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공군이 운용중인 전략 중폭격기인 B-52의 융단폭격 |
1. 개요
폭격( 爆 擊)은 공습(Air strike)의 한 방법으로, 비행중인 항공기가 폭탄이나 미사일로 지상을 공격하는 경우[1]를 말한다. 영어 bombardment는 국어 '폭격'과는 달리 지상에서의 포격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어휘가 항공기 등장 이전에 나왔기 때문.2. 상세
사진은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3번함 코럴 시(coral sea)의 F-4 팬텀 II로, 수직미익의 욱일기 비슷한 마크는 미 해군 비행대대 선다우너즈의 상징이다.
항공폭탄은 포병이 사용하는 포탄과 비교했을 때 파괴력이 훨씬 강력하다. 항공폭탄은 공중에서 투하 후 지면에 닿아 충격을 받거나 수분 뒤 자동으로 기폭되는 구조라 포탄처럼 포신 내의 폭압을 견딜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없고, 로켓이나 미사일처럼 추진장약을 넣을 필요도 없어서 무게 대비 폭약의 비율이 훨씬 높아 같은 크기, 같은 무게로 훨씬 강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다, 한 번 에너지를 줘서 날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엔진 달린 항공기가 계속 들고 다닐 수 있어 대형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전함의 16인치 함포에서 발사하는 해안포격용 고폭탄은 발사압을 견디기 위해 외피가 두꺼워서 내부 공간이 적으므로 작약이 겨우 150파운드(70킬로그램 정도) 실려 있고 철갑유탄은 10kg 수준인데, 동시대의 전투기가 싣고 다니던 1000파운드 항공폭탄(약500kg)의 작약량은 200킬로그램이 넘는다.
현대에도 항공폭탄의 작약량은 전체 중량의 절반 정도. 또, 항속거리 수백km를 가볍게 넘기는 항공기가 투발수단이므로 포탄이 닿지 않는 종심 깊숙이까지 타격이 가능하다. 이에 대응되는 포병용 포탄의 장점은 오랜 시간 동안 원하는 지역을 자유자재로 변경하며 화력의 지속투사가 가능하다는 점과, 제작/유지보수/출격 등 모든 부분에서 돈을 엄청나게 먹어대는 비싼 장비인 항공기를 이용하지 않아 값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점, 그리고 일단 쏜 포탄은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단어 모양도 이미지도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부분에서 강점을 가지는 셈이다.
3. 항공기
폭격은 항공기가 지상을 공격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지만, 비행기가 한 공격이라도 기관총이나 기관포를 쏘거나 하는 건 '기총사격' 혹은 '기총소사'등으로 호칭되며, 폭격이란 건 일단 폭탄이 떨어져 터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터지지 않는 물건을 떨어트리는 사례도 있기는 하다.4. 폭격 방식
4.1. 비행별
4.1.1. 수평폭격
Horizontal BombingB-29
표적을 향해 수평으로 날아가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 문제는 물리시간에 한 번 쯤은 예제 문제로 나왔을, '고도 얼마 비행기에서 짐을 떨어트리면 몇 미터 이동한 지점에 떨어지는가?'라는 것의 현실 버전 문제에 직면한다. 즉 폭탄을 떨어트린다고 투하한 지점 수직 아래로 떨어지는게 아니라, 실제로는 폭격기가 속도를 내며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떨어진 폭탄은 관성에 의해 포물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다. 게다가 교과서의 예제 문제들과는 달리, 현실의 폭탄은 공기저항과, 측풍에 의해서 단순 계산식보다 적은 거리를 이동한다. 그래도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구현하기 쉽다[2]는 건 무시못할 장점이어서, 수평폭격은 최초의 폭격기들부터 현재까지 쓰고 있는 방식이다.
초반에는 조종사 내지 폭격수의 감에 의존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기계식 계산기가 등장해 고도, 속도 등을 종합하여 투하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표적에 명중하게 되었다. 2차대전 시기 미국은 자이로스코프와 조준기를 결합해 폭격항정에 들어가면 폭격수의 조준에 맞춰 폭격기를 움직이는 노든 폭격조준기를 개발해 '쓰레기통도 맞출 수 있다'라고 자랑하며 유럽전선에 뛰어들었다가 맑은 날이 거의 없는 유럽 날씨에 넉다운. 개발자인 노든은 이 조준기에 대해서 6000미터 상공에서 접시를 맞출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영국 폭격기 사령관 아서 해리스는 이에 대해서 일단 그릇을 봐야 맞추든 말든 할 것이라고 평가했는데 유럽의 지랄맞는 기상을 생각하면 뼈있는 지적이었다. 어쨌건 미국은 이 노던 조준기를 어찌나 애지중지했는지 폭격기가 추락하면 가장 먼저 파괴해야 하는 장비였고, 기지에서는 아예 분리해서 보관하며, 폭격기를 버릴 편도 폭격 계획이었던 둘리틀 폭격대는 떼어내고 구형 조준기를 실었을 정도이다. 연합군은 지속적으로 연구를 계속한 끝에 전쟁 중반기에는 레이더로 지상 지형을 포착하는 기술까지 개발해서 아래에 뭐가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수준까지는 도달했다.(영국의 H2S, 미국의 H2X)
다만 노든 폭격조준기 자체는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경이적인 수준이긴 했다. 노든 폭격조준기가 사용된 가장 유명한 사례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 에놀라 게이에 탑승하고 있던 폭격수 토머스 페러비 소령[3]은 노든 폭격조준기를 이용해 고도 9,300미터의 성층권에서 리틀보이를 투하했는데, 이 원자폭탄은 목표였던 아이오이 다리에서 불과 240m 빗나가 시마병원건물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이정도면 흔히 말하듯이 높은 건물 옥상에서 공을 떨어트려 지상의 작은 바구니에 집어넣는 것 이상의 정밀도라 할 수 있다.
현재는 레이더나 기타 센서로 표적을 조준한 다음 폭격기를 해당방향으로 적절하게 비행만 시키면 컴퓨터가 알아서 폭탄 투하 시점을 계산, 자동으로 폭탄을 투하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수평폭격 명중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비유도 폭탄을 쓸 경우 측풍등의 영향은 여전히 어쩔 수 없으므로 현대전에서 수평폭격을 하는 경우는 저고도에서 폭격을 하는 경우나, 혹은 대형 폭격기로 밑에 설명될 융단폭격을 가하는 정도 뿐이다. 급강하 폭격에 비하면 대형 폭격기로도 쉽게 할 수 있는 폭격 방식이며, 위험한 적 대공포 근처에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어뢰를 투하할 때도 수평폭격방식을 쓰지만, 어뢰의 특성과 명중률 때문에 일반적인 수평폭격과는 좀 다르게 진행된다. 이는 뇌격기 항목 참조.
4.1.2. 급강하 폭격
Dive Bombing대략 2000m 이상 고도까지 상승한 후 표적을 향해 일반적으로 45도에서 60도 정도의 각도로 급강하하면서 폭탄을 떨구는 폭격 방식. 보통 매우 낮은 고도까지 내려와서 폭격을 가한 후, 지면에 충돌하지 않기 위해 다시 급상승을 해야 하므로 움직임이 둔한 대형 폭격기로는 어려운 폭격 방식이며, 소형 경폭격기나 전투기급의 전폭기, 혹은 이런 폭격을 전문적으로 하는 급강하폭격기들이 쓰는 폭격 방식이다.
표적을 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접근할 수 있으므로 별도의 폭격수가 없는 1인승 소형 항공기로도 폭격을 할 수 있고, 급강하를 하면 평소보다 속도가 더 붙는 만큼 투하된 이후 폭탄 역시 속도가 더 붙은 상태로 표적에 도달하므로 측풍의 영향을 덜 받고 더 빨리 표적에 도달하여 명중률이 높아진다. 물론 무엇보다도 표적에 가까이 붙어서 투하하기에 명중률이 높아지지만...
대신 급강하 폭격을 할 수 있는 폭격기/전폭기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으므로 한 번 급강하에 투하할 수 있는 폭탄의 양은 1발, 많아야 2, 3발 정도가 고작이므로 여러 표적을 공격할 때는 다수의 항공기가 동시 다발적으로 급강하 폭격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체가 적의 대공포화를 뚫고 돌진해야하니 피해가 크다. 하지만 전술한대로 정확도가 높은 폭격방식이며, 2차세계대전에서 특히나 전차나 기갑병들이 밀집한 지역에 큰 효과를 보였다. 태평양 전쟁에서도 전함이나 항공모함같은 군함의 가장 대표적인 약점인 갑판이나 함교, 함포 등에 폭탄을 명중시켜서 큰 피해를 입히고 운 좋으면 탄약고나 어뢰의 유폭등으로 해당 적 함을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어서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높은 전과를 이룩하기도 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러한 급강하 폭격만 전문으로 하는 독일의 Ju 87나 미국의 SBD 돈틀리스, SB2C 헬다이버 같은 급강하폭격기도 개발되었다.
현대전에서는 공대지 미사일과 유도폭탄이라는 대체재가 있어서 입지가 줄어들었으나, 그게 보통 비싼게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여러 전폭기들이 비유도 폭탄을 이용하여 적 지상군을 공격할 때 사용하긴 한다. 2차대전 당시의 70~80도 각의 급격한 강하는 하지 않고, 45도 미만의 얕은 각도로 파고들며 폭격한다. 고속 제트전폭기 특성상 고각 급강하가 훨씬 위험해지기도 했고, 정밀화된 폭격 조준 컴퓨터와 그 결과를 HUD에 띄워주는 시스템의 조합으로 인해 각이 얕아도 옛날의 급강하폭격 이상으로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기 때문. 다만 맨패즈, 자주대공포 등 저고도 방공망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급강하 폭격하겠다고 잘못 저고도로 내려갔다간 되려 전폭기가 격추당할 수 있다.
지형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도 있다. 표적이 산의 후사면에 있는 경우, 지형 문제로 애초부터 공격할 각이 아예 안나오거나 연료 문제로 산악지형을 우회하기 어려울 시[4] 수직 급강하 폭격이 쓰인다. 일례로 체첸 전쟁 당시 산악지형 뒤에 체첸군 탄약고가 숨어있었는데, 그걸 공격할 각이 나오지 않자 Ka-50 공격헬기가 로켓을 사용, 고각으로 급강하 폭격을 날려 기어이 유폭시킨 적이 있다.
4.1.3. 로프트 폭격(토스 폭격)
Loft Bombing / Toss BombingA-5 공격기의 폭탄창. 엔진 배기구 부분에 있다.
A-5 공격기
이것은 급강하 폭격과 반대로 전폭기가 급상승하면서 폭탄을 위로 집어 던진다는 느낌으로 하는 폭격 방식이다. 이는 수평 폭격이나 급강하 폭격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표적에다 폭탄을 '내던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당연히 수평폭격방식보다도 명중률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표적 근처에 방공망이 두터워서 접근할 엄두가 안난다거나, 혹은 던질 폭탄이 핵폭탄이어서 내가 그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폭탄이 떨어지는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경우 이 폭격 방식을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핵 투발 전용인 A-5 초음속 공격기가 이 방식을 쓰기 위해 폭탄창을 동체 뒤에 달았다.
수평폭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전폭기들은 컴퓨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여기에 정밀폭격용 유도폭탄을 결합하면 먼 거리에서 안전하게 폭탄을 투하하면서도 꽤 높은 명중률을 얻을 수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진행 과정에서 러시아군, 우크라이나군 양측 공군 모두 공격기와 헬기전력을 동원해 무유도 로켓포드로 로프팅을 하고있다. 쉽게 말하자면, 항공기를 곡사포로 쓰는 중이다.
4.2. 투하 형태 별
4.2.1. 융단폭격
Carpet BombingB-17의 폭격실 내부에서 촬영한 융단폭격 영상
일반 폭탄을 수평폭격할 때 나오는 낮은 명중률을 보충하기 위해 대량의 폭탄을 폭격지역 전체에 광범위하게 투하해서 확률에 의해 목표물이 파괴될 확률을 높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폭격방식. 부수적으로 적군의 사기 저하도 가져올 수 있다. 이후 광범위한 면적에 퍼진 목표나 군수시설, 가옥밀집지역등을 공격하는 전략폭격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4.2.2. 정밀폭격
Precision Bombing정밀 폭격을 당한 영상.
현대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폭격 방식. 유도기능이 붙은 유도폭탄[5] 등을 이용하여 표적을 직격탄으로 공격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유도폭탄은 비유도 폭탄에 비하면 가격이 비싸지만 총비용 측면에서는 도리어 정밀유도 폭탄이 싸게 먹히는 경우도 많다.
즉 표적이 대공포 등으로 보호를 받고 있어 저고도 폭격이나 급강하 폭격이 어렵고, 그래서 조종사의 목숨을 담보로 폭격을 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대량의 폭격기를 출격시켜 융단폭격으로 일대를 아예 뒤집어엎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밀폭탄 한두 발로 깔끔하게 표적만 파괴하는 게 전체 비용이나 위험감수 측면에서 더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주된 적이 테러집단이 되고 시가지에 화력지원을 할 일이 많아지면서 민간인에 대한 불필요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폭탄 자체의 위력을 약하게 하는 대신 표적에 대한 명중률은 높이는 경우도 왕왕 있다. SDB가 그런 경우인데, 크기를 줄이고 외피 소재를 개선하여 파편이 멀리 튀지 않도록 하여 위력이 부족하지만 정밀한 센서와 유도장치를 이용해 정확하게 표적만을 타격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폭탄 자체가 작고 가벼우므로 소형 전폭기에도 다수의 폭탄을 탑재하여 한 번 출격에 다수의 표적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하다.[6]
정밀폭격을 하려면 폭탄값이 비싼 것은 사실이다. 폭탄 자체도 그렇지만 이 폭탄에게 표적을 정확히 지정해주려면 센서류도 정확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뛰어난 정찰자산이 필요하기도 하다. 최근 폭격오차가 십수m 수준으로 적당히 명중률이 높으면서, 가격도 몇천만원대로 적당히 싼(보통 레이저 유도폭탄 값도 1, 2억원 가량 한다) JDAM 같은 유도폭탄, 심지어 W-CMD[7]류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가격 역시 결국 비싸므로 현대에도 많은 전폭기들은 비유도폭탄으로 무장하고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은 정밀 폭격에도 오차가 있다는 건데 군에서는 2km정도의 오차는 잘 맞은것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8] 전자장비류의 발달로 많이 개선되어, 최신 타겟팅 포드 등을 장비한 전폭기는 이 오차, 즉 CEP 수치가 많이 나아졌다.
4.2.3. 스킵 바밍(skip bombing)
미 육군 항공대가 스킵 바밍을 연습하는 영상.
주로 당한 일본식 명칭은 반도폭격(反跳爆撃). 물수제비 폭격이라고도 하며,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기술이기도 해서 확정된 한국어 번역이 없다.
저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해 물수제비를 뜨듯이 폭탄이 수면을 튕기면서 달려가 함선 측면을 공격하는 폭격 방식. 폭탄은 어뢰보다 저렴하며 위력도 강하고 속도도 빠르고 명중율이 높은데다 상부구조물이 아닌 측면 또는 흘수선, 수면하에 파공을 만들어내므로 특히 경장갑함선에 치명적인 효과를 낸다. 게다가 대량으로 보유한 지상용 폭격기에 어뢰 관련 설비를 증설할 필요도 없고 기껏해야 한발씩 달고 날아가는 뇌격기에 비해 중형 폭격기라면 500파운드 폭탄을 2~4발 달고 날아가니 화망을 구성해 명중율을 높일 수 있는 등 장점이 많다.
그러나 요구사항을 보면 100미터 정도 거리에서 고도 60미터, 속도 320km/h로 500파운드 폭탄을 떨구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고 하며, 말하자면 적함에 100미터까지 접근해야 한다! 실전에서는 18미터까지 접근하기도 했다고. 아예 들이박을 기세로 접근해서 적 함선 위를 지나가야 하는 기술인데도 당시 워낙 개판이라 저속으로 안전하게 살살, 22.4인치 Mark 13 어뢰의 경우 110노트 이하의 속도 및 15m 이하의 높이에서만 투하 가능했던 미국 항공어뢰들보다는 나았다고. 물론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기술적으로도 어뢰와 로켓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어뢰 스캔들 이후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미군 항공어뢰는 1944년에 이르면 고도 730미터, 속도 410노트에서 떨어트려도 정상 작동하는데다 활공익을 달아 안전거리투사까지 가능해졌다. 기술발전을 통해 현대에도 살아남은 어뢰에 비하면 그 짧은 시간동안만 사용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사용한 것은 비스마르크해 해전이다. 미육군 제5항공군이 338기의 항공기를 동원해 일본군 수송선단의 수송선 8척, 구축함 8척을 사흘간 타격한 사건이라 해전이라 부르기도 좀 애매하다. 또한 일본군 함선의 경우에는 미해군 함선과 다르게 대공 사통능력이 썩 좋지 않아 좋은 성과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댐피어 해협의 비극'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진짜 비극은 바로 제대로 상황분석은 안하고 나중에 키스카 섬 철수 작전의 기적을 이뤄낸 명장인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을 비난한 군부다.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전에도 댐버스터 작전에서 물 위를 튕기는 폭탄을 사용한 바 있는데, 이건 전용 폭탄을 만들고 벨트로 회전까지 주어 투하한 특수목적 장비인지라 skip bombing의 범주에는 들어가겠지만 뭔가 다른 듯하다. # 영국 공군은 이 댐버스터 작전으로 루르 공업지대에 전력과 용수를 공급하던 댐을 파괴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지진폭탄이라는, 땅속 깊이 박힌 상태로 터져서 건물의 토대부터 박살내버리는 흉악한 물건을 개발해서는 쏠쏠하게 써먹는다.
4.3. 표적별
4.3.1. 전술 폭격
전술적인 목적을 위하여, 바로 코앞의 적 진지나 아군이 공격준비를 하는 가까운 적 비행장, 적 대열 및 함정들을 상대로 하는 폭격 방식. 공격기의 로켓폭격등 대지공격이 여기에 들어간다.4.3.1.1. 근접항공지원(CAS)
전술 폭격과 공격대상이 겹치는 근접항공지원 역시 전술폭격의 범주로 해석할수도 있다. 다만 주의할점은 근접항공지원의 경우 보통 아군의 요청이 있었을때 그 대상에 대해 정밀폭격이나 급강하 폭격, 로켓폭격 등을 가하는 경우가 해당하며, 전술폭격처럼 아군의 요청 없이 타격하지는 않는다. 다만 근접항공지원을 하는 공격기들은 임무가 겹치는 만큼 대개 CAS요청이 없는 날에는 정비를 받거나, 정비필요가 없는날에는 훈련을 하던지, 정찰을 하던지 아니면 전술폭격기처럼 적 전방 비행장 및 진지에 대한 기습 전술폭격 임무를 뛰러간다.4.3.2. 전략 폭격
전략적인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전선 단위의 대규모 공세 전이나 적 종심, 후방 비행장, 군수/산업시설, 운수시설(철도, 항만 등)등등의 주요 목표에 대한 완전한 파괴와 더불어 적어도 한동안 사용할수 없도록 만들어 적이 보급에 차질을 빚게 하거나 적의 전략폭격 능력을 없애버리거나,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게 하거나, 항공지원을 받을수 없게 하는 등의 행동을 전략 폭격이라고 한다. 이때의 목표는 전술폭격과는 전혀 겹칠 일이 없으며, 비행거리도 전선 일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정도면 되는 전술폭격과는 달리 아군 비행장에서 필요하다면 폭탄량을 줄인다던지 해서라도 연료를 많이 싣고 적의 주요 식민지내의 공장이나 적국 본토, 경우에 따라서는 적국의 수도를 직접 때리러 가야 하는 만큼 엄청나게 길어져 버린다. 이로 인해 폭격기도 커져버리는 경우가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승무원의 피로도가 미친듯이 올라가는건 덤. 그리고 이걸 호위하려면 전투기도 비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연료탑재량이 많고 공기저항을 최소화해 연비와 순항속도 체공시간을 다 잡던지 아니면 단순무식하게 쌍발 중대형 전투기던지 둘중 하나는 무조건 되어야 한다.다만 동북아와 같은 좁은 범위내에 다수의 국가가 집중된 곳에서는 전술 폭격기 수준의 항속거리로도 충분히 아측 수도에서 타국(동북아내 한정) 수도를 전략폭격 해버릴수 있기 때문에 굳이 폭격기의 체급이 3발~4발기 수준으로 클 필요 없이 쌍발만으로도 전략폭격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외 내용은 항목 참조.
5. 역사
5.1. 폭격의 시작
고타 G.IV
동력으로 비행하는 비행기가 출현한 후, 최초의 폭격은 최초의 공중전처럼 지나가던 비행기의 조종사가 직접 손으로 수류탄을 던진데 시작한다. 1911년 11월 1일, 타우베를 몰던 이탈리아군의 조종사 줄리오 가보티가 리비아 트리폴리 근처에 주둔하던 오스만군을 향해 수류탄 1.5kg를 투하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19세기 중반에 최초의 폭격이 시행되었다. 1848년 전 유럽을 휩쓴 대혁명의 와중에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열기구를 이용해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다만 기술력의 한계로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항공기의 성능이란 게 정말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대형 비행선이 더 탑재량이 뛰어날 정도였으며, 실제로 독일군은 대형 체펠린 비행선에 폭탄을 싣고 영국 런던을 폭격하는 대범한 작전을 세워 연합국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이러한 비행선은 성능이 향상된 전투기들의 등장으로 느리고 둔하며 거대한 목표물로 전락하였고, 후에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탈리아의 공군 전략가 줄리오 두헤는 폭격에 의한 피해를 눈여겨 보며 "앞으로 미래의 전쟁은 육군이 갈 필요도 없이 공군이 폭탄싣고 가서 폭탄으로 적 도시를 도배해 항복을 받아내는 방식이 될 것이다." 라고 예견한다. 실제로 걸프전같이 공군만으로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을 박살내버린 사례가 생기기도 하였다.
5.2. 세계 대전과 폭격
온 천지가 죽음, 죽음, 죽음이다. 일부는 석탄처럼 완전히 새까맣다. 일부는 마치 잠이라도 든 양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앞치마를 입은 여성들, 아이들을 데리고 전차에 앉아 있는 여성들, 그들은 방금 깜빡 잠이 든 것 같다. 일부 파편에 팔과 머리와 다리가 찔리고, 두개골이 박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노란 반점과 갈색 반점을 몸에 지닌 채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빨갛게 불타고 있었고 나는 거울을 달라고 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물집 덩어리였고 눈은 찢어진 구멍이었다...[9]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 마르그렛 프라이어의 증언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노란 반점과 갈색 반점을 몸에 지닌 채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빨갛게 불타고 있었고 나는 거울을 달라고 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물집 덩어리였고 눈은 찢어진 구멍이었다...[9]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 마르그렛 프라이어의 증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폭격기였던 고타 G.IV의 폭탄 탑재량은 최대 500 킬로그램이라는 처참한 수준이였다. 그라프 체펠린 같은 당시 비행선의 경우 60톤까지 적재 가능했지만, 덩치가 너무 커져버려서 이착륙과 운항, 정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듯 항공 기술 자체가 아직 원시적인 시대였기에 항공기의 군사적 이용은 다소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제2차 세계 대전에 들어서면서 항공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자, 폭격은 인류 전쟁 역사에서 매우 끔찍한 상처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총력전이라는 개념이 생기자, 더 이상 군인이나 전쟁 관련 시설만이 폭격의 대상이 아니었다. 도시와 민간인들도 폭격 대상이었다. 각국들은 적국의 도시를 폭격하여 민간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여 이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것을 기대했다. 여기에 적국에 대한 개인적 혹은 국가적 분노와 인종주의까지 더해지면서 지구 상에 끔찍한 지옥을 자아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행된 폭격은 연합국이던 추축국이던 그동안 단일 전쟁에서 인류가 겪었던 최대, 최악의 폭격이었다.[10]
영도자께서는 내게
공군으로 영국을 박살내라고 명령하셨소. 강력한 타격을 가해서 이미 재기불능의 정신적 참패를 당한 이 적이 가장 가까운 장래에 무릎을 꿇도록 만들 계획입니다. 그래야 우리 부대가 그
섬나라를 점령하는 일이 아무런 위험 없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11]
헤르만 괴링
헤르만 괴링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중소형의 폭격기들도 1톤 이상의 폭탄 탑재가 가능했는데, 독일군은 급강하 폭격기에 한발~세발의 대형 폭탄을 달고 정확한 폭격을 퍼붓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미군과 영국군은 이러한 중소형 폭격기 뿐만 아닌 대형기도 많았는데, 대형 폭격기인 B-29는 최대 9톤, 아브로 랭커스터는 최대 10톤의 폭탄을 탑재 가능했다. 영국군과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이런 폭격기들을 한번에 수십, 수백대를 띄워 서로의 도시를 집중 공격했다. 후에는 제공권이 연합국에게 넘어가자 미군의 대형 폭격기들이 독일 국토를 유린하기도 하였다.
독일 해군이 상당히 초라했던 까닭에 독일군은 공군으로 영국 해군과 도시들을 초토화시킨 뒤 상륙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공중전을 영국 본토 항공전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런던이 초토화 되고 영국의 군사시설이 많은 피해를 봤지만 결국 영국은 건재하게 된 반면, 독일 공군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잃고 전투력을 상당히 손실하여 결과적으론 영국 본토 상륙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영국 항공전 막판에 코번트리라는 도시를 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그리고 폭격으로 한 도시를 완전히 박살낸다는 은어로 '코번트리'화하다(Coventration/Coventry Blitz)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12] 물론 영국군도 당하기만 한건 아니고 독일 본토로 폭격기를 띄워 똑같이 도시 하나를 불태웠고 은어를 만들어냈다. 뤼베크 문서 참조.
이듬해에 전세가 역전되자 영국군은 당시 사용 가능한 폭격기 1,034대를 박박 긁어모아 쾰른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가해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전술로 코벤트리의 앙값음을 했다. [13] 그리고 미군이 유럽 전선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독일은 야간폭격을 주로 하는 영국군과 주간폭격을 주로 하는 미군에게 밤낮으로 시달리게 된다.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군사 거점들은 그 뒤로 계속되는 폭격으로 인해 전쟁수행 역량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특히, 일명 석기시대 애호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연합군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전쟁 후반기에 감행된 무차별 전략폭격은 독일을 그야말로 석기시대로 돌려놓았다. 드레스덴 폭격에서는 3만 5000여 명의 사상자가[14] 발생하였고 산업시설의 23%를 파괴하였다.
피의 토요일(Bloody Saturday)[15] |
충칭 상공의 일본군 폭격기 |
폭격은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저지를 수 있었던 잔혹한 대량 학살의 최악의 보기였습니다. 폭격을 당한 지역은 생지옥이었죠. 저는 그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산허리에 붙어 있는 가옥들 대부분은 긴 말뚝들에 연결되어 있는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부싯깃처럼 활활 불탔죠. 인은 불을 계속 맹렬하게 타오르게 하였고, 미풍은 이를 확산시켰습니다. 1.6 평방킬로미터의 4분의 3에 있는 가옥들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죽어가는 사람과 부상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비명이 한밤중에 울려 퍼졌고, 이 소리는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의 끊임없는 소리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옛 도시의 성벽을 올라감으로써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뒤따라오는 불길에 붙잡혔고, 마치 마술처럼, 숯가루가 되었습니다.[16][17]
충칭 대공습을 목격한 기자 에드거 스노우의 증언
충칭 대공습을 목격한 기자 에드거 스노우의 증언
한편 중일전쟁에서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무차별적인 폭격을 시행했다. 이미 이전부터 일본 제국은 중국대륙에서 항일운동가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폭격을 일삼곤 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의 각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1937년 7월부터 다음 해 10월까지 1만여 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어 3만 5000천 발의 폭탄이 떨어졌다. 난징, 광둥, 충칭, 상하이 등의 도시들이 폭격을 당했다. 폭격의 피해는 주로 민간인에게 집중되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중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인까지도 피해를 입을 지경이었고, 이에 1937년 9월 국제연맹은 이 일련의 폭격을 비난했으나 당시 일본 제국은 이를 묵살했다.
수많은 폭격 사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의 옛 수도였던 충칭에서 벌어진 대공습이었다. 1938년 2월부터 시작된 폭격은 1943년 8월까지 장장 5년 반 가까이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에서도 전쟁 후반 커티스 르메이가 부임하면서 그 동안의 폭격 전술을 근본부터 바꾸게 된다. 일본 제국에서는 미군의 B-29 편대가 매일같이 본토를 폭격하고 있었는데 이후 일본 열도에 목조건물이 많다는 점을 이용해 화재 유발을 위해 소이탄을 위주로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또한 한발 한발의 폭탄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피해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학자들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각 폭탄을 몇초 간격으로 떨어뜨리면 몇미터 간격으로 떨어지며 최대한 많은 지역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계산한 값을 폭격 방식에 도입해 적절히 일본 제국에게 타격을 주고 있었다. 이 일련의 공식을 악마의 방정식이라고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소이탄 폭격을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일본 제국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군사고문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때 제국의 소이탄 공격이 동아시아의 목조건물과 결합하며 피해를 입히는 것을 보고 이를 태평양 전쟁에서 활용한 것이다. 또한 이때 소이탄의 일종으로 미국에서 새로 개발된 네이팜탄도 동원됐다. 기존 소이탄에 화학적 젤리 성분과 인을 추가한 이 폭탄은 더욱 큰 살상력을 지니게 되었었다.
폭격의 결과는 매우 처참했다. 1945년 3월 9일 저녁부터 10일 새벽까지 걸쳐 3시간 동안 진행된 소위 도쿄 대공습이라 불리는 대규모 폭격이 도쿄에 가해졌다. 1,665톤이나 되는 폭탄이 떨어졌고 엄청난 화마가 몰아닥쳤다.
새벽에 마스코 하리오노는 맨발로 발이 다 까진 채 유스호스텔로 일하러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때 메이지 극장이 서 있던 곳에는 검게 탄 시체와 질식하고 깨지고 불탄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부풀고 찌그러지고 뒤틀린 방금 불에 탄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였다.[18]
폭격 직후 생존자가 본 도쿄의 풍경
폭격 직후 생존자가 본 도쿄의 풍경
네이팜탄은 터지면서 끈적거리며 불타는 액체들을 흩뿌렸고 이것들은 주변의 모든 것들에 달라붙어 불타올랐다. 길거리와 목조건물에 있었던 사람들은 불타죽고, 이를 견디지 못해 강이나 소방용수에 뛰어든 사람들도 그 열기로 인해 끓는 강 속에서 삶아져 죽었다. 게다가 콘크리트 건물은 그 자체로 커다란 솥이 되어 그 안의 사람들을 찌어죽였고, 급기야 화재선풍[19]까지 일어날 정도의 아수라장 속에서 산소까지 모두 태워져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들까지 질식시켰다. 당시 사진
이 날의 공습으로만 최소 1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20][21] 하지만 공습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미군은 곧 도쿄를 포함하여 일본의 주요 대도시에도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다. 이 공습으로 나고야, 오사카, 고베 등의 대도시는 물론이고 중소도시들까지도 잿더미가 됐다.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라는 말이 상징하듯 세계대전 당시의 총력전은 수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고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항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여전히 시간만 끌었다.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5.3. 6.25 전쟁과 폭격
흔히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6.25 전쟁 때에도 미군의 폭격은 그 규모나 위력에서 상당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7일, 김일성은 테렌티 시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사방에서 전화로 미 공군의 폭격과 대규모 파괴에 대해 보고한다. 왜 소련은 공군을 안 보내는 건가? 정말 힘들다."라고 다급한 모습을 보이며 허둥댔다. 사실 이 당시 북한에게는 공군이나 대공 전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에 별다른 반격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군과 주민들한테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 토굴을 파라고 지시하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차례차례 폭격의 강도를 높였다. 처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이나 산업시설,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도로, 철도, 항만 등 북한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곳을 주로 파괴했다.
그러나 북진하던 유엔군이 대거 참전한 중국군에게 참패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그래서 미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1월 5일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삼아 초토화시켜라"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사용된 폭탄이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소이탄과 네이팜탄이었다. 이로 인해 최전선 북쪽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모든 지역이 불길에 휩싸였다. 게다가 독일과 일본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했던 2차 대전과 달리, 이번엔 아주 작은 시골마을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폭격의 패턴은 먼저 미 공군의 중폭격기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면, 이어 전폭기가 나타나 화재 진화를 못하도록 기총소사를 하고 시한폭탄까지 뿌려댔다.
세 번째 단계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였다. 전선이 교착되자 미 공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보급을 끊기 위해 북한 전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파괴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포로 송환 문제로 휴전협상이 중단되자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모든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동시에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수력발전소와 논농사에 필수적인 저수지를 대거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풍발전소를 시작으로 부전, 장진, 허천 발전소 등이 무너졌다. 곡창지대인 해주의 경우 저수지 20곳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둑이 파괴돼 마을이 물에 잠기고 벼농사가 중단되었다. 또한 휴전 때까지 포로 생활을 했었던[22] 미 24 사단장 딘 장군은 "희천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도로와 2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가 사라졌다. 건물은 공터 아니면 돌무더기만 남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텅 빈 껍데기로 변했다."라고 회고했다.
북한 폭격에 대한 저서인 폭격(창비 간행)을 펴낸 김태우 서울대 평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어린 시절 강원도 출신인 할머니에게 전쟁 때 제일 무서운 경험이 무엇이었냐"라고 물었는데, 들려온 대답은 "폭격이었지. 굴뚝에서 연기가 날 때마다 폭격하는 것 같더라. 그 이후로 제대로 밥을 해 먹을 수 없었어."라고 회고하셨다"였다. #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느냐 하면, 6.25 전쟁 말기에 미군 공군기 조종사들은 북한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북한에 더 이상 폭격을 할 목표물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서 폭격을 거부하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23]
그렇다면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발생한 북한 주민들의 사망자 수는 어느 정도나 되었던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집계가 아직까지 나와있지 않은데, 미군 측에서는 16만 명 정도라고 집계했고 북한에서 활동했던 소련 스파이들이 본국에 보낸 첩보에 의하면 28만 명이라고 하며 북한 측 주장으로는 100만 명 수준이다. 어느 쪽 집계가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5.4. 베트남 전쟁과 폭격
베트남 전쟁 때에는 마침내 제트 전투기의 시대가 와서, 2명이 탑승하는 전폭기인 F-4 팬텀 II 1대가 무려 6.4톤의 폭탄을 탑재하는 시대가 왔다. 또한 B-52 같은 폭격기는 한 번에 수십 톤의 폭탄을 탑재 가능했는데, 이는 원래 핵폭탄을 여러 발 싣고 만에 하나 벌어질 소련과의 전쟁 때 소련 도시들을 핵으로 초토화시키는 임무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전 때에는 재래식 폭탄을 떨어트리고 다녔는데, 이 폭격이 얼마나 가공할 수준이었는지 북베트남이 결국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며 베트콩들은 B-52의 폭격을 맞는 게 가장 무서웠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폭탄 양에 비해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커티스 르메이 3번 문서 참조.
그러나 그런 가공한 폭격도 결국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또한 폭격이라는 작전은 엄청난 정치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베트남 전쟁이 보여주었다. 롤링썬더 작전 등의 예를 봐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폭격을 제대로 못 했다가 죽어라고 쏟아부어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기도 했다. 게다가 개전 이후 정치적 이유로 작전 범위를 남부 지역에 한정해 놓고 있는 동안 북베트남 공역에는 소련제 SA-2 미사일을 비롯한 본격적인 방공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5.5. 현대의 폭격
1980년대에는 러시아의 방공망에 걸리지 않고 적에게 폭격을 할 수 있는 스텔스 폭격기가 개발되었다. 이로 인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 어느 순간에도 적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걸프전 때 위력을 발휘하여 F-117 스텔스 폭격기가 개전 첫날에 이라크 국방부, 대통령 관저, 방송국, 군사령부, 교량, 발전소 등등을 전부 박살내 버리는 바람에 개전과 동시에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본 중국은 병력만능주의를 버리고 대대적인 군 현대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순전히 항공력만으로 진행된 코소보 전쟁(Operation Alied Force)의 승리 이후 공군력만능론이 되살아나기도 했으나, 그 반박으로 코소보 전쟁 역시 코소보해방군(KLA)의 지상공세 없이는 승리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는 세르비아 측 자료가 공개되면서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항공전역의 성과 자체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요컨데 항공폭격은 분명 강력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쟁을 이긴다는것은 설령 대국이 소국을 상대로 하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며 어디까지나 폭격은 지상군의 승리를 돕는 보조적인 수단이라는 결론으로 가고 있다. 이는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서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리비아를 폭격하기 위해 공군을 파견하고 나서도 워낙 비싼 폭격 비용 때문에 폭격만으로 리비아군을 몰아내는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리비아군과 맞서 싸우는 시민군을 보조하는 형태로 고착되는 과정에서도 증명되었다.[24]
6. 사례 목록
- 털사 인종 학살[25]
- 게르니카
- 전략 폭격/2차 대전
- 런던 대공습
-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 진주만 공습
- 모스크바 폭격
- 타란토 공습
- 바티칸 폭격
- 드레스덴 폭격
- 헤일스톤 작전
- 일본 본토 공습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26]
- 원산 포위전
- 롤링썬더 작전
- 라인배커 작전
- 볼로 작전
- 리비아 공습
-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 충격과 공포
- 오디세이 새벽 작전
-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 파지기 대학살
7. 같이보기
7.1. 개념
7.2. 인물
7.3. 폭격의 매개체
7.4. 기타
[1]
수 백개의 폭탄을 떨어뜨리는 융단폭격 때문에 폭격의 정의를 '다수의 폭탄을 떨어뜨려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한 개를 떨어뜨리든 백 개를 떨어뜨리든 '항공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공격하는 것'을 폭격이라고 정의한다. 이후 나오는 급강하폭격이나 정밀폭격이 적은 수의 폭탄을 떨어뜨려 공격하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2]
물론 맞추는 것은 논외로 하고 일단 폭탄을 떨어트리는 과정까지만 생각하면.
[3]
당시 원자폭탄 투하작전을 실행했던 제509 혼성비행단에는 말 그대로 예술가 수준으로 노든 폭격조준기를 다루던 폭격의 명수들이 모여있었다. 에놀라 게이를 타고 인류 최초의 실전투입 원자폭탄을 투하한 토머스 페러비 소령, 예술적인 폭격솜씨를 자랑하다보니 그냥 탑승기 이름이 '위대한 예술가'로 붙어버린 커미트 비헌 대위(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등.
[4]
그 우회라는게 산이 하도 많이 가로막고 있어서 최소 수십 km는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잔여 연료가 그만큼 엄청나게 까인다. 그렇다고 연료를 넉넉하게 실으면 이번엔 또
무장량이 그만큼 크게 까인다.
[5]
미사일과 다르다. 미사일은 자체 추진 로켓이 장착되고 자세제어를 통해 유도가 가능한 무기이지만, 유도폭탄은 미사일처럼 자세 제어를 통한 유도가 가능하나 자체 추진 로켓이 없다. 추진체를 달 필요가 없이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니 무게를 크게 신경쓰지 않아서 가성비가 무척이나 좋다. 그냥 떨어뜨려서는 높은 정밀도가 안 나오니 유도 기능을 추가 한 것.
[6]
물론 대형기에는 더 많이 실을 수 있다. 핵폭격하려고 만든 B-1 랜서 폭격기를 띄워놓고 JDAM 택시로 써먹는 판국이다.
[7]
바람편차수정폭탄. 간단한 자이로스코프를 달아 측풍의 영향에 저항하는 폭탄이다. 여기에 기초적인 FCS를 적용하면 명중율이 절륜하게 높아진다. 다만 2010년 이후에는 GPS 유도무기가 너무 저렴해졌는지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8]
보수적으로 볼때 2010년대고, 오차를 크게 줄일수 있는 성능의 타겟팅 포드 자체는 2000년대 초반이나 그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9]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222~223쪽.
[10]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희생된 민간인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
독일: 353,000~635,000여명
영국: 60,000여명
중국: 260,000~351,000여명
일본: 330,000~500,000여명(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포함)
폴란드: ~50,000여명
프랑스: 67,000여명
소련: 51,526~500,000여명
네덜란드: 11,250명
이탈리아: 60,000~100,000명
루마니아: 7,693명
헝가리: 19,135–30,000명
불가리아: 1,374명. [11] <2차세계대전사>, 존 키건, 청아람미디어, 2016, 139~140쪽 [12] 이 폭격과 관련해서 현재도 끈질기게 제기되는 음모론 중 하나로, 영국 당국은 독일의 암호문을 성공적으로 해독하고 있었던 까닭에 코벤트리가 폭격당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암호문이 해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일부러 방관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은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실제로 해독에 성공한 것은 폭격이 끝난 후였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셜록(BBC)에도 한 에피소드에서 소재로 쓰였다. [13] 이 때 1천 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밀레니엄 작전"이란 명칭을 붙였는데, 당연히 '천년왕국' 운운하던 나치 독일에게 엿을 먹이려는 네이밍이다. [14] 공식 집계.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5] 이 흑백사진은 1937년 8월 28일 상하이 남부 기차역에서 찍혔다. 이날 상하이에서는 일본군의 공습이 있었고 기차역은 폭격에 맞아 박살이 났다. 당시 기차역에서는 어머니와 아이가 있었는데 폭탄으로 어머니는 죽고 아이만 상처를 입은 채로 울고 있었다. 이 장면을 중국인 기자 히 S. 웡이 발견하여 사진을 찍고 아이를 구출하였다. 신원 미상의 이 아이는 메이 핑(Ping Mei)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적 또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이 사진은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이에 당시 일본 제국 정부는 이 사진이 조작이라고 주장했으며 사진을 찍은 웡 기자의 목에 5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기까지 했다. [16]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170쪽. [17]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에드거 스노우가 목격했던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참혹한 장면들은 안타깝게도 일본에서도 또한 거의 똑같이 재현된다. [18]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233쪽 [19] 고온이 한곳에 집중되면 거길 중심으로 토네이도 같은 돌풍이 일어나는 것. [20] 이 공습 당시 피해는 통계에 따라서 다른데. 미국 전략폭격조사(US Strategic Bombing Survey)의 경우 88,000명 가까이가 사망하고 44,000명정도가 부상을 입었다고 계산한다. 도쿄소방청에서는 97,000명이 죽어나가고 125,00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집계했다. 도쿄 경찰청에서는 124,711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봤다. [21] 대공습 당시 그런 피해를 입고 몇 번에 걸친 항복권고에도 결국 항복하지 않다가 핵을 맞고서야 항복한걸 보면 그 당시 일본 제국 수뇌부가 얼마나 국민들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는 비열한 정부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항복의 이유도 원폭으로 인한 대량의 사상자 발생이 아니고, 미군이 상륙해서 이세 신궁에 있는 3종의 신기를 빼앗는 것과 천황의 신변을 직접 위협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2] 정확히는 대전 전투 이후 퇴각하다 길을 잘못 들어 전라도 무주, 진안 부근에서 한두규의 밀고로 붙잡혔다. [23] 6.25 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2층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김일성의 발언이 있을 정도였다. [24] 만약 미국의 참가가 없었다면 이 조차도 달성하기 힘들뻔했다.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서 미국의 폭격량은 다른 서방국가들 모두를 합친것보다 훨씬 더 많다. [25] 군인이 아니라 백인 폭도들에 의한 폭격이다. [26] 유일한 실전 핵폭격 사례들이다 [27] 특히 대다수의 생물학 무기들은 집속탄에 담겨 투하되는 경우가 많다. [28] 현대에는 각종 협정과 조약, 민간인 오폭 문제로 인해 잘 쓰이지 않지만 과거만 해도 헬기나 공격기를 통해 문자 그대로 살포하는 경우가 많았다. [29] 통상적으로 뇌격이라고 많이 부르지만 일단은 항공기에서 떨구는 폭발물이기도 하기에 폭격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독일: 353,000~635,000여명
영국: 60,000여명
중국: 260,000~351,000여명
일본: 330,000~500,000여명(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포함)
폴란드: ~50,000여명
프랑스: 67,000여명
소련: 51,526~500,000여명
네덜란드: 11,250명
이탈리아: 60,000~100,000명
루마니아: 7,693명
헝가리: 19,135–30,000명
불가리아: 1,374명. [11] <2차세계대전사>, 존 키건, 청아람미디어, 2016, 139~140쪽 [12] 이 폭격과 관련해서 현재도 끈질기게 제기되는 음모론 중 하나로, 영국 당국은 독일의 암호문을 성공적으로 해독하고 있었던 까닭에 코벤트리가 폭격당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암호문이 해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일부러 방관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은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실제로 해독에 성공한 것은 폭격이 끝난 후였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셜록(BBC)에도 한 에피소드에서 소재로 쓰였다. [13] 이 때 1천 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밀레니엄 작전"이란 명칭을 붙였는데, 당연히 '천년왕국' 운운하던 나치 독일에게 엿을 먹이려는 네이밍이다. [14] 공식 집계.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5] 이 흑백사진은 1937년 8월 28일 상하이 남부 기차역에서 찍혔다. 이날 상하이에서는 일본군의 공습이 있었고 기차역은 폭격에 맞아 박살이 났다. 당시 기차역에서는 어머니와 아이가 있었는데 폭탄으로 어머니는 죽고 아이만 상처를 입은 채로 울고 있었다. 이 장면을 중국인 기자 히 S. 웡이 발견하여 사진을 찍고 아이를 구출하였다. 신원 미상의 이 아이는 메이 핑(Ping Mei)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적 또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이 사진은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이에 당시 일본 제국 정부는 이 사진이 조작이라고 주장했으며 사진을 찍은 웡 기자의 목에 5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기까지 했다. [16]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170쪽. [17]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에드거 스노우가 목격했던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참혹한 장면들은 안타깝게도 일본에서도 또한 거의 똑같이 재현된다. [18]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233쪽 [19] 고온이 한곳에 집중되면 거길 중심으로 토네이도 같은 돌풍이 일어나는 것. [20] 이 공습 당시 피해는 통계에 따라서 다른데. 미국 전략폭격조사(US Strategic Bombing Survey)의 경우 88,000명 가까이가 사망하고 44,000명정도가 부상을 입었다고 계산한다. 도쿄소방청에서는 97,000명이 죽어나가고 125,00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집계했다. 도쿄 경찰청에서는 124,711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봤다. [21] 대공습 당시 그런 피해를 입고 몇 번에 걸친 항복권고에도 결국 항복하지 않다가 핵을 맞고서야 항복한걸 보면 그 당시 일본 제국 수뇌부가 얼마나 국민들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는 비열한 정부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항복의 이유도 원폭으로 인한 대량의 사상자 발생이 아니고, 미군이 상륙해서 이세 신궁에 있는 3종의 신기를 빼앗는 것과 천황의 신변을 직접 위협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2] 정확히는 대전 전투 이후 퇴각하다 길을 잘못 들어 전라도 무주, 진안 부근에서 한두규의 밀고로 붙잡혔다. [23] 6.25 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2층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김일성의 발언이 있을 정도였다. [24] 만약 미국의 참가가 없었다면 이 조차도 달성하기 힘들뻔했다.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서 미국의 폭격량은 다른 서방국가들 모두를 합친것보다 훨씬 더 많다. [25] 군인이 아니라 백인 폭도들에 의한 폭격이다. [26] 유일한 실전 핵폭격 사례들이다 [27] 특히 대다수의 생물학 무기들은 집속탄에 담겨 투하되는 경우가 많다. [28] 현대에는 각종 협정과 조약, 민간인 오폭 문제로 인해 잘 쓰이지 않지만 과거만 해도 헬기나 공격기를 통해 문자 그대로 살포하는 경우가 많았다. [29] 통상적으로 뇌격이라고 많이 부르지만 일단은 항공기에서 떨구는 폭발물이기도 하기에 폭격으로 취급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