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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9:31:18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파일:예수에게 간청하는 성 세바스티안.jpg
예수에게 역병의 희생자들을 무덤으로 옮기는 이들의 생명을 구제해달라고 호소하는 성 세바스티안, 조세 리에페린스(Josse Lieferinxe) 작, 1497 ~ 1499.

1. 개요2. 역병의 전파 과정3. 역병의 원인과 증상4. 피해5. 영향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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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40년부터 시작하여 지중해와 유럽, 근동 전체를 덮친 전염병. 페스트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이 전염병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 발발했기에 해당 명칭으로 불리며, 14세기의 중세 흑사병과 대비하여 1차 흑사병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이며 자신들의 옛 영토를 수복할 것을 꿈꾸던 유스티니아누스와 동로마 제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2. 역병의 전파 과정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 나일 강의 북동쪽 기슭에 있는 펠루시움에서 전염병이 시작됐으며,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빠르게 북상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진 곡물 배에 함께 실린 쥐에 의해 제국의 본토인 그리스와 발칸 반도까지 퍼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희생된 이들의 유골을 분석한 고고학자들은 역병이 중앙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한편, 프로코피우스는 이 기간 동안에 기후가 급격히 변동되었다고 밝혔다. 온도는 평균 이하였으며, 일조량은 줄어들었고, 수십 년에 걸친 한파가 들이닥치면서 수확량이 예년보다 훨씬 떨어져 식량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가뜩이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복 전쟁에 시달렸던 주민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각지로 이주했다. 그 과정에서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곧 지중해 전역과 유럽 각지에서도 수많은 이가 죽어나갔다.

3. 역병의 원인과 증상

역병으로 사망한 이들의 유골을 대상으로 DNA 분석을 수행한 과학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을 강타한 전염병은 페스트였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폐렴 및 패혈성 전염병도 함께 돌았을 거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프로코피우스와 에페수스의 요한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역병에 걸린 이들은 망상, 악몽, 고열에 시달렸으며, 사타구니, 겨드랑이, 귀 뒤에서 부어올라서 검게 변한 부종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운이 좋은 자는 증상이 시작된 직후에 사망했지만, 운이 나쁜 이들은 십여 일 내내 심각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듯 역병에 걸린 이들 중 60~80%가 사망했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는 <비사>에서 망상에 빠진 이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일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이는 악마의 소행이 분명하며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악행으로 신에게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4. 피해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역병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매일 10,000명의 사람이 사망했으며, 어떤 날에는 이탈리아에 주둔한 로마군과 맞먹는 1만 6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는 시신을 매장할 공간이 없어서 성밖에 쌓였으며, 다들 역병에 걸릴까 겁이 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아서 방치된 시신이 수두룩했으며 악취가 온 성을 진동했다고 설명했다. 프로코피우스는 '비사'에서 황제가 역병으로 인해 황폐해진 시골 주민들에게 세금을 가차없이 거뒀으며, 심지어 역병으로 사망한 이웃이 내야 할 것까지 내놓으라고 명령했다고 밝혔다. 또한 원로원 의원 등 상류층도 많이 죽었는데, 황제는 사망한 원로원 의원들의 재산을 가로채 군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마저 역병에 걸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테오도라 황후가 남편을 대신해 제국을 통치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보이자 차기 황제는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동방 전선에서 사산 왕조 호스로 1세와 대치하고 있던 장성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회의를 열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신들의 동의 없이 통치자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경우 승인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병마에서 회복하면서, 그렇게 협의한 장수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회의를 주도한 부제스는 지하 감옥에 갇혀 28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죽기 직전에 석방되었고, 회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회의 결과에 동의를 표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는 테오도라에 의해 동방 지휘권을 빼앗기고 그동안 거느리던 방대한 식솔들을 해산하고 창병과 근위병들은 동료 지휘관과 궁정 환관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전 재산이 몰수당했다. 543년 병마를 완전히 떨쳐낸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사면하고 재산도 돌려줬지만, 황제의 신임을 온전히 받지 못해 전쟁을 치르는 내내 견제받아야 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4달간 역병에 시달렸고 전체 인구의 40%에 달하는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역병은 이후에도 종종 재발해 750년까지 역병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이어졌다. 역병으로 인한 전체 사망자 수는 불분명하다. 전통적인 견해는 2천만에 달한다고 보지만, 일각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등 특정 지역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타격이었을 뿐, 농업량 생산과 화석화된 꽃가루는 역병이 발생한 직후 몇년간 현저하게 감소하지 않는 등 지중해 전체의 인구를 크게 감소시킨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며 역병 희생자 수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한다.

5. 영향

역병은 동로마 제국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악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역병 발생 전 이탈리아를 거의 석권해 동고트 왕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던 동로마군은 역병 발생으로 인한 전력 손실과 군자금 축소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었고, 민생 역시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고트족은 이 때를 틈타 탁월한 지도자 토틸라를 앞세워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고, 동로마 제국을 둘러싼 다른 외세도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수시로 침략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554년 마침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수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제국이 감당하기 힘든 인적, 물적 손실을 봐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한 지 몇년 후인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벌인 20년 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 관료들이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는 바람에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러 주민들은 침략자에 저항할 의욕을 잃었다. 따라서 랑고바르드 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해 함락시킨 것 외에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하해 알보인 왕의 지도하에 토스카나에 자리를 잡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고,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가서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라벤나,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 제국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 및 남부 지역 만이 동로마 제국의 수중에 온전히 남았고, 로마 시는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에 항시 시달려야 했다.

6.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