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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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FLAVIVS BELISARI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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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출생 | 505년경 |
사망 | 565년 3월 13일 |
종교 | 기독교 |
가족 | 아내 안토니나 |
참전 |
다라 전투 니카 반란 반달 전쟁 고트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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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리사리우스는 6세기에 활약한 동로마 제국의 장군이다.뛰어난 전술과 지략, 그리고 인품으로 대페르시아 전선과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에서 훌륭한 성과를 올린,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명장이다.
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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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족계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무렵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년 정도 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유스티누스 1세의 경호원이 되었는데 이는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기용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그는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도 하는데, 심지어 장군들과는 앙숙이라고 할 수 있던 환관들조차 니카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그의 공적을 고평가해 벨리사리우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지지했다. 527년 장군의 직위에 오르며, 530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다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내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3년만에 동고트 전선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출중한 능력에 어울리게 수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가 해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는 당시 동로마 근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잡는 일 정도였고, 이것도 휘하 부하들의 실수가 문제였지,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 반달 전쟁과 고트 전쟁에서의 그의 행적은 해당 문서 참고.
그의 업적 중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대제의 명을 받들어 멸망해버린 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고토 수복 원정이다. 그는 턱없이 높은 이상에 비해 부실한 지원만을 해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을 받들어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중나온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를 단숨에 격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1] 아프리카 원정이 완료되고 나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정복한 아프리카 속주의 초대 총독이 될 것인지 아니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치를지 선택지를 제시했고, 벨리사리우스는 후자를 선택했는데, 의심을 불식시키고 충성심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개선식에는 그 다음 해인 535년의 집정관이라는 영예도 같이 얹어졌다.[2]
참고로 이탈리아 공략전 당시 나르세스도 함께 했지만, 어째선지 그는 인지도가 한참 모자라다. 타기나에 전투나 카실리눔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적 안목을 보여준 일이 있음에도 나르세스가 벨리사리우스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환관, 그것도 권력자들에게 한 힘 쓰는 대단한 환관이었던 탓도 크고, 나르세스가 투입된 시점은 이미 벨리사리우스가 적은 병력만 가지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동고트를 북이탈리아까지 몰아내 로마까지 수복한 때라 남의 공적에 숟가락 얹기 식으로 투입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당시 황제의 의심과 반목으로 신뢰를 잃어간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풍부한 지원을 받고 싸운 것이 저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 또 나르세스가 희한하게도 벨리사리우스와 같이 있었을 때는 계속 벨리사리우스와 대립관계를 유지했으며 전략적인 실책도 많이 저질렀다.
이후에는 재차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지원받은 병력은 7천명으로 아프리카 상륙 당시보다도 적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방에는 동고트 왕국의 15만 병력에 육박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그야말로 죽으러 간 것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상명하복의 군인 타입이었는지 군말 없이 명을 받들고 이탈리아에 상륙, 한줌의 병력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옛 고도 로마까지 수복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 열린 휴전협상에서 로마 황제를 믿지 못한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믿고 협상에 임해, 왕국 절반과 왕위를 주기로 제안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왕위를 받는 척하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그리고 테오도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질 못했다. 이미 젊어서 황제와 고토 수복의 현실성을 두고 입씨름을 벌였고, 로마 정복 이후에도 통치방식을 두고 대판 싸웠다. 덕분에 의심병이 도진 황제는 단 한번도 그에게 제대로 된 병력지원을 해준 일이 없었다.[3] 이는 본인이 처신을 실수한 점도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본인이 감염되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방 전선에서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와 대치하고 있던 장군들은 현지에서 회의를 열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신들의 동의 없이 유스티니아누스의 후계자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경우 승인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병마에서 회복하면서, 그렇게 협의한 장수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회의를 주도한 부제스 장군은 지하 감옥에 갇혀 28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죽기 직전에 석방되었고, 벨리사리우스도 회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회의 결과에 동의를 표한 죄목으로 테오도라에 의해 동방 지휘권을 빼앗기는 동시에 그동안 거느리던 방대한 식솔들을 해산당하고 창병과 근위병들은 동료 지휘관과 궁정 환관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전 재산이 몰수당했다. 543년 병마를 완전히 떨쳐낸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사면하고 재산도 돌려줬지만, 황제의 신임을 온전히 받지 못해 전쟁을 치르는 내내 견제받아야 했다. 게다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협상에서 그가 왕위를 제안받은 사실은 결정타였다.
이탈리아 원정 종결 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하는 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고,[4]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도 맡게 되었으나, 그의 모반을 두려워한 황제는 거의 병력을 보내주지 않는 지경이었고, 겨우겨우 전선을 유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본인이 지친 탓도 있거니와 지원도 안 해준 주제에 오랜 기간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에 지쳐서 총사령관직을 반납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에도 불가르족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562년 횡령혐의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고 면직되었다. 물론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지만, 이 당시 재산을 몰수당한 탓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병사들에 밀린 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고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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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빈센트 作. 1776 (왼쪽 갑주를 입은 노인이 벨리사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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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에게 적선받는 벨리사리우스, 자크 루이 다비드作, 1780[5] |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은데, 횡령혐의를 받았을 때 황제가 옳다구나 그의 양눈을 뽑아버려 장님이 되어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로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널리 퍼졌다. 위의 관련 그림들은 이 설에 근거하여 옛 부하가 놀라거나 적선해주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일로 인해 한차례 면직되었다가 복권한 후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그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용모는 가히 영웅의 풍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관대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그는 백성들의 애정도 잃지 않으면서 병사들의 사랑도 받았다. 병들고 다친 병사는 약과 돈으로 구할 수도 있지만, 사령관의 병문안과 미소로써 더 효율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 군대에서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포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를 그에게 바쳤으나 그는 그들의 매력을 멀리 했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부부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 그의 무훈을 목격한 사람과 기록한 역사가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그가 용감하되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되 겁먹지 않으며, 상황의 급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것을 익히 보았다. 그는 곤란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도 겸손하고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ㅡ 에드워드 기번 < 로마 제국 쇠망사> 제41장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뛰어난 장군으로 칭해진다.ㅡ 에드워드 기번 < 로마 제국 쇠망사> 제41장
벨리사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의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당대 명장이라 칭해지는 인물들과 비견되는 이유는 대략 이와 같다. 정복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떼어놓은 수비병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단 1만명의 병력, 후기에는 수천의 병력만으로, 그것도 사실상 아무런 지원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지역을 탈환한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 트라야누스, 후의 바실리오스 2세조차 이렇게 적고 부실하며 보급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이 상황에서 탈환의 목표인 각 지역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적국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악조건으로 싸운 인물은 이라클리오스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빼고는 찾기 힘들다.
다만 그가 정복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반달 왕국이 긴 내전으로 인해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반달족의 지배에 염증을 느낀 북아프리카인들이 카르타고로 가기까지 스스로 성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6]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자신의 사병까지 포함해 만명도 되지 않았으나 이탈리아인들의 호응으로 로마까지 순조롭게 갔다. 로마에서는 다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삼만명의 민병대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동로마인들을 해방자가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고 실제로 동로마군이 로마 시를 방어하는 로마 공방전 때 성문 열쇠를 몰래 가져다 주려다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고토 수복 전쟁 이전까지 고트족과 이탈리아인들은 서로 그렇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고토 수복 전쟁이 일어나면서 고트족들은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불신하게 되고 그전까지의 상대적으로 평화롭던 통치에 종막을 고하며 강경책으로 전환, 밀라노 시의 시민들을 전부 학살하기까지 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4. 기타
- 황제와의 반목으로 시련을 겪는등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했으나, 당대에 벨리사리우스는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적들에게도 명성이 높았다. 이와 반대로 부인인 안토니나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으나 남편과 달리 고결하지도, 정숙하지도 않은 희대의 난봉녀였다. 그럼에도 벨리사리우스가 그녀와 이혼[7]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토니나가 황제의 부인인 테오도라 황후의 친구였기 때문.[8] 또한 아내가 원채 여장부였던 탓에 가정 내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기도 했다.[9]
- 벨리사리우스가 의심병 환자라는 조롱을 들을만큼 조심성이 강했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아래 실각당하거나 암살당하지 않았던 건 아내인 안토니나와 테오도라 황후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반대로 이 친분이 황제와의 오랜 반목의 원인 중 하나이자 벨리사리우스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후술한 안토니아-테오도시우스 불륜 스캔들의 사례처럼 벨리사리우스가 안토니나와 싸우게 되면, 안토니나는 테오도라를 통해 남편을 정치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고, 황제-황후 측에서도 둘의 불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벨리사리우스를 압박한 정황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황제 뿐만이 아니라 황후에게도 많은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안토니나의 말 한마디로 이게 모두 끊겨버리는 위험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세운 공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반감을 크게 샀지만, 테오도라의 사망 이후에는 어느정도 반감이 누그러지게 되었다.[10]
- 아내의 불륜 스캔들 중에 가장 악명이 높고 남편에게 악영향을 미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벨리사리우스의 대자였던 테오도시우스와의 불륜 사건[11]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안토니나는 심각한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벨리사리우스는 아내를 믿지 못해 전쟁터에 그녀를 데리고 다녔는데, 문제는 남편의 전장에 따라가면서도 불륜남을 데리고 가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안토니나의 친아들(벨리사리우스의 자식은 아니다)인 포티우스(Photius)는 남편의 페르시아 원정(541~542년)에까지 불륜남을 대동한 이런 어머니의 부정한 행위에 분노한 나머지 양아버지와 함께 공모하여 어머니를 가두고 테오도시우스를 납치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친구인 황후 테오도라의 개입으로 저지당했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 부부는 황제와 황후의 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재결합하고 테오도시우스는 안토니나에게 선물로(...) 하사된다. 이는 벨리사리우스의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미쳐 벨리사리우스는 모든 직위에서 해제당하고[12] 포티우스는 테오도라측에 의해 고문당했다는 기록 이후 역사서에서의 등장이 사라진다.
- 시오노 나나미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해서는 거의 마지막 로마인으로 띄워주지만, 그와 쌍벽을 이룰만한 명장이었던 나르세스가 대활약한 두 전투에 대해서는 연설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물을 잔뜩 보여주어 사기를 높였다고 축약한다. 다른 로마의 명장들에 비하면 크게 알려진 점이나 임팩트는 적으나, 이 엄청난 공적 덕분에 후대에 로마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거나, 멸망의 순간까지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에게 붙여지는 칭호인 최후의 로마인[13]이란 칭호를 가진 이들 중 하나이다.
- 동로마 군대에 횡행했던 군납비리로 인해 골머리를 앓은 적도 있었다. 로마군의 전투식량인 부켈라툼(Bucellatum)[14]의 경우 장기적인 보존을 위해 두 번 구워서 단단하면서도 바삭하게 만들었는데[15] 납품업자가 시간과 비용을 줄이려고 한 번만 구워서 납품했고 당연히 부켈라툼들은 시간이 지나자 부패하기 시작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군인들이 먹는 음식으로 장난질을 한 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고 판단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납품업자는 공교롭게도 황제의 지인이었고 황제는 엄벌에 처하는 대신에 삭탈관직과 벌금 수준으로 낮춰서 처벌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목격한 벨리사리우스 본인은 물론이고 후대 역사가들도 '전장의 현실을 깨닫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처사였다'는 의견을 내며 크게 비판했다.
5. 대중매체에서
토탈 워: 아틸라의 DLC 캠페인인 마지막 로마인에서는 주인공이자, 로마 제국 원정대 팩션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본편에서의 아틸라처럼 전투에서 장군이 죽더라도 사망처리되지 않고, 부상으로 그치게 된다.
이때 원정군으로 플레이시 간접적으로나마 벨리사리우스가 겪었을 수많은 고통들을 경험할 수 있다. 성능이 좋은 편이 아닌데 숫자도 적은 병력, 바닥을 드러내는 재정,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및 테오도라 황후와의 갈등으로 인한 수입/사기 페널티 등 다양한 요인이 플레이어를 괴롭힌다. 여기에 공처가란 것을 반영해서 안토니나 앞에서 무릎 꿇고 그녀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줘야 하거나, 테오도라와 안토니나 사이에 끼여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동고트에게 왕위를 받은 후 뒷치기로 멸망시킨 것을 모티브로 해서인지 고토 수복이 아닌 독립 루트로 서로마 제국을 재건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동로마와의 관계도는 최악이 된다. 그래서 독립 루트로 진행하려면 반달족과 적당히 싸운 후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시점에 몰려오는 무어인을 무시하고 아말라순타 구출 임무 또는 교황 체포 및 승리 조건 때문에 언젠가 이탈리아로 가야만 한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독립해서 동로마 세력이 최대한 적을 시점에서 독립해야 한다. 안 그러면 동고트족+랑고바르드족+유스티니아누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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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당시 군량으로 지급된 쉽 비스킷의 다수가 식량 담당자의 횡령으로 벌레가 파먹고 썩어버렸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신고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담당자를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의 반목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포에데라티로 동원한 훈족 용병들의 배신,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사병들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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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위키백과
Belisarius 중, 'Belisarius was presented with a choice by Justinian: he could either continue governing the new territory as its official governor or return to Constantinople and get a triumph. If he wanted to rebel he was sure to choose the governorship, but instead he chose the triumph, convincing Justinian of his loyalty once again.' 및 'While east, Belisarius was not only awarded a triumph but also made con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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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당시 로마 제국을 강타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즉
흑사병의 영향이 매우 심각했음은 감안해야 한다. 또, 이 시기에 대해 기록한 비잔티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536년쯤에 “연중 내내 태양이 달처럼 빛을 잃고 있다”라는 언급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기근과 역병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저 기록의 내용은 그 당시 범지구적으로 벌어진 화산 폭발들(
엘살바도르,
아이슬란드 등)의 파장인 것으로 역사 시대 중에서 가장 추운 시기가 6세기 중반이었다고 한다.
[4]
이 시기에 아내 안토니나의 불륜-납치시도 스캔들이 터져 직위에서 해지당하고 본국으로 소환되는 곤혹을 치르게 된다.
[5]
이 그림은 다비드의 초기 작품임에도 다비드의 걸출한 실력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젊은 작가의 미숙함이 표현되어 있다. 놀라는 로마 병사 좌우의 바닥 각도가 잘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단점은 아니지만.
[6]
여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뒷공작도 한 몫을 했다.
[7]
로마 제국에서는 부인이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면 간통죄를 근거로 이혼이 가능했다.
[8]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서로 신분이 천했던 서커스 단원 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와의 결혼 이전에도 방탕한 생활에 자식을 여럿 두고 있었다고.
[9]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와 사이가 서먹해진 후 그 용맹했던 양반이 환갑 다 되어가는 나이에 어린애와 바람이나 펴대는 할망구에게 무력하게 휘둘린다며 비난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0]
테오도라와 안토니나의 오랜 친분도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 사이 유일한 혈육인 딸 요아니나(Ioannina)와 테오도라의 손자 아나타시우스(Anatasius)의 결혼을 테오도라 측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사이가 심하게 틀어져 테오도라가 죽자마자 칼같이 이혼시켜 딸을 데려오는 뒤끝을 보여주게 된다.
[11]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따르면 북아프리카 원정 때 벨리사리우스가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자 안토니나는 테오도시우스와 창고의 물건을 보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고, 벨리사리우스는 그 일을 알면서도 덮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인 만큼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부터가 당대의 노골적인 가십과 루머, 그리고 테오도라와 안토니나를 향한 프로코피우스의 악의에 기초하고 있다.
[12]
얼마안가 복구되긴 하였다.
[13]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 등이 대표적이다.
[14]
오늘날의
비스킷의 어원이기도 하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부켈라툼은 두 번 구웠기 때문에 라틴어 panis bis coctus(두 번 구운)에서 유래한 biscoctum(두 번 구운 것)으로도 불렸는데 이게 고대 프랑스어에도 영향을 주어 bescuit으로 불렸고 영어 단어 biscuit 역시 이것을 골자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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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단단한지 이빨로 깨먹기가 힘들어 물을 부은 뒤 다른 재료와 섞어 죽처럼 끓여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