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nificia Faustina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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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 Annia Cornificia Faustina |
출생 | 160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황궁 |
사망 | 212년(52세) |
직위 | 로마 황녀 |
가족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아버지) 소 파우스티나(어머니) 루킬라(여자형제)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여자형제) 파딜라(여자형제) 콤모두스(남자형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남자형제)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여자형제)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첫번째 남편)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두번째 남편)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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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 사이의 14명의 자녀들 중 유년기 이후까지 생존한 6명의 남매 중 넷째였다. 한 살 아래의 남동생이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으로 유명한 콤모두스 황제였다. 혈연상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외손녀로, 부모 양쪽 모두를 통해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손이었던 황녀였다.
첫 번째 남편은 서기 2세기 ~ 4세기 경 그리스 및 아나톨리아와 함께 가장 부유하고 보수적이었던 푸닉(북아프리카) 지방의 재벌 귀족이었던,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였으며, 두 번째 남편은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이자 사업가였던 마르쿠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였다.
세베루스 왕조 때인 서기 212년, 카라칼라 황제가 자신의 친동생인 공동황제 게타를 살해한 뒤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약 20,000여 명을 재판없이 학살할 때, 게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채, 조카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황후 소 파우스티나의 14명의 자녀들 중 아홉 번째로 서기 160년 로마의 팔라티노 황궁에서 태어났다.전체 이름은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로, 이 이름은 고모인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따라서 동명이인인 고모와 구분하기 위해, 소(小)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라고 한다. 그렇지만 보통은 코르니피키아 또는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라고 통칭해 부른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서기 173년 13살의 나이에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의 조카뻘 친척으로 푸닉 지방의 재벌 자제였던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와 결혼했다.
첫 남편이었던 마메르티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대부터 로마 제국과 원로원 안에서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와 함께 매우 보수적이고, 부를 독차지하고 있었던 푸닉 지방 출신 중에서도, 재벌 신흥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조상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포에니 전쟁 이후 옛 카르타고 땅으로 건너간 이탈리아계 푸닉 사람이었으나, 생애의 대부분은 수도 로마에서 자랐고 매우 부유했다. 그렇지만 코르니피키아는 대부분의 로마 귀족들처럼 정략혼인이었기에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서 아들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가 태어났다.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겨울 숙영지인,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함께 있다가 180년 아버지의 죽음과 한 살 아래 남동생인 콤모두스의 단독 승계를 지켜본 뒤, 로마로 귀환했다.
콤모두스와는 사이가 좋기로 유명했고, 남편인 마메르티누스 역시 그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콤모두스와는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마메르티누스는 182년 콤모두스의 추천으로 집정관이 되었다. 하지만 이 해에 벌어진 루킬라,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콰드라투스 등이 주도한 역모(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에 남편이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다행히 코르니피키아의 남편은 직접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고, 증거도 없어 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부부 사이는 완전히 파탄이 났고 별거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년, 부부는 결국 이혼을 했고 마메르티누스는 아들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 동생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셉티미아누스, 이름 미상의 누나 등과 함께 콤모두스 암살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일가족 전체가 연좌제로 엮여져 몰살되었다. 하지만 코르니피키아는 182년 직후부터 별거 중이었고, 남동생인 콤모두스와의 사이가 각별해 신변은 안전했다.
첫 번째 남편과 아들이 살해된 해 혹은 그 이전인 190년경,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프로쿠라토르[1]로 파견되었던, 잘생기고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인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와 재혼했다.
두 번째 남편인 디디우스 마리누스는 코르니피키아와 결혼한 뒤, 콤모두스 황제를 보필하고자 프라이토리아니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하고, 193년 1월 1일 이후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올랐다. 이때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코르니피키아와 오랜 기간 동안 불륜 관계였다고 한다.
52세이던 서기 212년, 동생이자 공동황제였던 게타를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침실로 유인해 직접 살해한 카라칼라가 약 20,000명의 로마인을 학살할 살생부를 만들어 실행에 옮겼다. 이때 코르니피키아와 그녀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역시 살해당했다. 당시, 코르니피키아가 살해된 이유에 대해 거리에서 떠돌았던 소문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자녀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코르니피키아 황녀가 게타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따라서 코르니피키아는 카라칼라 황제가 보낸 병사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모든 장신구를 벗은 뒤 양 손목의 정맥을 스스로 끊고, 고통 속에 죽는 자살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이때의 일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누명을 쓰고 죽게 된 코르니피키아가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나의 가련하고 불행한 영혼아! 그리고 합당하지 못한 육체에 갇힌 자여. 이제 나가서 자유로워지거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임을 보여주거라!"
이 발언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부자가 제 멋대로 그녀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안토니누스 황가를 살육한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엄숙해졌는데, 코르니피키아는 이 유언을 말한 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목숨을 끊었다.그녀가 억울하게 살해될 당시, 그녀의 조카였던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역시 카라칼라가 보낸 병사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1]
속주의 재정 업무나 소규모 속주에 부임한 총독 중 하나로, 황제가 임명했다. 일반적으로 황제령 속주로 알려진 곳에 부임한 총독(레가투스 아우구스티 프로 프라이토레)과 함께 부임했으나, 총독의 부하가 아닌 별개의 행정관으로 황제의 대리인 자격을 가진 행정관이었다. 따라서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재정 문제를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