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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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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디너[1]

1. 개요2. 특징3. 종류4. 역사
4.1. 영국 요리와 육식4.2. 영연방과 영국 요리4.3. 전쟁 배급제의 악영향4.4. 오늘날의 발전
5. 명성
5.1. 고품질의 육류 요리5.2. 다양한 제과·제빵5.3. 의외의 미식 강국
6. 영국 요리에 대한 악명과 인터넷 밈
6.1. 일반 가정식의 부재6.2. 비좁은 식재료 풀6.3. 급식의 문제점
7. 한국에서의 영국 요리8. 여담

[clearfix]

1. 개요

British cuisine

영국 지역에서 향유되어 온 요리.

2. 특징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켈트, 로마, 앵글로색슨, 노르만 등의 문화가 융합하여 중세까지의 영국을 형성시켜 왔던 역사적 기반에 더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파키스탄,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영제국 이후의 영향으로 이민족의 전통 문화가 유입되어 만들어진 종합적인 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2]

영국 구성국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 요리 특색이 뚜렷한 것도 특징이다. 더불어 대영제국의 주요 구성원들이었고 현대에는 영연방 왕국 및 5개의 눈으로 영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캐나다 요리, 호주 요리, 뉴질랜드 요리, 미국 요리와 역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리의 뿌리가 되는 요리이기도 하다.

분야별로는 베이커리와 육류 요리에 강하고 채소 요리[3]와 해산물 요리에 약하다. 과거 유럽에서는 바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일본처럼 사면이 바다인 섬나라인데도 해산물 요리가 발달하지 않았다.[4][5]

그러나 나중에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육식 위주의 식량이 모자라자 다른 종류의 요리에 눈을 돌려 피쉬 앤드 칩스, 청어, 연어 요리나 감자[6]와 같은 요리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3.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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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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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기본적으로 육식, 그 중에서도 특히 쇠고기 요리가 중점적으로 발전했다. 타 문화권과의 접촉을 통해서 발전한 여타 대다수 문화권의 요리들처럼 영국 요리도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문화권의 접촉을 거쳐 발전했다. 19세기부터는 지속적으로 자국의 영향권에 넣기 시작한 인도 요리 중국 요리의 영향도 받았다.

이미 기원전부터 영국은 인류가 생활하던 장소로서 숱한 이민족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함락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왔다. 특히 지금의 영국을 구성하고 있는 4개 지역은 지금까지도 각각 민족적,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독자적인 요리 문화가 발전했다. 숲이 울창한 스코틀랜드의 경우 사냥한 동물을, 웨일즈는 농경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가축과 야채를, 잉글랜드을 중심으로 한 곡식을 주요 재료로 하여 요리해 왔다.

재미있는 것은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생선은 인기 있는 음식이 아니었는데 이는 북유럽 지방에 일반적으로 분포하는 바다에 대한 공포가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섬나라로서 불교의 전래에 따라 육식을 기피하고 주로 생선을 즐겨먹던 일본[7]과는 다르게 영국인들은 바다를 식량 창고가 아닌 죽음이 펼쳐진 하나의 암흑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8]

북해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동아시아 근처의 태평양이 괜히 '태평양'(평온한 바다)인 게 아니다. 이는 동서양의 문화적인 큰 차이 중 하나인 바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기인하기도 한다. 동양권에서의 바다란 민물이 흘러흘러 최종 목적지이고 인간이나 생물들이 성숙해지고 완성되는 단계와 생명의 포용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바다, 더 근본적인 물 자체가 죽음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구약의 탈출기에서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도 죽음을 견딘 것이고, 예수가 강물 위를 걷는 것도 죽음에 대한 승리, 맹물을 와인으로 바꾼 것도 죽음에 가까운 의미 없는 삶에 가치 부여를 한 것을 뜻하며 세례성사 때 세례를 받는 사람이 물에 잠기는 것도 죄에 물든 육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권에선 심해의 밑바닥에 용궁이 있지만 서양권에선 크라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권에 사는 영국인들은 식문화적으로도 해산물을 즐기지 않으며 바다에서 나는 식재료도 가능하면 육지에서 가까운 걸 먹는다.

이후 항해술이 발달하자 바다를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한 항로로만 간주하였기 때문에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정어리나 특별히 맛이 있는 대구, 연어 랍스터[9], 을 제외한 다른 물고기나 해초는 음식으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원전부터 내려온 곡식과 육류 위주로 이루어진 식단을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10]

당시 요리의 조리법은 신석기 시대부터 발견하였던 불을 기초로 하는데 특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중심으로는 직화(直火) 문화가 발달하였고 아일랜드 중심으로는 냄비(Pot) 조리가 발달하였다. 예를 들자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곡식을 불에 구워 빵을 만들고, 고기를 바로 불에 던져 태운 채로 먹었고, 반대로 아일랜드는 감자를 쪄서 으깨거나 곡식을 갈아 끓여 먹는 차이가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국력의 차이로서 꾸준한 정복 활동으로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영국은 고기를 통째로 불에 던져 태워낸 겉 부분을 제거하고 고기에 배어진 향기와 흐르는 지방질을 양념으로 통째로 먹으며 서민은 곡식을 갈아 불에 구워 독특한 향이 밴 을 먹은 반면 가난한 아일랜드에서는 곡식이든 고기든 일단 물을 넣고 끓이는 식으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요리법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11][12]

하술하겠지만 지금의 악명과는 달리 영국,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인들은 중세 때부터 농업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풍부한 육류와 곡물을 섭취하는 그 시대 기준으로는 풍족한 식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3] 또한 현대의 영국 요리가 건강에 나쁘다는 인식이 있는 것과 달리 당대 잉글랜드인의 이러한 식습관은 건강식에 가까웠으며, 통곡물, 신선한 과일과 채소, 그리고 적은 양이긴 해도 다소간의 고기, 치즈, 생선이 추가돼 현대의 건강 칼럼니스트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발굴된 인골이 보여주는 증거에 따르면 당시 잉글랜드 농민들은 상당히 건장했다. 잉글랜드인들의 평균 신장은 165cm로,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잉글랜드의 역사학자들은 성인 남성이 하루에 최대 5파운드의 빵을 먹었고, 이는 주로 탄수화물로 구성된 식단으로 약 5천 칼로리에 해당한다고 계산했다.

당시의 잉글랜드인들은 집과 텃밭과 1~2에이커의 경작지가 있으면 한 사람이 생활할 수 있다고 여겼다. 빈농 가족은 보통 3~5에이커의 경작지를 가졌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는 별로 좋은 생활은 아니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최악인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데 구호소 기록에는 끼니를 제공받기 위해 잠시 들렀던 빈민들과 지역 연금 수급자들에게 배분된 식량의 양도 보존되어 있다. 가장 호화스러운 시설 중 하나인 셔번 구호소에서는 각 사람에게 매일 한 덩어리의 빵과 1갤런의 에일, 일주일에 사흘은 고기, 나흘은 달걀, 치즈, 청어를 제공했다. 버터, 채소, 소금도 항상 추가로 제공되었다.

수확기 노동에 제공되는 식사는 일반적인 식사보다 확실히 더 풍성하고 다양했는데, 자신들의 수확을 미루고 영주의 경작지에서 일을 해야 하는 농민에 대한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농민들은 파업을 벌였다. 제공되는 식사의 양은 종종 장원의 관습법집에 기록되어 있었다. 서식스의 비숍스톤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두 번의 쟁기질 노동에 대해 영주는 첫째 날에는 고기, 둘째 날에는 생선을 제공하기로 했으며, 둘 다 에일과 함께 제공되었다. 무거운 쟁기를 끄는 사람들은 영주의 식탁에 초대되었다. 수확기 첫날에는 먼저 죽, 흰빵, 소고기, 치즈가 제공되었고 다음 끼니에는 빵과 치즈, 원하는 만큼의 에일이 제공되었다. 둘째 날에는 수프, 흰빵, 생선, 치즈, 원하는 만큼의 에일이 제공되었고 다음 끼니에는 큰 빵 한 덩어리가 제공되었다.

당시의 잉글랜드 농민들은 좋은 음식을 즐기며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웃과 친척을 초대해 식사와 에일을 즐겼으며 더욱 성대한 잔치도 마을 생활의 일부였다. 교구 길드는 항상 축일을 기념하기 위한 많은 음식들을 준비하여 연회를 열었다.[14] 이처럼 중세의 영국인들은 좋은 음식들을 몹시 탐했고 폭식과 음주는 일상적어서, 오늘날의 부실한 요리를 먹는 영국인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15]

의외로 산업 혁명 초기( 조지 시대)까지만 해도 영국인들이 풍족한 식생활을 했다는 증언도 많다. 대표적으로 인구압과 소빙하기가 닥쳐 빈곤에 시달리던 건륭제 시기 중국 농촌과 영국 농촌을 비교하면 영국 농민들은 중국 농민들보다 풍족한 식사를 했다.[16] 사실 대분기로 대표되는 16세기 이후 서구의 약진 중에서도 영국의 발전은 눈부신 것으로써 1650년대부터 20세기 초 무렵까지, 영국의 1인당 GDP는 줄곧 우상향해 전세계 1위였으며 덕분에 과연 대영제국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국가에 비하면 국민들이 그나마 풍요로운 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다. 즉 지금의 악명과는 달리 어떻게 보면 영국,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 서민들이 서민 식단으로는 전세계 대부분의 서민들보다 더 잘 먹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매번 우리의 먹다남은 밥이나 요리를 받을 때마다 여러번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가 쓰고 버린 찻잎도 그들은 서로 싸워가며 가져갔고, 다시 물을 부어서 마셨다."

사절단의 구성원인 존 버로우가 쓴 <<내가 본 건륭성세>>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산(舟山)에서건 백하(白河)를 거설러 경성으로 가는 3일간이든, 어떤 백성들도 배부르게 먹고 입었거나, 농촌이 부유하고 번영한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을 주위를 빼면, 나무도 거의 없었고, 모양도 형편없었다. 집은 보통 진흙벽으로 된 단층건물이며, 띠나 풀로 지붕을 덮었다. 가끔 독립된 작은 건물을 볼 수는 있지만, 신사의 주택이라거나 최소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농가주택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주택이건 강물이건, 모두 레드리프나 와핑(영국 템즈강 가의 두 마을)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사실상 눈에 띄는 것은 빈곤하고 낙후한 모습뿐이었다"

영국의 햄프셔 농장의 한 보통 노동자의 1일 세끼 식사는 다음과 같다: 아침은 우유, 빵과 전날 남겨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점심은 빵, 치즈, 소량의 맥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감자, 배추와 ; 저녁은 빵과 치즈. 일요일에는 신선한 돼지고기를 먹는다. 산업혁명 후에 영국인의 생활은 더욱 풍요롭게 된다. 1808년 영국 보통 농민가정의 소비목록을 보면 2.3갤런의 탈지우유, 1파운드의 치즈, 17 파인트의 에일맥주, 반파운드의 버터와 설탕, 그리고 1 온스[17]의 차(茶)가 있다.

이 기록을 보면 1700년대 후반~180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했을때 영국 농민가정의 식단은 생각보다 꽤나 풍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시대에 활동한 성직자인 존 웨슬리가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며 아이들의 식단을 제한할 것을 제안했다지만, 역으로 따지면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전세계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들은 고기와 빵을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일 수 있는데도 버릇 나빠진다면서 잘 안먹인 것일 뿐 식량이 풍족하지 않아서 그런것은 또 아니라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오늘날 영국요리의 발전이 이 시대와 달리 뒤쳐진 것은 중세 이후 청교도 교리, 산업혁명, 세계대전 이후 배급제 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들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1970년대에 현대(modern) 영국 요리가 성립되었으며 성립 직후 굉장한 인기를 얻어 브리티시 퀴진의 대세가 되었다. 현대 영국 요리란 고품질의 현지 재료를 쓰며 현대적 발명과 20세기 이전의 전통 영국 레시피를 섞어 사용하는 것으로써 슬로우 푸드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4.1. 영국 요리와 육식

영국 요리의 역사를 논할 때 육식, 특히 쇠고기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쇠고기를 가장 탐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켈트족 선조들은 기원전부터 이미 영국 섬들에 사육 문화를 구축했으며, 로마인들도 43년에 영국을 침략하면서 소 떼를 이끌고 왔다. 결국 로마의 농업은 스코틀랜드 남부 및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잡았고, 켈트족의 소 사육 문화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북부 및 서부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쇠고기는 영국의 로마 병사들이 특히 선호하는 양식이었다. 그 수요가 증가하자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소를 위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로마인들이 영국에서 물러난 뒤에도 소는 자연스럽게 부의 상징으로 남았고, 육식은 영국인 식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유럽 육식을 즐기는 대륙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인들은 이웃한 육지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쇠고기를 소비했다. 쇠고기에 대한 그들의 탐식은 사냥, 동물 학살, 화려한 고기 만찬을 즐겼던 켈트족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전통은 봉건 시대의 귀족들을 거쳐 이후 지주 계급 사이에서 계속 이어졌다. 제임스 1세는 사슴 사냥을 할 때 직접 그 목을 딴 다음 '관리들의 얼굴에 사슴 피를 바르고 나서 그 피를 닦는 것을 금했다. 사슴 사냥을 마친 뒤 상류층 숙녀와 여성들은 사슴 배를 가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하얗게 해준다는 믿음에 양손을 피로 씻는 것'이 관례였다.[18]

영국인의 의식에서 동물 도살의 신성한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퇴색되었지만, 고기 특히 쇠고기가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믿음은 영국인, 그 중에서도 귀족들의 의식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쇠고기를 대량으로 섭취하는 것은 엄청난 힘과 남성다움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 독립 전쟁 직전, 즉 영국의 군사력이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대륙에 손을 뻗치고 있었던 무렵 한 영국인은 이렇게 적었다. "고기를 맘껏 먹는 사람들이 좀 더 가벼운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용감하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때문에 영국 귀족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호화로운 고기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개인의 재산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부유층에서는 그 음식 준비가 지위와 특권을 내세우는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영국에서는 '빈자들은 살기 위해 먹었지만, 부자들은 먹기 위해 살았다'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귀족들 간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1283년 에드워드 2세는 '왕국의 저명 인사들이 자신들의 성에서 엄청난 양의 고기와 음식을 흥청망청 낭비하고, 그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그들을 흉내내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왕의 칙령은 만찬에서 고기 요리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었는데, 만찬 주최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준비한 요리에 따라 열렬한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는 능력을 크게 좌우한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고기는 각 군주의 만찬에 초대된 손님들의 적절한 지위와 신분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정치적, 사회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주빈석은 언제나 가장 윗사람에게 제공되었으며, 그 옆으로 지위를 따라 차례차례 자리가 정해졌다. 최고 부위의 고기는 가장 윗사람의 몫이었고, 질이 좀 떨어지는 부위는 아랫사람들 차지였다. 흔히 사용하는 '굴욕을 참다(eat humble pie)' 라는 표현도 실은 '사슴 내장을 먹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19][20]

영국의 봉건 군주들과 지주 계급의 쇠고기 탐식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심지어 빅토리아 시대 후기까지도 귀족과 상류층 계급은 화려하게 차려진 고기 만찬을 즐겼다. 소설가 프리스틀리(J. B. Priestly)는 " 로마 제국 이래 탐식에 빠져든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던 적은 없었다." 라고 말한다. 지주 계급의 농촌 주택에서는 매일같이 백정, 요리사, 주류 관리인, 부엌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성대한 사냥 파티, 만찬 준비, 화려한 음식물이 요란하게 펼쳐지곤 했었다.

부자들은 쇠고기에 파묻혀 뒹굴다시피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19세기 말까지 사실상 쇠고기 중심의 식생활이 아닌, 즉 영국인들이 '백색 고기[21]'라고 부르는 식품으로 대신해야 했다. 근대 초기에는 영국 도시에서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부류인 노동자 계급과 번창하는 유력한 부르주아 계급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들은 귀족들의 육식 생활을 갈망했다.

산업혁명 직전에 영국은 이미 세계적인 쇠고기 육식 생활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726년 즈음 런던 시장에서만 해마다 10만 마리의 소들이 도살되었다. 당시 런던 주민들은 '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일부 지역 주민들이 한 해 동안 소비하는 전체 쇠고기보다 더 많은 양의 질 좋은 쇠고기를 한 달 동안 먹어치웠다.' 18세기에는 적색 육류 중심의 식생활이 적군에 대한 결정적인 우위를 가져온다는 믿음을 갖고 영국 수병 1인당 1년 동안 무려 208파운드(1파운드=0.45킬로그램)의 쇠고기를 제공했다.[22]

1798년 영국을 방문했던 한 스웨덴인의 글이다. "군주나 지배권을 가진 영국인들이 고기 없이 식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쇠고기 중심의 영국이 세계 최초로 쇠고기 상징 국가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초창기부터 ' 로스트 비프'는 잘 먹는 영국 귀족 중산층의 대명사가 되었다.

쇠고기에 대한 영국인의 집착은 근대 초기에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식민지 정책의 방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영국 귀족, 부르주아 계급, 군대에서 쇠고기 수요가 급증하자 영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야 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최초로 식민화된 목초지가 되었으며, 뒤이어 19세기에는 북아메리카 평원, 아르헨티나 팜파스, 오스트레일리아 오지, 뉴질랜드 초원이 똑같은 길을 걸었다.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시공사(2002), 66~69쪽

그레이트브리튼 섬은 고위도의 서늘하고 우중충한 해양성 기후로 인해 일부를 제외한 과채류 전반이 자라기 힘든 땅이다. 농업이 발전한 현재도 영국에서는 기후적인 이유로 인해 온실과 화석연료의 도움 없이는  토마토조차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영국은 과채류 대부분을 남유럽에서 수입해오며 모종의 이유로 공급망이 불안정해지면 영국인들은 채소를 먹을 수 없다. 당장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기름값이 오르고 전 세계적인  이상 고온 현상으로 인해 남유럽의 과채류 생산량이 급감하자 2023년에 영국 전역의 마트 매대에서는 토마토와 오이를 비롯한 생채소 전반이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

하지만 동시에 이 기후는 주곡 농업 축산업에 있어서는 축복받은 기후이기도 했다. 고른 강수량과 서늘한 기후는 밀 생산에 최적이었고 목장의 너른 목초지를 유지하기에도 좋았다. 영국의 높은  식량자급률은 이 두 부문에서 기인한다. 자연스럽게 영국에서는 밀과 유제품, 그리고 육류를 중심으로 한 식문화가 자리잡았다. 일례로 중세의 잉글랜드인들은 양고기와 쇠고기를 많이 먹었다. 잉글랜드 안의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유적지에서 돼지 뼈는 단지 4~13%를 차지했으며, 소 뼈는 18~46%, 양 뼈는 41~78%로 가장 흔했다. 중세시절부터 잉글랜드에서 고기는 매우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업튼에서는 늙은 동물들의 머리와 다리 부위는 먹지 않고 버렸다. 60% 정도의 소가 3살이 되기 전에 도축된 것은 연한 고기를 선호했음을 시사한다. #

양고기도 유명한 식재료인데 영국인들은 어린 양(lamb) 고기와 늙은 양(mutton)을 철저히 구분하여 요리법을 체계화시켰으며 근대 가축 품종 개량 기술의 발전 당시 가장 첫 대상으로 양을 품종 개량해 질 좋은 양고기를 생산했다.

여러 가지 요리법으로 양고기의 단점인 누린내를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영국인들은 목초지에서 소와 함께 양의 사육도 활발히 했는데 이렇게 개척된 지역들인 스코틀랜드, 웨일스, 호주 뉴질랜드는 오늘날까지 드넓은 양 목장과 질 높은 양고기 생산으로 유명하다.

영국식 양고기 스튜는 오늘날 영국의 각 지역과 가문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정식이자 영국계 이민자들이 세운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각 가정에서도 중요하게 만들어먹는 가정 요리 중 하나일 정도로 양고기에 대한 사랑도 크다.

이렇게 고기 매니아들이 넘쳐난 터라 이들은 고기를 2가지로 나눴는데 이게 붉은 고기[23]와 하얀 고기[24]로 이 중 값비싼 것은 역시 붉은 살코기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닭고기도 고기색은 하얗지만 오늘날의 고기보다 더 늙고 풍미와 색이 짙었다. 이러한 고기 사랑으로 인해 채소 요리는 기껏해야 샐러드 정도인 부실한 수준에 머물렀다. 이웃 국가인 프랑스 외에도 유럽 대륙의 대다수의 국가들도 영국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채소 요리가 있다.

4.2. 영연방과 영국 요리

영국 요리의 발전을 얘기할 때 17세기 이후 전세계 곳곳에 있었던 영국 식민지들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영연방의 일원이 된 이들 국가 간 교류의 영향으로 다양한 나라의 음식 문화와 재료가 영국으로 유입됐으며 많은 영연방 국가에 영국 요리가 유입됐다. 현재도 강력하게 남아있는 영연방 국가 간 교류 채널들로 영국과 영연방 각국의 요리들이 교류, 발전하고 있다.

가장 먼저 손에 꼽히는 것이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방글라데시 요리, 스리랑카 요리, 네팔 요리 남아시아 지역의 요리다. 남아시아 요리는 현재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으며 영국 요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장 치킨 티카 마살라, 로간 조쉬 등 커리, 탄두리 치킨, 비르야니가 영국 요리로도 인정된다.

처음에는 남아시아로 파견된 영국인들이 귀국하면서 데리고 들어온 인도인 하인 등 소수의 인도계 노동자들을 통해 영국 상류층 사회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이 시기에 커리, 고추 등 인도식 향신료가 영국 요리에 일부 첨가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이후 남아시아인들의 영국 이민이 늘었으며 20세기 이후에도 남아시아 동아프리카[25]에서 영국으로 많이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던가 요식업 쪽으로 진출했다 보니 런던 등 대도시에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을 운영했고 이는 영국 요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도 런던에서 가장 흔한 외식 식당 중 하나로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식당이 꼽힌다. 현대 영국 요리에 커리, 탄두리 치킨, 비르야니 등 인도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가 많은 원인이기도 하다.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식당이 많아진 이유도 인도 식민지 시대에 유입된 노동자도 있지만 인도, 파키스탄의 독립 및 분단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영국이 인도, 파키스탄에 있는 인도인, 파키스탄인들의 이민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의 독립 이후 인도인 상인들이나 전문직들이 영국으로 대거 유입하기 시작했고 이민자 1세대들은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인도계 영국인, 파키스탄계 영국인 요리사들은 영국인을 상대로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를 팔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에는 방글라데시인들 역시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들의 응원 찬트가로 인도 카레 요리의 일종인 빈달루(Vindaloo)가 선정되었다.

현재 영국의 도심, 번화가에 가장 많은 식당은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방글라데시 요리 식당이다. 영국 전역에는 커리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음식점만 해도 1만 개 이상이다. 이는 한국에서 중국집의 입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짜장면 짬뽕 한국의 문화 요소로 서서히 인정받듯이 영국인들도 커리를 자국 요리로 인정한다.

특히 치킨 티카 마살라는 영국인들은 인도 요리가 자국화된 사례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로빈 쿡 전 외무장관은 치킨 티카 마살라를 영국의 자랑스러운 문화 요소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인도 음식점은 주로 펀자브, 구자라트, 카슈미르, 델리 - 하리아나 등 인도 북서부와 파키스탄 북동부 지역, 뭄바이와 같은 일부 해안 지역과 벵골 지역 요리가 중심이지만 오랜 외교적 관계로 인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부탄 다양한 지역의 요리가 많다.

반대로 인도 요리에 영국이 영향을 준 것이라면 대표적으로 양고기 문화가 있다. 이전까지 양고기 문화가 크게 보급되지 못했던 남인도 지역을 비롯한 인도 곳곳에 양고기 문화가 퍼진 원인 중 하나로 영국의 영향이 꼽히고 있다. 인도의 짜이를 비롯한 차 문화도 영국 차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도의 주류 문화에도 영국의 주류 문화가 끼친 영향이 제법 커서 위스키 사과주 등의 영국식 주류에 대한 소비가 큰 나라들 중 하나가 인도다.

중국, 특히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광동 요리, 복건 요리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영국에서 중화 요리 상당수는 광동 요리, 복건 요리 중국계 싱가포르인 요리 등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가 유입된 것도 중국, 중화권 국가들의 영향 때문이다.

반대로 중화 요리, 특히 그 중에서도 홍콩 싱가포르 지역의 해외 중화 요리에 영국 요리의 영향은 컸는데 우선 해당 지역들에서는 영국식 아침 식사와 영국식 차 문화가 남중국 지역의 매식 문화나 전통 요리 문화와 결합하여 독특한 아침 식사 문화와 간식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해당 지역들은 쇠고기 유제품, 그리고 양고기 소비가 적은 남중국 지역의 요리에 그 요리 문화의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영국의 영향으로 쇠고기, 유제품, 양고기 소비가 많다. 해당 지역들에서 인식하는 양식의 표준은 일반적으로 영국식이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개발된 여러 퓨전 요리나 양식 간편 요리 레시피는 영국 요리의 영향을 받은 레시피가 많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영국 본토에서는 나지 않는 과일, 향신료, 채소 등 다양한 식재료가 영국으로 유입됐다. 이로 인해 레시피가 수정, 보완됐으며 새로운 레시피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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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리의 발전으로 영국 요리를 항변하는 고든 램지

반대로 현재의 영연방 국가들로 건너간 영국인들과 그 후손들은 모국의 요리를 현지 사정에 맞게 개량, 발전시켰고 지금도 현지화된 영국 요리는 영연방 국가들의 주류 요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현지화되면서 같은 메뉴여도 나라마다 레시피와 맛이 다른 일도 종종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피시 앤드 칩스는 영국 본토에서는 대구를 이용하지만 캐나다는 연어, 광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호주는 상어를 이용한다고 한다.

영국과 상대적으로 교류가 많았고 영국의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메이카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자메이카로 건너온 아프리카인들과 크리올들이 영국 요리를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영국 요리를 기반으로 자메이카 섬의 독특한 환경과 특산물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해먹던 요리를 반영해 독특한 자메이카 요리 문화를 형성했다.

자메이카가 독립한 1960년대 이후 자메이카인 이민자들과 교류 채널을 통해 이런 자메이카 요리들이 영국과 다른 영연방 국가들로 수출되고 있으며 현대 영국의 요리도 자메이카 요리에 영향을 주고 있다.

4.3. 전쟁 배급제의 악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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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당시 한 사람에게 할당된 일주일 분 음식의 종류[26]

본래 영국은 독일이나 네덜란드처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들로 가정에서 만든 소박한 전통 요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에 기반한 화려한 식문화를 뽐내던 남유럽 국가[27]들은 당시에도 이를 비웃었지만 당시의 영국 요리는 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맛이 심심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육류 요리[28], 다과류 및 제빵[29], 피시앤칩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같은 요리들은 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문화는 산업혁명을 거치서 대도시에서부터 점차 퇴보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시작된 배급제로 인해 치명타를 맞았다. 전쟁 시작 직후 나치 독일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상선들을 마구 격침시키며 섬나라인 영국을 말려 죽이려고 했는데 영국은 프랑스가 망한 1940년 5월부터 독소전쟁이 터지는 이듬해 6월까지 독일의 공격을 홀로 받아내야 했다. 경제는 군수물자 생산을 우선시하는 총력전 체계로 개편되면서 정부의 계획적인 통제를 받기 시작했고 식재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2년부터였으니 이전까지 약 2년간 영국인들은 아주 팍팍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추축국 세력이 약화되고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한 1943년부터는 사정이 꽤나 호전되었으나 영국에서는 세계대전이 초래한 피폐한 경제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세월 배급제가 유지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인 1954년까지 자그마치 약 15년간이나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영국 정부가 나눠주는 몇 가지 되지 않는 필수적인 생필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수적인 식재료들은 거의 식탁에서 사라졌다. 일부를 제외한 필수적인 식자재들은 배급 쿠폰을 제시하고 정해진 양만을 받아갈 수 있었다. 영국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배급받던 일주일치 식료품은 다음과 같다. #

생산량이 원체 많던 감자, 바다에서 잡을 수 있던 생선, 그리고 정부에서 제공한 거칠고 맛없는 통밀빵인 '국민빵(National Loaf, 내셔널 로프)' 정도만이 배급에서 제외된 품목이었다. 이 중 국민빵은 1942년 도입되어 1956년까지 생산되었는데 전쟁 당시 제조가 허가된 유일한 식사용 빵이었다. 밀가루 낭비를 막기 위해 도정 정도가 낮은 85% 추출 밀가루 감자 전분, 그리고 귀리 보리, 호밀 가루 등을 섞어 만들었다. 설탕은 아예 넣지 않았던 대신 소금 함량은 좀 더 높았는데 이는 전시에 귀해진 설탕을 아끼고 좀 더 보존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만들고 나서 하루 묵혔다가 팔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나마 식감이 괜찮은 갓 만든 빵만 구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영국은 독일처럼 빵에 톱밥을 섞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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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빵(National Loaf)

영국 정부는 가장 기본적인 식단이라고 할 수 있는 빵마저 배급으로 제공한다면 국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에 최대한 빵만큼은 넉넉하게 제공하고자 했다. 국민빵은 통곡물에 도정 정도도 낮았기 때문에 건강에는 좋았지만 워낙 거칠어 소화하기도 힘든 데다 맛도 없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국민빵에 " 히틀러의 비밀 무기"라는 별명을 붙엮다. 심지어는 오늘날 한국군에서 도는 별사탕 관련 오해처럼 정부가 국민빵에 최음제를 넣었을 거라는 악소문까지 돌곤 했는데 원인은 도정이 덜 된 밀가루 때문에 볼 수 있던 씨눈을 영국인들이 최음제로 오해한 것이었다. #

또다른 배급 예외 대상이었던 생선은 당시 가장 위험한 직군 중 하나였던 어부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배려 차원에서 제외되었다. 어부들은 독일 공군의 전투기나 독일 해군의 함선들 또는 그들이 깔아댄 기뢰에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서 조업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걸고 전쟁터의 최전선을 뒤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어선단은 기뢰를 제거하기 위한 소해 작전에도 많이들 동원[34]되었기 때문에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때문에 정부는 생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만은 제어했지만 어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잡아온 생선들을 제 값 주고 파는 것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잡혀온 생선들 중 대구 같은 것들은 또다른 배급 예외 품목이었던 감자와 함께 조합되어 피시앤칩스로 만들어졌다. 피시 앤드 칩스가 영국인들의 국민 요리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배급되지 않는 품목들은 같이 도입된 포인트 제도로 구할 수 있었다. 모든 국민들은 매 4주마다 16포인트를 지급받았고 포인트를 차감하여 기타 통조림이나 건조 과일 등의 품목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포인트의 증감은 한 사람당 하나씩 주어진 배급 수첩(Ration book)에 기입되었다. 그러나 전 유럽이 독일의 손에 떨어지고 항로는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많은 물자들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못했다.

가령 치즈는 전쟁 전 영국은 70% 이상을 서유럽에서 수입했으나 이 국가들이 전부 나치 독일령이 되면서 영국인들은 치즈를 먹기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 식민지[35]에서 수입하면서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남유럽에서 수입해오던 양파 토마토 역시 식탁에서 거의 사라졌다.

한편 신선한 생 과일과 생 채소는 보관과 유통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승리를 위해 땅을 파자(Dig for Victory')는 일종의 자급자족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들이 직접 재배할 것을 주문했다. 이로써 주택과 별장의 뒤뜰이나 도시의 공원, 공터들은 으로 개간되었다. 영국 왕실 일원도 자신들의 영지인 윈저 성 밸모럴 성의 정원에 밭을 일구어 직접 채소를 길러 먹었다. #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선 기를 수 없던 열대 과일 같은 경우는 여전히 위험한 바다를 건너서 가져와야 했으니 정말로 보기 힘들었다. 진짜 바나나 대신 설탕당근을 갈아다 바나나 모양으로 반죽하고 바나나 향을 첨가하여 바나나랍시고 먹어야 하는 식이었다. #

식당들은 그대로 영업했지만 역시 물자 부족에 크게 영향을 받아 부재료가 이것저것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마저도 1명이 한번에 주문할 수 있는 양은 3접시로 한정되었다. 특히 고기가 들어간 메뉴는 메인 메뉴로 분류되어 1접시 이상 주문할 수 없었다. 추가적으로 영국 식품부는 교회나 학교 등을 징발해다 공공식당[36]을 열어 배급표를 잃어버렸거나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당시 영국 전역의 공공식당 점포 수는 2,160개였는데 이는 오늘날 영국에 있는 맥도날드 점포 수(약 1400개)보다도 50%가량 더 많은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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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대전 당시 포츠머스의 "공공식당(영국 식당)" 내부의 모습.
간이 막사를 식당으로 만들었다.

공공식당에서는 배급 쿠폰이나 포인트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가격[37]도 저렴했기 때문에 많은 영국인들이 식사를 했다. 하지만 제공하는 요리들은 대부분 아주 단순한 구성을 자랑했다. '고기와 채소 2개(Meat and two veg)' 또는 '생선과 채소 2개(Fish and two veg), 푸딩[38] 구운 감자, 스튜, 그리고 홍차 커피 등의 기호품 정도 뿐이었다. #

물론 기본적으로 제공하던 메뉴가 그랬다는 것이고 로스트 디너나 커스터드 크림 올린 구스베리 타르트 등의 다른 요리들도 종종 '오늘의 메뉴(Today's Menu)'로 올라왔다. 영국 식품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민들이 좀 더 다양한 요리들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끔 창의력을 쥐어짜내어 다수의 요리 레시피를 각 가정에 배포했다. #

위 영상은 1940년 영국 식품부가 제작하여 상영한 청어구이 조리 및 취식 방법 교육영상이다. 오늘날 TV의 요리 프로그램과 요리 유튜버들이 올리는 영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어떻게 청어를 손질하고 어떻게 구워야 하는지, 먹을 때 가시를 어떻게 발라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알려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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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슬로식 아침식사

좀 더 나은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채소만 잔뜩 채워넣은 파이인 울턴 파이(Woolton Pie)[40] 등의 메뉴를 만들거나 채소 수프 또는 오슬로식 아침식사(Oslo Breakfast)[41][42] 등의 메뉴를 공공식당에 추가하기도 했다. 이 요리들은 건강에는 좋았지만 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영국인들에게는 항상 불만거리였고 '대전기 요리'의 전형으로 낙인찍혀 전후에 곧바로 식단에서 퇴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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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권장 메뉴
아침 식사 점심 식사[43] 저녁 식사
월요일 스크램블 에그 냉고기 및 샐러드
잼 롤리폴리[44]
웰시 레어빗[45]
화요일 베이컨과 토마토 속 채워서 구운 해덕대구
재킷 포테이토[46]
콜리플라워
사과 파이와 커스터드
감자 수프
코니시 패스티[47]
수요일 피시 케이크[48] 구운 토끼
찐 양파[49]
구운 감자 슬라이스
마카로니 푸딩[50]
과일 스튜[51]
소금간 한 오믈렛
목요일 구운 베이컨과 감자 슬라이스 구운 소시지
구운 토마토
매시드 포테이토
채소류
팬케이크
절인 청어
금요일 포리지
앤초비 토스트[52]
치즈와 감자 타르트
당근이나 채소
마멀레이드 푸딩
소시지 통조림[53]
샐러드
토요일 삶은 달걀 멀리가토니(Mulligatawny) 수프[54]
연어 리솔레 통조림[55]
크림 루타바가와 당근[56]
매시드 포테이토
빵과 버터 푸딩[57]
생선구이와 감자칩[58]
일요일 키퍼[59] 로스트 디너
구운 감자
채소
요크셔 푸딩
과일 파이와 커스터드[60]
콜리플라워 그라탕[61]
참고: 홍차나 커피는 아침에 내십시오. 원한다면 아침에 토스트나 빵 그리고 시리얼도 같이 드십시오.
▲ 1951년에 출판된 영국의 한 요리책에서 권장하는 일주일 식단. #

이렇게 먹을 수 있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식자재들을 가릴 것 없이 최대한 활용하려던 노력 덕분에 영국인들의 영양 상태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좋아졌으며 배급제 덕에 영국인들은 타 문화권의 요리를 접할 수도 있었다. 자주 볼 수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공공식당에서는 인도 등 식민지와 미국에서 들여온 커리, 볼로녜제 스파게티 등의 외국 요리들이나 스코틀랜드 해기스 같은 타 지역 요리들도 들어오는 대로 적극적으로 선보였다. 특히 미국산 스팸의 영향은 너무도 커서 전후에 스팸메일이라는 표현이 새로 등장할 정도였다.

전쟁 전에는 외국 요리를 딱히 접할 기회가 없던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이때 공공식당에서 식사하며 처음 외국 요리들을 접했다. 6.25 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의 원조물자로 이나 소시지 등의 서양 요리를 처음 접했던 것이나 부산 경남 동부 지역이나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도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가져온 함흥냉면을 먹을 수 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부의 이런 방침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언제 독일의 폭격으로 비명횡사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시달리던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정부가 반강제로 들이미는 낮선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피시앤칩스, 뱅어즈 앤 매시 등의 익숙한 요리들을 먹고 싶어했다. 이 요리들은 정부가 도입한 식단들에 비해 영양가는 한없이 낮았지만 시민들의 든든한 '컴포트 푸드(Comfort food)'였다. 익숙한 맛은 전쟁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되찾아 주었다. 전시 상황에서 육체적 건강 외에도 정신적인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면 이 요리들이 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꽤 긍정적이었다.

이 정도의 자그마한 반발이나 일부 약탈자들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영국인들은 정부의 배급 제도를 아주 잘 따라 주었다. 배급 제도는 영국인들이 생필품 부족에도 불구하고 기아에 시달리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게 해 준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왕실[62]까지 대상으로 했던 배급 정책과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영국은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당대의 영국인들은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한 여타 유럽 국가들이나 주요 곡창지대를 전부 상실한 소련, 그리고 연합국 폭격의 대상이 되어 갈수록 피폐해지던 독일인[63]들보다는 분명 잘 먹었다.

대전 이후에도 배급 제도가 9년이나 더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우선적으로는 식량 생산 문제가 전후에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높은 위도[64] 서안 해양성 기후로 인해 빵은 1948년까지 배급되었으며 감자도 종종 공급 부족 현상을 겪어야 했다. 홍차는 1952년, 치즈 설탕은 1953년, 마지막으로 적색육은 배급제가 끝나는 1954년에야 배급 대상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

경제적으로도 전후 영국은 사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물론 외교적으로는 서방 연합국의 2인자이자 2차 대전의 5대 승전국 중 하나로서 최고의 영예를 목에 걸었으나,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력을 소모한 영국 경제적 상황은 그 위상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우선 영국은 미국 무기대여법의 최대 수혜자로써 어마어마한 채무를 갚아야 했다. 동시에 연합국으로써 영국이 해방한 유럽 및 아시아 지역들과 독일 점령 지역에 있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식량 지원을 해야 했다.

동아시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다시 한 번 수만 명의 원정군 한국에 파견했고 아시아 식민지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고 패권국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홍콩 싱가포르에 있는 주둔군의 전력을 보강해야만 했다. 이 와중에도 전처럼 거대한 식민제국령의 수억 인구를 부양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대전 전후의 영국은 제 코가 석 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맞먹는 수준의 초강대국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딜레마를 맞이했다.

물론 전처럼 식민지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런 상황을 타개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전쟁 이전이라면 모를까 자유와 인권 보장에 대한 인식, 그리고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해 주었던 식민지 주민들의 정치적 위상이 대폭 상향된 전후 세계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논리였다. 폭압적인 추축국으로부터 세계를 해방하며 새로운 전후 질서를 열어젖힌 장본인 중 하나라는 영국이 착취라는 시대 역행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히틀러를 쓰러뜨렸다는 자부심에 물든 영국인들 스스로도,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도 그러한 선택으로 인해 격렬하게 벌어질 탈식민주의 운동을 일일히 진압할 정도로 여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바로 옆에서 프랑스 네덜란드가 옛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다시 쳐들어갔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당하고 끝내 쫒겨나는 모습은 이러한 믿음을 강화했다. 영국은 곧 자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미국 주도의 서방 국제 질서에 편승하는 대신 2인자의 위치를 확보했으며 1960년대까지 기존의 제국 체제를 영연방의 형태로 정리하며 식민지들을 차차 독립시키기에 이른다. 파운드 스털링의 기축통화 지위도 달러로 넘어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국 정부는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민생 안정을 위해 배급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본격적인 침략을 당하지는 않았던 영국이 추축국의 점령지이자 육상 전장으로 변해버린 여타 유럽 국가들보다도 오래 배급제를 유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간에는 영국 요리를 두고 '영국이 전 세계를 경영하느라 요리에는 미처 신경을 못 썼다'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1940 ~ 50년대 한정으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 정책이나 영양학적 측면에서의 평가고 요리 문화의 차원에서 보자면 15년간이나 이어진 배급은 더도 덜도 말고 그냥 재앙이었다. 현대 영국의 요리사들과 전문가들은 영국 요리에 치명타를 날린 사건으로 2차 대전과 배급제를 이구동성으로 꼽는다. 승리를 위해서는 빠르고 확실하게 배를 채워야 했고 정부는 국민 건강을 위해 영양 균형을 강제적으로라도 맞추고자 했다. 당연히 은 뒷전이 되었다. 대전 이전에 자유 무역과 식민지를 통해 들어오던 향신료와 식재료들은 전쟁으로 거의 증발했으며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료들만으로 요리를 하게 되면서 영국의 요리들은 정말 극도로 단순해졌다.

한편 배급품에 의존하며 총력전 하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일반 가정에서는 요리를 하기보다는 빠르게 먹고 나갈 수 있는 통조림 등의 보존식품들이나 간편식을 선호했는데 배급제가 끝난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공공식당 제도는 유지될 필요가 없었고 맛없는 배급 식품들과 채소 식단들은 사람들의 식탁에서 빠르게 퇴출되었다. 이로써 정부가 우격다짐으로 도입하여 그나마 영국인들의 영양 균형을 맞춰주던 요소들마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영국의 미식 문화는 초토화되고 영양 상태는 다시 불균형해졌다.

따지고 보면 20세기 중후반의 한국 요리 6.25 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쇠퇴하다가 경제 급성장이 본격화된 1980년대 이후에야 서서히 복구되었듯이, 영국 요리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더 따뜻한 기후적 조건과 늦은 산업화로 인해 다양한 요리와 가족적 식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한국은 나름 빠르게 식문화를 복구할 수 있었지만 과일과 채소를 키우기 힘든 서안 해양성 기후에 기반한 데다 오래 전부터 산업화를 완료했던 영국은 한 번 파괴된 식문화를 복구하기 쉽지 않았다.[65]

4.4. 오늘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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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도 영국의 많은 레스토랑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대표적인 요리인 로스트 디너
세계대전 당시의 식량 배급제가 가져온 끔찍한 시대 이후,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요리가 가진 끔찍한 평판을 극복하고 전통적 미식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되찾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구자였던 엘리자베스 데이비드(Elizabeth David)[66]는 좋은 요리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주로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유럽의 향토 요리에 관심을 가졌다. 60년대와 70년대는 다른 국가들의 요리가 주목받던 시기였고, 이국적인 음식들과 식당들이 넘쳐났다. 80년대는 다시 프랑스를 참고하며 누벨 퀴진이 도래했던 시기였다.

당시에도 이미 전통적인 영국 요리의 세계를 찾아나섰던 요리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옛 시대의 영국에서 가장 핵심적이었던 요리들은 누벨 퀴진의 까다로운 외형과는 맞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술적으로 장식되었지만 쥐꼬리만했던 요리들에 끝내 질려버릴 때쯤, 드디어 현대 영국 요리가 요식업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대 영국 요리(Modern British cuisine)은 옛 요리들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퓨전된 요소들을 통한 재해석, 즉 전통적인 스튜, 로스트, 파이와 푸딩들의 좋은 점들을 가져다가 재창조하는 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육즙 넘치는 양 정강이살과 소고기 로스트, 짭짤한 파이들은 지난날의 요리들의 핵심을 장식했지만, 이제는 창의적인 변화를 거쳐 새로운 황금시대를 맞는다. 한때 우리와 학교 급식의 관행이 망쳐버린 요리들은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새 향신료와 허브들, 창의적인 부재료들, 잘 쓰이지 않던 채소들 등의 요소들이 동원된다. 스테이크 앤 키드니 파이, 버블 앤 스퀴크, 랭커셔 핫팟, 스팀드 푸딩과 같은 류의 요리들은 끔찍한 케이터링 업체들과 학교 식당들의 손아귀에서 풀려났고, 대신 영감 넘치고 솜씨좋은 요리사들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했다.
- Go Dine에 실린 ' 현대 영국 요리 가이드' 중.

배급제의 여파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긴 시간 동안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전후 복구에 신경을 썼고 식민지들은 대부분이 점차 독립해 나간 데다 본토는 영국병까지 겪다 보니 요리는 뒷전이었다. 그렇다보니 외식 요리도 인근 서남유럽 요리[67]나 구 식민지들의 요리[68]가 주를 이루었다. 주요 식당의 셰프들도 외국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69]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이들에게 배운 영국 요리사들이 새로 대두되었다. 이 신세대 요리사들은 이전 시대와는 달리 중산층 출신이었고 도제식 교육이나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적었다. 그들은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셰프들[70]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지나친 장식성과 부르주아적 형식은 배제한 요리들을 선보였다. 대신 그동안 천대받던 북유럽 독일의 소박한 요리 방식과 일본의 디자인을 접목했고 분자요리와 같은 실험적 성격이 강한 시도도 계속되었다.

여러 가지 영국 전통 요리들을 발굴하고 이를 다시 세계 만방의 식재료들과 접목하여 현대화하기 시작한 것도 이들의 공이다. 가령 1991년 요리연구가 아라벨라 복서는 대전 이전, 에드워드 7세 치세의 영국 각지의 요리 조리법들을 재발굴하여 '아라벨라 복서의 영국 요리서(Arabella Boxer's Book of English Food)' 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주로 클럽[71]의 주방에서 전해지던 200가지의 요리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영국인들이 식문화에 대해 가진 뿌리깊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동안 영국인들은 이웃한 프랑스 식문화가 구축한 거대한 위상에 짓눌려 자신들의 능력과 전통 요리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사실상 자국 요리는 요리라고 보지 않고 프랑스를 추종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식문화를 아예 뿌리 뽑다시피 했던 전쟁과 배급제를 거치면서 이 관념은 훨씬 악화되었다. 제대로 된 요리는 프랑스인들이 만드는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인들이 만든 이탈리아 요리였고 감자 요리나 스튜 또는 파이 같은 자국의 '천한' 음식들은 그냥 대충 만들어 먹는 연료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니 개선될 리가 없었다.[72]

그러나 신세대 요리사들은 발상을 전환하여 이 '천한' 요리들에 주목했으며 제대로 된 레시피와 새로운 시도들을 개발하며 그 위상을 끌어올렸다. 여기에는 케이준, 소울푸드, 텍스멕스 요리나 캘리포니아 롤과 같이 멸시받던 서민 식문화를 모두가 즐기는 새로운 트렌드로 재탄생시킨 미국 요리의 사례가 참조할 만한 좋은 예시였다. 영국인들은 바다 건너에서 이러한 변화를 목격하면서 프랑스 요리에 가진 오랜 열등감을 깰 수 있었고 영국의 전통 요리들과 전통 재료들 역시 발전시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가령 음식에 톡 쏘는 맛을 더할 때 무작정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방식을 쫓아 영국에서는 자라지도 않는 레몬 오레가노를 쓰는 대신 전통적으로 그랬듯이 지천에 자생하는 구즈베리[73]를 사용해도 전혀 문제 없다는 관념이 이때가 되어서야 자라났다.
"오래된 영국 요리 조리법들을 연구하면서, 저는 이 끔찍한 시기[74]가 도래하기 전의 요리들이 생각보다도 더 세련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2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요리들이 죄다 묵직하거나 전분으로 떡칠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세련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지요."
- 영국 셰프 게리 로데스(Gary Rhodes),[75]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

영국 식문화의 초토화된 폐허는 역설적으로 영국인 셰프들이 제약 없이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펼치며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현대 영국의 셰프들은 전통 요리를 재발견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타 국가들처럼 교조적인 전통에 구속되지는 않는다. 상술한 대로 이민자들의 요리들이 영국의 다문화 사회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성을 더한 것도 영국 요리의 발전을 가속했다.
현대 영국인들은 전과 같이 새롭고,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 기반한다. 활발하게 무역하는 탈제국적 국가에 말이다. 전쟁과 배급, 침체된 경제와 심지어는 계급에 고유의 식문화를 빼앗겼고 요리계에는 늦게 참여했지만, 배고프고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데다 이미 문화의 용광로이다. 지난 20년간, 마치 튤립 파동 때처럼 몰아치는 "요리 르네상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 파이넨셜 타임스 #

일각에서는 영국 셰프들이 세계 만방의 요리 문화를 도입하는 것을 두고 제국주의적 문화 침탈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그 근원은 제국주의라기보다는 현대 영국의 다문화적 개방성에 있다. 오늘날 영국의 외국 이주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식민지 시대가 종결되어 가는 시기에 정착했다.

가령 영국인들의 식탁을 점령하다시피 한 인도 요리가 영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빅토리아 시대였지만 이것이 오늘날처럼 널리 퍼져나간 것은 1950년대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과 분단 이후 인도계 파키스탄계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부터다.[76] 이 중에서도 특히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난민으로서 런던에 들어온 벵골인 요리사들은 영국식 인도 요리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가령 영국식 치킨 티카 마살라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레스토랑을 운영한 벵골인 요리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도계 이주민들은 늦게까지 식당을 영업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밤 11시경에 이 문을 닫고 나서도 2차를 달릴 곳을 찾던 영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인도 요리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중국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런던의 첫 중국 식당이 개업한 것은 1908년이었지만 우후죽순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 난민들이 홍콩을 거쳐 런던으로 대거 들어온 1950년대부터다.[77] 그들은 주로 피시앤칩스 가게를 인수하여 중화요리점으로 바꾼 후 장사를 했기 때문에 테이크 어웨이가 가능한 값싼 요리들을 팔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이 판매 전략이 길거리에서 대충 식사를 때우곤 하던 영국 시민들에게 먹히면서 영국식 중화요리로 정착한다. 이 중 탕수육 차오몐은 영국인들이 선호하는 중화요리다. 특징이 있다면 피시 앤드 칩스 가게들에서 시작했다는 역사로 인해 메뉴에 감자튀김이 포함되며 주문한 것들을 개별포장해주는 게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한 박스에 집어넣어 버리기 때문에 내용물이 섞이기 쉽다는 점이다.[78]

비슷한 시기 소위 ' 대영제국'이 붕괴하고 식민지 국가들과 영국 본국이 동등한 관계를 구축하였다. 지배국인 영국의 문화와 피지배자인 식민지 문화 간에 존재하던 위계적 질서는 영연방의 등장과 함께 무너졌고 때마침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68운동을 통해 구 식민지 국가들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떠오르면서 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대영제국 시대의 권위적인 영국인들과 외국인 혐오적인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국 문화를 편협하게 바라보면서 그 영향을 배격하였으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90년대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 나이젤라 로슨, 제이슨 애서턴, 그리고 헤스턴 블루멘탈과 같은 영국의 스타 셰프들은 다시 각종 방송과 요리책, 그리고 사회운동을 통해 요리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점과 식문화를 개선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공영방송 BBC BBC Good Food라는 미디어 브랜드를 1980년대 후반부터 신설하여 보다 좋은 레시피를 보급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노력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효과를 보고 있으며 한때 거의 죽어 버리다시피 했던 영국의 요리와 식문화는 이렇게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이미 파인 다이닝 음식점들에서는 현대 영국 요리가 중요한 위치로 떠올랐다.[79] 물론 일반적인 영국 시민들의 식탁에까지 이 발전상이 완전히 닿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기후적인 약점은 여전히 영국 요리의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인들의 식단에서 서남유럽 요리[80] 남아시아 요리[81], 중화 요리를 비롯한 외국 요리가 차지하는 위상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노력은 분명 꾸준히 영국의 전반적인 식문화를 개선 중이다. #

5. 명성

5.1. 고품질의 육류 요리

영국 요리에 대한 세평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영국의 육류 만큼은 재료와 요리 모두 유럽을 포함하여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쇠고기는 '잉글리시 비프(English Beef)'라고 해서 매우 고급으로 쳐 준다. 당장 고급 품종으로 알려진 앵거스는 스코틀랜드 육우 품종이다. 지리적 표시제/유럽연합에 등록한 유럽연합 역내 28개국과 역외 등록 제품 보유국 8개국을 통틀어 36개국 중 등록 품목수 7위가 영국이다.

18세기, 19세기에는 세계적으로 질 좋기로 유명한 영국의 헤리퍼드(Hereford) 품종, 앵거스 품종 소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국 식민지로 수출했으며 현재도 세계적으로 질 좋은 소고기로 영국산 품종의 소가 자주 이름을 올린다. 광우병 사태 이전에는 영국이 세계에서 제일 질 좋은 쇠고기를 생산한다고 인정받기도 했다. 스테이크는 너무 세계화되어 영국 전통 요리라는 인식은 희미하지만.

가금류도 많이 이용하는데, , 오리, 칠면조 품종 개량도 활발하고 크리스마스 때 먹는 칠면조 구이, 로스트 치킨도 영국에서 자주 먹는 요리이며 닭고기, 오리고기, 거위 고기와 칠면조 고기도 많이 소비된다. 이는 과거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숲에서 등을 사냥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며 육류 요리에서는 영국만큼 즐겨먹는 케이스는 드물다.

그 누가 뭐라해도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빵이나 죽이 아닌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대표주자는 영국인들이며 복잡, 화려한 프랑스식 퀴진과 별개로 주식으로 먹기위한 붉은 고기의 스테이크 류 조리만큼은 단연코 영국이 일류다. 특히 쇠고기와 돼지고기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잘 조리하지 못하는 양고기까지 어떻게든 맛있게 조리해서 먹는 방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영국이라는 점만 봐도 영국 요리가 육류 요리만큼은 탁월하게 다룬다는 점은 분명하다.

5.2. 다양한 제과·제빵

1840년대 사회 상류층 풍조로 시작해서 지금에는 서민층, 상류층을 막론하고 영국의 전반적인 식문화로 자리잡은 티타임[82] 영향으로, 영국은 식사류 음식은 몰라도 차에 곁들여 먹는 제과제빵을 기반으로 한 디저트 음식 문화는 특출나게 발달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대영제국 시절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나 지역도 일상식에서 영국식 메뉴 자체[83]는 드물더라도 제과제빵의 영향은 남은 곳이 많다. 쇼트브레드 비스킷, 다이제도 인기가 많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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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현지화된 영국식 밀크티와 간식들
전술한 잉글랜드식 아침 식사 식재료에 기반한 호평과 더불어 영국산 제과제빵 식품의 품질은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영국산 식재료와 잉글랜드식 아침 식사의 인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아무리 영국 요리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나라라도 영국산 빵, 디저트 메뉴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높게 쳐주고 있다. 세계에서 많이 소비하는 빵인 식빵[85]도 영국이 기원이다. 영국 요리/증언 항목에 서술되어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증언에서도 '그래도 빵만큼은 맛있다'는 평이 있다.

5.2.1. 티타임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티타임이 공식적인 식문화로 자리잡았고 케이크 비스킷, 스콘, 샌드위치 등 다양한 간식을 곁들여 먹는다.

샌드위치는 보통 마요네즈 + 1장 or 오이 1장의 단순한 구성으로, 차에 곁들여 먹기 위해 간단히 만든다. 과거 영국에서는 '아삭한 오이'를 먹을 수 있던 것은 상류층들의 특권이었으므로 식빵 사이에 얇게 저민 오이를 끼운 큐컴버 샌드위치가 티타임 전통 음식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애초에 홍차 자체가 찻물의 색이 나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우려먹던 고급 음식이었고 찻잎을 보관하는 상자는 감히 하인들이 만지지 못하고 오직 여주인만이 만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생햄을 넣는 음식인 데다 같은 영국식 식빵이라도 본토 물건은 조금 더 퍼석하기 때문에 촉촉하고 아삭한 오이와 매우 잘 어울린다.

곁들여 먹는 스콘은 퀵브레드의 일종으로, 견과류와 여러 재료를 섞어 넣기도 하며 종류가 다양하다. 밀가루로 만든 단순한 것은 클로티드 크림 같은 것을 얹어 먹기도 한다.

17세기 이후 티타임 문화의 발전은 영국 농업의 산업화로 인한 농업 생산력 폭증과 과일 품종 개량과 겹쳐 영국 제과 제빵의 급격한 발전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한동안 서민층들은 점심 식사를 'dinner[86]'로, 저녁 식사를 'tea'로 불렀다.

현대 들어서 영국 일반 가정이나 평범한 대다수 서민들에게서 전통 티타임은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홍차 티백을 머그컵에 담아 간편하게 우려내서 설탕이나 우유 등을 넣은 후 비스킷이나 약간 달달한 것을 곁들여 간단히 마시는 정도로 간소화되었다.

특히 젊은 층으로 갈수록 생활에 치이고 간편한 것을 선호하므로 평소에는 커피나 차를 마시다가 전통 티타임은 기념일, 접대, 파티, 행사 등에서만 가지는 추세다.

5.3. 의외의 미식 강국

1954년 런던 소호의 모습. , 중국 요리, 에스카르고, 이탈리아 요리 등 다양한 음식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영국 요리영국 요식업은 별개다. 영국인들이 먹는 음식의 종류가 적고 너무 간단한 요리들이라 악평을 받는 것이지 영국의 레스토랑과 요리사들의 명성은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다. 해외에서 작성된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볼 때 런던은 미슐랭 레스토랑 별점 갯수에서 7위에 랭크된다. # 심지어 개중에는 영국 요리만을 파는 레스토랑도 많다.

영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요리사로는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 등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서도 영국 유학파 출신 셰프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영국의 셰프 육성은 체계적이고 많은 실력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영국은 다소 침체되었던 시기는 있었으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이자 경제 강국이며 더불어 인기 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 중에도 런던은 수많은 여행객과 사업가가 드나드는 도시이기 때문에 시쳇말로 목이 좋은 동네이며 실력있는 셰프 관광객들이나 경제력이 있는 사업가들을 타겟으로 삼아 개업한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대표되는 하이엔드급 식당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환경이다. 때문에 재력이 충분하고 미식에 관심이 있다면 영국은 좋은 식도락 관광지이며 미식 선진국이기도 하다. 물론 그 '재력이 충분하다'는 정도는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 중 하나인 런던 기준으로도 부유하다는 경우에 한한다.

6. 영국 요리에 대한 악명과 인터넷 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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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에 서술된 나름대로의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영국 요리는 긴 세월 동안(최소 300년 이상) 전 세계적으로 조롱과 풍자, 인터넷 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심지어 영국인들 본인조차 디스하는 악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인 증언을 몇 가지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 대영제국은 전세계에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단지 조리 전(Before cooking)으로 말이죠."
윈스턴 처칠[87]
"어릴 적의 나는, 전통 잉글랜드 서민 요리의 온갖 익숙하면서도 추한 맛을 보며 자랐다. 매년 도버 해협 건너 벨기에에 사는 친척들네 집에서 식사를 하는 명절을 1년 내내 고대했고, 내 10대 무렵 즈음에 대도시에 막 독립한 식민지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의 식당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은 성장기의 축복이었다."
―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 유대계 영국인), 유작인 자서전적 회고록 Memory Chalet (2010) 중에서
"영국인의 태도와 생활 양식, 음식 등은 폴란드인[88]에게 충격이었다. 영국에 도착한 그들에게 제공된 어묵 샌드위치는 잊기 힘든 기억을 남겼으며, 태우다시피 한 양고기와 양배추부터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커스터드 소스에 이르기까지(자유 프랑스인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끔찍한 영국 요리 때문에 향수병만 더 짙어졌다."
―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영국인), 제2차 세계대전, 196페이지
" 동아시아 담당 기자로서 내가 누린 가장 큰 행운은, 지난 15년간 우리 나라(영국) 음식 대신 한국 요리, 중국 요리, 일본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 더 가디언지의 동아시아 특파원 조너선 와츠의 말
"나는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외식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맛있는 레스토랑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지내다 보면, 런던에서 돈을 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미안한 말이지만 직접 만들어 먹는 편이 더 맛있다. 식빵은 맛있었다. 요리라고 할 정도의 음식은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89], 먼 북소리 中
" 올림픽에만 3번째로 참가하면서 선수촌 [90] 맛없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2012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대한민국 사격 선수 진종오 증언
증언은 이 외에도 다수 존재한다. 이 외의 증언들은 영국 요리/증언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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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BBC를 포함하여 다양한 저널리즘 관련 수상 경력이 있는 푸드 저널리스트 조안나 블리스먼이다. 책의 제목은 "나쁜 음식 영국 - 어떻게 국가가 식욕을 파괴하는가"("How A Nation Ruined Its Appetite".) 인데 이 책의 소개를 일부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레시피와 다이어트 책은 꾸준히 베스트셀러 Top 10에 들지만,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단 8분뿐이고, 스스로 요리를 하기보다는 유명 쉐프가 TV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데에 더 시간을 들이는 나라에 잘 오셨습니다.
Welcome to the country where recipe and diet books feature constantly in top 10 bestseller lists but where the average meal takes only eight minutes to prepare and people spend more time watching celebrity chefs cooking on TV than doing any cooking themselves, ...

음식의 안전과 산지에는 거의 병적으로 집착하지만, 영양 섭취는 공산품에 의존해서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4배나 많이 소비하는 나라에 잘 오셨습니다.
Welcome to the nation that is almost pathologically obsessed with the safety and provenance of food but which relies on factory-prepared ready meals for sustenance, eating four times more of them than any other country in Europe, ...
이 비판은 일개 저널리스트의 개인적인 논평이 아니라 2009년 영국관광청(VisitBritain)에서 영국을 방문하는 36개국 관광객에게 "영국 요리는 매우 맛이 없다(very bad)"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하여 가장 많은 관광객 숫자를 차지하는 상위 10개국에서 도출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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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웹아카이브).

1이 강한 부정, 7이 강한 긍정으로 3.5 미만은 '보통'이라는 뜻이다. 조사국 36개 중 대다수의 여행자들은 영국 음식이 나쁘지 않다고 응답했으나 영국 여행국의 상위 10개국 중 6개국이 3.5를 웃도는 답변을 했다는 것은 유럽 내에서 영국 요리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91]

다만, 원래 음식의 맛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음식의 외양은 물론 식당의 인테리어 및 분위기, 요리사의 명성, 음식에 대한 이미지, 주위 사람들의 평판 등의 외부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는데, 과거부터 영국 음식은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에 식문화가 개선된 지금도 해당 조사의 참여자들은 이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실제 맛보다 평가 절하했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상기된 영국 요리의 장점들과 문제점들의 상반된 모습에 당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 몇 안 되는 장점들은 식재료, 베이커리, 하이엔드급 레스토랑에 치중된 것이고 반면 단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은 그런 극소수 케이스에 해당하지 않는 전반적인 영국의 식문화 경험에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런던에 살면서 매 끼마다 하이엔드 레스토랑에서 먹을 돈이 있으면 서술된 영국 식문화의 문제는 무시해도 된다. 오히려 하이엔드 레스토랑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막말로 영국에서 그 정도로 맛있는 것 먹고 살 재력이 있는 부자 영국인들조차도 같은 조건이라면 조국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값싸고 맛있기까지 한 타 서남유럽 국가[92]에서 미식 여행을 하고 다닐 것이다.

영국 요리 레시피 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똑같은 레시피라도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심지어 같은 영연방에서 만드는 피시앤칩스도 맛은 물론이고 조리법까지 다른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같은 영국인이 만들어도 그 맛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처럼 산업 혁명의 부산물로 오염된 바다에서 건진 저질 생선이 아닌 비교적 깨끗한 바다에서 나온 질 좋은 생선에 다른 비영국계 이민자들이 가지고 온 향신료로 맛을 낸 피시 앤드 칩스는 꽤나 맛있는 음식으로 평가받는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케이트 폭스는 그녀의 2004년 베스트 셀러 'Watching the English: The Hidden Rules of English Behaviour'에서 영국인들은 타 유럽인들에 비해 요리에 관한 열정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청교도 특유의 지나친 금욕주의 때문에 요리에 관한 열정을 비웃는 부정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역시 영국 요리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고 말한다.[93]

종합해 보자면 영국 요리에 대한 나쁜 인상은 일반적으로 접하게 되는 전반적인 영국 식사, 그 중에서도 영국 요리라는 레시피 자체가 아닌 조리의 측면에서 기인하고 있는 면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레시피 자체는 아주 정상적이고 공급되는 식재료의 질도 좋아 잘만 만든다면 맛있는 요리가 되지만 극소수를 제외한 그 요리를 만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요리에 관한 열정도 없고 관심도 없으며 자연스럽게 요리를 배울 기회[94]조차 없다는 삼위일체로 조리법이 개판이 되어 이런 대참사가 발생했다는 소리다. 이렇다 보니 영국 유학생들, 심지어 영국인 본인들조차 그나마 제일 맛있는 음식이 손 많이 안 가는 샌드위치 토스트라고 할 지경이다.

6.1. 일반 가정식의 부재

영국 요리/악명/원인 문서에서 지적한 여러 원인들로 인해 영국은 식문화 자체가 발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해당 문서에서도 언급했듯이
  1. 식재료 자체의 질이 좋은 덕분에 생긴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문화
  2. 청교도적 금욕주의로 인해 생긴 손이 많이 가는 요리법을 사치로 여겨 기피한 문화

위 두 요인이 접목된 결과 영국 요리는 재료에 별다른 가공을 가하지 않고 먹는 풍조가 생겼고 그 결과 영국의 가정식 풀은 매우 빈약해져 버렸다. 쉽게 말해 영국 음식은 자취생도 간단히 해먹을 만한 요리나 일류 레스토랑에 나올 법한 최고급 요리들은 즐비한데 그 중간이 텅 비어 있는 셈이다.[95][96]

당장 한국 음식만 하더라도 한국의 국과 찌개를 보면 매우 다양한 요리가 포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굽거나 삶거나 기름에 부치는 등 좀 번거롭긴 해도 하려면 못 할 것 없는 조리법으로 온갖 식재료를 활용하는 요리가 넘쳐난다. 하지만 영국 음식은 이 단계에 해당하는 요리가 몇 개 없다.

한국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주먹밥이나 수제비 같은 매우 간단한 음식이나 한정식, 열구자 같은 고급 요리는 있는데, 김치찌개 제육볶음, 닭도리탕과 같은 조금 수고는 들겠지만 신경쓰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중간 수준의 요리들이 거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식이란 '집에서 식사로 조리해 먹기 편하며', '음식점에서 평범한 한 끼 식사로 사 먹을 만한 요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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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국민 요리로 유명한 '빈즈 온 토스트'와 '머시 피스'

이는 특히 외국에서 영국 요리의 악명이 알려지는 데 크게 일조했다. 빈약한 가정식의 풀은 고스란히 영국에서 먹을 거리는 고작 피시앤칩스, 로스트, 파이, 비스킷 정도가 다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영국 요리를 까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영국 요리들은 저것들 말고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조리 방법이 너무 간단하고 한 끼 식사거리가 되지 못한다. 외국에서 손님이 집에 찾아왔는데 베이크드 빈즈를 올린 '빈즈 온 토스트(Beans on toast)'나 으깬 콩 요리인 '머시 피스(Mushy peas)'를 요리라고 내놓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97]

반대로 '영국의 매우 간단한 요리'들은 영국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요리라고 부르기 민망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아침 식사 메뉴도 사실 그냥 계란 프라이, 구운 소시지 베이컨 같이 조리법도 단순하고 너무도 보편적인 것이라 다른 나라 같으면 굳이 '우리 문화 고유의 음식'이라며 내세우지도 않는 것들이다.

흰 쌀밥에 구운 스팸, 케첩 소시지 볶음, 맛김, 볶음고추장, 김치 두어 가지, 간단한 즉석 국이나 라면으로 이루어진 한 상은 한국인이라면 좋아하다 못해 매일 한 끼씩 꼭 먹으래도 "한 끼 정도면 매일이라도 생각해볼 만하다" 싶은 상차림이지만 그 어떤 한국인도 이런 걸 한국 고유의 세계 만방에 내세울 만한 요리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98]

그 결과 영국인들이 '가정식'하면 주로 떠올리는 음식에는 '인도식 카레'가 당당히 들어간다. 즉, 한국에서의 짜장면이나 스테이크처럼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끼리 외식을 나가서 인도 커리를 먹고 자라 추억의 음식이 된 영국인들이 상당히 많다. 식민지의 요리가 되려 본토 식문화를 잠식한 어이없는 상황이다.

베트남 요리, 캄보디아 요리, 라오스 요리 본토 식문화를 잠식하지는 않은 프랑스[99] 한국 요리 본토 식문화를 잠식하지는 않은 일본[100], 식민 지배 사례는 아니지만 체코 요리, 폴란드 요리, 헝가리 요리 동유럽 지역 요리와 튀르키예 요리의 영향을 받은 독일 요리, 오스트리아 요리[101]와도 대조적이다.[102]

영국에 세계적인 셰프는 즐비한데 영국 요리는 악평을 듣는 이유도 이 사실을 알면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 대영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문화권의 식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고급 요리와 레스토랑 문화는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셰프의 수요도 많고 육성 과정도 체계적으로 잘 갖춰져 있으므로 고급 셰프의 양성은 잘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간 단계인 가정식이 통째로 증발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요리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현재의 영국 요리의 악명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가정식에서 강점을 찾아보자면 무너진 가정식을 통째로 다양한 스테이크 요리가 차지했다는 점 정도다. 영국산 육류의 품질은 예로부터 명품으로 칭송받았고 고기에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고 본연의 맛을 즐기는 풍조가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에 영국의 ' 로스트 디너, 스테이크, 비프 웰링턴' 만큼은 맛도 일품이고 퀄리티도 상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 요리는 아예 요리 취급조차 안하는 프랑스인들조차 영국인들이 스테이크 하나는 잘 굽는다고 인정할 정도다.

6.2. 비좁은 식재료 풀

아래 항목들을 보면 육류, 제과와 주류만 빼고 전반적으로 모든 식재료의 활용도가 낮다는 걸 알 수 있다.

6.2.1. 채소

동아시아와 남서유럽권 사람들이 영국 요리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공통적인 문제로 지목하는 지점이 바로 영국 요리의 채소 활용이 형편 없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영국 요리에서 많이 사용되는 채소들이라고 하면 강낭콩, 양상추, 당근,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그린 빈, 양파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을 가지고 하는 요리법들을 보면 갖은 방법으로 요리에 이용하는 타 문화권 요리에 비해 매우 뒤처졌다. 당장 위에서 그나마 괜찮다고 추켜세워 준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만 봐도 구성에서 채소가 쏙 빠져 있고 그렇다고 샐러드 등으로 보충되지도 않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것도 최근 들어 샐러드에 신경을 쓴 거지 과거에는 육류만 먹다가 괴혈병에 걸린 해군 수병도 많았다.[103]

이는 영국의 기후적-토지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에 기인하는 점이 크다. 영국 요리가 탄생하고 성장한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은 대부분의 지역이 서안 해양성 기후이기 때문에 다양한 채소를 키우기 좋지 않은 환경이며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의 토질도 보리 같은 곡류가 아닌 채소를 키우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거기에 빙하기 때 식물이 싹 밀려나갔다가 빙하기가 끝나고 나서 물러간 식물이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식물상이 매우 단조로워 산나물 조차도 구하기가 힘든 땅이었다.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와 웨일스 외에는 평야 지대라 산나물이 자랄 지역이 드물고 일부 습지 역시 이끼 외에는 자라기 힘든 지역이다.

이 때문에 영국인들이 접할 수 있는 채소는 매우 한정적이었으며 온실 기술 등이 등장한 오늘날에도 영국의 채소 생산량은 많지 않다. 따라서 영연방 혹은 유럽산 채소를 제외하면 다양한 채소를 접하기가 힘들고 상대적으로 가격도 비싸다. 그나마 지금 무역이 발달해서 과거보다 채소를 찾기 쉬운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정 국가를 상징할 만한 요리가 되려면 일단 재료를 그 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함은 상식이다. 유통 및 저장 기술의 발달로 자국에서 보기 힘든 타지의 식재료를 '구할 수는' 있겠지만 별미에 그칠 뿐 국가를 대표하는 요리가 될 순 없다.

반면 단조로운 식물상은 바꿔 말하면 드넓은 목초지에 , 보리 잔디가 대량으로 쉽게 자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광대한 목초지와 해양성 기후의 사시사철 균등한 강수량 덕분에 영국의 육류와 곡물 생산량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덕분에 역사적으로 영국은 잠시간의 정치적 혼란기를 제외하면 만성적인 기아를 겪은 일이 없고 드넓게 펼쳐진 비옥한 평야지대와 근대 이후에는 세계 곳곳의 식민지들로 말미암아 농축산물 생산량을 중심으로 한 식량 생산량이 넉넉한 편이었다. 지금도 식량자급률 92~150%이 나온다.

근대 이전까지 서민들의 식량 사정이 빈천했던 한국이나 일본 등과는 달리 서민들조차도 채소 요리에 굳이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있는 고기 사다가 구워 먹기만 해도 삼시세끼를 넉넉히 챙길 수 있는데 산나물이나 버섯 등을 힘들여 캐거나 잘 자라지도 않는 채소들을 억지로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영국의 식문화에는 채소를 요리하는 방법이 실종되어 버리는 문제로 이어졌다. 채소를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해 먹는 타 문화권들과 달리 영국 요리의 채소 요리는 기껏해야 샐러드로 먹는 거나 삶는 것 정도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샐러드도 19세기 들어 다양한 드레싱이 등장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거라 푹 삶아서 맛없게 먹는 것 외에는 사실상 채소 요리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이 문제는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아이슬란드 등 전반적으로 채소류 재배가 까다로운 서유럽 북부와 북유럽, 그리고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싱가포르[104] 등 영연방 국가들의 요리나 미국 요리에서도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므로 딱히 영국 요리만의 문제라고 보긴 힘들다.[105]

6.2.2. 해산물

해산물을 안 먹는다는 편견과 달리 영국인들은 유럽 내륙의 국가들보다는 해산물을 자주 먹는 편이다. 다만 유럽에서도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같은 해양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확실하게 적고 제한적인 해산물 식단을 가지고 있으며, 대륙부 국가들 중에서도 발트 국가들이나 독일 북부 같이 해안에 인접한 국가들보다는 확실히 적은 소비량을 보이고 있다. 섬나라인 영국의 적은 해산물 소비량은 세계의 호사가들뿐만 아니라 영국 내에서도 많은 요리사들과 연구가들의 논쟁 대상이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이유는 없다. 그저 여러 요인이 합쳐져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할 뿐이다.

에식스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영국인들은 오늘날보다 해산물을 훨씬 더 자주, 더 다양하게 소비했다. 영국 근해의 어장은 300종이 넘는 생물 자원의 보고이며 이는 전근대 시대의 영국 서민들에게 풍부한 단백질을 제공했다. 삶은 홍합, , 바닷가재 등은 영국 저소득층들의 값싸게 배를 채울 수 있던 식단 중 하나였으며 장어 역시 마찬가지다.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삶은 조개와 소라, 게나 장어 젤리 등을 팔던 해산물 노점들은 런던 시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극빈층의 식단이라는 이유로 보다 상위의 계급들에게는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장어 젤리의 예시에서 알 수 있듯, 해산물은 그들처럼 지저분하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먹기에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박혀 버린 것이다. 자연스레 중산층 이상 시민들은 해산물을 기피하는 풍조가 형성된다.

종교적인 요인과 미신 역시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원래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순절 시기에 금육일을 지키는 전통이 있었다. 이 시기 유럽인들은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해산물을 통해 단백질을 보충하였는데, 영국에서는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과 척을 지게 되면서 이 문화가 사라졌다. 영국인들이 보았을 때 해산물 소비는 '너무 가톨릭적' 이었던 것. 물론 이 역시 개신교 문화권인 나머지 북해 지역 국가들이 생선을 자주 먹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답변이다.

한편으로는 영국인들이 바다 생물을, 특히 그들의 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 역시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힌다. 프랑스인들과 스페인인들은 생선을 통째로 사서 본인들이 직접 필레로 가공하지만 영국인들은 대부분 직접 손대는 것을 꺼리며, 가공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다. # 그리고 두족류를 먹지 않는 이유는 문어를 악마의 물고기라 여겼던 북해 일대의 민간 전승에 기반한다는 설이 지지를 받는다. 근대 영국에서 해양 생물 전시회가 최초로 열렸을 때 영국인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던 생물은 해외의 이국적인 생물들이 아니라 바로 문어였을 정도로, 영국인들에게 두족류는 공포의 대상이자 낮선 생명체였다. #

마지막으로 1900년대 초 어업의 산업화 역시 원인으로 꼽힌다. 20세기 초부터 영국 어업계는 선호도가 높은 청어, 그리고 대구를 잡기 위해 더 먼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산업 혁명기 산업체들의 소품종 대량 생산의 법칙은 영국 어업계도 다르지 않았다. 업체들 입장에서는 선호도 높은 하나의 어종을 대량으로 잡아 유통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은 줄어들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는 영국인들의 선호가 대구 연어 그리고 새우에 한정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가 피시앤칩스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해산물 식문화다. 반대로 기타 어패류 등의 가격은 점차 오르는 바람에, 한때는 펍에서 일요일마다 무료로 삶은 조개 등을 술안주로 내놓던 문화는 사라졌다. 그 자리를 장악한 것은 풍족하게 공급되는 고기였다.

오늘날 영국인들이 주로 소비하는 해산물은 생선류에 치중되어 있다. 패류로는 전통적으로 을 즐겨 먹었고 오늘날에는 새우를 주로 소비한다. 빅5로 꼽히는 어종은 대구, 연어, 해덕대구, 참치 그리고 새우다. 또한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해산물 소비 문화가 거세당함에 따라 영국인들의 해산물 조리 실력은 빈말로도 좋게는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끔찍한 피시앤칩스에 대한 수많은 악평들은 본질적으로는 이 문제에서 기인한다.

영국인들의 제한적인 입맛은 다시 영국 수협의 위기로 돌아오고 있다. 가장 인기있는 생선인 대구가 영국 해역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기에 영국은 대구를 잠재 적국인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러시아 제재에 영국이 가담하면서 수입로가 뚝 끊겨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들이 다른 생선들을 찾는 것도 아니기에 영국 수협은 국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가디언지와 인터뷰한 영국의 생선장수들은 '방금 잡은 신선한 생선이 바로 여기 있는데 손님들은 대구만 찾는다'고 불평할 정도이다.

릭 스타인을 비롯한 영국의 유명한 스타 셰프들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영방송 BBC 역시 다큐멘터리 <생선 혐오(A Fishy Phobia)>를 제작하며 문제를 분석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는 아직 요원하다. 풍족한 해양 생물 자원을 보유한 영국의 어업은 세계적인 수준이며 수산물의 품질 역시 인정받으나, 막상 대부분의 수산물들은 영국 내에서 소비되지 않고 유럽 대륙으로 팔려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으로 도버 서대의 경우 95% 가량의 물량이 스페인으로 향한다. # #

6.2.3. 향초(herb)와 향신료(spice)

민요 < 스카보로 페어> 노래 가사에서도 나오듯이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 타임, 보리지 등의 여러 향초가 영국에서 재배되지만 재배량과 사용량에 있어서는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지역 불문하고 모든 향초들은 기본적으로 풍부한 일조량과 온화한 기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다양한 향초를 사용하기로 정평이 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프랑스, 몰타, 포르투갈, 키프로스, 튀르키예는 대표적인 지중해성 기후 지역들이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바질, 로즈마리 등을 아끼지 않고 넣는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튀르키예는 페페론치노 등 고추를 많이 사용하고 스페인 - 프랑스 - 이탈리아는 타 국가에 비해 마늘도 많이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를 보면 비록 위도 문제로 열대 지방과 같은 향신료 재배는 불가능하지만 열대 지방과 맞먹는 수준의 여름 기후가 있기 때문에 여름에 고추, 생강, 참깨, 들깨, 마늘과 같은 아열대성 향신료 작물들을 키워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수확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게 가능한 남부 지역의 음식에 향신료 사용이 많은 편이고 상대적으로 북부 지역은 음식을 싱겁게 조리하는 편이다. 적도 바로 윗부분에 위치한 인도 등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동아프리카가 수만 가지가 넘는 향신료의 본산인 것은 두말하면 입아프다.

영국은 서안 해양성 기후 특성상 일조량이 적어 향신료 재배에 불리하다. 따라서 캐러웨이나 주니퍼베리, 겨자, 호스래디쉬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고 19세기 영국령 식민지들에서 증기선을 타고 향신료들이 대거 들어오기 전까지 영국 요리에서 향신료는 서민들에게는 접할 수 없는 귀족들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었다.

이 때문에 향신료 사용에 적극적이었던 귀족 요리와 달리, 향신료를 접할 수 없는 서민들이 즐기는 대중 요리에서는 향신료가 사실상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적 통치를 겪은 뒤 검약을 더욱 강조하게 되자 상류층들도 향신료 사용을 과거보다 잘 하지 않게 되었다.

근대 이전까지 향신료는 기호와 사치의 기능에 더해 음식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겸했다. 육류나 수산물을 염장해서 먹는 문화가 그 예시라고 볼 수 있고 향신료는 식재료의 낮은 신선도를 감춰보려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었다. 한국의 간고등어가 내륙 지방인 안동 지방의 유명한 식자재임을 떠올려 보자.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영국은 '식문화'가 저열한 것이지 육류를 비롯한 '식자재의 공급'은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신선한 육류를 국민들에게 쉽게 공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영국인들은 그냥 신선한 고기를 사서 그날 요리해먹으면 되었지, 굳이 영국의 기후 기준으로 '매우 구하기 어려운' 값비싼 향신료를 써야 할 당위성이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국의 음식사학자들에 의하면 튜더 시대의 영국 상류층 음식은 인도 음식에 버금가는 '스파이시'함을 보였다고 하며 이는 이 시기 요리책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파인 다이닝의 경우라면 유럽 국가들 중 영국의 향신료 사용이 그나마 많은 편인데 방대했던 식민지로부터의 영향이 크다.

식재료의 그림 백과사전 출판으로 유명한 DK 출판사의 <The Science of Spice> 유럽 편을 훑어보면 영국이 유독 향신료 사용에 있어 두드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나마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중화 요리 등의 영향으로 인해 고수 등 향신료 사용은 증가했지만 이것은 '영국인들의 향신료 사용'이 늘어난 것이지 '향신료를 쓰는 영국 요리'가 늘어난 게 아니다. 위에서도 계속 언급하지만 영국 요리가 빈약한 거지 영국인들의 식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풍족하고 다양하게 잘 먹는다. 다만 그 식생활에 자신들의 요리가 아닌 전세계에서 건너온 요리들이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6.3. 급식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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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법적인 영양 가이드라인이 갖춰진 채 급식이 시작된 이래로 진행되어 오던 급식이지만 맛은 보장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마거릿 대처[106] 정부에 의해 무상급식과 같은 재정지원이 폐지되고 학교 급식을 관리하는 주체가 학교에서 민영사업자로 넘어가면서 급식의 질이 급격히 하락했다.

민영사업자들이 감자튀김, 칠면조 및 치킨너겟, 인스턴트 피자 파이 등 수준 낮은 '따뜻하지 않고 차가운' 패스트푸드 수준의 급식을 학교에서 제공하자 이에 경악한 제이미 올리버가 2004년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시작하고 TV 방송을 통해 이를 알리기 시작했다.

제이미 올리버가 영국 급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내용을 보면 공립학교의 급식 수준이 많이 낮았다. 군대 군용견 사료보다도 단가가 낮았다고 한다. 그 때 토니 블레어의 개입 덕에 큰 개선을 했고 이후 제이미 올리버 MBE를 수여받았다. 제이미 올리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요리사인 그가 성인병 예방과 급사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학교 급식에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이자."는 상식선의 운동을 펼치고 이를 위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영국 급식을 상대로는 방송 중에 울면서 노력했어도 제대로 안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사 페인(Martha Payne)이라는 9살짜리 꼬마가 자신의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에 대해 신랄하게 평점을 매겨 비판하는 글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포스팅이 반 년만에 300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이전 급식 개혁 운동을 주도했던 제이미 올리버의 격려 멘트까지 받았다. #

이 때문에 자신들의 입장이 불리해진 현지 협의회가 "근면성실한 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부당한 모함이다"라며 급식에 대한 사진 촬영과 업로드를 금하고 탄압하자 영국 급식에 대해서 논란이 사회 문제로 크게 불거져서 급식 개혁에 대한 불길이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2012년 6월 14일, # #

결국 제이미 올리버의 이러한 노력이 2005년 영국 총선의 주요 화제로까지 진화하여 영국 정부로 하여금 아이들의 급식 영양권을 지키기 위하도록 아이들의 급식신탁(Children's Food Trust)이라는 비정부공공기관까지 만들었고 2014년 9월부터 영국 모든 학교의 유치원생들은 무상으로 '따뜻한' 급식(free hot meal at lunchtime)을 제공 받게 되었다. 부총리인 닉 클레그도 적극적으로 나서 모든 유아들에게 인당 2.30 파운드를 급식비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모든 어린이들이 무상급식을 제공받게 되었다. 영국의 교사노조는 여전히 영국에서 나머지 모든 학생들이 무상급식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며 영국 노동당에서는 이를 정책 과제로 삼아 진행 중이다.

사실 이건 공립학교뿐 아니라 심지어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년 학비가 12,000 ~ 15,000 파운드(당시 환율로 2,400~3,000만 원)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식사는 무척이나 부실해서 특히 저녁 식사는 손바닥 반 크기의 조그만 파이와 삶은 꼬마 감자들 정도가 전부인 경우가 대다수이고 거기에 잘 나와봤자 고작 식빵 몇 장과 맛이 없는 샐러드, 차가운 파스타 정도를 추가해 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동양권 유학생들은 방학만 끝나면 라면들을 산더미 같이 싸들고 와서 저녁 대신 라면을 먹곤 했고 용돈을 많이 받는 학생들은 저녁마다 중국 요리 커리, 케밥 등을 배달시켜 먹곤 했다. 너무 음식들이 부실해서 음식을 떠주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자신들도 어쩔 수 없다며 학생 한 명당 배당 받는 일일 식비가 50p라고 하였다.

당시 환율로 1천원 정도인데 아무리 20여 년 전이라지만 영국 물가에서 하루 세 끼에 1천 원[107]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만들기 어렵다. 방학을 제외하면 1년에 약 7개월 정도 학교 기숙사에 머무니 1년에 식비로 학생 1인당 105파운드가 투입되는 셈인데 비율로 따지면 학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학교에서 학생들의 식사를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7. 한국에서의 영국 요리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영국 요리를 처음 접한 것은 보통 거문도 점령 사건 당시로 추정한다. 당시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거문도 주민들에게 선물로 음식을 주거나 작업을 위해 주민들을 고용하고 대가로 식료품 등을 지급하였는데 이 때 영국 음식을 주민들이 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6.25 전쟁 이후 한국이 서구화되면서 받아들인 로스트 비프 스테이크 식빵, 샌드위치는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영국 요리고, 다이제, 쇼트브레드 비스킷 등을 통해 유입된 비스킷, 파운드 케이크, 스펀지케이크, 스콘 등 디저트도 영국 요리의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미국을 거쳐 양식을 접한 한국인들에게 있어 세계화된 이런 메뉴들을 '영국의 전통 요리'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실상 많지 않고, 전세계적인 영국 요리 혐오 밈에 유학생들과 여행객들의 불쾌함을 겪은 증언이 더해져 본토의 영국 요리는 맛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영국 요리의 악명은 의외로 한국이 매우 가난하던 1968년, 1971년 대한민국 신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영국 요리는 맛없기로 유명하다"는 기사. 1970년대엔 아직 가난해서[108] 많이 먹지 못하는 세대였던 데다 레스토랑이나 경양식 집들은 웬만한 중산층 가정조차도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나 기웃거릴까 말까 할 정도로 문턱이 높았던지라,[109] 많은 한국인들은 서양 요리에 대해 "뭔가 근사한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110] 그런데도 저 기사에서는 당시 한국 입장에선 까마득한 차이가 나던 선진국인 영국 요리를 혹평한 것이다. 대놓고 "영국에선 요리사가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는 마무리까지 압권.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 등 영국인 스타 셰프들의 유튜브로 인해 칠면조 구이, 비프 웰링턴, 훈제 연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등 나름 인지도를 얻고 있긴 하다. 그러나 영국 여행이 보편화된 현대까지도 본토 피시 앤 칩스와 샌드위치가 맛없다던가, 아침식사(브렉퍼스트)가 그나마 제일 맛있다던가, 영국식보다 커리를 먹으러 가는 편이 낫다던가 등등의 소수의 파인 다이닝을 제외한 본토 식사문화에서의 안 좋은 경험은 여전히 전해져 오고 있기에 요리에 관심이 많은 현대 한국인들에게 있어 스타 셰프는 많으면서도 정작 일반적인 식사는 형편없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현지 영국식 요리를 주력으로 하는 식당은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마이너하다는 프랑스 요리 레스토랑보다도 더 적다. 물론 셰퍼드 파이, 비프 웰링턴, 뱅어스 앤 매시같은 정통 영국 요리를 잘 하는 곳도 없진 않으나, 그런 곳은 서울에서 직접 찾아서 가야 하는 정도로 마이너하다.

식사류 이외에는 호텔이나 전문 카페에서 영국식 애프터눈 티를 판매하는 곳이 제법 있으며 술집 중에 영국식 맥주나 위스키와 함께 안주 피쉬 앤드 칩스와 같은 영국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기존의 호프집에 밀려 별 인기는 없다.

8. 여담

심지어 잉글랜드인 본인들도 잉글랜드 음식은 세계 최악이라고 종종 말하곤 한다. 게다가 잉글랜드 음식은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방적이기까지 하다. 최근에 내가 읽은 프랑스 사람이 쓴 어떤 책에선 이런 말까지 본 적이 있다; "잉글랜드 요리 중 가장 좋은 건 당연히 그냥 프랑스 음식을 그대로 요리해 낸 것이죠."
조지 오웰, 영국 음식을 위한 변명
영국 요리에 대한 악명은 1940년대부터 널리 퍼져 있던 모양인지 저명한 작가인 조지 오웰은 "영국 요리에 대한 옹호"로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 요리가 상당히 맛있는 음식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참고로 조지 오웰은 영국 정부와 문화원으로부터 영국의 모든 것을 홍보하는 선전 잡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받을 만큼 영국 국민주의를 맹신했다.[111]

'영국 문화'가 아니라 '향토 문화'임에 유의하자. 이 시기인 20세기 초중반 외부인들이 인식하는 '영국 문화'는 젠트리 부르주아들의 피상적인 상류층 고급 문화나 반대로 축구 난동판, 싸구려 개판인 산업화 사회의 음식 같은 양극단을 의미했기에 이를 한탄한 것이다.

위 글도 '알고 보면 잉글랜드에도 찾아보면 토속적이고 아기자기한 향토 문화가 많다'는 내용이다. 즉, 위 에세이는 객관적으로 잉글랜드 음식 자체가 훌륭하다는 주장보단 알고 찾아보면 잉글랜드에도 여전히 토속적인 맛이 느껴지는 좋은 음식점이 꽤 있다는 소극적 옹호론에 가깝다.


[1] 주로 로스트 비프를 뜻한다. [2]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커리를 이용한 요리가 있고 광동 요리도 많이 먹으며 홍콩, 싱가포르에서는 차와 빵이 반드시 들어간 영국식 아침을 먹는다. [3] 다른 유럽 국가들은 샐러드가 기본으로 제공되지만 영국만 추가로 돈 내고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소 요리 문화가 발달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4] 북해의 거친 파도와 흐린 날씨도 어업의 발달을 저해했다. [5]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접하는 해산물 요리라고는 피쉬 앤드 칩스와 피쉬핑거스 밖에는 없다. 둘 다 단순히 생선살을 튀긴 요리이다. [6] 요리를 하긴 했는데 이건 여유 있는 이들만 했고 대부분 시간과 돈이 없어 삶은 감자 한 알 먹고 잠을 잤다. [7] 일본은 불교는 표면상의 이유고 농경 사회의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던 소를 도축해 먹지 못하도록 한 정책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조선도 소는 중요한 노동력이라 귀한 음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흔히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게 조선시대는 일 년에 소를 60만마리 까지 기를 정도로 소고기를 많이 먹었다. 물론 노동력으로 많이 중요했던 건 사실이라 요즘처럼 막 먹지는 않았지만. [8] 다만 이런 인식과는 달리 중세에는 생선도 곧잘 먹었던 거 같다. 당시엔 생선과 해산물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순절의 식단에도 포함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해산물 어업이 주요 산업이었고, 때문에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유적에서도 바닷고기의 뼈가 발견되었다. 민물고기 어업 중에도 상업적인 목적의 것이 있었지만, 주로 소년들이 지역 개울에서 고기를 잡도록 보내졌다. 해안 마을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해변에서 조개를 주워왔다. [9] 다만 랍스터, 닭새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영국 본토에서는 취급도 잘 안 했고 북아메리카 호주 식민지 해안 지역에서 죄수들 식량용으로 썼다. 미국과 캐나다 동부 해안에선 랍스터가 너무 많이 잡혀서 이걸 너무 많이 먹다 보니 싫어하는 사람도 엄청 많았다. 랍스터가 지금처럼 고급 식재료 취급받기 시작한 건 프랑스식, 캐나다식, 호주식 랍스터 조리법이 퍼지면서부터다. [10] 이 때문에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에서는 '바로 옆에 해산물이 넘쳐나는 바다를 두고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농담도 나올 정도다. [11] 비슷한 경우가 바로 프랑스 요리다. 프랑스 요리에서는 국물이 있는 요리를 빈자들의 요리라고 여겨서 최하위로 치지만 와인이 들어간다면 그 와인의 질만큼 요리의 레벨도 같이 올라가는 편인데 이는 양을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수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와인을 주재료에 배어들게 하고 숙성시키기 위하여 쓰기 때문이다. [12] 유럽 문화권에서 '양을 불리기 위한' 국물 요리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는 게임 프로스트펑크 식량 적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식량이 부족할 때 양을 불리기 위해 수프를 끓이면 건강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매번 배식할 때마다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는 데 비해 톱밥을 넣어 양을 불리면 먹은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짐에도 불구하고 배식 자체로는 불만이 쌓이지 않는다. 물론 밸런스 조절을 위한 게임적 리얼리티지만 '물을 부어 양을 불린 요리'에 대한 인식이 '양을 불리기 위해 못 먹을 것을 섞은 음식'과도 비교될 정도임을 게임과 같은 대중 매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3] 물론 지금의 영국 땅이 모두 이랬던 것은 아니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보다 기후나 토지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잉글랜드인들보다 생활 수준이 낮았다. [14] 이때의 메뉴들을 살펴보면 소고기, 송아지 고기, 양고기, 새끼양고기, 돼지고기, 토끼, 계란, 버터, 우유, 크림, 후추, 식초, 정향, 메이스, 설탕, 대추야자, 꿀 등이 있었다. [15] 어떻게 보면 영국의 작가인 톨킨이 창조한 종족인 호빗족이 이런 중세 잉글랜드인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16] 산업 혁명 이전의 영국 요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미국 요리 문서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영국 정착민들이 가져온 식문화가 신대륙의 풍족한 물산 덕분에 유지된 미국과 다르게 영국 본토에서는 산업혁명, 전쟁 이후의 배급제로 인해 가정식이 그냥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17] 약 28mL [18] 지금도 영국에서 여우 사냥을 할 때는 첫 사냥감을 잡은 사람의 얼굴에 피를 살짝 묻히는 의식을 한다. [19]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근세 사회에서 사슴 내장이나 고기가 저급한 음식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사슴은 영주 소유인 사냥터에서만 잡을 수 있었으므로 평민들은 맛보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고 오히려 희귀한 고급 식재료에 가까웠다. 유럽 귀족들은 크림으로 요리한 사슴 내장이나 사슴 고기 요리들을 별미로 높게 취급하며 소비하였다. [20] 어찌됐든 옛날 영국에서 영주의 만찬에 초대 받을 정도면 (영주가 어느정도 지위를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영주의 가신 계급인 바바소르(vavasor) 정도는 돼야 했다. 평민 기준이라면 영주에게 초대 받아 영주가 주는 음식을 먹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지배층들 사이에선 영주가 누구에게 어떤 음식을 배분했는지에 따라 알력다툼이 있었다. [21] 닭고기, 칠면조 고기, 오리고기 우유, 치즈, 버터, 크림 등 유제품 [22] 연간 약 93kg이므로 대략 하루에 250g 정도다. 그러니까 고깃집에 가면 나오는 쇠고기 1인분보다 좀 더 많은 양을 1년 365일 내내 먹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저기에 나오는 급양 기준은 뼈와 부산물을 포함한 무게이므로 뻥튀기된 면이 좀 있고 당시엔 보급 계통의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고기의 절반이 뼈에 그나마 나머지도 오랫동안 조리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부위들이 대다수였다. 하여간 고기를 먹어야 강해지고 야채를 먹으면 약해진다는 믿음 때문에 영국 해군은 채소를 기피했고 이로 인해 괴혈병이 유행했다는 설이 있다. [23]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24] 우유, 치즈, 버터 등의 유제품과 닭고기, 칠면조 고기, 오리고기다. [25] 우간다 이디 아민을 피해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다. 프리티 파텔도 이런 케이스다. 케냐, 탄자니아에서도 인도계들이 이주했는데 리시 수낙이나 수엘라 브레이버먼 역시 마찬가지다. [26] 달걀, 베이컨, 버터, 치즈, 고기 통조림 고기, 조리용 지방, 홍차, 마가린, 설탕으로 구성된다. [27] 특히 미식으로 유명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튀르키예. 영국과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 요리를 특히 더 비웃었다. 현대 영국 요리 밈의 근원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에게서 기원한다. [28] 로스트 디너, 스테이크, 비프 웰링턴 [29] 애프터눈 티, 쇼트브레드 비스킷, 케이크, 식빵 [30] 약 120g.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슬라이스햄 기준으로 4장 정도 분량이다. [31] 약 450g. 시판되는 간 고기 한 팩 정도 양이다. [32] 약 60g. 시판 버터 바의 절반 정도 양이다. [33] 여섯 컵 정도. 1파인트짜리 병 하나가 약 두 컵 정도 양이다. [34] 쌍끌이 어선이나 일반 트롤어선의 저인망에 칼날을 달아 바다 바닥을 끌고 다니며 설치식 기뢰의 와이어를 끊었다. 떠오른 기뢰는 전문 소해함이 처리했다. [35]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일대 [36] '영국 식당'(브리티시 레스토랑 British Restaurant)이라고 한다. 일반명사 같지만 고유명사다. [37] 최대 9페니의 값을 치르면 됐다. 사설식당들은 영국 정부가 가격을 강하게 통제했으나 기본적으로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최대 5실링까지 가격을 매기는 것을 허가했다. [38] 미국식 젤리 푸딩이 아니라 영국식 푸딩을 의미한다. 이건 오히려 식사에 가깝다. [39]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를 발라낸 뒤, 소금과 파슬리, 그리고 후추로 양념하여 오븐에 구워낸다. 진미로 취급받는 알집이나 이리는 따로 잠시 빼 두었다가 양념하기 직전에 청어에 도로 집어넣어 함께 조리한다. [40] 2차 대전 당시 런던의 유서 깊은 호텔인 사보이(Savoy) 호텔에서 만들었다. 이름은 당시 영국 식품부 장관이던 울턴 백작 프레더릭 마커스 경(Frederick Marquis)에서 따왔다. 영국 식품부에서 배포한 공식적인 레시피에 따르면 감자, 콜리플라워, 루타바가, 당근, 그리고 양파를 푹 익힌 후 파이 반죽에 넣어 구워낸다. 먹을 때는 그레이비 소스와 함께 먹는다. # 울턴 경 본인도 공공식당 시찰 도중 자신의 이름을 딴 이 파이를 먹었던 적이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전시 요리 중 하나로 손꼽히며,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영국인들의 식탁에서 퇴출되었다. [41] Oslofrokosten. 노르웨이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륙식 아침식사의 일종이다. 버터 마가린 바른 호밀빵 몇 조각과 우유 작은 병 하나, 치즈 몇 조각, 사과 오렌지 등의 과일 몇 알이나 생 당근 등의 채소로 구성된다. 삶은 채소를 곁들이기도 하며 가을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식사 후에 먹을 대구 간유로 만든 영양 보충제를 같이 주기도 했다. [42] 오슬로식 아침식사는 저렴하고 간편한 데다 단촐하지만 영양학적으로는 뭣 하나 빠지는 것 없이 균형잡힌 영양소를 공급하기 때문에 20세기 초 여러 나라들에서 무료 단체 배식, 특히 아이들을 위한 급식으로 도입했다. 원래 유럽의 아이들은 3분의 2가 저체중과 영양불균형에 시달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정부가 오슬로식 식단을 강제로 도입하면서부터는 체중이 전보다 25% 가량 느는 등 건강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1950년대 이후로는 각국이 학교 급식을 점심만 제공하도록 방침을 바꾸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유럽 대륙식 아침 식사 메뉴에 남긴 영향은 아직도 크다. # # [43] 디너(Dinner)는 일반적으로는 저녁을 의미하지만 영국에서는 하루 중 가장 든든하게 챙겨 먹는 점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44] 얼핏 슈트루델과 비슷하게 생긴 영국식 푸딩 또는 롤케익의 일종. 중간에 잼을 채워 넣었기에 잼 롤리폴리라고 불린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를 즐기는 영국인들은 시체의 팔(Dead man's arm) 내지는 시체의 다리(Dead man's leg)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창백한 원통에 붉고 푸른 잼이 비어져 나오는 꼴이 영락없는 살해당한 사람의 피투성이 팔 같이 생겨서다. 다만 실제로는 아주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이렇게 생겼다. [45] 웨일스식 빵의 일종으로, 치즈를 올려 구운 빵이다. 이렇게 생겼다. [46] 패밀리 레스토랑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칼집 내어 구운 감자. [47] 콘월 지방에서 먹는 파이의 일종. [48] 생선을 이용해 만든 경단을 튀긴 요리. 영락없는 일본 생선까스 고로케처럼 생겼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조상에 해당한다. [49] 원문은 브레이징 한(Braised). [50] 영국식 푸딩의 일종. 푸딩이라곤 하지만, 영국에서는 미국이나 일본식 젤리 디저트가 아니라 일종의 한끼 식사나 빵을 의미한다. 마카로니, 밀가루, 그리고 체다 치즈를 틀에 넣어 오븐에 구워 만든다. 말로만 들어서는 감이 잘 안 오지만 얼핏 보면 한국 횟집에서 스끼다시로 자주 나오는 맥 앤 치즈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생겼다. 이렇게 생겼다. [51] 과일을 설탕과 함께 푹 끓여 만든 디저트로, 러시아와 독일의 컴포트(Kompot)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단 과일 건더기가 메인이다. 이렇게 생겼다. [52] 멸치의 일종인 앤초비를 구운 빵에 올려 먹는 요리. 이렇게 생겼다. [53] 말 그대로 통조림에 담은 소시지로, 영미권에서는 가장 하급품 육류로 친다. 이렇게 생겼다. [54] 남인도 요리로, 커리의 일종이다. 렌틸콩과 양고기 또는 닭고기로 만든다. 영국에서 최초로 유행한 커리 중 하나다. [55] 리솔레는 남는 빵부스러기들을 모아 굽거나 튀긴 요리를 뜻한다. 범유럽적으로 먹는 잔반 처리용 음식이다. 연어 리솔레는 여기에 연어살을 섞어 넣은 것이다. 생긴 것은 영락없는 동그랑땡이나 고로케다. 이렇게 생겼다. 통조림 리솔레의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일반적인 리솔레로 대체한다. [56] 크림 당근은 말 그대로 크림 넣은 로 볶아낸 당근이다. 이렇게 생겼다. 루타바가 순무와 비슷한 채소의 일종이며 하급 구황작물로 쓰인다. 다만 북유럽에서는 기후 문제로 인해 자주 먹는다. 스웨덴 순무라고도 한다. [57] 남은 빵과 버터를 이용해 만든 푸딩으로, 역시 잔반처리용 음식이다. 많은 영국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겼다. [58] 감자칩은 영국에서 개발된 요리이다. 오늘날에는 과자로 먹지만 원래는 요리였다. [59] 내장을 손질하고 반 갈라 염장한 후 훈제한 청어. 버터를 발라 구운 후 스크램블 에그, 토스트와 함께 먹는다. [60] 메뉴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로스트 디너 메뉴다. 과일 파이와 커스터드는 영국인들이 자주 먹는 디저트다. [61] 콜리플라워로 만든 그라탕. 프랑스 요리다. [62]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도 결혼을 앞두고 드레스를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할당된 배급 쿠폰을 모아야 했다. 물론 왕실에 대한 배급은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의 속성을 강하게 띄었다. # [63] 단, 독일인들은 1943년까지는 여타 유럽 점령지들과 동맹 국가들을 아주 가혹하게 착취하며 전쟁 이전과 같은 생활을 영위했다. 독일인들이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반 연합군이 독일 점령지들을 탈환하여 착취할 대상이 사라진 후부터다. 곧 이어진 연합국 점령기에 미국에서 대량의 원조 물자가 들어오면서부터 독일은 전쟁 이전의 삶을 곧 복구했다. [64] 잘 체감하지 못하는 사실인데, 당장 영국 본토는 유럽에서도 꽤나 북쪽에 있다. 그래서 독일에서도 가능한 와인 생산이 영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예시로 독일의 거의 북쪽 끝인 함부르크의 위도는 잉글랜드 중부의 리버풀, 맨체스터와 동위도다. [65] 2000년대에야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과 달리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라서 미식 문화 복귀가 더 쉬워 보였지만 자연 환경의 차이가 역설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66] 영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푸드 칼럼니스트. 각국의 전통 요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67]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스페인 요리, 포르투갈 요리, 그리스 요리, 튀르키예 요리 [68]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방글라데시 요리, 네팔 요리, 스리랑카 요리, 중화 요리, 말레이시아 요리, 싱가포르 요리가 인기를 끌었다. 일단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인도계 영국인 파키스탄계 영국인 대부분의 본적지인 펀자브, 구자라트, 델리 - 하리아나 지역 등 인도 북부 지역 요리가 인기를 얻었다. 중화 요리 광동 요리, 복건 요리 싱가포르 요리가 주를 이룬다. 이는 영국령 식민지에 널리 퍼져 있던 광동인 위주의 홍콩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의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69]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홍콩 싱가포르 등. [70] 고든 램지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제이미 올리버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 [71] 현대와 같이 춤추는 유흥업소로서의 클럽이 아닌 근세 젠트리들의 사교 클럽을 말한다. 프리메이슨이나 클럽 33이 대표적인 사교 클럽이다. [72] 물론 이 시기에도 비프 웰링턴, 로스트 디너, 칠면조 구이, 구운 치킨과 같은 육류 요리와 주류, 제과류, 홍차 종류는 높게 평가받았으나 이들은 거의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73] 구즈베리는 독일, 오스트리아, 북유럽에서 소스에 산미를 더할 때 많이 사용히며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자주 썼다. [74] 배급제 이후를 말한다. [75] 1960 ~ 2019. 남런던 출신의 요리사. 14세 때 암스테르담에서 요리 경력을 시작했다. 생전 많은 레스토랑을 영업하면서 현대 영국 요리의 위상 확립에 기여했으며 이 공으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마스터셰프 등에 출연한 스타 셰프이기도 했다. 2019년 두바이에서 사망했다. https://www.bbc.co.uk/news/entertainment-arts-50573348 [76] 주로 펀자브인과 신드인, 구자라트인이었다. 그 외에도 우간다, 동아프리카 피지등에서 식민지 중간관리자로 있던 인도인들 역시 독립 이후 현지인과의 갈등 때문에 영국으로 넘어와 요식업에 종사했다. [77]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국공내전이었지만 해협식민지의 독립,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축출 등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도 여러 이유로 인해 영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78] 이건 영국에서 일반적인 피시앤칩스 포장 방법이다. 가로 30cm 가량의 납작한 직사각형 포장 상자 또는 신문 같은 종이 고깔에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을 수북히 쌓아올린 뒤 위에 소스까지 흩뿌려 준다. 때문에 내용물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인다. 피시 앤 칩스 가게를 인수한 중국계 영국인들도 같은 포장지에 같은 방식으로 포장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외국인, 특히 중화요리라면 역사다리꼴 테이크아웃 박스에 개별포장된 것을 떠올리는 미국인들에게는 컬쳐 쇼크나 다름없어 영국식 중화요리는 또다른 인터넷 밈이 되었다. [79] 과거 고든 램지가 한국 요리에 대해 영국 요리와 비슷하다는 소감을 남긴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 요리도 화려하기보다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소박한 요리 문화에 기반하며 전쟁으로 많은 식문화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고 헤게모니를 장악한 타국에 의해 무시당하다가 현대 들어서 세계 요리계에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영국 요리와 아주 유사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꼈다. 물론 한국 요리는 영국만큼 심각한 식문화 파괴를 겪거나 악명을 얻지는 않았으므로 램지의 단순 비교성 평가에 대해 반발이 적지 않았으나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맥락을 따져보면 램지는 오히려 현대 한국 요리의 위상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80]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스페인 요리, 포르투갈 요리, 그리스 요리, 튀르키예 요리 [81]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네팔 요리 [82] 해외에서는 'tea break'라고도 쓰인다. [83] 주류 민족의 요리인 중화 요리 말레이 요리가 기본적인 일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홍콩의 중화 요리나 말레이시아의 말레이 요리에 영국 요리가 준 영향이 제법 크기는 하다. [84] 다만 일상식으로의 메뉴가 드물 뿐이지, 해당 국가/지역들에서 양식=영국식으로 통하며 양식을 기반으로 한 간편식에서는 영국 요리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한국에서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미국 요리가 일상식은 아니더라도 양식의 전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냉동식품이나 통조림 식품 등의 일상 간편식이 보급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85] 단, 빵을 자동으로 잘라주는 기계를 최초로 도입하여 공급한 것은 미국이 시초다. [86] 디너는 원래 "가장 풍족하게 먹는 식사"라는 뜻이며 과거에는 농경 국가이며 밤에는 어두워서 바로 자야 했으므로 점심을 가장 잘 먹었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디너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나중에 전기와 사교회 등이 발달하여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먹게 되어 저녁식사를 디너라고 부르게 되었다. [87]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총리.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지도자마저도 이런 소리를 했다. [88]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한 폴란드 망명 조종사들. [89] 이 양반은 일본인치고 딱히 보수적인 입맛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리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는 잘만 먹었고 튀르키예 요리는 '대체로 맞지 않았으나 그래도 먹을 만한 것은 있었다'고 쓴 바 있다. 정확히는 "향이 너무 강하여 한국 요리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평했다. 튀르키예 요리 그리스 요리와 겹치는 항목도 있는 걸로 보아 케바케인 듯하다. [90] 보통 운동선수들은 평상시 몸관리를 위해 거의 중세 수도자 수준의 음식을 먹지만 큰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는 보통 사기 진작을 위해 선수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나 홍보 차원에서 해당 올림픽 주최국의 음식 중 가장 호평받은 맛있는 음식이 나오기 마련이다. [91] 게르만이나 노르딕 문화권으로 갈수록 영국 음식에 대한 평가가 후해지는 경향이 있다. [92]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튀르키예, 키프로스, 그리스, 몰타 [93]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94] 요리법을 가장 먼저 배울 수 있는 곳은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어머니의 손맛'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정작 그 가정식의 조리법 전통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95] 이 중 고급 요리들은 주로 성공회를 믿었고 청교도적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왕족과 귀족들 위주로 발전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국의 청교도는 영국의 상공계층인 요먼과 젠트리에게 많이 퍼져 있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정치적인 영향력은 거의 상실했지만 경제,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끼쳤고 식문화도 마찬가지였다. [96] 사실 재료에 별다른 가공을 가하지 않고 먹는 풍조는 똑같은 섬나라인 일본에도 있지만 적어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기피하는 불교적 금욕주의 문화보단 귀족층을 중심으로 과시주의적인 면모가 메이지 유신 이후 발달한 덕택에 일식은 충분히 먹을 만하고 서양에도 맛있는 요리로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롤처럼 변형되어 알려진 요리도 있긴 하지만. [97] 참고로 이 음식들은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한 번쯤은 먹어봤을 '국민 요리'에 해당하지만 조리법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만드는 과정이 지나치게 간단하며 그런 만큼 그냥 혼자 집에서 한 끼 때우는 간식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영국인들도 손님을 대접하는 자리에서는 일절 내놓지 않는다. [98] 스팸을 김치에 싸서 먹어보라고 권유하는 것도 웃음거리가 될 정도다. [99] 오히려 프랑스 요리, 바인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쌀 바게트가 바인미의 빵으로 쓰이고 포토푀가 퍼에 영향을 끼쳤다. [100] 8.15 광복 이후에 명란젓(타라코), 김치, 고기구이(야키니쿠) 등이 건너가 매우 대중적인 음식이 되기는 했다. 고기 쪽에 한해서는 육식금지령 때문에 자체 고기요리가 없다시피 해서 비슷한 양상이 되기는 했다. [101] 굴라슈 등 동유럽 지역 음식이 독일어권에서 인기를 얻고 있고 케밥, 바클라바, 로쿰 튀르키예 요리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급식 할랄 푸드로 바꿀 만큼은 아니다. 1인당 돼지고기 소비 지역 1위~5위 중 덴마크를 빼면 독일, 오스트리아 독일어권 국가이다. 할랄 푸드로 바꿔도 큰 차이가 없는 영국과 다르다. [102] 물론 프랑스와 일본도 옛 식민지 요리들이 본토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말 그대로 인기를 끄는 정도지 아예 본토 식문화까지 잠식하는 정도는 아니다. [103] 당장 한국 요리만 봐도 김치, 나물 요리, 콩나물, 숙주나물, 탕평채 등으로 채소를 사실상 주식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 한 상 차렸을 때 김치와 나물은 밥, 국과 함께 반찬 가짓수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다.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스페인 요리, 포르투갈 요리, 그리스 요리, 튀르키예 요리 지중해권 유럽 요리들도 다양한 채소를 적극적으로 활용 및 섭취하고 있다. [104] 싱가포르 요리는 그 네 뿌리인 영국 요리, 중화권, 말레이, 인도 타밀 중 세 뿌리가 채소 요리에 강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국 요리 문화와 싱가포르의 여러 복잡한 사정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빈천한 채소 섭취와 과도한 육류 섭취를 보이고 있다. # [105] 당장 니더작센 요리를 보면 알 수 있듯 독일에서도 케일 등 양배추류를 삶아먹는 것이 전통적인 채소 섭취법이었다. 독일 하면 생각하는 요리도 채소류가 아닌 육류인 소세지이기도 하고. [106] 심지어 대처는 급식에서 우유를 뺐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다. [107] 이것도 당시 파운드당 2천 원의 환율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지금 환율로 치면 700원 정도이다. [108] 한국이 최빈국을 면하게 된 것도 1969년이고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절반을 넘기는 중진국에 진입한 것도 1977년이었다. [109] 애초에 짜장면도 졸업식용 음식으로 취급받았던 시절이다. [110] 당장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한지도 20년이 다 되가던 2020년대 초반에야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서양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이 잔존해 있던 마당인데, 하물며 한국이 최빈국 탈출 안팎 시기이던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에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은 그보다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111] 당시 상황을 설명한 BBC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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