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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08:10:07

타우리스 해전

카이사르의 내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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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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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7년 초,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해군과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이쓰는 옵티마테스 해군이 타우리스 섬 인근 바다에서 맞붙은 해전.

2. 상세

기원전 48년 여름,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그는 동방으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면서, 그리스 속주를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에게 맡기고 일리리아 속주를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에게 맡겼다. 칼레누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거점을 마련하려던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을 몰아내는 등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지만, 코르니피키우스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일리리아 부족들은 로마가 내전에 휘말린 틈을 타 독립하려 했고, 로마 정부로부터 반란군으로 규정된 폼페이우스 일당과 협력해 카이사르에 적대했다.

여기에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함대를 이끌고 일리리아에 나타나 주민들을 징집하여 병력을 보충한 뒤 코르니피키우스를 압박했다. 카이사르는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코르니피키우스를 도우라고 명령했고, 가비니우스는 기원전 48년~47년 겨울에 15개 보병 대대와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일리리아까지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달마티아 부족의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살로나로 향했다. 그곳에서 폼페이우스 측 지휘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의 공격에 맞서 항전했으나, 식량이 부족해져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몇달 후 병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고자 이집트로 향했기에 코르니피키우스를 당장 도와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마지막 희망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 도시인 브룬디시움에 주둔하던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바티니우스는 중병에 걸렸지만 출진하기로 마음먹고,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남겨둔 병사들을 민간 상선에 태워서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당시 에피다우로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옥타비우스는 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타우리스 섬 인근으로 이동했다.

바티니우스는 수적으로 열세한 함대를 이끌고 있던 데다 파도가 거칠었지만, 전투를 회피하는 대신 곧바로 돌격하기로 했다. 그는 장병들을 독려하여 타우리스 섬 인근 바다에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던 적선을 향해 돌격했다. 당시 전장으로 쓰인 해로가 워낙 좁아서, 장병들은 마치 지상에서 싸우는 것처럼 배를 바짝 대고 격렬한 근접전을 벌였다. 수 시간의 격전 끝에 옥타비우스의 기함이 여러 척의 적선에 포위되어 공략될 위기에 몰리자, 옥타비우스는 바다에 뛰어든 뒤 적선을 피해 수영하여 간신히 탈출했다. 그는 살아남은 배 몇 척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나머지는 바티니우스에게 포획되었다.

이후 바티니우스는 일리리아를 성공적으로 평정한 뒤 브룬디시움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요양했다. 나중에 그의 공적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9월에 그와 칼레누스를 집정관에 세우는 것으로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