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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9 16:25:07

안드리스코스


<colbgcolor=#000> 마케도니아 왕위 요구자
안드리스코스
Ἀνδρίσκος | Andrískos
파일:안드리스코스.jpg
안드리스코스
Ἀνδρίσκος
출생 미상
미시아의 아드라미티오스[1]
사망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 로마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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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 왕위 요구자. 기원전 150년 로마 공화국의 간접 지배를 받던 마케도니아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왕을 칭하며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단행했다가 기원전 148년 로마군에 패배한 뒤 로마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2. 생애

미시아의 아드라미티오스 시 출신으로 알려졌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폴리비오스 등 로마 역사가 및 친로마 성향의 역사가들은 그를 "비천한 출신의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직물을 짜는 집안 출신이라고 밝혔으며, 플로루스는 노예 출신이라고 기술했다.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그를 깎아내리는 의도가 다분하지만, 실제로 왕가의 후손을 자처하기 전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기원전 150년대, 안드리스코스는 자신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페르세우스의 아들 필리포스라고 주장했다. 페르세우스에겐 아들 필리포스가 실제로 존재했는데, 이 인물은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끌려간 뒤 알바 푸센스 시에 연금되었다가 2년 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인들 사이에서 필리포스가 로마를 탈출해 지금까지 숨어있다는 소문이 은연중에 퍼져 있었는데, 그는 이 소문을 이용해 왕의 후예를 자칭했던 것이다.

그는 마케도니아 각지를 돌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안티오키아로 넘어가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국왕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의 여자 형제 라오디케 5세는 페르세우스의 아내였으니, 페르세우스의 아들 필리포스를 자처하는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데메트리오스 1세는 그의 삼촌이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1세는 강대국인 로마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었기에, 그를 체포해 로마로 넘겼다.

원로원은 이 인물을 허풍쟁이로 여길 뿐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여겼다. 안드리스코스는 이탈리아 도시 중 하나에 억류되었지만 별다른 감시를 받지 않았다. 그는 곧 도망쳐 밀레투스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마케도니아 왕자를 사칭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믿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에 따르면, 아버지 페르세우스는 로마와의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을 크레타로 피신시켰다. 그는 크레타 부모의 양육을 받으면서 평범하게 지냈지만, 12살 때 아버지로 여겼던 크레타 남자가 임종을 맞이하면서 진실을 말해줬다고 한다. 그 남자는 페르세우스가 직접 봉인한 서판을 건네줬는데, 그 서판에는 암피폴리스와 테살로니카에 두 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밀레투스 당국은 안드리스코스를 체포했지만, 그를 어찌 처리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로마 사절들이 공무 수행을 위해 동방에 왔다가 잠시 밀레투스에 들리자, 그들에게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겠는지 문의했다. 사절들은 "미친 사람일 뿐이니 석방하라"고 권고했고, 밀레투스 당국은 그대로 따랐다. 그 후 안드리스코스는 페르가몬에 거주하고 있던 페르세우스의 첩이었던 칼리파를 찾아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칼리파는 그를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로 여기고 돈을 건넸고, 그는 이를 토대로 왕실의 예복과 왕관, 노예 두 명을 구매했다.

칼리파는 그에게 페르세우스의 누이와 결혼한 오드뤼사이 왕국의 국왕 테레스가 있는 트라키아로 가라고 권고했다. 안드리스코스는 즉시 트라키아로 향하다가 도중에 비잔티움에 들러서 그곳 주민들로부터 처음으로 마케도니아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그는 트라키아에 도착해 테레스 왕과 면담했다. 테레스는 로마가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자국과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와의 오랜 경제 교류가 끊어질 위기에 몰린 것에 불만이 가득했고, 그를 이용해 광물과 목재가 풍부한 마케도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에게 왕관을 씌우고 100명의 군인을 주고 다른 지도자에게 소개했고, 그 지도자는 전사 100명을 추가로 줬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바르사바스라는 이름의 트라키아 부족 지도자는 아예 '필리포스 왕자'의 복위를 위한 원정에 직접 참여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비잔티움 및 트라키아인들의 지지를 얻은 그는 기원전 150년 마케도니아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스트리몬 강 서쪽과 오도만티카 강 동쪽에서 벌어진 2번의 전투에서 지역 민병대를 격파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 후 마케도니아의 일부 지역은 그를 자발적으로 받들었고 다른 지역은 위협에 못 이겨 지지했다고 한다. 당시 마케도니아에는 로마군이 단 한 명도 주둔하지 않았고, 로마가 세운 4개 공화국은 정예 병력을 양성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라키아 부족들의 지원을 받은 그가 쉽사리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국왕으로 등극한 뒤 '필리포스 6세'를 칭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이 건재했을 때 주조된 동전과 동일한 유형의 은화를 주조했다. 은화에는 "Βασιλεός Φyleneιππος(바실레우스 필리포스)"라는 문구가 들어있는데, 이는 그가 마케도니아인들에 의해 왕으로 인정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테살리아 등 로마와 동맹을 맺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원로원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을 파견해 안드리스코스에게 침략 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하게 했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코르쿨룸은 아카이아 동맹과 페르가몬 왕국으로부터 온 지원군과 지역 민병대를 이끌고 테살리아를 방어했다. 하지만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어 로마가 점령한 마케도니아를 보전하기 어렵자,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기원전 149년, 원로원은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에게 군단을 맡겨 그리스로 파견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탈나는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간의 국경 인근에서 안드리스코스와 맞붙었다고 한다. 전투의 세부 사항은 전해지지 않지만, 탈나가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전멸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이는 로마가 마케도니아에 진출한 이래 겪은 패배 중 최악의 패배였다. 플로루스는 이에 대해 "모두에게 왕으로 인정받은 이들과 맞섰을 때 무적이었던 로마군이 이 참칭자에게 패배하다니 아이러니하다"라고 평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렸던 마케도니아인들은 그가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열광했고, 그는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고 있던 고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그들로부터 자금과 선박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그가 최종적으로 패배할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그리스 각지에서 안드리스코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다만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페르가몬 왕국은 그를 마케도니아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확고히 했고, 이 시기 로마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아카이아 동맹 또한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리비우스, 폴리비오스 등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따르려 하지 않는 일부 마케도니인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다. 특히 로마에 의해 4개 공화국의 지배층으로 선정된 귀족들은 친 로마 성향을 드러냈다가 그에게 대거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로마와 내통할 수도 있는 인사들을 숙청하는 한편, 로마에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면 적대행위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탈나의 참패를 되갚지 않으면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묵살하고 토벌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148년,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안드로니코스 토벌에 착수했다. 그는 2개 군단과 비슷한 숫자의 동맹군(총함 20,000명)을 이끌고 에페이로스 해안에서 테살리아로 이동한 뒤 마케도니아로 북상했다. 그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총동원하여 맞섰다. 그가 동원한 병력은 알려진 바 없지만, 로마군의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양측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패망을 초래한 전투가 벌어졌던 피드나에서 조우했다.

이후 기병끼리 맞붙은 첫번째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자, 안드리스코스는 이에 자신감을 얻고 로마군의 후방을 위협하고 보급을 끊기 위해 기병을 포함한 일부 병력을 테살리아로 파견하기로 했다. 적이 전력을 분산시키자, 메텔루스는 이를 이용해 다음 전투 때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몰아붙였다. 이로 인해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주축을 맡던 트라키아 기병 장관 테레스가 로마군에 귀순해버렸고, 이로 인해 군대 전체가 전의를 상실하고 와해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25,000명의 마케도니아인과 트라키아인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고 한다.

안드리스코스는 트라키아로 도망친 뒤 새 병력을 규합하여 다시 마케도니아로 진군했지만 메텔루스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이후 트라키아로 재차 망명한 후 병력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트라키아인들은 그를 더이상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비지오스라는 인물이 그를 체포한 뒤 메텔루스에게 넘겼다고 한다. 이후 로마로 보내져서 2년간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기원전 146년 메텔루스가 아카이아 전쟁까지 치른 뒤 로마에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전리품' 취급받았다.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개선식이 끝난 직후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 현재 튀르키예 발르케시르주 에드레미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