해 부군을 만들어서 부군과 함께 통치해야 했었다. 다른 전제 군주국들과 로마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기도 한 것이 이것이다. 둘 다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쉽게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와 달리 로마는 시민들의 지지가 곧 황제의 정통성이었다. 이것이 로마에 남은 마지막 공화정적 전통이자 로마의 후계구도가 마지막까지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신격화나 신의 대리자로 권위를 다지려 시도는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수많은 황제들이 기독교 공인 이전부터 시작해 수세기 동안 황제 권위의 신격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끝끝내 정교분리 원칙이 성립되고 말았다. 동로마 시기에도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교회와 황제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 가까웠다.[11] 하지만 이는 왕조는 몰락해도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국가는 지속시킬 수 있었음으로(왕조 바뀐다고 황제의 넘버링이 초기화되고 그런 거 없이 쭉 누적되었다.) 동로마 제국 독자적으로도 천 년 넘는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즉, 일장일단.

한편 동방을 벤치마킹하고 본격적으로 전제군주화됐다고 하는 동로마 제국도 황제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행정, 예산, 법률의 삼권분립을 진행하는 등 생각보다 훨씬 공화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물론 이는 한때 공화정이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이었다. 또한 혈통으로 제위를 계승받은 황제보다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한 황제를 (혈통빨로 꽁(?)으로 먹지 않고 능력으로 쟁취했다는 측면에서) 당대 역사가들이 더욱 높이 평가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모로 전형적인 전제군주정과는 거리가 멀다. 오죽했으면 동로마 군주정이 일반적인 전제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전통이 남아있는 로마 특유의 전제군주정이라 평가하는 최근의 관련 저서인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을 보다 보면 동로마 황제는 경우에 따라 세습도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으로 여겨질 정도다. 지지율 관리를 적절하게 해서 여론이 호의적이면서, 집안의 후계자가 능력이 그럭저럭 괜찮으면 세습하는 것도 받아들여지는 반면, 능력과 치세가 괜찮더라도 지지율 관리가 안 되어 인기가 없거나[12], 혹은 후계자가 영 아니면 불만 여론이 조성되고 이를 이용한 정권교체( 쿠데타)[13]가 받아들여지곤 했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마저 온갖 편법을 활용해 황제라는 직위를 만들어야 했을 만큼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했다.[14] 그렇다보니 계승 원칙조차 두루뭉실했던 것이 수천 년 역사 동안 그 수많은 내란의 원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있던 시기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공화정 유지가 불가능해진 과도기였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정의 설립이 필요했기에 시민들이 용납했다고 보는 게 로마 제국의 역사 동안 이어진 생각이다. 10세기 증흥기 이후 들어 로마의 고대 공화정에 대한 고찰이 로마 제국 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것도 이런 연유로 볼 수 있다.[15]

제정 말기 게르만족을 필두로 마자르 · 바이킹 · 무어인들의 집중적인 침략으로 인해 점차적이기는 하나 확실하게 고전 문명의 방대한 이데올로기적 일치감과 이를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뒷받침할 관료제 · 상수도와 도로로 대표되는 경제적 체계가 재건 불가능하게 파괴당한 도나우 강 서쪽(서유럽/남유럽)과 달리, 발칸 반도 그리스 · 아나톨리아 · 레반트 지역의 로마 세력은 훈족의 침략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을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하여 고전 문명의 찬란함을 서방만큼의 단절성 없이 유지해왔다.

그래서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 등 몇몇 일본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을 '기독교화된 그리스인의 로마 제국(キリスト教化されたギリシア人のローマ帝国)' 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것도 앞서 각주와 마찬가지로 연구와 편의를 위한 것이다. 기독교화는 이미 2세기부터 진행되던 변화고, ( 그리스인이라는) 민족·종족적인 정체성도 무려 12세기부터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지 그전에는 그런 관념 자체가 보편제국 속에 용해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16]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이 나라를 이의없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7세기 중반 이후의, 그리스어가 제1언어가 되었으며 타우루스 산맥 밖의 거의 모든 아시아 영토 및 카르타고 주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프리카 영토를 뺏겨 유럽·지중해·중동 일대에서의 최강국 위치를 이슬람 제국에 완전히[17] 내주고 나서의 모습이다. 즉 보통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고대 로마의 전통을 끝내고 중세 동로마 제국을 열었다는 시각이 꽤 많으며, 현대 그리스에서도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18]

다만 물론 이슬람의 침입과 성상파괴론의 등장 등으로 제국이 격심한 혼란에 빠져든 소위 "7세기의 위기"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이 겪은 변화가 크긴 하였으나, 다른 시기보다 그렇게 큰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로마 제국과 7세기 말~8세기 초 로마 제국은 어느 정도 달라지긴 했지만, 도시 국가 로마 시기와 이탈리아의 맹주이던 라틴 연합 시기,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시기, 2세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와 3~4세기 점차 외부의 위협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든 시기의 로마이 겪은 그 모든 변화보다 그렇게 낙차가 크진 않았다. 4세기, 6세기, 8세기 로마를 비교해 보면 8세기 로마는 6세기 로마와 공통점이 더 많다. 한편으로는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왔던 제국은 굳이 로마/비잔티움으로 나눠 보면서, 정작 진짜 한 번 망하고 재건되었던 1204년 이후 제국은 같은 나라로 본다는 건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 인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1204년에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오던 노바 로마 중앙정부가 파국을 맞이한 것을 두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이고 1204년 이후의 각 동로마 세력들은 이를 계승하려는 '계승국'에 가깝다는 시각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19], 동로마 제국이 7세기 이후로 어떤 형태로든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띄게 된 계기를 제공한 황제로써의 기점이 이라클리오스 임은 분명하다. 근래 영미권 사학계 저술에서는 서로마가 멸망한 것과는 관계없이 이라클리오스 전후 시기를 분기점으로 해서 그전까지는 동로마에 대해서 '로마'라고 지칭하고, 그 이후부터는 '비잔티움'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실제로 제국이 범 지중해적인 패권국이었던 것은 이라클리오스 시기가 마지막이라서,[20][21] 범지중해적 패권을 잃고 나서는 (법통상으로는 여전히 분명한 로마이지만) 더 이상 '로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추락해 버렸으며 성격 또한 다소 달라졌다고 보아[22] '비잔티움', 혹은 동로마로 부르는 것이다.

이를 반영한 것인지 영어 위키백과 로마 역대 황제 문서에서는 영토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활동범위로 축소되고 본격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함으로써 동로마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아된 시점인 이라클리오스 왕조부터 팔레올로고스 왕조(610-1453)까지 800여년을 후기 동방 황제(Later eastern emperors)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4. 당대인들의 인식

4.1. 동로마인들의 인식

동로마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Ρωμαίοι, 로메이)[23]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들이 쓰던 중세 그리스어도 로마어(Ρωμαϊκά, 로마이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부와 국가 체제가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당대 동로마 사람들의 인식은 그대로 로마 제국이었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재편"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비잔티움은 그리스 속주[24]가 아니라 트라키아 속주에 속하는 소도시였고, 의도적으로 재편된 바 없으며, 그리스 문화나 그리스인이 어느 날 갑자기 제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 이미 공화정 말기 때 군사적으로 정복당해 편입되면서 로마 제국에 하나로 융해된 것이다.

그리스어는 공화정 로마 당시부터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서지중해 연안의 대 그리스 폴리스 문명들을 세력권 내로 편입하면서 서방의 공용어로서 먼저 쓰이기 시작했고 포에니 전쟁 후에는 로마 상류층 중에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로마 본국에서도 그리스어가 많이 보급되었다. 오히려 그리스어를 할줄 몰랐던 초대 원수 아우구스투스가 특이한 경우였고 이후 로마 황제들도 무인시대 전까지는 기본으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 로마의 신흥 졸부 집안이라면 그리스어도 자식에게 네이티브로 익히게 하려고 시중드는 하녀에 유모까지 죄다 그리스 노예로 도배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 다한거다. 그리고 동방에서는 로마가 개입하기 전부터 이미 그리스 디아스포라로 인해 동방 전체의 다민족 공용어였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저술되었다는 점, 그리스어로 '물고기' 를 뜻하는 단어인 '이크티스(ἰχθύς)' 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암호로 사용했다는 점,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를 가리키는 '흐리스토스(Χριστος)' 의 첫 번째 글자 Χ와 두 번째 글자 ρ를 조합한 '카이-로(Chi-Rho)' 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모노그램으로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로마 시대의 초기 기독교를 구성하던 중심 언어 역시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였다. 밀라노 칙령 역시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대한 적용의 일환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두 언어로 공포되었다.[25]

이쯤 되면 고대 로마인들은 동방에서 말이 안통한다 싶으면 그리스어부터 하고 봤고 현지 이민족 시민권자들도 라틴어는 모를지언정 그리스어는 반드시 구사했기 때문에, 동방에서 아람어나 페르시아어 안쓰고 그리스어 쓰는 자체가 곧 로마제국인이라는 증거였다.

4.2. 외국인들의 인식

4.2.1. 서유럽인들의 인식

앞서 언급했듯 서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로마 제국을 세우고 나서 동쪽의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데 열심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 중서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제국(Imperium Graecorum), 그리스 황제(Imperator Graecorum) 같은 표현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 용어들은 동로마 제국이 고대 로마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굴곡이 있기는 했어도 동로마는 충분히 로마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장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뭐였는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칭한 칭호[26]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오늘날 이탈리아 로마냐(Romagna) 지역도 그 명칭이 이 일대의 도시들 중 하나인 라벤나에 동로마의 총독부가 소재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서 '로마인들의 땅( 로마니아(Romania))' 을 뜻한다. 서로마의 실질적인 마지막 수도이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당한 도시인 라벤나는, 54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벨리사리우스의 군대에게 점령당한 이래 200년간 동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의 고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라벤나 일대만 '로마냐' 로 불린 건, 서로마 멸망 이후 이민족들 놀이터가 되어 버린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곳만큼은 여전히 (동)로마인이 강한 지배력을 유지했다는 데서 비롯했다. 이와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지역이 과거 랑고바르드족의 왕국이 자리했던 롬바르디아인데, 명칭의 극명한 대비를 반영하듯 실제로도 롬바르디아 지역의 랑고바르드 왕국과 로마냐 지역의 동로마 라벤나 총독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 유지 · 확장을 위해 서로 오랫동안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함락시키면서 동로마는 로마냐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으나, 이후에도 남이탈리아에 장기간 발을 걸쳐 놓음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라벤나 총독부의 몰락을 계기로 상당히 약해졌을지언정 제법 오래 유지하였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세운 라틴 제국의 경우 그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이었으며, 서유럽 출신인 라틴 황제들은 스스로를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라고 불렀다.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라는 칭호는 이미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 제국의 황제가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신성로마제국 및 이에 정통성을 부여한 교황과의 정치적인 분쟁에 휩쓸릴 위험이 컸고, 그렇다고 아무런 칭호도 안 붙이기에는 '로마 제국 수도의 새 주인' 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자기네들의 권위도 살리고 교황과의 충돌도 최대한 피하는 심산으로 택한 것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로마 땅의 황제)'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 제국 황제의 타이틀이 적힌 각종 문서나 인장을 보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 도 아닌 '로마인들의 황제' 라는 칭호를 대놓고 쓴 사례도 적잖이 발견된다. 'Balduinus Dei gratia fidelissimus in Christo imperator a Deo coronatus Romanorum moderator et semper augustus' 라든지... 'Henricus Dei gratia imperator et moderator Romanorum' 이라든지... 그리고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 도 어쨌든 '로마' 라는 단어가 들어간 칭호이다 보니 분쟁의 소지가 아예 없었던 게 아닌지라, 대용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e Constantinopolitane, 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라는 칭호도 사용되곤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서방 제국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마' 라는 단어에 끈질기게 집착한 라틴 제국 황제들의 이러한 행위는, 당대의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어떤 때는 그리스로 봤다가, 또 어떤 때는 로마로 봤다가) 가졌음을 보여 준다.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69.] 그리고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진두지휘한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과 후대 도제들에게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DOMINUS QUARTAE PARTIS ET DIMIDIAE TOTIUS IMPERII ROMANIAE, Signor della quarta parte e mezza di tutto l’Imperio di Romània)'[27]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여기서 '로마니아' 는 로마인들의 땅(Land of the Romans, 로마 땅)이라는 뜻으로, '로마니아'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동로마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부르던 속칭으로 널리 사용해온 국명이었다.[28]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인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에서의 '로마인' 이 '비잔티움인' 이 아닌 당시 십자군을 주도했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방인' 을 일컫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 모두 자신들을 각각 '베네치아인(라틴어: Veneticis)' 과 '프랑스인(라틴어: Francorum)' 이라고 칭했지 '로마인' 이라고는 안 불렀기에 여기서의 '로마인' 은 명백히 '비잔티움인' 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니아 제국' 이라는 국명은 라틴 제국이 아주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과거 동로마인들이 스스로를 즐겨 일컬었던 국명을 서방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이는 라틴 제국이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나라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짙었다. 마치 '라틴 제국' 이라는 아주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게 아닌 단지 '동로마 제국의 라틴 왕조' 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도 가능할 정도로, 최소한 '국명' 만 놓고 봤을 때에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기존에 견지하고 있던 '비잔티움은 그리스일 뿐' 이라는 멸시적인 태도를 강하게 관철시켰으면 이곳의 이름을 아예 '그레치아(Graecia, Land of the Greeks, 그리스인들의 땅)' 로 충분히 뒤집어 엎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29] 당대의 서방인들 사이에도 '비잔티움은 로마' 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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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국의 영토가 크게 쪼그라든 시기에도 동로마의 황제는 로마 황제로서 서유럽인들에 의해 경외되었다. 갈수록 커져가는 오스만의 위협에 대응하는 원조를 얻고자 서유럽을 돌아다닌 황제 요안니스 8세의 사례가 좋은 예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이기도 한 요안니스 8세의 1438년 이탈리아 방문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어 그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30]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 사진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메달(Medal of John Ⅷ Palaeologus)' 이다. 1438년 요안니스 8세의 피렌체-페라라 공의회 참석을 기념하고자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가 현지 예술가 피사넬로(Pisanello, 피사노)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이 메달의[31] 표면에는 그리스어로 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Ἰωάννης Βασιλεύς καί Αὑτοκρἀτωρ Ῥωμαἰων ό Παλαιολόγός', 즉 '요안니스, 로마인들의 황제이자 전제자, 팔레올로고스(John, King and Emperor of the Romans, the Palaeologus)' 이다.[32] 이것은 동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이 만들어서 유럽 대륙 곳곳에 뿌린 것이다.[33] 자기네들 나름의 로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떡 하니 옹립해 두고 있었던 서유럽조차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 라고 지칭했다. 국력이 사실상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시기에도 로마 황제의 권위만큼은 서방과 동방,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높았던 것이다.

서유럽 사람들조차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일례로 세비야의 대주교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는 헤라클리우스 통치기에 발칸 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슬라브인들의 침공을 'Sclavi Graeciam Romanis tulerunt', 즉 '슬라브인들이 로마에게서 그리스를 빼앗았다' 고 기록했다. 당연히 800년 이전, 즉 교황이 동로마 황제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시기에는 서방인들 사이에도 '동로마 = 로마' 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800년 교황의 서로마 황제 옹립 이후 변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참고로 십자군 원정 초기의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로마인(al-Rum)' 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동로마와 십자군 모두 기독교 세력인 데서 비롯된 혼동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대차게 맞붙긴 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와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 온 주요 기독교 세력은 동로마였기에, 가슴팍에 십자가가 그려진 옷 입고 갑툭튀한 서유럽인들을 보고는 '저 놈들도 기독교도인 걸 보면 로마인이군' 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로마와 십자군은 서로 별개의 세력임을 알아차린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을 일컫는 별도의 명칭으로서 '프랑크인(al-Ifranj)' 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Angeliki E. Laiou, 『The Crusades from the Perspective of Byzantium and the Muslim World』p.56. #

4.2.2. 이슬람권의 인식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의 강역을 '빌라드 알 룸(Bilād al-Rūm, بلاد الروم)' 즉 '로마인들의 땅' 으로, 지중해(특히 동지중해)를 '바흐르 알 룸(Baḥr al-Rūm)' 즉 '로마의 바다' 로 불렀다. '비잔티움 = 로마' 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1077년 아나톨리아에 새 나라를 세운 셀주크 일족은 과거 이곳이 룸(Rum, 로마)의 땅이었음을 이유로 자신들의 나라를 룸 술탄국으로 명명했다.[34]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 Kaysar-i Rum, 즉 로마의 황제[35]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이후의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 을 자신의 타이틀에 포함시켰다. 이븐 바투타도 자신이 방문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룸' 의 수도라고 했고 그곳 사람들을 '로마인' 이라고 기록했다. 발칸 반도 지역은 로마인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 라고 불렀다. 오스만 제국 말기 그리스가 독립해 나간 뒤에는 독립국가의 그리스인들은 '유난(Yunan)', 제국 치하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룸(Rum)' 이라고 불러 구분하기도 했다. 이런 용법은 현대 튀르키예에서도 통용된다. 1923년 인구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과 인근 섬에 잔류한 그리스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하여 튀르크 세력은 비당사자 위치에 있다. '스스로 로마라고 주장한 동로마' 나 '그리스 운운하며 동로마의 정통성 흠집 내기에 바빴던 서유럽' 모두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한 직접 당사자였기에 저마다의 주장에 객관성이 흠결될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비당사자였던 튀르크 세력의 판단은 이러한 논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만약 이 때 이슬람 세력마저 동로마를 '고대 로마 멸망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 들어선 별개의 국가' 라고 인식해버렸다면, 동로마의 로마 정통성 주장은 누구 하나 인정하는 이 없이 자기 혼자서만 그리 우기는 '자뻑' 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 1세는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다는 정통성을 내세워 동로마 제국의 후계국임을 자청했다. 정치적, 영토상으로는 시작부터 1453년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식하며 적대, 경쟁한 무슬림 튀르크계 지배자들 입장에서도 정치적 대립과 별개로 당시 이슬람, 기독교권을 초월한 보편적인 지중해권의 정치 사상사적 관점에서 동로마의 로마성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무슬림 정복제국, 특히 오스만국 입장에서도 본인들은 로마의 정복자라는 타이틀이 훨씬 더 위엄쩔지 당대에는 지리적, 문화언어학적 명칭에 불과했던 그리스의 정복자 따윈 영 폼이 안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로마의 로마성을 계승하는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까지도 각종 외교 문서에서 서방,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들을 에 위치한 독일왕 따위로 부르며 절대 황제위를 인정하지 않다가 국력 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더이상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에 있지 않다는게 확인 된 1606년, 15년간의 대오스트리아 장기 전쟁을 끝낸 지트바토로크 조약에서야 독일의 황제(Padishah)라 부르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로마에 대한 관점은 아예 이슬람 경전 꾸란의 30번째 수라, "수라 알 룸", 즉 '로마장'[36] 2~4절에서 613년 안티오케이아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동로마가 크게 패배한 것을 두고 '로마는 가까운 곳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10년 이내에 다시 승리할 것이다. 하느님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통치하시는 바, 신자들은 이날 크게 기뻐하리라(The Romans are vanquished, In a nearby land, and they, after being vanquished, shall overcome, Within a few years. Allah's is the command before and after; and on that day the believers shall rejoice)' 라고 자신들의 성서에 '(서방에서 소위 말하는 고전 시대의)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이란 역사관을 명시해 놓았다.[37]

이와 같은 사례는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 및 이를 기록한 하디스에서도 발견된다. 628년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휴전조약(후다이비야(Hudaybiyyah) 조약)을 체결한 무함마드는 곧이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권유하는 편지를 주변의 통치자들에게 보냈는데, 물론 여기에는 이라클리오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에서 무함마드는 당대의 상식대로 이라클리오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했다.[38] 하디스에서는 당시 아랍인들이 동로마 사람들을 로마인, 혹은 “바니 알 아스파르”[39]라고 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14세기에 활동한 이슬람 역사 학자 이븐 카시르(Ibn Kathir)가 쓴 쿠란의 주석본(타프시르) 및 역사서에도 동로마를 '로마' 로, 동로마인들을 '로마인' 으로 지칭했다. 여러 타프시르들 중 이슬람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이븐 카시르의 타프시르는 로마인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메시아(예수)의 출현 이후 300년간 로마인들은 그리스 지역의 종교를 믿었다는 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점[40],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움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 성당들을 건립했다는 점 등. 뒤이어서는 로마의 '카이사르' 인 이라클리오스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를 물리치게 되었는지도 자세히 서술해 놓았는데, 여기서 이븐 카시르는 이라클리오스를 '가장 지혜롭고 단호하고 기민한 인물' 이라며 훌륭한 리더십으로 로마인들을 다스렸다고 크게 호평하였다.

다만 물론 이슬람인들이 전반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 자체로 보면서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고 있었고, 바로 그 이유로 이슬람 제국이 여러 차례 치명적인 대패를 당하기 전까진 로마 제국을 완전 멸망시키는 걸 단념하지 않았던 것이며 오스만 제국은 바로 그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기에 훗날 죽자꾸나 싸우게 되는 맘루크 왕조에게서도 찬사를 받긴 했어도, 꼭 긍정적인 이유로만 그렇게 본 건 아니었다. 우마미야조부터 아바스조까지 문명, 과학, 기술, 인문학 모든 분야에서 최정점에 다다라 있었던 이슬람 제국의 이슬람교도들은 고대 그리스 학문을 이룬 그리스인들에게 상당한 존경심이 있었으나, 다름아닌 이슬람 제국에게 여러 차례 패배해서 지중해 일각으로 몰려 경제든 학문이든 과학기술이든 꽤나 쇠퇴하여 오히려 최신 기술을 이슬람 제국에게 수입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동로마 제국은 과거의 위대한 그리스와 무관한, 공학 기술이나 수공예, 군사과학 분야만큼은 쓸만하지만 그 외 분야에선 무지한 '로마인들이라고 생각했다. 동로마 제국이 경제나 문화적 면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이슬람 제국 자기네도 쪼개져서 칼리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10세기부터는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적어도 7~9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동로마 제국 사람들을 '로마인'으로 일컬을 때는 '너무나도 학문적 역량이 딸려 그리스로 볼 수가 없는, 과거에 제국이었던 건 인정하지만 그 외엔 인정할 게 없는 사람들'이란 뜻도 깔려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욕하는 뜻이었다. 물론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서구에 대해 말할 때와는 반대로 본인들이 그리스인의 후손이기도 하다고 열심히 주장했으나, 이슬람 식자층은 이런 주장에 좀처럼 설득되지 않았다.

4.2.3. 슬라브권의 인식

한편 정교회 신앙과 키릴 문자 등 동로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슬라브족과 동슬라브족 역시 동로마를 로마라고 불렀다.

우선 불가리아의 경우 불가리아 제1제국의 전성기를 연 시메온 대제가 9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섭정단 대표를 맡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니콜라오스 1세로부터 모든 불가르인과 로마인의 황제이자 군주(Car i samodǎržec na vsički bǎlgari i gǎrci) 칭호를 받았다. 비록 로마 당국은 총대주교의 독단이었음을 주장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시메온은 로마와의 전쟁 기간 내내 로마 황제 칭호를 사용하면서 동로마의 신경을 거슬렀으며 결국 924년 공동황제였던 로마노스 1세와 화평을 맺으면서 '불가르인의 황제'라는 칭호로 합의를 보았다. 1205년 아드리아노플에서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세워진 라틴 제국을 격파하고 라틴 황제 보두앵 1세를 잡아죽인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의 경우 이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일대에서 동로마인들을 학살하고 다니며 과거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은 데 따른 보복으로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의 학살자)'라고 일컫기도 했다. 또한 14세기 초 동로마 제국이 쇠하고 불가리아 제2제국이 강성해지자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불가리아어 명칭인 '차리그라트(Цариград)'에서 따온 '황성 터르노보(Tsarevgrad Tarnov)'라고 부르며 제3의 로마를 자칭하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경우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 제국 내에서 잇달아 내전이 터지자 기회를 틈타 발칸 반도에서 동로마군을 잇따라 격파한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은 동로마의 서부 영토 일부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1346년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41] 자리에 등극해 로마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세르비아 제국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같은 정교회 신앙과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7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였다는 점을 근거로 자신들의 수도 모스크바를 본격적으로 제3의 로마로 자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모스크바 총대주교 조시무스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인 모스크바의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칭호를 바쳤으며 이반 3세 역시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조이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한 후 로마 황제와의 혈연관계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차르로 칭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제3의 로마 주장은 1510년 프스코프의 수도원장 필로페이가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두 로마는 무너졌지만 세 번째 로마는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네 번째 로마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5. 로마인이라는 명칭의 의미 변화

위와 같이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 로마를 칭하고 로마로 칭해졌지만, 정작 로마인이라는 말이 뜻하는 의미는 시간 흐름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제국의 뿌리였던 이탈리아 반도를 영구적으로 상실하고, 이슬람의 침공으로 그리스인 외 다른 민족이 이탈함에 따라 로마인은 '로마의 국민'이 아닌 '로마의 국민 중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화했다. 일례로 7세기 이후에는 라틴어가 공용어 지위를 상실하고 그리스어만이 '로마어'로 지칭되기 시작했으며, 7세기 이후로는 전염병과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인과의 전쟁 등으로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지식인의 수가 급감했다. 9세기의 미하일 3세는 고대 로마의 핵심 언어였던 라틴어를 "미개하고(barbarous) 야만적인(Scythian) 언어"라고 지칭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로마 최고의 학자 포티오스도 라틴어를 읽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1세기 후반에 이르면 로마인이라는 명칭은 완전히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명칭으로 정착된다. 15세기의 사가 두카스가 제노바의 군인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를 '로마인의 장군'이라고 부른 것처럼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의 용례가 완전히 사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6. '고전 로마성 결핍' 담론의 허상

물론 동로마 제국이 엄밀히는 로마 제국이란 사실만 두고 동로마 제국만 편파적으로 옹호하거나, 그것 자체로 동로마 제국이 위대하다고 보면서 후기 로마 제국이 독자적으로 이룬 성과엔 관심없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특정 시대의 로마, 혹은 특정 시기까지 로마만 로마 제국이라는 자의적인 생각으로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과 무관하다고 보는 관념이 옳아지는 건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수사학적이고 문학적인 수사를 실제 역사학적 용어와 혼동해서 벌어지는 오류에 불과하다. 이슬람, 슬라브권에서 동로마를 로마라고 불렀던 건 단순히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란 칭호를 자칭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고대 로마 제국이 축소와 변화, 진화를 반복하면서 이어진 연속선상의 그 나라였기 때문이고, 로마란 호칭 자체에서 뭘 얻을 것 없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개체였기 때문이기에 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례를 들어 동로마는 로마 제국 맞다라고 하는 건 순환 논증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견해라면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고려도 그저 고려란 국호를 자칭했을 뿐이기에 고구려와는 상관 없는 것인가?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 주장은 당대 주변국 인정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인가? 당대 주변국 인정이 이와 상관없다고 여전히 답한다면 그는 이미 학문적으로 별 가치가 없다고 판명난 동북공정식 논리를 반성 없이 복붙하고 있는 것이다.[42]

애초에 그리스어를 쓰고 말고로 로마성을 따지는 주장이 엉터리임도 다시 돌이켜봐야 한다. 동로마에서 쓰던 그리스어는 고대 시절 제국에서도 라틴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일 정도의 위상이 있었고 거기다 이미 라틴 문화 자체도 기원전 3세기부터 헬라스화가 진행되고 그 반대급부로 헬라스 문화도 라틴 문화의 영향을 받는 등의 로마화가 이루어지면서 문화의 분간이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애시당초 동로마는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정식 국호는 로마 제국이었고 동로마니 비잔티움 제국이니 하는 용어는 제국 멸망후 시대 분간을 위해 만든 용어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니 겨우 11세기부터 희미하게 드러나다가 13세기에 완연해지는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민족국가화 현상을 두고, '7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예전의 로마가 아니다'라고 인식하는 이유는 전제부터 틀리고 주장의 앞뒤도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일각에서 전제로 삼는 '로마성'이란 것 자체가 허무함을 돌이켜봐야 한다. 상술했듯 연속성을 지적하면 기원전 5세기~기원후 6세기 로마는 모두 고전 로마의 핵심 요소(라틴인, 라틴어, 라틴 문화, 라틴 생활양식)를 공유했다고 하는데, 우선 이런 것들을 당대 고대 로마인들이 핵심 요소라고 정의한 바 없음부터 명심해야 함이 중요하다.

6.1. 그리스인이 다스리니까 로마가 아니다?

그런거 없다. 원래 로마 시민권 취득에는 고향이나 혈통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에트루리아인이건 사비니족이건 로마 시내에 들어와서 살면 생기는게 시민권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로마 시민권자가 별로 늘지 않은건 로마 시민권자의 병역 의무가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로마가 패권국가가 되고 모병제를 도입하면서 특혜가 많아진 시민권의 개방은 중단되었으나 이마저도 동맹시 전쟁이라는 반발을 겪고 이탈리아 전체에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다. 게다가 이 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시 주민들도 모두 로마 시민권을 받았고 카이사르 시절엔 시칠리아 폴리스의 그리스인들까지 모두 로마 시민권을 받았을 정도로 그리스인의 로마시민권 보유는 역사가 깊다. 그리스인이라서 로마가 아니라면 그리스인들이 대거 로마 시민권을 받은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는 망한 셈이며, 정통 그리스 귀족가문 출신인 디오 카시우스를 원로원 의원에 야전군 사령관 및 집정관으로 중용한 서기 2세기 시절도 로마가 아닌 그리스라고 할텐가? 그리고 로마라는 국가 자체가 그리스인 뿐 아니라 트라키아인, 아랍인, 게르만 혼혈도 황제가 되는 세상이었는데 이들이 공식적으로 라틴인이 아니니 이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미 로마는 로마가 아니라는 말도 된다.

무엇보다도, 로마제국의 공식 고시조는 트로이에서 온 일리온 그리스인이었던 아이네이아스였다. 그리스인이라 로마가 아니라면 애초부터 로마일 리가 없었단 뜻.

6.2. 그리스어가 쓰이니까 로마가 아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은 기원전 2세기부터 이미 그리스어는 매우 자주 쓰였고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에 정복당했다고 비아냥이나 듣는 처지였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마리우스와 술라 시대에 어느 용기있던 지식인이 라틴어로 문법 수업을 해보기 전까진, 문법학 수업마저 그리스어로만 하는 게 철칙이었다. 하다 못해 당대 로마인들이 나약한 그리스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가장 비판했던 대 카토조차도 선생이랍시고 감히 문법 수업을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진행하는 자들이 있다던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란 말을 하고 다녔다. 한술 더떠 아예 수사학 수업은 적어도 네로 황제의 시기까진 라틴어로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없었을 지경이었다. 무조건 그리스어로만 해야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전통을 이어가는 교양인의 행동으로 보았다. 이래도 라틴어 사용이 특정할 '로마적 요소'고, 그리스어 사용이 '비로마적 요소'인가? 대단히 근거 없는 주장이다. 제정 시대에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유력자라면 무조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 이미 기본적인 교양이었고 네로 황제는 원로원 연설도 그리스어로 유창하게 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예 그리스어로 철학서적을 창작해냈다.

6.3. 그리스 식으로 사니까 로마가 아니다?

애초에 통시적으로 관통할 수 있는 라틴적 생활양식이란 게 있는가? 없다. 애초에 '라틴인'이란 용어 자체가 로마인과는 뭔가 다른 2등 시민 내지는 의무가 더 많은 사람들이란 용어로 기원전 3세기까지 쓰였고 바로 그런 이유로 동맹시 전쟁이 일어나서 라틴시민권 자체를 로마시민권으로 일원화하며 라틴인 자체를 없애는 걸로 로마 국가의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라틴인'이 있어야 로마 제국이다? 어불성설이다. 이번에는 라틴어를 보자. 라틴어는 꾸준히 발전하면서 오히려 그리스어적 요소를 통해 고급화되어 학문 용어로도 쓰일 수 있게 되었고, 다름아닌 동로마 지역 그리스어도 꾸준한 라틴적 요소로 고전 그리스어와는 어휘도 발음도 단어들 뜻도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기원후 6세기 로마의 라틴어가 다 똑같았다?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번에는 라틴 생활방식을 보자. '라틴 생활방식'. 그런거 없다. 그런게 있었다면 로마의 생활방식 자체가 이미 꾸준히 긴 과정을 거쳐 선진 '그리스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기원전 5세기 공화정 로마와 기원후 2세기 오현제 시절 로마의 생활방식 또한 그야말로 완전히 별천지 수준으로 달라져 있었다.

대표적인 게 가부장권 유명무실화와 정절에 대한 사고방식, 여권신장, 공중목욕탕 문화 등이었다. 공화정 말기 때만 해도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거의 생사여탈권에 준하는 권리가 있었지만, 기원후 2세기 즈음 로마는 그런건 상상도 못할 세상이었고 오히려 부모 말을 듣지 않고 재산을 탕진하는 자녀에 대한 부친들의 하소연이 만연한 시대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기 로마 여성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만 제정 전성기 때 로마 여성은 남성이 하는 건 직업면에선 못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자기 이름 내걸고 사업해서 대부호가 되어 바람을 피워도 남편이 모르는 척 해야만 했던 기혼 여성도 있었으며, 공화정 말기 때만 해도 원로원 의원이 아내한테 입맞춤 했다고 원로원 의원 자격까지 박탈당할 지경이었지만 제정 전성기 때 그런건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이해못할 일화가 되어 있었다. 그 시기에는 부부의 애정 표현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시대가 되어 있었고, 정식 부인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 남편들이 여러 자료에서 등장하는 데 이 또한 전반적인 정식 부부 관계 자체가 상당히 차갑기 그지 없었던 공화정 말기 기준으로 봐선 상전벽해의 변화였다. 특히 적어도 제정기에는 노예를 함부로 다루는 행태가 교양 없는 인간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가 된 것 또한 특기할 일인데, 적어도 이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이전 및 키케로의 여러 저술 활동 이전엔 전혀 없던 개념이었다. 이 모든 게 바로 로마의 점진적인 '그리스화' 및 '선진화'로 인해 일어난 일로, 그리스 또한 상당 부분 많은 면에서 로마화되고 있었던 바로 그것[43]과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니 현대 한국인 일각에서 떠올리는 로마성을 규정하는 통시적 라틴적 생활양식, 그런건 없는 것이다.

또한 공화정기 로마인들이 제정기 로마인들을 봤다면 대경실색할 만한 게 둘이나 더 있었다.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 로마의 특징 중 하나가 한 해에 휴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인데, 이 또한 공화정기 로마인들이 봤다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었다.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실질강건의 상징적 요소들이 죄다 없어져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기원전 4세기~기원후 4세기 핵심 지배층이 라틴인이며 라틴어를 쓰고 라틴식 건물에서 라틴식 씨족제도를 갖추고 사는 것은 동일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설득력이 매우 부족한 언설이다. '라틴식 생활방식', '라틴식 건물'. 그런 게 로마성을 규정하지도 않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사례가 있다. 공화정기 로마인들이 오현제 시절 로마인들을 봤다면 넋이 나가버릴 정도로 어이 없는 또 다른 문화요소 세번째가 바로, 오늘날에 대중에겐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걸로 되어 있는 공중목욕탕 문화였다. 공화정기 로마인들은 남에게 알몸 보이는 걸 상당히 수치스럽게 생각했었고, 때문에 대부분은 집에서 목욕했었다. 때문에 카토 같은 사람들은 공중목욕탕에는 아예 발걸음도 하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미 공중목욕탕은 오현제 로마 이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시대부터 대중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인들의 그리스적 생활양식으로 볼 것 같으면, 일단 라틴계 로마인들 자체가 상대적으로 타민족에 대해 처우가 관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카이사르부터 시작하는 로마제국 특유의 세계시민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원래 그리스 정치철학이 먼저이며 먼저 실현한 것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로마는 이상적인 보편 세계를 실현하는 지고의 문명이며 나는 특정 민족에 제한되지 않는 세계시민으로서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은 적어도 4차 십자군이 준동하는 1204년 전까지는 로마 제국을 관통하는 핵심 정신이었고 특히 오현제 시대만해도 황제들조차 진정한 로마적 세계시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고전 그리스어로 쓴 '명상록'에 나오는, 자신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시민이라는 자기 성찰적 고백이다. 애초에 세계시민주의가 그리스 정치철학이었는데 무슨 그게 진정한 고대 라틴적 생활양식이라도 되는 양 곡해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식의 소치이다. 그리스 덕질했다고 욕먹는 네로나 하드리아누스와 다르게 누구보다도 로마인 중의 로마인이라 칭송받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스 철학을 동경하며 또한 정통했고, 로마 제국의 공직자들들도 보편적으로 공공에 봉사한다는 스토아 철학을 바탕으로 살았다. 정리하자면 제정시절 그 소위 고대 라틴 로마인들의 양대 핵심 생활 태도 2가지 '세계시민주의' '스토아철학'이 전부 그리스 문화다. 이쯤 되면 고대 서로마 부터 그리스 제국으로 부르지 않을거라면 그리스 드립 자체는 아무런 구분의 기능을 하지못한다.

또한 상술했듯 '라틴인'이란 개념 자체가 동맹시 전쟁 전후 해서는 상당히 차별적인 대우를 내포하는 뜻이었던 차치하더라도,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핵심 지배층'은 연속성은 물론 있었으나 계속 바뀌고 있었다. 동맹시 전쟁 이후 '로마인' 범주에서 배제당했던 수많은 과거의 '라틴인'이 로마 핵심 지배층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다름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원소속 가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시대를 거치면서 장년 지배층이 꾸준히 몰살당하는 탓에 계속해서 젊은이들이 권력 중추에 등장하는 현상이 끊이지 않았으며, 당연 그러면서도 빈 자리는 과거 라틴인들의 후손들이 채우게 된다. 이후 제정기가 되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그리스인, 갈리아인, 히스파니아인 등등이 역시 로마화되어 꾸준히 유입되는데, 그런데도 라틴인이 계속 동일했다? 그리고 그 시기 로마인들은 계속해서 그리스어를 상용했으며, 라틴식 씨족제도는 벌써 원수정 초기 때부터 유명무실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니 라틴어를 쓰는 라틴식 씨족제도에 속한 라틴인이 계속 중추에 있었다고 하는 개념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설령 그런 게 있었다 쳐도, 그런 개념을 당대 로마인들이 승인한 바 없었으니 이 또한 현대 한국인 중 일각에서 하는 역사학과 무관한 얘기에 불과하다.

7세기 이후 동로마가 그전 로마와는 성격이 어느 정도 달라졌다는 건, 그때 이후 동로마가 지중해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패권을 지니지 못했고 이슬람 제국이 급부상해 지중해 패권을 행사했고 이후 지중해 문화의 헤게모니를 이끌어나가게 되었기에 달라졌다는 것이지, 7세기 이후 로마가 그전과 정체성이 달라져서가 아니고, 로마성이 없어서도 아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점점 더 멀어진다는 '원래의 로마적 토대'란 것 따위가 애초에 없음도 상술했듯 유념할 사항이다. 물론 국가는 당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계속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니, 기원후 13~15세기 로마의 특징을 추출해보면 대중에게 유명한 기원후 1~2세기 로마와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게 당연하다. 세월이 천 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같은 데가 있으면 그걸 호모 사피엔스의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 따지면 당장 기원후 1~2세기 로마도 기원전 5~4세기 로마와 군사문화, 인종구성, 정치 체제, 경제, 인문문화 등 별 공통점은 없다. 그런 식으로 계속 가면 진짜 로마는 기원전 8세기에 로물루스가 건국한 그 로마만 남겠지만 이런 주장은 상식 있는 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동로마 제국이란 국가가 자체로 아주 강력한 역동성에 의해서 발전한 큰 역량을 보인 것과,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기도 하다는 FACT는 서로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적응과 변천, 통합과 흡수를 반복하는 실체지, 누군가의 자의적 관념에서 어떤 특정 몇몇 요소나 특정 시기로 고정되어 늘 그 환경 그 조건에 맞춰 상연되는 테마파크가 아니다.

6.4. 로마의 종교를 믿지 않으니 로마가 아니다?

동로마 제국의 로마 국가와의 연속성 및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각의 무리한 주장들이, 무려 기원전 5세기 공화정 로마부터 이후 시기까지 일관적으로 진행된 로마란 국가의 '문명화' 및 '발전'에서 그리스적 요소, 즉 '헬레니즘화'에 대해 무지하여 나온 오류긴 하다. 그러나 이런 오류들은 로마 제국의 문화적, 문명적 후손인 서구인들마저 간혹 저지르는, 심지어는 3~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발전상에 대해선 잘 모르는 전기 로마사 전공자들마저 하는 실수기에 이해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된 걸 두고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 아니라는 얘기는 서구에서조차 드문 생소한 사례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이는 일본 신토를 은연중 서구 다신교와 근거 없이 동일시하는 로마인 이야기 및 그 서적만 읽고 그 견해에 경도된 한국 일부 독서인들에게서 나오는 얘기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사실 종교 논란은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의 격을 아주 크게 깎아먹는, 여기 언급될 가치도 없을 만큼 무지하고 무식한 이야긴데 애초에 로마 신화 자체가 그리스 신화의 확장 습합판에 불과한데 이 논리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로마의 고유 종교 자체가 그리스 종교였으니 원래 고대 로마 제국은 그리스 제국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심지어 기독교 공인 전의 로마인들 사이에선 동방 유일신교인 태양신 미트라 신앙이 대유행했으니 로마제국이 아니고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논하자면 고대 로마가 로물루스나 아이네이아스 설화에서 보듯, 스스로의 기원을 그리스 및 로마 신화와 밀접하게 연관지어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로마 사회에서도 최소한 키케로와 카이사르의 시대에 와선 적어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다신교 신화에 대해 대단히 허탄하거나 사회를 이끌어갈 이데올로기로서는 역부족이란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다신교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는 분위기는 강화되어, 하드리아누스 같은 사람은 본인이 최고신관으로서 다신교 이데올로기를 현창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다신교의 허탄함에 대해 대놓고 비웃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44]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이미 2~4세기부터 로마 제국에 하층민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게 되는 기독교 초기 교부들 대부분은 헬레니즘 철학에 능통한 철학자 아니면 그 제자들이었으니, 애초부터 기독교는 로마 제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알고보면 로마 사회가 다신교 사회에서 급속도로 기독교화되는 토대는 다름아닌 헬레니즘 철학 및 키케로, 카이사르 같은 대단히 실용적이었던 로마 지식인들이 닦아주었던 것이다.

그런 지경이었으니 설령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사람들이 보더라도, 기독교 믿으니 로마 제국 아니라는 얘기는 듣도보도못한 기괴한 잡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로마 제국은 기독교화되지 않았더라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다른 신플라톤주의나 미트라교 같은 종교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있었다. 설령 테오도시우스가 에우게니우스에게 패배했더라도, 율리아누스가 장기 집권에 성공했더라도 종래의 그리스 로마 다신교적 이데올로기는 오래 가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 가장 박해가 극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도 기독교인이니 로마인 아니라는 이유로 탄압했던 건 아니었고, 심지어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같은 경우는 상당히 피동적으로 박해를 집행했던 경황이 다분하다. 동시대 로마 고관들마저 기독교인들이 허위로 신앙을 부정했다고 보고하고서는 살려주는 행태가 잦았던 만큼[45], 종교적 이유로 박해하는 것조차도 동시대에 공감을 널리 얻진 못했던 감각이었다.

그러니 기독교화되었다고 로마 제국 아니라고 한다면 무려 3~4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는데, 이 시기 로마 제국은 여전히 지중해를 거머쥔 강국으로서 게르만족 공동체들은 왕이나 왕국으로조차도 인정 못하던 시기인데 그런 분류를 적용하는 정신 나간 학자는 분명코 말하던대 아무도 없다. 그나마 시대 구분으로서 일리가 있어 7세기부터 동로마 혹은 비잔틴 제국으로 보는 관념과도 아예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오해할 여지는 있다고 볼 순 있는 앞서 문제제기와는 달리 이는, 나무위키 이 항목에 남기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을까 정도로 가치가 없는 어거지다.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 주장의 논지 중 하나는 이와 비슷하긴 하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로마의 정체성을 구성하던 종교를 뒤집어엎은 너희 기독교도들도 로마를 자칭하였는데, 우리가 비슷하게 하지 못할 이유는 뭐냐?' 라는 것. 그러나 오스만의 로마 계승 주장에 대한 비판은 종교 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니 이렇게 논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더 자세한 건 제3의 로마 문서의 오스만 제국 문단 참고.

동로마인이 건국설화, 더 나아가서는 '로물루스의 후예들'이라는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종교를 철저하게 탄압하면서도, 정작 그 건국설화인 아이네이스 같은 작품들은 찬미하는 건, 종교와 신화를 구분할 수 있게 된 시대 구분으로서는 전혀 모순이 아니다. 카이사르나 키케로 같은 사람들도 그다지 이해하진 못했을 것 같지 않은 일화인 것이다. 게다가 오히려 로마제국의 고시조인 아이네이아스가 실존 그리스인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더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모순이라고 보는 한국인이 있다면, 한국인 자신들도 단군 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으면서도 단군에 대한 존중은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고 밖엔 볼 수 없다.

6.4.1. 반박

6.4.1.1. 로마의 지식인층의 일부가 그리스/로마교에 회의를 느껴가는 기류가 있었기에 그리스/로마교는 고대 로마 체제의 정체성과 상관이 없다?
위 문단의 주장은 "국가의 구성원, 특히 지식인들 중 기존의 주류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현상과 "국가 체제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국교가 바뀌었다"의 차이조차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도 결국은 구성원의 집합이기 때문에) 두 현상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두 현상은 분명 다른 현상이다.[46] 동로마에서 황제가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신성한 군주'였듯이, 기독교화 이전의 황제는 국교의 최고 사제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군주'였다. 이런 체제와 종교간의 깊은 관계를 무시하고 단순히 회의주의자가 증가했으니 상관 없다는 논리는 궤변일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서 국교가 있는 나라들 중 국민들의 종교 통계와 국교 사이에 괴리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나라인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을 예시로 들어보자. 한 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인들의 세속화는 매우 빠르게 이루어져서 2021년에는 기독교인 비율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영국이 법적으로 세속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국왕은 여전히 성공회 신도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영국 성공회는 상원 의석을 보장받는다. 만약 범국민적인 요구를 통해 영국 왕실과 정부에 성공적으로 세속화가 이루어진다면, 다른 큰 변화가 없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영국 역사에 매우 거대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가 체제를 규정하는 큰 틀 중 하나가 송두리째 뒤바뀐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왕실이 세속화된 영국이 더 이상 영국이 아니라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겠지만, 그와 별개로 (국가의 실질적인 종교 비율이 달라진 게 없더라도) 그 영국이 세속화 이전의 영국과는 다른 영국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에우게니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기독교를 국교화하고 다른 종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로마의 국교를 바꾼 것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47][48] "기독교화된 로마는 로마가 아니다"라는 반기독교적인 비약은 논외로 치더라도,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그리스/로마교에 그 허탄함 때문에 회의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로마의 종교와 로마 체제의 정체성의 관계에 대해 애써 축소하는 것 역시 비약이다. 즉,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이 모두 로마지만, '같은' 로마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사람도 있듯이, 고대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모두 로마지만 '같은' 로마인가? 라는 질문도 충분히 나올 법 하다는 것.
6.4.1.2.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허탄함에 대한 회의가 기반이 된 기독교의 확산?
한편으로, 그리스/로마교가 결국 주류에서 밀려난 원인이 과연 소위 '허탄함'에 있었는지, 혹은 다른 한계점이나 정치적 격변 때문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는 그 '허탄함' 때문에 과학자들에게 사방팔방에서 두들겨 맞았음에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오히려 신자가 늘어나는 종교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한 논리적 공격이 주로 가해진 무대였던 서구권에서는 쇠락하고 있지만. 사실 굳이 현대까지 갈 것도 없이, 기독교가 한창 세를 넓히던 고대 로마 후기 기준으로 봐도 창세기 같은 구약의 경전 상당수는 뭐 그리스 신화보다 크게 낫다고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내용으로 가득차있는 신화에 불과했다.[49] 고대 로마인들이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같은 전승이 비현실적이라는 걸 인지해서 그리스/로마의 종교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한다면, 그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나 요한묵시록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애초에 어떤 종교건 간에 합리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 믿음에 허탄함을 잣대로 들이대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이걸 인정 못 해서 등장한 게 바로 창조설 같은 해악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바로 그 시기를 살았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조차도 창세기의 우주탄생 대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문자주의적 해석을 경계하는 발언을 남겼으며, 그 내용은 나무위키의 어우구스티누스 문서에 인용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이자 기독교 이론가이기 전에 당대의 뛰어난 석학이었다. 현대의 과학이 아니라 300-400년대의 지식으로 비교해도 성경의 내용은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이다.
6.4.1.3. 고대 그리스~로마의 헬레니즘 철학이 기독교를 위한 길을 닦아놓았고, 따라서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다?
또한 초기 락탄티우스 같은 초기 로마인 기독교도 철학자들의 사상이 헬레니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처음부터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라는 주장을 하는 것도 얼토당토않은 비약이다. 헬레니즘 철학을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나, 그 철학자들이 이룬 학파들은 한둘이 아니며, 그 중에서는 기독교에서 영 달갑지 않아할 회의주의의 대부였던 피론이나, 유물론에 많은 업적을 남긴 죄(?)로 기독교에게서 금지당해 오랜 세월을 잊혀졌던 데모크리토스, 대부분의 사상이 기독교와는 상극이라 오랜 세월동안 비난을 받았던 루크레티우스, 심지어 기독교가 2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골치를 썩이게 된 숙제의 핵심을 관통하는 역설을 남겨 수많은 기독교도들의 증오를 받았던 에피쿠로스 같은 사람마저 있다.[50] 즉 초기 기독교도 철학자들에게 있어 헬레니즘 철학은 일부는 선망과 배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부분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이다.[51] 결국 초기 기독교도 철학자들의 노력의 결과물로 헬레니즘 철학의 일부가 기독교와 융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 헬레니즘 철학이 기독교를 위한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따라서 기독교와 초기의 로마 제국이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과장일 뿐이다.

또한 기존 그리스/로마 신화에 회의적인 철학자들의 존재와 기독교의 확산을 연관짓는 것 역시 과장인 것이, 이런 철학자들은 기존 다신교의 사상에 회의를 가졌을 뿐 이들이 기독교 특유의 삼위일체 일신교 사상에 동조할 만한 사상을 가졌다는 근거도 없고 상술한 대로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기독교인 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 등 일부 그리스 쳘학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 써먹었을 뿐이다. 즉 그리스 철학의 발달이 기독교 확산과 관련있다는 주장은 기독교 쪽의 아전인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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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마 제국'이 상존했던 시기에 대해서는 동서 분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이라고 부르는 편이지만, 7세기 이후 이 국가가 지중해의 패권을 잃고 사실상 지역 국가로 전락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다소 유난스럽다고 여긴다. 대만을 (대만 스스로 어떻게 호칭하든) 언론이나 학계에서 굳이 '중화민국'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2]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이 쉴레이만 1세의 통치 아래 최전성기를 누리며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때다. 쉴레이만 1세는 1547년 아드리아노플 조약의 체결 때 카를 5세를 '스페인 왕'으로 격하하고 자신은 '로마 황제'임을 내세웠는데, 이처럼 '누가 진정한 로마 제국의 후계자인가'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신경전 와중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던 학자 볼프가 내놓은 새로운 용어가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었던 것. 즉, 볼프는 '오스만 제국이 그 후계자를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은 '가짜 로마 제국'일 뿐이며 우리 신성 로마 제국이야말로 '진짜 로마 제국'이다'라고 주장하고자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명칭을 만든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신성 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의 '로마성'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창안한 지극히 '정치적인' 이름이었다. 관련 글(영어) [3] 사실 아르카디우스가 형으로서 당연히 선임 황제였지만 두 황제가 너무 어리고 무능하여, 이번에는 실세 및 국력 간의 우열로 선임 황제가 정해질 초유의 황당한 사태가 빚어졌었다. 스틸리코가 서로마에서 건재하던 시절에는 서로마가 그리 밀리지 않았으나, 스틸리코가 죽고 그 나비효과로 로마 시가 410년에 털린 이후로는 서로마는 동로마에 대해 열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망했다. [4] '비잔티움'은 물론 '동로마'라는 분리적 명칭부터 이 나라를 옳게 부르는 방식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5] 예로 들어, '존 1세'는 '이오아니스 1세'로. [6] 일례로 역사 마니아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는 어느 외국 사이트에서 '동로마 제국'이란 용어를 써야 하는지,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를 써야 하는지를 가지고 투표를 벌인 적이 있는데, '비잔티움 제국' 쪽에 표를 던진 사람들 중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라클리오스와 같은 특정 황제의 통치기 또는 이슬람 세력의 카르타고 함락과 같은 특정 사건을 기준으로 그전은 '동로마', 그 후는 '비잔티움' 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7] 이건 비잔티움 외에도 사례가 많다. 가령 후고구려는 왕씨 고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들어간 명칭이고 당사자들은 '고려'라 불렀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비하 목적 없이 널리 쓰인다. 유사하게, 상나라를 중심지 지명을 따서 은나라라고 부르는 건 사실 당대에는 주변국이 일부러 비하하려는 의미가 다분했으나 현대에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 즉 현대에는 비잔티움이라는 용어 자체에서 비하 목적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 [8] 그러나 고대 로마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을 정체성 단절이나, 자기가 알거나 인정하는 시대 로마가 아니라고 로마 아니라는 비하성 언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한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냥 로마란 나라는 비잔틴이란 별칭으로 불릴 수 있든없든 1453년에 망한 게 FACT다. "재료가 달라졌지만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이다"라는 관점이라면, "원래의 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면 이건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다"라는 관점도 충분히 나올만한 대답이라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안토니누스 시대 로마 또한 포에니 전쟁 직후 로마와 같은 점이 거의 없으니, 역시 테세우스의 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식이면 포에니 전쟁 직후 로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로마도 로물루스의 그 로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9] 서유럽의 비슷한 예시로 프랑스와 프랑크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중세 초 프랑크든 오늘날 프랑스든 국호는 라틴어로 동일하게 Francia이며, 프랑스와 프랑크 사이엔 분명한 국가적 연속성이 있으나 프랑스와 프랑크를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프랑스 비하가 아니다. 단, 비잔틴 제국과 로마 제국을 굳이 다르다고 보려는 의도는 로마 제국이 워낙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큰 제국이었고, 대중적으로 굳어진 이미지는 카이사르 시대 로마, 원수정 로마, 전제정 초기 로마에서 각기 따온 그 무언가다. 때문에 유독 로마사에 대해선 테세우스의 배 운운이 건전치 못한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에서 온 연속성 외엔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언가라던가, 자기가 자의적으로 정한 특정 어떤 시대와 다르다고 로마 제국 아니라다라는 허탄한 관념이 그것이다. 둘 다 옳지 못한 극단적 견해다. [10] 코 잘리고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노리다 제위를 되찾았지만 또 반란을 당했고 그때는 무사하지 못했다. [11] 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세계관에선 서열 2위였기에 교황만한 권위는 결코 누릴 수가 없었다. 이 서열 문제는 정교회에서 신봉하는 공의회에서 정한 사항이라 지금도 그렇지만 정교회에서 맘대로 바꿀 수가 없는 문제다. 서유럽은 간혹 어떻게 보면 교회가 우위에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건 서유럽인들이 무식하여 종교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보다 권위가 높았던 반면에 서유럽의 각국 군주들은 동로마 황제보다 권위가 떨어졌던 점이 서로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서유럽에서는 (서로마 이후를 말하는 거니 당연히 로마는 제외하고) 개별 왕국·왕조가 있기 전부터 교회가 존재했지만, 동로마에서는 그 반대로 교회가 있기 전부터, 심지어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로마라는 나라가 있었다. 제국 이전을 포함하면 말할 나위도 없고, 제국으로만 따져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존호를 받은 기원전 27년을 일반적인 제정 성립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12] 마우리키우스가 이 대표적인 케이스로서, 충분히 괜찮은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로 죽음을 맞았다. 바실리오스 2세도 마우리키우스의 상위호환인데,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제 칭호를 받지 못했다. [13] 한 번 황제가 되면 기본적으로 죽을 때까지라서 정해진 임기가 없기 때문에, 수단은 쿠데타밖에 없었다. [14] 다만 당시에는 시민=군인이었고 군인들 입장에서는 당시에 전역하고 땅도 안 주는 원로원보다 자신들을 챙겨주는 지휘관을 더 지지했다. 당장 카이사르의 개혁도 전역 군인들을 위한 정책이 많다. 훗날 영토가 더욱 넓어졌을 때 로마에서 일어난 황제 교체는 시민들의 지지 때문이 아니라 선대 황제 사후에 시민권을 얻기 위해 군에 입대한 군인들이 자기 지휘관을 황제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대부분이다. [15]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그는 군사지휘관인 임페라토르(Imperator)였으며 칭호는 제1시민(Princeps: 프린켑스)으로 불렸다. 카이사르와 같은 종신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은 아니었으며 원로원 중 한 사람이었고 집정관도 아니었다. 다만 호민관의 일부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후임자에게 이 임페라토르와 호민관 특권을 물려줄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2인의 집정관은 꾸준히 선거로 뽑았으며 제일 먼저 발언하고 반발없이 원로원이 승인해주는 형식이긴 했지만 어쨌든 원로원의 의사를 존중했다. 이런 기형적인 지배방식(이를 원수정이라 칭한다.)을 통해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이 부활했다고 받아들였으며 원로원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마리우스 - 술라 - 카이사르로 이어지는 독재관들의 지배로 인해 당시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공화정이 무엇인지는 책 속의 이야기였으며 이미 독재가 더 익숙한 상황이었다. [16]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0p, 'An ethnic image of a Roman genos only appeared in Byzantine historiography in the twelfth century.' [17] 7세기 초의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에도 뺏겼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전쟁 중의 일시적인 현상이었지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이 이슬람에게 당했던 것도 이것도 페르시아 때처럼 일시적이려니 했을 수도 있지만, 불운하게도 그 열세는 아바스 왕조가 구심력을 잃고 메소포타미아 밖의 땅들을 거의 모두 상실하고 난 9세기 후반까지 약 250년간은 굳어져 있었다. [18] 이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민족주의 사관으로만 이해하면,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일 경우 그리스인들은 무려 마리우스 술라 시대 이래로 19세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2천년 가까운 기간 자신들의 독립된 민족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튀르키예인들 중 적지 않은 일부가 바로 이 논리로 그리스를 비하하고 있는 이상, 적어도 현대 그리스에게 이는 아주 몹시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은 보편 제국이었기에 그 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든 라틴어를 쓰든 구성원에 더 이상 이탈리아인이 있든 없든 별로 큰 문제가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힘겹게 독립했고 튀크키예와 지금도 역사 문제로 갈등을 빚는 그리스인들 입장에선 이는 단순한 옛날 역사 얘기가 아닌 것이다. [19] 고대 로마적 전통으로부터 중세의 방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으며, 이라클리오스 한 개인이 담당한 역사적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 [20] 서지중해에서 로마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했던 카르타고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거꾸러뜨린(그 이후의 카르타고는 멸망하기까지 속국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기원전 202년, 그리고 동지중해에서 가장 강했던 셀레우코스 제국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꺾고서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밀어버린 기원전 190년 즈음의, 즉 기원전 3세기 말 ~ 2세기 초부터 7세기 초중반의 페르시아 전쟁 때까지, 약 800년간 인근의 지중해, 유럽, 중근동 일대에서 로마는 심지어 아틸라의 훈족이 강성하던 5세기 중반에도[52] 국력 지표상 항상 1등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이슬람 제국의 등장으로 2등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21] 유스티니아누스 재정복 이후로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레반트의 주요도시들이 함락되는 61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전쟁을 피로스의 승리로 끝맺어 전쟁 전의 땅을 되찾은 후 (이슬람에게 얼마 안 있어 뺏기기 시작하지만) 로마는 現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일부의 해안선을 제외한 (보통 좁은 의미의 지중해에서는 빠지는 흑해를 제외하면) 지중해의 모든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의 해군력은 로마에 맞서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교황령의 독립 및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 시점에서 거의 150~200년 전이라, 느슨하게나마 서유럽의 게르만 세력들을 포함한 전체 기독교권의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해서 (이 당시 라틴어를 사용했던 서유럽의 저술가들도 자국이 아닌 동로마에 대해서 '(sancta) res publica'((신성한) 공화국)등으로 높여 불렀다.) 서고트나 프랑크가 로마와 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해전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서고트는 로마가 페르시아와 한창 전쟁 중이었던 624년, 즉 바로 이라클리오스 당대에 現 스페인 동남부 해안가의 모든 로마령을 탈환하고서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지만(즉 로마 상대로 교전을 걸어서 영토를 뺏었지만), 딱 거기까지로 이베리아 반도에 안주했을 뿐 이전의 반달인들처럼 배 타고 아프리카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한 적이 없다. 오히려 7세기 중·후반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로 치고 들어왔을 때는, 순망치한이라 생각했는지, 서고트가 자기네 군대를 파견해서 동로마를 도와주었던 적도 있다. [22] 공식석상에서의 그리스어의 공식화 및 전면화, 고대 도시 문화의 쇠퇴, 주요도시 및 해안 요새화, 민정-군정이 분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3단계 지방행정체제(대관구-관구-속주)에서 민정-군정이 일체화된 테마 제도로의 변화 등. [23] 고전 식으로는 발음이 '로마이오이'이고 코이네 식으로는 '로메위'였지만 중세 그리스어 때는 'ai'를 '에'로 읽고, 'oi'를 '이'로 읽는 발음변화가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4] 좁게는 헬라스(=아카이아), 넓게는 헬라스+마케도니아(+에피루스(노바와 베투스)) [25]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의미하는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의 각 단어의 첫 번째 알파벳을 조합하면 'ΙΧΘΥΣ'가 되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이크티스(ἰχθύς)' 를 중세~현대 발음으로 읽으면, x 즉 로마자로 옮긴 ch는 ㅋ과 ㅎ가 섞인 음가에서 ㅎ이 강해서 ㅎ로 표기하고 θ는 ㅅ가 되어 '이흐시스'이지만, 기독교 관련 용어는 기독교 형성기에 용어들이 정립될 때 쓰인 코이네 발음으로 읽는다. 코이네 발음으로 읽을 때의 x(ch)는 ㅋ과 ㅎ 중 ㅋ 음가가 더 강하다. 크리스마스를 X-mas로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6] 제4차 십자군의 맹주이자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 무식해 보이지만 다른 지명을 절대로 안넣으려고 실제로 차지한 땅의 이름은 하나도 안붙였다.... [27]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로마니아 제국의 1/4와 그 절반(a quarter and a half quarter)' 인데, 여기서 '로마니아 제국' 은 라틴 제국이 아닌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 영토의 분할' 조약에 따라 동로마 영토의 3/8은 베네치아가, 2/8는 라틴 제국이, 3/8은 기타 십자군 지도자들이 가지기로 했기 때문... 만약 여기서의 '로마니아 제국' 을 라틴 제국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라틴 제국은 '라틴 제국의 황제' 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가 각각 2/8와 3/8씩 공동 통치하는 국가가 되어 버린다. 참고로 이 조약에 의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 3/8이 베네치아에 할양되었는데, 이때 베네치아가 먹은 구역에 하기아 소피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28] 국명으로서 '~의 땅' 을 쓴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니아' 로도 불렀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게 못 된다. '루스족의 땅' 을 뜻하는 러시아도 있고, '노르만족의 땅' 을 뜻하는 노르망디도 있으니... 어차피 제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른 명칭으로 쓰인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모두 자신들이 로마고 로마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국명이라는 사실만큼은 그 궤를 같이한다. [29] 이미 오래전 고대 로마 시대에 탄생한 단어로서 동로마 땅과 연관성이 강한 '그레치아' 로 이곳의 지명을 바꾸는 것은 서방인들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통성을 깎을 목적으로 '그리스' 라는 말을 즐겨 썼음을 감안하면 이곳의 이름을 '로마니아' 에서 '그레치아' 로 갈아치우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더욱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베네치아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30] 이 외에도 피렌체와 페라라에서는 요안니스 8세의 방문을 계기로 고전 그리스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 수많은 이탈리아의 젊은 학자들이 동로마 사절단에게서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플라톤과 스트라보 등이 저술한 고전 그리스어로 된 문헌의 수집 및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또한 이 시기에 많이 이루어졌다. 덩달아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문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고,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기진장)가 위조된 것이었음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한 15세기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의 경우 이 시기에 축적된 그리스어 텍스트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스어 성경과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성경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꾀하기도 했다. [31] 요안니스 8세 메달은 많은 수가 제작되어 유럽 곳곳에 퍼졌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오늘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등 구미의 여러 박물관들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달을 시작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서유럽에서는 당대에 생존한 인물의 얼굴을 넣은 메달 제작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32] 반대면에는 말을 타고 있는 요안니스 8세의 모습과 함께 '화가 피사노의 작품' 이라는 글귀가 그리스어(Ἕργον του Πισἀνου Ζωγρἀφου)와 라틴어(OPVS • PISANI • PICTORIS)로 새겨져 있다. [33] 여담으로 이때 피사넬로는 동로마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의 차림새에 대단히 감명을 받아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과 스케치를 다수 남겼고, 이후 제작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다른 이탈리아 예술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는데, 특히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의 경우 동방박사의 경배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발타사르(Balthasar)의 얼굴을 아예 요안니스 8세의 그것으로 묘사해 놓기까지 했다. 심지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5개 출입문 중 하나이자 가운데 문인 필라레테 문에도 요안니스 8세가 이탈리아로 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등 당시 동로마 황제의 방문은 서구 예술가 및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젯거리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다. [34] 이러한 명명법은 서유럽인들이 세운 라틴 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 다시 말해서 '로마 땅의 제국' 이었다. [35] 서유럽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스만이 로마 제국과는 관계 없는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이다. [36] 수라 꾸란의 각 장, 즉 챕터(chapter, 章)이다. [37] 참고로 과거 무료로 배포되던 한국어판 번역본에서는 번역자의 배경 지식 부족으로 2절이 “로마는 망하였으되”로 번역되어 있다. 애초에 해당 번역본은 “파라오족”같은 정체 불명의 어휘가 튀어나와서 읽는 사람들 뒷목을 잡게 하는 일이 많다. [38] 현대에는 이러한 사료들을 '비잔티움'이라고 번역한다.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역사왜곡일 수도 있다. 다만 비잔티움이라는 단어 자체는 학계에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마냥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당대에 쓰지 않았던 단어이니 고증 오류라 주장할 수는 있다. [39] 동로마 제국의 유명한 장수 중 한 명 아스파르의 이름에서 따온 어휘로 아스파르의 부족이라는 뜻이다. [40]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이븐 카시르의 관점은 개신교 학자들이 가진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흡사했다. 이븐 카시르는 자신의 역사서 및 탑시르에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으며 개종 이후에도 기독교와 이교 이중 신앙을 가졌다.”라는 식의 서술을 남겼다. [41] 세르비아어로는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 그리스어로는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Σερβίας καὶ Ῥωμανίας' 로 표기되었다. 세르비아어 명칭으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 Emperor of the Serbs and Greeks)' 라고 불리기도 했다.(참고로 'Emperor of the Serbs' 문서의 세르비아어 위키백과 타이틀은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방 세력을 상대로 한 라틴어 명칭으로는 'I(m)p(erator) Roma(niae)(Emperor of Romania)' 또는 'I(m)p(erator) Ro(ma)io(ru)m(Emperor of the Romans)' 을 사용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도 자신이 '로마 황제' 에 올랐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42] 똑같이 고려란 국호를 자칭했는데도, 국력이 꽤 만만찮았는데도, 당과 신라에게서 고구려 계승성을 정면 부정당하여 고(구)려란 명칭은 국호로 거의 쓰지도 못한 발해의 사례가 또 다른 큰 실례로 남아 있다. 명분 주장이 영토나 언어 계승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당연히 당대 국력만으로도 안 된다. [43] 대표적인 게 여성 나체 묘사. 남성 묘사를 과하게 숭상했던 원래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건 로마인들같이 문화가 떨어지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으로 보았다. 어쩔 수 없을 때나 하는 것이지 로마인들처럼 즐겨서 하는 일로는 보지 않았기에 그리스인들은 남성 나체 묘사에만 열을 올렸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풍속과 습속 자체가 상당히 로마화되면서 이런 관습은 기억 저편으로 없어지게 된다. [44] 하드리아누스는 그럼에도 다른 누가 자신 앞에서 그걸 못하게 강력하게 처벌하는 행태를 일삼아 동시대인들에게서 상당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45] 거꾸로 일부러 순교하고 싶어 대놓고 신앙을 표방하고 로마 관리들을 화나게 어그로끌어 순교하는 몰지각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46] 당장 윗 문단에조차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스스로 신앙심이 깊지 않은 회의주의자였음에도 그리스/로마교의 신앙심이 옅은 자들을 탄압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구성원들의 종교와 국교의 정치적/정체성적인 차이를 구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47] 물론 로마 지배층의 기독교화가 테오도시우스 1세 한 사람만이 한 일은 아니기에 완전히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타 종교의 성장 가능성을 완전히 억눌러서 그 방향을 확정지은 것은 분명 그라고 할 수 있다. [48] 현대국가들 중 세속국가가 더 많음에도 굳이 국교가 있는 나라인 영국을 예시로 든 이유는, 기독교화 이전의 로마 역시 황제를 신격화하는 등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종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49]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고대 그리스의 생물학은 계통분류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장 덕분에 시대를 감안해볼 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발달해있는데 비해, 구약의 레위기가 제시하는 율법에 따른 생물 분류는 조악하기 그지없다. 물론 비종교적 관점으로 볼 때 구약의 저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생물학 지식이 떨어지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지만, 레위기가 종교 경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건 고대 로마인들에게나 현대인들에게나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정말 허탄하다는 논지로 종교의 흥망성쇠를 주장한다면 이런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수 포함한 책을 최고이자 유일한 경전으로 삼은 종교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50] 이렇게 초기 기독교 시대에 묻힌 철학자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처럼 아직 기독교의 영향력이 굳건할 시기에 재조명된 학자도 있지만, 이미 기독교가 철학계에서 흔들리기 시작할 시기에 재조명된 철학자들도 많고, 심지어 니체처럼 에피쿠로스를 인용하며 기독교를 깐 사례조차 있다. 이것만 봐도 헬레니즘 철학을 마치 한덩어리인 것처럼 뭉뚱그려놓고 헬레니즘과 기독교를 찰떡궁합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51] 당연히 기독교에서 받아들인 학파들도 위의 주장처럼 기독교도들이 수정하기 이전부터 기독교 사상과 찰떡궁합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진짜로 그랬다면 플라톤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기독교를 거부했던, 그것도 기독교가 동로마에 뿌리내린지 천년이 지난 뒤에 그랬던 플레톤 같은 사람이 나왔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