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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1:15:49

프리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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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사적 활동
3.1. 멕시코에서의 프리메이슨3.2. 러시아에서의 프리메이슨
4. 지회(lodge)
4.1. 랏지 내부의 구조
5. 음모론에서의 프리메이슨
5.1. 기원5.2. 비판
6. 신비학에서의 프리메이슨7. 현재의 프리메이슨
7.1. 프리메이슨이 되려면?7.2. 한국의 프리메이슨
8. 그리스도교와 프리메이슨9. 여담10. 유명한 회원 목록11. 관련 문서

Free and Accepted Masonry[1][2][3] ( 자유롭고 적법한 석공 [4])
Masonr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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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신론에 기반한 사교(社交) 클럽이다.

남성 상류층들만이 가입할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6],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정 요건이 충족되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나 가입이 되는 것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신에 대한 믿음, 성인일 것 단 2가지의 공개된 자격이 있지만 실제로는 프리메이슨 개인의 명성, 자격, 믿음의 정도를 기존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그랜드 랏지 잉글랜드의 영국 정부 공개 내용에 따르면 영어 또한 능숙해야만 한다.

신규 단원을 많이 뽑지도 않거니와 워십풀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 등이 주관하는 최고 회의의 전원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입단의 난이도를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부모나 형제 등 가족이 프리메이슨이거나, 프리메이슨이 소속되었던 대학 등의 엘리트 조직 활동을 하다가 추천을 받아 입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프리메이슨이 내걸고 있는 모토가 세계 동포주의적 박애 형제애이다. 하는 일도 한국 로터리 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처럼 자선, 봉사 활동이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영국 국회가 소속 정치인 및 법관들의 프리메이슨 단원 여부를 공개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영국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가 메이슨에 대한 탄압과 차별에 반발하며 나왔던 내용으로 실제 중요한 프리메이슨의 명단과 활동은 숨기고 표면적인 모습만 공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2. 역사

프리메이슨의 기원은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보통 7개 정도로 나뉜다.
공식 기록으로는 1717년 영국 런던의 구즈 & 그리드라는 술집에서 모였다는 내용이 가장 먼저 작성되었다. 물론 활동은 훨씬 그 이전부터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공식화된 것은 1717년이다. 위와 같이 여러 설이 많지만 일단 프리메이슨에서는 솔로몬 성전의 석공들에서 자신들의 기원을 찾고 있으며, 히람 아비프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그의 죽음을 재현하기도 한다.

프리메이슨이 산업 혁명 이후에야 설립되었다는 설은 사실 진지하게 논의된 설인 것보다는 19세기 중엽 영국의 청교도 역사가들이 프리메이슨을 사이비 집단으로 매도하기 위해 제시한 설에 가깝다. 그러나 상술했듯 프리메이슨의 활동은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이미 산업 혁명보다 훨씬 이전 시대인 18세기 초부터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 설의 신빙성은 떨어진다. 다만 프리메이슨 입장에서는 당시에 이런 식으로 얻어맞았던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현재까지도 이들이 현실과 유리되어 고고학 연구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3. 역사적 활동

프리메이슨은 석공 길드로 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1600년대 중반 또는 그 이전부터는 노동자의 비밀 단체에 철학적 성격이 더해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600년대 말에 영국에서 프리메이슨 반대 운동이 일어나 '악마적인 반그리스도교 집단'으로 비난받기 시작한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17년 런던의 4개 랏지(지부)는 총랏지(총지부)로 연합하기로 결정하고 총지부장을 선출했다. 1723년에는 '프리메이슨 역사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 제임스 앤더슨이 프리메이슨의 철학, 역사, 법률, 의무, 활동을 집대성하여 프리메이슨 규약을 발표하였는데 규약에는 시민의 권리나 노동 윤리와 같은 '진보적' 개념도 포함되었다. 이후 영국 프리메이슨은 크게 성장하고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지부를 확대한다.[10]

이후 1700년대 초에 영국에서 계몽주의적 경향에 비밀 결사 등의 개념이 더해지고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성격이 부여된 근대적 프리메이슨이 나타났다. 프리메이슨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밀 결사였다. (여기서 비밀성이란 운영이나 규율보다는 입당식 등의 절차와 과정의 비밀을 뜻한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에는 원래 신비주의에만 기초한 전통적 프리메이슨이 있었으나 1717년 런던에서 철학적이고 사색적 성격의 근대적 프리메이슨이 창설되자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11]

1700년대 초반 유럽과 스페인에서 프리메이슨은 사회를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국가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는 대상이었다. 특히 가톨릭은 프리메이슨은 신앙의 순수성을 위험하게 하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계몽사상과 함께 정치적 도덕적으로 재앙을 부르는 악으로 규정하고 개신교와 결부시켜 공격하였으며, 종교 재판에서 프리메이슨을 처벌하였다. 이 점은 식민지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12]

이후 프리메이슨은 프랑스 혁명에도 참여하여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프리메이슨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프랑스의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혁명(1789-1794)을 지지했다고 설명할 수 없다. 신비주의적 전통을 중시하는 프리메이슨(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프리메이슨)은 혁명에 관심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활동하던 프랑스 프리메이슨들은 전반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강했고, 많은 프리메이슨이 프랑스의 정치를 비판했고 대혁명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친위대 활동을 하였다.[13]

3.1. 멕시코에서의 프리메이슨

프랑스 혁명 이후, 프리메이슨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군주에게도 특별하게 경계할 대상이 되었다. 프리메이슨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교회뿐 아니라 스페인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를 포함하여 식민지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우선적으로 감시 대상이었다. 이들이 프랑스 혁명 사상을 식미지에 전파시킬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스페인 왕의 퇴위 사건 이후 당시 나폴레옹은 프리메이슨은 자신의 권력과 혁명 사상을 확산하는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프리메이슨을 군주제와 종교 재판에 맞서는 존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의 계획은 먹히지 않았다. 프랑스의 침공에 저항하는 스페인 국민들의 투쟁이 예상과 달리 굳세었고 나폴레옹과 프리메이슨에 대한 반감도 오히려 커졌다. 이런 분위기가 대서양을 건너 누에바에스파냐에도 전해졌다[14]

멕시코 최초의 랏지는 1806년 멕시코시티에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스라타스(Las Ratas, 즉 볼리바르<Bolivar>)가 5번지의 주택에서 멕시코 최초의 랏지가 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멕시코 독립의 선구자인 미겔 이달고의 가입 여부이다. 여러 정황에 따르면 이달고 신부가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분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멕시코만의 현상이 아니라 남미 독립 과정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당시 프리메이슨 랏지는 독립운동의 수단 또는 거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15]

그리고 역사적 전례에 따르면 "프리메이슨과 비밀 결사는 혁명이나 독립과 같은 정치적 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근대 프리메이슨인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프리메이슨은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정치나 종교에 대해 어떤 특정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이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의 개념은 확장됐고 성향도 다양해지며 현실 사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향이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프리메이슨과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밀 결사 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16]

멕시코의 초기 프리메이슨은 '정치적'이었다. 1800년대 초 멕시코에 온 스페인 출신 군인과 정치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프리메이슨은 스코틀랜드 의례파가 다수였고, 이들은 입헌 군주제와 교회 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프리메이슨을 결성했다가 식민지가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프리메이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17]

이달고 신부가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었다는 건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산타 안나는 확실히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그리고 훗날에 멕시코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뒤를 이은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모두 프리메이슨 랏지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독립에 관여한 중요한 인물들이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18] 다만 모든 프리메이슨들이 멕시코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프리메이슨은 독립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프리메이슨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독립을 지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현상이 실제가 되자 자신들의 이해를 보전하려 하였고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독립을 받아들였다. 독립을 자발적을 지지했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프리메이슨과 마지못해 받아들인 프리메이슨으로 나뉘었고 훗날 프리메이슨이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19]

프리메이슨은 분명 멕시코 독립운동과 관련은 있었다. 다만 독립군에 우호적인 활동을 전개한 조직들은 대개, 프리메이슨의 형식을 가졌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프리메이슨과는 연관이 없고 대신 정치적 애국주의 단체란 성격이 더 강한 준프리메이슨 단체이거나 프리메이슨 의식도 없고 프리메이슨과 같은 조직 내 위계 구조도 없는 정치적 비밀 결사 조직들이었다. 다시 말해 멕시코 독립 과정에서 활약하였던 조직은 프리메이슨과 프리메이슨에 준하는 단체,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독립운동 단체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프리메이슨'이다.[20]

독립 혁명 참여에 대한 멕시코 프리메이슨의 참여는 과장된 점이 있는데 이것은 반혁명 세력의 전력과도 관계가 있다. 멕시코에서 프리메이슨은 "왕실(본국 왕실)과 제단(가톨릭)에 대항하는 이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였고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본국과 식민지 당국은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의 확산을 저지하며 독립 세력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기 위해 프리메이슨의 독립 혁명 참여를 실제보다 과장한 점이 있다고 한다. 실제 멕시코 독립에서 역동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프리메이슨 단독이 아닌 프리메이슨과 준프리메이슨까지를 포함한 독립운동 결사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프리메이슨이 멕시코의 독립을 주도하였다"는 설명은 당시 '넓은 의미의 프리메이슨'의 다양하고 중첩적인 성격을 놓치게 만들 수 있는 설명이다. [21]

이후 시간이 지나며 식민지에선 실제로 독립이 되려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이 전개됐고 군인들과 정치인들은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랏지(프리메이슨 지부)를 조직하였다. 명백하게 멕시코의 독립을 지지하는 랏지(프리메이슨 지부)도 증가하였다. 1823년 과달루페 빅토리아는 할라파에서 쿠바 출신 시몬데 차베스와 함께 '검은 독수리 군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스페인인들을 추방하는 데 동의해야만 가입할 수 있었다. 1825년 비센테 게레로도 '멕시코의 장미' 랏지를 세웠다.

독립 직후에 멕시코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때 멕시코 프리메이슨은 국가 정치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체가 되었다.[22]

독립을 하며 주도권을 잡은 건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였다. 이투르비데는 1821년 2월에 이괄라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군주제로의 독립, 가톨릭의 인정, 모든 사회 계급의 통합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 계획 발표에 따라 멕시코 독립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1822년 5월이 되자 이투르비데는 스스로를 아구스틴 1세로 선언하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헌 의회를 해산하였다. 산타 안나는 이투르비데 왕정에 반대하였고 12월 2일에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투르비데는 반란 진압을 위해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은 산타 안나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1823년 2월 1일에 카사 마타 계획을 발표하였다: 카사 마타 계획은 새로운 의회의 구성과 지방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당시에 이투르비데는 중앙 집권주의로 기울었고 지방에 강제로 재정을 강요하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도 산타 안나를 지지하였다. 1823년 3월이 되자 아구스틴 1세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의회는 다시 소집되고 11월에 공화정을 선포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제정된 1824년 헌법에 따르면 가톨릭은 국교였다.[23]

이투르비데가 축출되기 전부터 의회에는 다수의 프리메이슨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투르비데와 군주제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카사 마타 계획에서 주동 세력이 되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Miguel Ramos Arizpe)와 세르반도 테레사 데미에르(Servando Teresa de Mier) 등이 그런 프리메이슨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독립의 영웅들이기도 하였고 자유주의를 선호하였고 북부 출신이었다. 로렌소 데 사발라(Lorenzo de Zavala)도 자유주의자였으며 1825년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의 창설 멤버였다. 반면 루카스 알라만(Lucas Alamán)은 기업가이자 정치가였으며 보수파의 리더였다. 이투르비데 축출의 일면은 프리메이스 투쟁의 승리라는 성격이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패배했고 군주제를 상대로 공화주의가 승리하였다. 그 후 멕시코 정치는 중앙주의와 연방주의가 대립하며 혼란이 계속됐다.[24]

이트루비데의 군주제가 무너지자 초대 대통령으로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당선되었고 니콜라스 브라보가 부통령이 되었다. 과달루페 대통령이 재임한 4년(1824-1828)은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그것은 스코틀랜드 의례파(스코틀랜드파)와 요크 의례파(요크파) 라는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었다. 당시 정치인의 다수는 프리메이슨에 속해있었으므로 당시 프리메이슨은 정치 클럽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엔 아직 정당이란 것이 없었고 대신 프리메이슨이 정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다.[25]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은 스페인에서 백인 상류층 사이에 퍼졌던 분파였다. 다수의 크리오요(식민지 태생 백인)는 이투르비데 세력과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였는데 이들은 스코틀랜드파를 중심으로 중앙 집권주의적 정치 세력으로 형성하였다.[26]

요크파 프리메이슨은 미국 대사 포인셋(Joel Roberts Poinsett)의 지지를 받으며 메스티조와 중산층을 규합하여 연방주의적 정당의 기초를 만들고자 했다. 빅토리아 대통령은 연방제와 반스페인주의를 주장하는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지지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로렌소 데 사발라와 그 외에도 호세 마리아 알푸체, 비센테 게레로 등의 자유파 인사들이 그런 요크파 프리메이슨의 활동에 참여하였다.[27]

멕시코에서 요크파 프리메이슨이 성립하는 데는 미국 대사 포인셋의 활동도 중요했다. 이것은 미국 외교 전략에 의해 생겨난 현상이기도 했다. 포인셋이 대사로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멕시코의 외교는 유럽 계몽주의에 정통한 보수주의자 루카스 알라만이 주도하고 있었다. 루카스 알라만은 미국보다는 영국과 중남미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 더 집중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멕시키 북부의 국경 지역으로 노리던 미국을 크게 경계하였다. 그리고 알라만은 미국의 요청을 뿌리치고 영국과 먼저 우호, 통상, 항행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포인셋은 알라민이 버티고 있는 행정부보다는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의회를 상대로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포인셋은 대통령과 의회의 협력을 얻어내며 멕시코 보수파를 견제했으면서 멕시코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8]

포인셋의 개입에 따라 요크파 랏지는 뉴욕 총랏지(그랜드 랏지, 총지부)에게 인정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조직되었다. 요크파 프리메이슨들은 급진주의자, 연방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스코틀랜드파를 상대했다. 보수적인 프리메이슨들은 '오래되고 인정된 스코틀랜드 의례파' 랏지로 결집하였다. 마누엘 코도르니우(Manuel Codorniu) 는 이 중 중요한 인물이었다.[29] (마누엘 코도르니우는 1821년 당시 마지막 부왕 후안 오도노후가 부임했을 때 그의 주치의였고 '엘 솔'이란 랏지를 조직하고 같은 이름의 신문을 발간했는데 목적은 이괄라 계획을 지지하고 가톨릭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었다.[30])

이에 따라 요크파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프리메이슨이 모였고 반대편에는 스페인 자유주의를 계승하는 보수적 정치인들이 스코틀랜드파 랏지로 결집하였다.[31]

두 세력 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제3의 대안을 세웠다. 그들은 1825년에 민족주의적 랏지인 멕시코 의례파(RNM) 프리메이슨을 세웠다. RNM은 자유주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외세가 아닌 멕시코 고유의 정치 시스템을 추구하였다. 멕시코 의례파는 1826년에 요크파나 스코틀랜드파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아나우악의 자오선', '평등', '폭군의 공포', '인디오의 무심', '멕시코의 비'와 같은 랏지들이 결성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나중에 RNM은 요크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32]

과달루페 정부에게 당시에 중요했던 과제 중 하나는 국가 개정으로 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권과 재산을 사용하는 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 요크파는 그것을 지지하였고 스코틀랜드파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의 신변과 관련된 문제도 논란거리였다. 이런 시기에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 사건이 벌어졌다: 아레나스 신부는 멕시코의 혼란이 자유주의 때문이라 주장하며 1827년 1월에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의 왕정 복귀를 주장하며 이에 동조하는 사제들과 반란을 계획했다. 계획은 사전이 발각됐고 신부는 처형됐다.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스페인의 재정복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사건은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댕겼다. 가읕 해 5월에 스페인인은 공직과 사제직 취임을 금지하는 영이 내려졌고 12월에는 스페인인 추방령이 내려졌다.[33]

브라보 부통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파는 즉각 반발하였다. 이들은 1827년 12월 몬타뇨 계획(멕시코주의 오툼바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오툼바 계획이라고도 한다.)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요구했다: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포함하여 비밀 결사를 금지하고, 요크파 정치인을 축출하기 위해 내각을 재구성하고, 요크파의 최대 후원자인 포인셋 대사를 추방하고, 카톨릭을 국교로 정한 1824년 연방 헌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베라크루스주와 산루이스포토시주 등 일부 지역이 몬타뇨 계획에 가담했고 양측의 충돌은 격화되었다. 결국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의 정부군이 승리하였다. 요크파 프리메이슨은 다시 세력을 인정받았고 스코틀랜드파의 위세는 축소되었다.[34]

다음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고 요크파와 RNM은 게레로를, 스코틀랜드파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하였다. 선거에서는 마누엘 고메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요크파와 게레로가 불복했다. 결국 마누엘 고메스는 사임하고 게레로가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요크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에 멕시코는 국가 재정이 계속 부족하였고, 농업, 광업, 제조업의 생산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도로 등의 사회 기반도 엉망이었고 교회와의 마찰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재침공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거의 전무했다. 결국 스페인은 1829년 멕시코를 재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탐피코를 점령하였다. 게레로 대통령은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부통령을 탐피코로 파견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스타만테는 반란을 일으켜 1830년에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부스타만테를 상대로 게레로가 다시 봉기하였다 부스타만테의 계략에 당해 1831년에 암살당하였다. 부스타만테에 반대하여 산타 안나 장군이 봉기하여 부스타만테를 몰아냈다. 이후 고메스 페르라사가 대통령 자리를 맡게 됐고 그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였다. 산타 안나 후보는 요크파의 지지를 받으며 RNM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정치 개혁 계획을 발표하였다: 여론과 언론의 자유 보장, 군대와 교회의 특권 폐지, 수도원의 철폐 등이 정치 개혁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1833년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35]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은 모두 멕시코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했지만 종합적인 계획을 서로 달랐다. 자유주의 세력은 연방 공화국을 희망하였고 보수파는 군주제를 지지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중앙 집권주의적 모델을 지지하였다. 자유주의는 요크파 프리메이슨으로 모이다가 나중에는 RNM 프리메이슨으로 모였고, 보수주의는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으로 결집하고 정치 세력은 양분되고 19세기 멕시코 정치 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36]

멕시코 독립을 완전히 해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멕시코 정치조직들이 새로 생겨난다는 것은 뜻했다. 당시에 정당의 탄생은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정당이 생기기 전이었고 대신 프리메이슨이 정당에 준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에 따른 활동이 훗날 멕시코 정당 정치에서 기초가 되었다.[37]

위에 인용된 임상래 교수의 2015년 논문은 스페인의 카디스 체제에 의한 페닌술라레스 크리오요 문제에 대한 최신 연구를 반영하지 않았다. 임상래 교수는 2020년에 스페인의 카디스 체제에 의한 페닌술라레스 크리오요 문제를 논문에 반영해 학회에 게재했다. 해당 논문도 참고하시오. 임상래. "멕시코 독립의 고유성에 대한 소고: 스페인과의 관계에서 본 성격과 의미를 중심으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33.2 (2020)

3.2. 러시아에서의 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은 러시아 제국에서도 비밀 결사 단체로 반차르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프리메이슨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는 1917년 2월 혁명 전후였다. 니콜라이 비사리오노비치 네크라소프의 증언에 따르면 2월 혁명 시기 단원들의 수는 약 300~350명 사이었다.[38] 그리고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다양한 정당이나 정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인민주의(나로드니키) 세력 : 알렉산더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알렉산더 알렉세비치 데미아노프, 파벨 니콜라예비치 페레베제프, 게오르기 드미트리예비치 시다몬-에리스토프, 세르게이 드미트리예비치 므스티슬랍스키, 멘셰비키적 성향의 인물: 니콜라이 세모노비치 치헤이제, 예브게니아 페트로비치 게게치코리, 아카키 이바노비치 치헨켈리,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프로코포비치,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쿠스코바

입헌 민주당(카데트) 소속 : 니콜라이 비사리오노비치 네크라소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콜류바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스테파노프,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볼코프

진보당 소속 : 이반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 알렉세이 아나톨예비치 오를로프-다비도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롭카

우크라이나 독립 세력 : 표도르 루돌포비치 슈타인겔,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로비치-바르스키, 니콜라이 프로코피에비치 바실렌코, 레브 블라디미로비치 피사르젭스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루솁스키.[39]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멜구노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정치적 프리메이슨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건 네크라소프, 케렌스키, 미하일 이바노비치 테레셴코 3인방이었고, 1916년에 코노발로프와 예프레모프가 더해져 5인방이 되었다. [40]

프리메이슨 운동 참여자들의 정치적 소속은 다양했지만 포괄적인 정치적 목적은 동일하였다. 정파와 무관하게 차르 전제정에 반대하였다.[41] 그레고리 야코블레비치 아론손은 당시 러시아 프리메이슨단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단체의 비밀적 성격, 다른 하나는 소속된 인물들의 "잡다함, 다채로움, 다양성"이었다.

아론손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은 정당이 아니라 초정당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의 중심을 갖고자 했던 사람들이 연합한 단체였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 운동에는 입헌 민주당과 진보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인민주의자들은 참여하였지만 극우 세력은 배제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정파에 속했다는 데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가입식에 약속한 비밀 준수에 따라 프리메이슨들은 자신들이 그런 조직에 속했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소속 정당이나 정파에 알리지 않았다. 치헤이제 같은 사람들은 그런 프리메이슨 활동이 자신들이 소속된 당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42]

그런데 이들도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1917년 초에 볼셰비키가 선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때 프리메이슨단의 최고 협의회는 혁명 세력이 시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교섭을 결정했었다. 그런 목적으로 선출된 대표로 케렌스키, 네크라소프, 소콜로프, 알렉산더 야코블레비치 갈페른이 있었다. [43]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다른 정치 세력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프리메이슨들은 1917년 2월 하순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사태와 2월 혁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페른은 말한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혁명을 맞이했다. 혁명 초기에 우리가 가진 당혹감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2월의 사건들이 아주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에도, 그 사건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44]
2월 혁명 이후엔 제한적으로 일부 귀환한 혁명가들이 가입했다. 유명한 테러리스트이자 에쎄르인 보리스 사빈코프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45]

2월 혁명 이후 타브리드궁에서는 크레스티 감옥에서 해당된 멘셰비키, 4대 국가 두마의 사회 민주주의 당원들, 언론인들 그리고 몇 명의 볼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 좌파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임시 집회 위원를 구성하기로 결정됐다. 이 결정에 따라 임시 집행 위원회, 그다음에 상임 집행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프리메이슨들인 스코벨레프, 소콜로프,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수하노프, 케렌스키가 포함됐다. 소비에트 의장에는 '러시아민족들의 위대한 동방’(프리메이슨)의 최고 협의회 위원인 치헤이제가 선출됐다. 성립된 두마의 임시 위원회 속에는 네크라소프, 코노발로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카라울로프,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르젭스키, 케렌스키, 치헤이제 같은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포함되었다. 그에 따라 프리메이슨 조직은 국가 두마와 소비에트 양쪽에 자신들 파벌의 주요 인물들을 포진시켰다.[46] 1917년 3월 1일 저녁에 임시 정부의 구성이 결정되었고, 2일 밤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국가 두마 임시 위원회 합동 대표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임시 정부 장관 11명중에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몇 명인지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왔다.[47]

비탈리 이바노비치 스타르체프(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Старцев) 역사학 박사는 임시정부 초대 내각에서 프리메이슨 단원은 네크라소프가 증언한 3명(네크라소프, 케렌스키, 코로발로프)이라 설명했다.[48]

빅터 스테파노비치 브라체프(Виктор Степанович Брачев)역사학 박사는 11명의 장관 중 프리메이슨 단원은 최소 6명, 프리메이슨단과 관련을 맺은 경우도 포함하면 파벨 니콜라예비치 밀류코프를 제외한 최대 10명이었다.[49]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안드레예프( Дмит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дреев) 역사학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임시 정부 1차 내각에서는 11명 중 7명, 제1차 연립 정부에서는 15명 중 10명이 프리메이슨 단원들이었고, 제2차 연립 정부에서는 16명 중에 10명, 제3차 연립 정부에서는 17명 중 6명이 프리메이슨이었다.[50]

임시 정부 내각에서 프리메이슨 단원의 비중에 대해 스타르체프는 비교적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런 스타르체프도 10월 혁명 발생 전까지 장관들 중 프리메이슨 단원은 15명이라고 설명했다.[51]

임시 정부 각료 중 프리메이슨 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초기 임시 정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건 프리메이슨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3명설을 지지하는 스타르체프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세 사람은 연약한 성격의 게오르기 르보프 총리, 신성 종무원장인 르보프(В. Н. Львов), 이전에 프랑스 의전의 프리메이슨이었던 토지 장관인 신가료프(А. И. Шингарев)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초대 임시 정부 내각에서 강력한 급진 경향의 핵을 형성하였고, 임시 정부는 국방 장관인 10월 동맹당의 구치코프와 외무 장관인 밀류코프의 정치 노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52]
임시정부 초대 각료 구성에서 프리메이슨단의 영향력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가 테레셴코 임명 문제였다. 요젭 블라디미로비치 게센은 밀류코프에게 질문했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백만장자의 아들이었던 테레셴코가 어떻게 임시 정부 초대 내각에서 재무 장관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밀류코프는 이때는 "러시아 남쪽에서 어떤 유명한 인물을 정부 구성에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고 답변했었다.[53]

그러나 나중에 밀류코프가 쓴 회고록에 따르면 사실을 달랐다. 밀류코프는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증언한다:
“우리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새 사람, 즉 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자본가-장관’인 테레셴코를 추천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어떤 ‘명단’에서 그가 재무 장관으로 ‘슬쩍 들어왔는가?’ 그때 나는 근원이 바로 우리(즉 카데트)의 네크라소프와 예프레모프의 공화주의가 유래되었으며 케렌스키가 엮여있는 바로 그것이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 근원에 대해 나는 아주 나중에 알았다.”[54]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다른 회고록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나는 케렌스키와 네크라소프, 그리고 아직 언급하지 않았던 각료 두 사람, 즉 테레셴코와 코노발로프 사이의 유대를 또한 강조하고 싶다. 이들 네 사람은 성격, 과거, 그리고 정치적인 역할 면에서 매우 달랐다. 그렇지만 그들을 결합시킨 것은 단지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만이 아니었다. 이것 외에도, 그들은 순수하게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정치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모종의 개인적인 유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것과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되는 상호적인 의무감 같은 것으로 결합되어 있었다.”[55]
밀류코프가 말한 ‘정치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모종의 개인적인 유대’란 프리메이슨 조직인 ‘러시아 민족들의 위대한 동방’이다.[56]

밀류코프는 프리메이슨단의 존재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고 있다가 임시 정부가 성립된 이후에야 그 영향력을 실감하게 되었다.[57]

프리메이슨이 아니었던 밀류코프와 구치코프와는 달리, 프리메이슨 장관들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에 대해서도 밀류코프는 소비에트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하면 프리메이슨 ‘러시아 민족들의 위대한 동방’에 소속된 장관들은 소비에트와의 협력을 강조하였다.[58]

임시 정부 초대 내각을 대표하던 인물은 외무 장관인 밀류코프였다. 그렇지만 그는 불과 2개월여 만에 실각하고 말았다. 물론 이건 당연히 프리메이슨 때문만이 아니라 2월 혁명 이후 복잡한 국내외 정세 때문이다. 1917년의 러시아의 전반적인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됐고, 볼셰비키 지도자인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여 이른바 "4월 테제"를 발표했고, 경제적인 혼란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밀류코프가 실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쟁 지속 문제였다.

그러나 이면에는 프리메이슨단에 속한 인물들의 압력이 있었다. 케렌스키, 네크라소프, 코노발로프는 임시 정부 내각에서 보다 급진적인 경향을 보여주었고, 국방 장관인 10월 동맹당의 구치코프와 외무 장관인 밀류코프 같은 온건파 정치 노선 제압에 성공했다. 밀류코프는 케렌스키에게 "7명의 정부 각료들"이 밀류코프를 외무 장관직에서 경질하고 인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밀류코프 경질을 결정한 7명 중 그 핵심에는 프리메이슨 3인방인 케렌스키, 네크라소프, 테레셴코가 있었다. 나머지 4명은 우파 장관인 블라디미르 르보프, 고드네프, 케렌스키의 정치적 친구인 코노발로프와 르보프 공이었다. 밀류코프를 뒤이어 외무 장관이 된 살마은 테레셴코였다.[59][60]

임시 정부 시기 프리메이슨단의 활동은 주로 최고 협의회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당시 최고 협의회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던 부분은 좌파 정당들을 연합 노선 속에 붙잡아 두기 위해 좌파 정당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 일에서 큰 역할을 맡은 살마은 멘셰비키에 속한 갈페른이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 있던 치헤이제는 비록 프리메이슨으로서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갈페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61]

프리메이슨들의 중심 조직인 최고 협의회가 지지하고 있던 것은 민주주의적 연대였고, 이 점은 2월 혁명 이후에도 여전하였다.[62]

이 시기에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정치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고, 중앙 정부 및 지방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케렌스키가 1917년 7월 초에 임시 정부 총리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다수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정부의 각종 직책에 임명되었다. 스타르체프에 따르자면 1917년에 중요한 행정직에 임명된 단원들은 도합 148명이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지방 행정직의 인사 문제에도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갈페른이 말한 바에 따르면, “주지사 자리에 누구를 임명할 것인지, 그리고 다른 중요한 행정직에 누구를 임명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해당 지방의 랏지의 단원들이 고려 대상이 되었다. 만약 그들 가운데 적임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였다.”[63]

하지만 프리메이슨단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어 가고 있었다. 2월 혁명 직전에 랏지는 약 40개였으나 10월 무렵엔 28개로 줄어들었다. 1917년 당시 프리메이슨 단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러시아 전체를 통들어도 300~350명(최대 추정치도 500명)이었다. 혁명 이전에도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혁명적 상황 속에서 활동 여건이 크게 변하였다.

스타르체프에 따르면 혁명 이전에 차르 정부에 의하여 정치적인 활동이 억압되던 시기에는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많지 않은 반정부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했었다. 반면에 혁명으로 갑작스럽게 자유가 허용되자 불과 수백 명인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흡사 바닷속의 물 한 방울과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64]

또한 2월 혁명 이후에는 정치가와 전문가들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이 정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중은 냉정한 정치적 판단력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감정이나 집단적 이해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에게 이해되는 구호를 내걸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유리했다. 따라서 도덕적인 자기완성이나 진보, 자유, 민주주의라는 프리메이슨의 기보 원칙들은 혁명적 상황에서는 별다른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65]

대중 속에 조직을 가지고 있던 혁명 정당들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었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붕괴된 이후에 유형 및 망명 생활을 하던 일급 혁명가들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인민주의자들은 역할이 축소되었다. 1917년 3월 중순에 카메네프, 스탈린, 4월 초에 레닌과 지노비예프 등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각각 유형지 및 망명지로부터 귀국하자 프리메이슨들은 더욱 위축되었다. 볼셰비키는 프리메이슨단과 연결을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66]

조호연 박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추가하고 있다: 2월 혁명 이후엔 프리메이슨 단원들 내부에서도 적대감이 너무 강하여 모임을 소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리메이슨단의 정치적 목표는 전제정의 철폐였다. 그런데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붕괴되어 정치적 목표가가 달성되자 자유주의자들 내에서 상대적으로 급진적 성향이었던 네크라소프 같은 입헌 민주당 좌파가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비교하여 오히려 온건한 세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프리메이슨들은 혁명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했던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사실 원래부터 정보 획득 및 혁명의 한 방편으로서 가입했던 것이나 2월 혁명 이후에는 더 이상 프리메이슨단 활동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67]

치헤이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 나는 랏지나 최고 협의회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떻게 하여 관계가 즉각 단절되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곳에서 나를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활동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68]

갈페른의 증언에 따르자면 치헤이제는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 갈페른에게 프리메이슨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면서 프리메이슨단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프리메이슨들은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조직의 틀 내에 묶어두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69]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10월 혁명 이후 프리메이슨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운동은 소련 해체된 1991년에야 다시 등장한다.[70]

프리메이슨들은 볼셰비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10월 혁명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조호연은 " 엘리트 중심의 프리메이슨 운동이 지닌 한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 결론 내렸다.[71]

4. 지회(lodge)


프리메이슨은 랏지Lodge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고대의 석공들이 교회를 짓고 있을 때 오두막(lodge)에서 모이곤 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랏지는 가톨릭의 교황청처럼 중앙 조직의 명령으로 세워지는 게 아니라 랏지를 세우기 원하는 지역의 프리메이슨 회원이 그 근방 랏지의 회원들에게 허락을 받아 세우는 방식이다.[72] 가장 높은 권위의 랏지는 영국 런던의 United Grand Lodge of England이고 이 랏지의 수장Grand Master은 현재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이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각 랏지는 자치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UGLE와 켄트 공작의 권위는 성공회에서 캔터베리 대성당과 캔터베리 대주교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때문인지 초기 외국인의 묘지로 사용된 양화진 묘지에 가보면 프리메이슨 단원들의 무덤이 있다. 묘비에 프리메이슨의 상징이 새겨졌으면 확실하다. 이 중에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어니스트 베델도 있다. 베델은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더불어 프리메이슨 한양 지부 창립 회원이었다.

음모론의 영향 탓에 뭔가 비밀 본부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리메이슨 랏지라고 당당히 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뉴욕 23번가에 있는 랏지의 경우 건물 외벽에 큼지막한 프리메이슨 로고가 그려져 있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군인이나 경찰들처럼 자신의 차량 번호판이나 차량 스티커로 프리메이슨 로고를 부착하고 다녀서 알아보기도 쉬워 비밀결사로 보이진 않는다.
파일:맨해튼23가프리메이슨로지.jpg
미국 필라델피아 시청 바로 옆에 세계에서 가장 큰 랏지 세 곳 중하나가 있다. 이 랏지 역시 프리메이슨 로고가 박혀있고, 돈 내고 입장하면 관광 가이드를 따라 내부를 볼 수도 있다.

단, 견학 일정은 하루에 4번 정도뿐이고 반드시 정각에 시작하기 때문에, 랏지에 정말 가보고 싶다면 여행 계획을 견학에 맞출 각오가 되어어야 한다.

4.1. 랏지 내부의 구조

파일:external/www.fatimamovement.com/masonic-lodge-altar.jpg
프리메이슨의 랏지들엔 공통적으로 홀이 있는데, 이 홀은 동쪽 방향에 최고 직위자의 좌석, 서쪽에 2위 직위자석, 남쪽에 3위 직위자의 좌석이 있다. 북쪽은 이런 좌석이 없는데, 북쪽이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위치이며, 암흑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홀의 중앙에는 프리메이슨 입단 의식을 위한 곳이 마련되어 있다.

참고로, 프리메이슨 랏지를 포함해서, 프리메이슨 기념물 등 각종 프리메이슨 후원으로 인해 지어진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화려한데 주변 건물들에 묻혀서 눈에 띄지 않는 절묘한 위치 배정을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필라델피아의 그랜드 랏지는 굉장히 화려함에도 만만치 않게 화려한 시청 건물, 교회, 행정부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는다.[73] 대놓고 프리메이슨 심볼을 박아 넣고 주변에 메이슨 사원이라고 안내판이 박혀 있음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또한 도쿄의 프리메이슨 랏지는 유명 관광지인 도쿄 타워 바로 옆에 있는데, 입구에 프리메이슨 로고가 새겨진 비석까지 있는데도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건물인가 하고 넘어갈 정도의 평범함을 자랑한다.

5. 음모론에서의 프리메이슨

5.1. 기원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기원은 크게 3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로 가톨릭교회와의 사이가 매우 안 좋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리메이슨 사상의 기반이 이신론이라 인격신을 숭상하는 가톨릭교회와 상극일 수밖에 없고, 가톨릭교회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거나 어느 형태로든 친교를 갖는 자를 자동 파문 한다는 선언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74] 프리메이슨 측에서도 가톨릭과 무력 충돌 하는 등 대중에게 비춰지는 인식이 매우 안 좋았다. 실제로 관련 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지하에서 활동하는 테러 조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또 하나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의 영향. 나치는 1차 대전기 독일 제국부터 이어진 배후중상설을 믿고 있었는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유대인과 프리메이슨 등이 집중적인 포화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는 비단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기타 나치 체제 부적응자뿐 아니라 프리메이슨 단원들도 수용되었다. 단원들은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빨간 역삼각형 표식을 달고 다녔고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무려 8~20만 명의 프리메이슨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프리메이슨 단원들 사이에서 물망초[75]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단원들을 추모하는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간혹 물망초 모양의 뱃지를 달고 있는 프리메이슨 단원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리메이슨 세계 그림자 정부설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이탈리아 P2 사건이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지역 랏지의 승인을 받지 못한 프로파간다 두에라는[76] 랏지가 이에 앙심을 품고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포섭해 이탈리아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프리메이슨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나빠졌고, 이후 마치 프리메이슨이 모든 정부의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비밀 결사인 양 잘못 묘사되게 되었다.

반유대주의자들이 조작한 시온 의정서에서는 유대인-프리메이슨 음모론(Judeo-Masonic conspiracy theory)이 나온다.

5.2. 비판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음모론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저희는 세계를 정복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무슨 정부를 전복시킨다든지 하는 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저희가 비밀주의의 요소를 보존하려는 이유는 그게 프리메이슨을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일 따름이에요."
-고대 프리메이슨 명예 회의 그랜드 마스터 크리스틴 채프먼
전 세계 수많은 멤버를 가지고 있다는 점, 그냥 수상한 소문이 도는 덕에 음모론의 주 떡밥이다. 대표적으로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이 관계가 있다는 음모론이 유명하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워낙 대중화되어서 비종교, 반종교적인 음모론 애호가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도 보여진다.

프리메이슨은 이집트에서 시작한 서양 문명의 줄기가 그리스와 로마, 유럽을 거쳐 현재는 국부(國父)들을 통해 미국으로 이어졌으며, 미국이 문명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관점이 있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유럽에서는 큰 인기를 못 누리는 반면 아메리카, 특히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인기가 있다.

무엇보다 프리메이슨 관련 음모론은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음모론이다. 쉽게 말해 아무런 근거가 없다. 현실의 프리메이슨은 세계급 거대 사교 클럽일 뿐이다.[77]

일루미나티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일루미나티 문서에도 나와있듯 일루미나티 음모론 자체가 헛소리이고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는 서로 다른 조직이다. 예전의 전성기 시절의 프리메이슨이라면 물론 일루미나티를 합병할 정도로 강력했겠지만[78] 지금은 완전히 다른 조직이다. 물론 일루미나티의 잔존 세력이 프리메이슨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황금여명회 장미십자회가 들어온 것처럼....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가 전 세계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다니기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물론 증거를 은폐한다는 증거도 없다(...).

요즘은 프리메이슨이 침체되면서 회원 수가 격감되고 현대에 와서 단체의 성격 자체가 바뀌면서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당연히 각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여있거나 있었고, 이런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인맥에 큰 영향을 주는 만큼 사회적 영향력은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프리메이슨은 사교, 즉 친목을 도모하는 곳이지, 정치 집단으로 설계된 단체가 아니라고 대외적으로 말한다. 그 영향력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프리메이슨 자체에서도 정치 관련 얘기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프리메이슨이 세계적 단체로 성장했던 이유로 뽑는 것이 바로 내부에서의 정치, 종교 관련 얘기를 금지하는 것이다. 당장 현대 한국에서도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민감하고 분쟁의 여지가 큰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아닥하라고 눈총을 받는 경우가 많다거나, 적지 않은 커뮤니티들이 내부 분쟁을 피하기 위해 정치 이야기를 금지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정치나 종교처럼 논쟁의 여지가 많은 화제가 허용되는 친목 조직은 십중팔구 분란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 애초에 체계적인 세계 통치 같은 것은 이런 형태의 집단이 이루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짜 제대로 된 통치 조직을 만든다면 제대로 된 정규 회의 형태를 띠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런 친목 단체 말고.

프리메이슨이 유대인들이 만든 음모 조직이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다. 물론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다만, 실제로 어느 정도 유대인들을 위한 조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초창기 프리메이슨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시절엔 탄압받던 유대인들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가할 수 없었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 아무리 세계구급 인사들이 모인 사교 단체라도 돈줄이 필요한지라, 억압받던 유대인들이 돈줄이 되어주면서 정치 참여용 창구로 쓰고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로는 생각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후 프리메이슨의 정치적 존재감은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정치 참가가 가능해지면서 수면 아래를 넘어 내핵으로 처박힌다. 즉, 행여나 실제로 유대인들이 이용한 것이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제는 정치적 영향력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프리메이슨의 정치적 존재감이 내핵에서 다시 해수면으로 올라오는 것은 미국의 독립 전쟁이 벌어질 즈음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유대인들이 정치 참가가 가능한 시기이기 때문에 대리 정치를 위한 창구가 당연히 필요 없다. 프리메이슨이 실제로 유대인에게 의해 정치 단체로 쓰였더라도, 그 이후에 프리메이슨의 정치적 존재감이 증발해 버리는 사실을 고려하면 결국 이 시기의 프리메이슨은 순전한 사교 단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루미나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며 프리메이슨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단체도 아닌 데다가 프리메이슨도 이미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던 것도 옛날이야기. 현대에는 신입 회원의 부족으로 인해 존재 자체가 소멸할 위기가 닥쳐올 정도로 퇴물이 다 된 집단이다.

6. 신비학에서의 프리메이슨


비단 프리메이슨뿐이 아니라 여타 장미십자회 계열의 단체들을 모두 포함할 경우, 이들은 신비학에 있어서 대단히 큰 뿌리를 내리고 있다.

프리메이슨이 신비학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 것은, 신비학의 시초가 철학/수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문이라는 것-프리메이슨의 시초가 석공 조합-간단히 말해서 수학에 해박한 지식인의 그룹이었다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세기 이전의 저명한 연금술사/ 마스터/ 매지션[79]들의 저서를 외국에서 구매할 경우, 대부분 장미십자회의 로고가 찍혀져 있거나 프리메이슨의 전지안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신비학 저서 쪽에서 이 단체들의 영향력은 강하다.

신비학이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해골 머리 위에 양초 올려놓고 마법진을 그리고 주변에 복잡한 주문을 적어놓는 판타지적인 그것이 아니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정신적 해탈을 위한 일종의 종교적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내면적으로는 동양의 전통 종교적인 면도 꽤 강하고, 종교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물론 마법진을 그리는 것 역시 신비학의 일부로서 존재하지만.

현대 기준으로는 오컬트나 판타지, 미신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프리메이슨에 큰 영향을 끼친 것 역시 프리메이슨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면 간단하다. 신뢰하기 힘든 고대 기원설은 다 빼고 신뢰성 높은 증거들이 남아있는 시점만 따지더라도 프리메이슨의 결성 및 발전 시기는 18세기 초반, 즉 근세 말~근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현대(21세기 초반)의 기준에서 미신, 오컬트, 판타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많은 영역들이 근대 후기~현대 초반(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과학이나 사상/철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미신 내지는 유사 과학의 영역인 골상학만 하더라도 20세기 초반까지는 당당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대접받고 있었던 것. 심지어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 골상학과 별 차이가 없는 혈액형 심리학 같은 것을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현대인에게 익숙한 과학적 방법론 및 그에 기반한 이성적 합리주의가 사회 전반을 주도하게 된 것 자체가 현대(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 따라서 현대 기준으로는 오컬트나 미신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학적 요소들이지만 프리메이슨이 성립하고 발전하던 당시에는 과학이나 사상, 철학의 한 영역으로 여겨졌기에 '당시 사회의 기준에서' 학문적 최신 사조를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 그리고 역사가 긴 조직인 만큼 발전기부터 축적되어 온 성과들을 사회가 변화한 현대에 와서도 쉽게 버리지 않는 보수적인 경향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7. 현재의 프리메이슨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프리메이슨의 신학적 기반인 보수적 자유주의 신학이 세를 잃어가며 프리메이슨도 덩달아 세를 잃어갔다.

신입 회원의 부족으로 인해 소멸할 위기가 닥쳐와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2015년부터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상단에 모집 광고도 냈다. 미국 북동부에 유독 프리메이슨의 영향이 많이 발견되는데, 지금은 상당수의 랏지들이 폐쇄되어 있다. 프리메이슨이 지은 마을들도 주민들이 다 떠나가고 프리메이슨이 있었던 흔적만 남았을 정도로 프리메이슨은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대가 변하고 이전까지 프리메이슨을 강력하게 유지해 주던 계몽주의적 이성관, 상류층에게 필요한 사교 장소라는 두 기둥이 무너지면서 매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가 있어야 하고, 21살 이상이어야 하고, 부양 가족이 있어야 하며, 연 수입이 일정 이상 되는 고정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등 가입 조건도 까다롭기 그지없는 데다가 가입비와 연회비가 만만치 않고, 가입한 이후의 메리트도 없고, 기껏 가입해도 대부분이 모임 한 번 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기껏 모여봐야 고연령층 인사들과 맛없는 식사, 영수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지루한 회의 등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웃긴 점은 정작 많은 종교에서는 프리메이슨을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리메이슨이 전성기를 맞은 근세에서 산업화 초기 시대 사이의 서구 문명권에서 프리메이슨은 명확하게 진보적, 혁신적인 계몽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이러한 급진성을 상실했다. 예를 들어, 귀족의 신분적 특권이 당연하던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가진 21세 이상의 남성에게 널리 열려있던 프리메이슨은 분명 개방적인 모임이었다.

하지만 보통 선거권이 일반화된 현대 기준으로 보면 보수적이다 못해 잘난 체가 지나쳐서 밥맛 떨어지는 모임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도 '종교(곧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주도 이념이던 근세~근대 서구 문화권의 기준으로 보면 프리메이슨의 이신론은 이단적일 정도로 혁신적인 관점이었지만 무신론이나 무신앙의 자유가 보장된[80] 현대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종교적'이며, 프리메이슨 특유의 신비주의적 요소들 역시 과거에는 수학적, 철학적 고민의 산물이었지만 현대 기준으로는 미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프리메이슨의 쇠퇴는 프리메이슨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기에,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현대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 그래서 남아있는 회원은 소수라고 한다. 그래도 명목상 유지는 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현재까지도 프리메이슨이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전용 랏지도 존재한다.

공식적으로 "경찰관이 몇 명 단원으로 있긴 하지만 이 때문에 특혜를 받은 것은 본 적 없다"고 주장하지만 프리메이슨이 경찰과 사법부 내의 부패와 연관돼 있다는 의혹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프리메이슨의 규율은 단원들이 서로를 돕고 법이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단원들의 비밀을 지켜줄 것을 요구한다. 때문에 부패한 파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따르곤 했다. 물론 이게 그림자 정부 운운하는 것과 관련된 얘기는 아니고, 일단 형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비밀주의 성향이 있는 단체에 가입해 있는 공직자가 있으면, 단체 회원들을 통해 구축한 인맥을 통해 부정부패를 일으키기가 쉽다는 얘기에 불과하다. 공직자 몇몇이 비밀 단체를 끼고 부정 축재 하는 걸 프리메이슨이 정부를 쥐락펴락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 같으면, 재벌 세력 등, 정부를 꼭두각시로 부리는 단체가 한둘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웬만한 정치 단체들보다도 존재감이 희박한 단체다. 이 정도면 정부를 흔드는 건 고사하고, 정치인 몇 명 포섭하는 것도 꿈나라 얘기다.

이 역시도 프리메이슨에 대한 많은 낭설처럼, 프리메이슨이라는 조직이 탄생한 시점과 그 전성기가 언제인지를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 가능한 부분이다. 21세기 사회에서는 친분이나 인맥을 바탕으로 특혜를 주는 것을 불공정하다고 여기고 몹시 부정적으로 보거나 범죄시하지만 프리메이슨이 탄생하여 전성기를 보낸 근세 말~근대, 더 길게는 현대 초기까지도 이런 행태가 그렇게까지 나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왕 하려면 믿을만한 사람하고 해야지' 하는 식으로 '아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사회적으로도 그 때문에 기회를 잃고 억울한 사람이 있을지언정 할 수 없는 일, 또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신분 제도의 영향력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던 사회에서 실적주의적 공정성을 기대해 봤자 헛일이다. 이것이 꼭 과거의 이야기라고만 할 것도 아니고,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인맥에 의한 연고주의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딱 한마디로 간단히 표현하는 꽌시라는 개념이 있고, 당장 한국에서도 아직 민주화의 성과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80~90년대까지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 영향력을 공공연히 과시하고 행사했다. 심지어 공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현대 사회에서도 연고주의의 일파인 엽관주의가 제도의 일부로 정착되어 있고,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의 전성기였던 근대, 프리메이슨과 같은 '고급 사교 클럽'의 존재 의의가 바로 '인맥'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또는 일단 사회적으로 자리부터 잡고 성공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돕고 도우며 기회와 혜택을 제공할 인맥을 만들어주는 공간이 바로 고급 사교 클럽인 것이다. 프리메이슨뿐 아니라 문서 초반에 설명된 것처럼 로타리 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등도 비슷하다. 아예 입회 자격 자체가 지역 유지나 전문직 종사자, 지식인, 사업가 등 서로에게 인맥이 되어줄 사람들만 뽑아내기 딱 좋은 것이니[81] 그 안에 들어와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유용한 인맥이 되어줄 만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시대가 변하여 사회의 윤리적 기준도 달라지면서 이전 시대에는 '상식'이고 '그것도 능력'이던 것들이 '부정부패'로 재분류된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리메이슨이 경찰과 사법부 내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당장 한국에서도 불과 20세기 말까지는 법적 문제가 생기면 별 죄의식 없이 "너 혹시 경찰 없어? 아는 판검사는 없어?" 하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즉 단원들이 서로를 돕고 비밀을 지켜주라는 프리메이슨의 규율은 단원들이 서로의 연고이자 인맥이 되어주라는 의미가 맞다. 다만 이는 단순한 이익 집단의 행동 원리에 가깝지 무슨 그림자 세계 정부 같은 어반 판타지와는 상관없는 것. 그리고 '상부상조'와 '부정행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또 각각의 사람들과 그들이 속하는 사회에 따라서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기에 어떤 프리메이슨 회원들이 한 행위는 사회적 기준에서 부정부패에 해당하여 지탄받은 것았으며, 그랜드 마스터 채프먼은 프리메이슨의 주요 인사로서 (어쨌건 공식적으로는) 프리메이슨은 그런 부정행위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변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랜드 마스터 채프먼은 프리메이슨의 비밀주의가 "뭔가 음험한 것"을 감추려는 게 아니라 매력과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임을 강조한다. 기사

2017년에는 프리메이슨에 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다. 음모론 다큐멘터리는 아니고, 오히려 프리메이슨 멤버들의 생활을 코믹하게 다룬 내용이다. 불성실하고 개념 없는 초보 단원에 뒷목 잡는 선배 단원, 의식서 외우기를 힘겨워하는 젊은 워십풀 마스터 등 음모론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일면들을 볼 수 있다.

7.1. 프리메이슨이 되려면?


먼저 프리메이슨의 기본 구조에 대해서 약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하 내용은 제일 기본적인 내용으로 웬만한 프리메이슨 단체 홈페이지에 친절하게 나와있다. 물론 영어로. 상단에 언급되어 있듯이 프리메이슨의 기본 주체 단위는 각 지역의 랏지다. 교황이 있는 바티칸 같은 중앙 집권 기관이 없다. 국가 차원에서 그랜드 랏지예)Grand Lodge Of Japan 가 있는 경우도 있고 미국의 경우는 각 주마다 거의 독립 단체나 다름없는 그랜드 랏지가 있으나 실제적인 운영, 신규 회원 가입 절차, 각종 의식의 수행은 각 랏지의 재량에 맡기게 된다. 운영에 필요한 자금 또한 랏지의 회비로 충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마음대로 "나도 프리메이슨이오" 하고 주장하면 프리메이슨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최소 18세기 초반, 또는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따르고 영국/스코틀랜드 (United Grand Lodge of England/Grand Lodge of Scotland)의 원조 격 구조 및 의식을 지키는 랏지가 정식 랏지Regular Lodge로 인정이 된다.

이와 같이 큰 틀에서는 공통점을 공유하지만 각 국가/지역마다 색깔이 있다 보니 가입 조건도 약간씩 다르다. 하지만 근 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본 틀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프리메이슨이 되기 위해서는:
  1. 21세 (일부 지역은 18세) 이상의 남성이어야 한다.
  2. 도덕적인 (즉 심각한 범죄 기록이 없는) 자유인이어야 한다.
  3. 신 또는 절대자Supreme Being를 믿어야 한다. 믿는 종교엔 제한이 없지만, 무신론자/불가지론자는 프리메이슨이 될 수 없다.

이상이 절대적인 가입 조건이고 이 외에 가족을 부양하면서 가입비와 회비를 낼 재력이 있는지 등을 보게 된다. 회비 또한 제각각이지만 가입비 기십만 원에 연회비 10~20만 원 정도 내는 랏지가 대부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리메이슨은 공개적으로 회원 모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가입자 수가 너무 저조해지자 미국 일부 주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프리메이슨에 대한 홍보를 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지만 그래도 공개적으로 가입을 유도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만약 누가 와서 프리메이슨에 가입을 권유하거나 돈을 요구하면 정식 랏지가 아니다. 즉 사이비.

참고로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한국 내에도 랏지들이 존재하고 종종 한국인 가입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중요한 사실은 메이슨 회합의 의사소통에서 다수의 외국인(메이슨은 한국인 등 동양인이 메인이 아니다.)과의 소통이 필요하므로 영어 회화 능력을 의외로 높게 본다고 한다.

미국에선 프리메이슨 회원들이 차 범퍼나 배지 등에 2B1ASK1(TO BE ONE, ASK ONE) 이라는 표어를 많이 붙이고 다니는데, 프리메이슨이 되고 싶으면 프리메이슨 회원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즉 프리메이슨이 되는 방법은 본인이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고 탐구하는 것이다.[82] 각 지역 랏지의 연락처는 공개되어 있고 웬만한 랏지는 적어도 페북 페이지 정도는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프리메이슨들은 자기들의 단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매우 감격한다. 전 세계 프리메이슨 지부 대부분이 구성원들의 고령화와 청년층의 관심 이탈로 인해 말라 죽어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젊은 프리메이슨들은 살다 보니 프리메이슨이었던 친한 학교 은사님, 동네 아저씨, 지역 어르신 따라 몇몇 젊은이들이 어쩌다가 가입하게 되면 처음에는 엄청나게 성심 어린 환영과 접대에 감격하다가 정식 회원 되고 나면 막상 하는 게 동네 늙은이들 따라다니면서 말동무해 주고 사실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이런 동네 어르신들 친목회 관리하는 일인데 쓸데없는 책무, 무게 잡는 분위기에 지겨워하다가 유령 회원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7.2. 한국의 프리메이슨

8. 그리스도교와 프리메이슨

가톨릭은 아직도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것을 정당한 형벌로 처벌되어야 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3년 1월 25일에 반포한 새 교회 법전 제1374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1374 조 교회를 거슬러 음모하는 단체에 가입하는 자는 정당한 형벌로 처벌되어야 한다. 또 이러한 단체를 조장하거나 주관하는 자는 금지 제재로 처벌되어야 한다.[88]

1917년에 공포된 구 교회 법전과는 다르게 1983년에 공포된 새 교회 법전에서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성직자를 또는 수도자들에게만 귀속되는 특별 처벌에 관한 언급이 없고,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로 분류하고 있지 않다. 새 교회 법전은 이러한 단체에 단순 가담 한 자(정당한 형벌로 처벌)와 이러한 단체를 조장하거나 주관하는 자(금지 제재로 처벌)로 나누고 있다. 둘 다 명령적 형벌(1344조)이고, 미확정적이면시(1349조), 선고 처벌이다. 선고 처벌이므로 주교가 파문을 선고할 수 있다. 실제로 링컨 교구의 페이비언 브루스키위츠(Fabian Bruskewitz) 주교는 1996년 성명을 통해 1개월 이상 프리메이슨이나 교회를 거슬러 음모하는 단체에 소속될 경우 선고 처벌의 파문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이들은 파문당하였다. 교황청은 파문을 지지하였다. 또한 필리핀 천주교 주교 회의는 2003년 선언을 통해 "프리메이슨 정신을 고수하는 신자는 교회법 1364에 의해 자동 파문 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1983년에 반포된 새 교회법에서는 프리메이슨에 관한 명시적인 조항이 삭제되었지만, 1983년 11월 26일 교황청 신앙교리성 '프리메이슨 단체들에 관한 선언'을 통해 "프리메이슨 단체들에 속하는 충실한 지지자들은 대죄 상태에 있으므로 영성체를 하지 못합니다." 라고 밝혔다.

이런 정책에는 역사적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 19세기 들어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프리메이슨의 기본적인 사상 조류였던 계몽주의 철학에 따른 이신론(理神論) 성향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서유럽 미국 등지에 확산되면서 반(反) 사제주의와 함께 반(反)가톨릭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의 이신론은 종교 상대주의를 내세워 국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삽입시키는 데 한몫을 했는데, 이 때문에 가톨릭의 교세가 위축된 점도 크다. 근대 유럽에서 계몽주의자들에 있어서 가톨릭은 까야 제맛으로 통했을 정도로 취급이 안 좋았고, 중세 유럽을 암흑시대라고 부르며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했다. 다만 가톨릭이 암흑시대를 부른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조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이 부분이 자세히 궁금하면 중세 항목을 참조하자.

다만 중세=암흑기=그 원흉은 가톨릭식의 단순한 도식이 부정된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프리메이슨의 성장기이자 전성기였던 근세 말~근대 기준으로 보면 가톨릭교회가 명확하게 반계몽주의 및 반근대주의/반진보적 입장을 취해온 것은 사실이다. 즉 중세의 가톨릭은 통념과는 달리 그렇게까지 억압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지식의 축적과 학문의 발전에 공헌해 온 바가 상당하지만 근세~근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민주주의나 공화주의, 종교의 자유와 세속 국가화, 신분제 폐지 등 새로운 사회 질서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왔다는 것. 즉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이 가톨릭을 까야 제맛 취급한 것이 꼭 중세에 대한 부족한 이해 탓은 아니었고, 당장 근세~근대 당대에 계몽주의자들과 격렬히 충돌하며 구질서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기인한 바도 크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대단히 도식적인 이해로, 근대 초기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계몽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당시 체제를 부정하고 공화주의나 혁명을 옹호한 것도 아니었고, 가톨릭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계몽주의, 반진보를 취했던 것도 아니다. '가톨릭 계몽주의(Catholic Enlightenment)'라는 학술 용어가 왜 있는지 생각해 보자...고 하는데, 가톨릭에 비판적인 의견들은 무조건 '역알못의 도식적인 이해' 취급하며 가톨릭의 긍정적 특성만을 강조해야 올바른 이해를 가진 것처럼 오도하는 이런 관점이야말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 계몽주의를 이야기할 것이라면 당장 교황 요한 23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근대의 가톨릭에서 근대주의자(modernist)라는 개념 자체가 명백한 비하와 의심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근대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통해 근대성, 세속화, 민주주의 및 공화주의에 맞서는 왕당파 및 구체제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도 생각해 보자. 물론 가톨릭교회는 근대 기준으로도 수억(현대 기준으로는 수십억)의 신도를 가진 거대한 집단이고, 계몽주의자들 역시 그 못지않게 거대하게 성장하여 영향력을 확보한 집단이니 그 구성원 중에는 자기 집단 주류와 이질적인 입장을 보이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질적 구성원의 존재만으로 주류적 입장을 부정하는 것은 무리수인 것. 단적인 예로, 미국 공화당의 중도파(공화당 내 진보파) 정치인 중에는 미국 민주당의 중도파(민주당 내 보수파) 정치인보다 더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정치인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런 일부 인물들이 있다는 이유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분석을 단지 도식적인 이해라고 비하하지는 않는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들을 나쁘게 볼 수밖에 없다. 특히 가톨릭 내 보수파 일각에서는 자유주의(신학적 의미든 정치적 의미이든)나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또한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도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며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다만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레벨이면 같은 보수파 신자 속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이 문서에서도 프리메이슨의 긴 역사와 보수성을 여러 번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프리메이슨보다 훨씬 역사가 길고 보수성이 강한 조직이 바로 가톨릭교회다. 예를 들어 현대(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가톨릭에서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소수파로 전락한 상태이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가 금지한 책(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나 다른 종교에 대한 책, 또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위배되는 사상이나 과학적 연구 결과를 다룬 책 등)을 읽거나 가톨릭교회가 지지하는 정당(주로 보수 정당이거나 군주제를 지지하는 정당, 종종 극우 파시즘 정당) 이외에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는 교회법상 범죄로서 최대 파문까지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가톨릭교회가 이런 입장을 본격적으로 포기한 기점이 바로 1962년~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였다. 그리고 60년대면 이미 프리메이슨 역시 슬슬 쇠퇴기에 접어들 무렵이다. 즉 근세~근대의 절정기 내내 두 조직은 서로 명백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정치 사회적으로 격렬하게 충돌하는 관계였던 것.

프리메이슨이 자유주의 개신교 종파들과 가까운 사이인 것 역시, 단순히 적의 적이니 친구라는 수준의 얄팍한 교류가 아니라 양쪽 모두 근대 계몽주의와 근대 자유주의(현대 기준으로 보면 보수적 자유주의 및 신학적 자유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나타났기에 서로 뜻이 맞는 바가 많아 자연스럽게 벌어진 현상인 셈. 물론 20세기 중후반 이후 '가톨릭교회는 사회와 국가가 세속주의화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프리메이슨 역시 진보적 개혁주의 세력이라는 정체성이 크게 희석'되면서 양자가 대립해야 할 이유 자체가 크게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근대 내내 치열하게 대립해 왔던 역사적 경험이 한순간에 사라질수는 없고, 가톨릭 역시 종교 조직이라는 특성상 필연적으로 보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종교 조직의 정체성은 수백 년간 누적되고 발전되어 온 '교리'에 의해 형성되고, 교리는 곧 종교적 진리와 연결된 것이므로 사회가 변화했다고 교리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당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대놓고 반대하는 성 비오 10세회 계열 세력을 생각해 보자.) 프리메이슨 역시 가톨릭교회만큼은 아니라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조직으로서 그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는 없기에 <이전까지 대립해 왔던 관성에 따라> 대립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당장 후술된 것처럼 프리메이슨을 명확하게 가톨릭교회와 양립할 수 없다고 명시한 교황 교지가 몇 건씩이나 있는 상황에서 후대 교황이라고 해도 '선대 교황의 교지가 이젠 무효다'라고 철회하여 교황과 바티칸, 가톨릭의 권위를 무너트리기는 쉽지 않다는 것. 차라리 교회 일치 운동 같은 거야 '분열되었던 교회의 재통합'이라는 강력한 대의가 있으니 약간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양보하고 입장을 철회할 동력이 있겠지만, 프리메이슨과의 대결 종식에는 그런 대의도 없으니 관성적 대립의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기 쉬운 상황인 것.

이에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이신론을 정죄하는 한편, 가톨릭 신자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것을 금했으며, 1892년 교황 레오 13세는 프리메이슨을 적그리스도라고 대놓고 거론하며 '하나에 가입함은 다른 것과 결별하는 것'이라는 불구대천지원수 격의 매우 강경한 교지를 내렸다.

1917년에 나온 교회법에서도 프리메이슨을 가입하면 자동 파문이라는 내용이 남았다.

흥미로운 것은 당대의 프리메이슨은 일종의 종교 조직에 공동체 조직이라 사립 학교[89]는 물론 상호 부조[90] 신용 조합을 설립했고, 가톨릭의 대처 역시 그에 대응해 맞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방식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각종 대학 등에서 가톨릭과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상당 수의 대학들이 프리메이슨 아니면 가톨릭교회(특히 예수회 계열)의 지원을 받아서 지어졌다.

제3자적 입장에서는 세속에 대한 영향력이 쇠퇴해 가던 가톨릭의 대응을 다룬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대에는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가톨릭이 다시금 영향력을 회복하면서[91] 프리메이슨과의 군비 경쟁은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 진영을 비롯한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프리메이슨과 가톨릭을 즐겨 엮는다. 이들은 프리메이슨을 극딜하며, 종말론을 설파하려고 프리메이슨 음모론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이 교황의 하수인이라거나 반대로 교황이 프리메이슨의 하수인이라거나. 반면에 가톨릭 계열 중에서도 교황 공석주의자들[92]은 현대 가톨릭교회나 교황을 프리메이슨에 포섭된 타락한 교회로 보기도 한다.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도 개신교 전체를 프리메이슨으로 매도하기도 하니 도긴개긴.

한편 정통주의 신학의 세가 강한 한국 개신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프리메이슨을 나쁘게 보는 편이지만[93] 근본주의 측의 프리메이슨이 가톨릭과 함께 세계를 지배한다는 음모론 또한 허튼소리로 치부한다.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의 득세로 프리메이슨의 기반인 보수적 자유주의 신학이 크게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는 근거가 부족한 음모론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한국에도 예외가 없다.

여호와의 증인은 20세기에 시작한 신흥 단체로, 1878년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 목사가 설립한 파별에서 비롯되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 연구생(Bible Students)이라 불렸다. 현대 여호와의 증인을 비판하는 복음주의 평론가들은 종종 여호와의 증인이 프리메이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러셀 목사 역시 프리메이슨이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그 어떤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를 입증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러셀 목사 역시 프리메이슨 소속이 아니라는 결론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 애초에 종교 활동에 시간을 많이 쏟으라는 요구가 큰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으로 활동하면서 프리메이슨 활동을 병행한다는 것은 백수가 아니라면 힘든 일이다(...).

9. 여담





10. 유명한 회원 목록

11. 관련 문서



[1] 프리메이슨의 정식 명칭. [2] 단체 이름이 Freemasonry이며 Freemason은 회원 각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3] accepted는 수용된 이란 뜻이며, claim 싸움이 이어져온 유럽사의 전통 상, 적법함을 인정 받는이란 의미가 된다. [4] Masonry는 Mason들의 단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긴 하나, 단어 자체의 1차적 의미는 본래 돌을 쌓는 일 자체를 의미한다. 즉, 자유롭고 적법한 대의를 수행한다는 의미 또한 포함하는 것이다. [5] Free and Accepted Masonry을 격식있게 줄여 표현하는 용어이다. Freemason은 엄밀히 말하면 꽤 무식한(?) 용어이자, 심각한 용어 오염이 시달리는 표현이므로, 이들을 지칭할때 고풍스럽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Masonry를 대신 쓰자. 고유 명사이니, the Masonry로 쓰면 된다. [6] 그래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가입하지 못했다. [7] 너무 황당하다는 이유로 여러번 지워졌으나, 몹시 비주류이긴 해도 프리메이슨 내에서 고대 이집트 문화에 특별히 심취한 이들 중 이 설을 미는 사람들이 있기에 서술하도록 한다. 이 여신의 제단을 관리하는 일에 굳이 약제사들이 관여해야 했던 이유는 하토르 문서를 참고. [8] 프리메이슨은 이 기원설을 따르고 있으며 히람 아비프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그의 죽음을 재현하기도 한다. [9] 석공이라 하면 얼핏 천한 직업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의 건축가들은 설계와 구조 기술을 모두 익혀야 했고, 천문학과 더불어 가장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요구되었으며 더불어 철학, 예술 등의 교양도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만큼 높이 존경받았다. 따라서 중세 유럽의 석공 집단이 단순히 을 깎는 기술인들이 아닌 동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회 일반에 알려진 프리메이슨의 기원이 중세 석공이라는 것은 결코 놀랍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선에서도 조선 후기가 아니면 중요한 공사를 맡은 목수는 정3품의 벼슬까지 받을 정도로 지위가 높았으나 조선 후기들어 대책 없이 지위가 낮아진 것이다. [10]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78쪽 [11]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79쪽 [12]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1쪽 [13]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1쪽 [14]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1 쪽 [15]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2쪽 [16]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3쪽 [17]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3쪽 [18]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2쪽 [19]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2~93쪽 [20]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4~86쪽, 93쪽 [21]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6쪽, 93쪽 [22]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7쪽 [23]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7~88쪽 [24]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8쪽 [25]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8쪽 [26]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8~89 [27]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28]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29]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30]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7쪽 [31]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32]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0쪽. [33]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1쪽. [34]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0쪽. [35]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1쪽. [36]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1쪽 [37]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3쪽. [38]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2쪽. [39]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112-113쪽. [40]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3쪽. [41]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3쪽. [42]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3~114쪽. [43]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4쪽. [44]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115쪽 재인용. [45]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6쪽, 주석 47. [46]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6쪽. [47]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6쪽. [48]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7쪽. [49]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117~118. [50]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8쪽. [51]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118쪽. [52]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8쪽 재인용. [53]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8~119쪽. [54]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9쪽 재인용. [55]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9쪽 재인용. [56]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19쪽. [57]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0쪽. [58]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0쪽. [59]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0~121쪽. [60] 논문의 저자도 인정했듯이 직접적인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으므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을 과장하지 말자. 밀류코프의 실각은 '밀류코프 각서'의 공개와 이에 분노한 노동자 대중과 병사들의 시위와 운동 때문이었지 하찮은 비밀 결사 단체의 음모 때문에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61]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2쪽. [62]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2~123쪽. [63]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4쪽. [64]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5~126쪽. [65]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6쪽. [66]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6쪽. [67]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7쪽. [68]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7~128쪽. [69]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8쪽. [70]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28~130쪽. [71] 조호연.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 역사문화연구 43 (2012), 132쪽. [72] 즉, 전 세계의 프리메이슨 조직이 하나의 지도부-중앙 조직의 영향력 아래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사교 클럽의 특성상 어떤 지역에서 새 모임을 만들 때 옆 지역 모임에 가서 인사하고 명함 교환한 뒤 알고 지내게 되면 '우리 모임의 일원' 으로 인정받는 것에 가깝다. [73]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가 더 화려하지만, 그럼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74]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 재위기부터 유지된 유구한 규정으로 1917년 구 교회 법전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었고, 현행 교회 법전에는 이를 단순화하여 “교회를 거슬러 음모하는 단체”에 가입하는 자를 처벌하는 규정으로만 두고 있으나, 프리메이슨에 가입·동조하는 행위는 직권자의 판단에 따라 여전히 파문 가능하다. 참고로 1826년 교황 레오 12세, 1846년 교황 비오 9세, 1892년 교황 레오 13세 등 역대 교황들은 연속하여 프리메이슨을 반교회 단체로 명시하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8.항 참조. [75] 영어명은 "Forget-me-not", 직역하면 "나를 잊지 말아요"다. 물망초라는 이름도 (아닐 물 勿 잊을 망 忘 풀 초 草) 이를 직역한 것. [76] P2는 약칭이다. 위키백과 참조. [77] 침례회 목사 제시 잭슨도 프리메이슨 회원이다. [78] 물론 일루미나티는 1785년에 공식 해체 되었으니, 전성기 시절의 프리메이슨일지라도 일루미나티를 합병하려 해도 합병할 수도 없다. [79] 셋 모두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80]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무신론을 주장할 시 문자 그대로 목이 달아나거나, 사회적으로 깔끔하게 매장되는 나라들이 아직 수두룩하긴 하다. 하지만, 한국이나 대다수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무신론이 대대적으로 용인받고 있으며, 종교의 자유 원칙에 따라 에 대한 관점이나 신앙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미덕으로 자리 잡혀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입 조건에 종교를 믿고 있을 것을 요구하는 단체가 매력적으로 보일 리가 없다. 뭣보다 현대까지 무신론을 금기시할 만큼 종교적 원리주의 성향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프리메이슨이 제대로 정착하여 활동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81] 근대 유럽의 프리메이슨을 기준으로 보면 "종교를 가진 21세 이상의 남성으로서 부양 가족이 있는 인물이며 일정 수준 이상의 연 수입이 있는 고정직이 있어야 한다" 자체가 "급진 과격파나 반사회적 단체 등과 관련이 없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으로서 평범한 시민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중에서도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기준이고, 상당한 가입비와 연회비를 내고까지 그 모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당연히 적극적으로 모임 내에서 활동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인 것. 전통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 역시, 프리메이슨의 전성기에는 어차피 여성의 사회적 활동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82] 다만 '탐구하라'는 게 무슨 지식을 추구하듯 탐구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으면 무슨 이상한 음모론 책자 같은 거나 보고 망상 키우지 말고 걍 회원한테 와서 물어보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83] 다만 해당 수신호는 프리메이슨들만의 수신호는 아니다. 근대 이후에 단순히 유행했던 수신호이기 때문. 일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카를 마르크스 등도 초상화를 그릴 때나 사진을 찍으면서 해당 수신호를 즐겨 했다. [84] 해당 묘원의 안장자 417명 중에 선교사는 가족 포함 145명뿐이며 심지어 한국 사람도 안치되어 있다. [85] 다만 고위급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며, 기밀인 부분도 많을 것이다. 또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설명하려다 보니 본 위키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많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86] 접선 번호는 채널의 재미 요소를 위해 진용진이 제안한 컨셉이라 한다. [87] 현재 다른 영상은 비공개 상태고, 한양 랏지 마스터와의 인터뷰 영상, 영국 최고 경영자와의 인터뷰 영상 등 2개 영상만 공개돼 있다. [88] 1917년 반포된 구 교회 법전에는 프리메이슨(masonic sects)이라고 명시적으로 나와있었으나, 새 교회 법전에서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 위와 같이 바뀌었다. [89] 이른바 아이비 리그 학교들이 이쪽 관련해서 커넥션이 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90] 일종의 [91] 정확히 말하면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은 기존의 강경한 보수적 정치색과 세속적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고, 그 반작용으로 종교적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회복한 것이다. [92] 전통 가톨릭 강경 보수파로 전부 이단이다. [93] 애초에 자유주의 신학의 이신론은 (신)정통주의에서 극혐하는 요소이다. [94] 미국 전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가 이 정당 소속이었다. [유튜버] 김원과도 합방을 하였으나 현재 영상을 찾아볼 수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hf0rEL9WQWA] [97] 자유민주당 창립자이자 초대 총재 겸 자민당 출신의 첫 총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