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Sextus Erucius Clar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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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
섹스투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Sextus Erucius Clarus |
출생 | 미상 |
사망 | 143년 3월,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수도 장관 |
가족 |
가이우스 셉티키우스 클라루스(숙부) 가이우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아들 또는 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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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수도 장관이자 장군. 두 번 집정관이 됐고, 두번째 집정관과 수도 장관에 임명된 뒤 현직 활동 중 병사했다.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로, 트라야누스 시대를 대표한 귀족 중 한명이나, '로마판 황색언론'으로 평가받는 수에토니우스가 저지른 122년 불경죄 때문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진노를 얻어, 16년 동안 모든 고위직 진출에 실패한 귀족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2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황후 비비아 사비나에 대한 불경죄로 수에토니우스가 해임된 뒤 크게 처벌을 받았을 당시, 수에토니우스를 추천했던 이유로 함께 해임된 뒤 처벌받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가이우스 셉티키우스 클라루스의 조카다.자세한 가계는 불확실하나, 로마 귀족이었고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전 문학에 진심으로 열정적이고, 교양이 깊어, 이 부분에서 뜻이 잘 통한 소 플리니우스와 친분이 깊었다. 그래서 친구가 됐는데, 소 플리니우스는 젊은 에루키우스 클라루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97년 집정관을 지낸 거물 실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추천까지 해줬다. 이때 플리니우스는 아폴리나리스에게 에루키우스 클라루스를 크게 칭찬하면서, 젊은 그를 호민관 자리에 추천해달라고 요청하고, 그의 정치 활동에 도움을 많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그는 대략 99년에서 101년 사이에 이런 도움 아래에서 행정관 경력을 쌓고 다양한 인맥을 쌓았던 것으로 로버트 사임을 비롯한 이들은 추정 중이다.
그렇지만 이런 플리니우스와의 관계보다 특별했던 것은, 그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도 신임을 받은 장군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가 성실하고 교양이 풍부함을 좋아해, 명예로운 경력의 길을 걷게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손수 재무관 직을 추천해줬고,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할 기회도 줬다. 따라서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했다.
디오 카시우스가 말한 116년 트라야누스 황제 휘하의 주요 장군으로, 율리우스 알렉산데르와 함께 셀레우키아 점령을 했다. 이때 군공이 대단했는지, 그를 추천해 기용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보고를 받자마자 그와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모두에게 정규 집정관 직을 추천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점에 관해, 학자들은 정확히 언제 이들이 집정관이 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를 크게 신임했고 아낀 트라야누스 황제가 서거하고, 황제의 오촌 조카이자 양자 하드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무난하게 경력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후일 역사가로 잘 알려진 변호사이자 황실 서기관인 수에토니우스 때문에 큰 고초를 겪게 됐다. 그 이유는 그의 숙부 셉티키우스 클라루스가 자신과 소 플리니우스 집을 오고 가면서 식객이자 호사가로 홍등가 이야기, 축제 이야기, 야사 등을 재밌게 풀어준 수에토니우스를 황실 서기관에 추천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저술 스타일을 직간접적으로 크게 비판한 헤로디아누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등 로마 사가들의 비난처럼,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행동해, 하드리아누스 황제 부부에게 총애를 받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기세등등해진 나머지, 122년 자신이 모신 비비아 사비나 황후를 표적삼아 음란하고 경박한 말을 했다. 이런 언행은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이는 자칫 황후가 그와 불륜 중일 수 있는 착각까지 들게 해, 큰 소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비비아 사비나 황후는 관용을 베풀어 용서했다. 그렇지만 이 말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직접 알게 된 까닭에 상황은 심각해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내와 서로 무심하고 냉담해보여도, 애처가였고, 아내에 대한 불경은 곧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아내가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뒤, 수에토니우스를 반역죄에 가까운 불경죄로 엄히 처벌했다. 이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수에토니우스를 추천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 이들과 그 가족까지 연좌제로 처벌했다. 그래서 클라루스의 숙부 셉티키우스 클라루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신임받는 근위대장에서 순식간에 몰락한 처지가 됐다. 하드리아누스가 어느 정도로 화가 났는지, 그는 수에토니우스를 추천하고 그를 친구로 두면서 말벗으로 삼은 일 때문에, 해임 후 모든 관직에서 추방선고를 받았다. 이는 에루키우스 클라루스도 비슷해, 그 역시 수에토니우스 때문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서거하기 전까지 어떤 고위직, 임명직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죽고,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조카 대 파우스티나의 남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제위에 올랐다. 다행히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그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되레 황제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따라서 그는 146년 생애 두번째 집정관이 됨과 동시에 수도 장관 직까지 맡게 됐다. 하지만 고령이었기에 그해 3월 임기 중 사망했다.
170년 집정관인 가이우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가 그의 아들 또는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