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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1:29:16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파일:러시아 공화국 국장.svg
러시아 공화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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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화국 제2대 총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Alexander Fedorovich Kerensky
파일:Karenskiy_AF_1917.jpg
출생 1881년 5월 4일[1]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울리야놉스크주 울리야놉스크)
사망 1970년 6월 11일 (향년 89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묘소 퍼트니 베일 묘지
재임기간 초대 임시정부 총리
1917년 7월 21일 ~ 9월 14일
제2대 총리
1917년 9월 14일 ~ 11월 7일
서명
파일:Kerensky_autograph.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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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9a6><colcolor=#fff> 신체 178cm[2]
부모 아버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케렌스키
어머니 나데즈다 알렉산드로브나 케렌스카야
배우자 올가 리보브나 바라놉스카야 (이혼)
리디아 케렌스카야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변호사, 정치인
소속 정당 사회혁명당 ( 트루도비키) }}}}}}}}}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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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정치인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중도민주파 인사들의 실패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유명한 법률가였던 그는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으며, 황제 니콜라이 2세 폐위 직후 온건 사회주의자의 지도자 격으로 러시아 공화국의 2대 총리를 맡았다.

니콜라이 2세에게서 정식으로 권력을 이양받는데는 성공했지만 부족한 정치 기반으로 인하여 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강경한 경제 개혁을 주장하거나 처음부터 임시정부와 협력할 의지가 없었던 극좌파 권위주의 군사독재를 원하는 극우파와의 조율에 실패하여 고통받던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2. 생애

2.1. 초기

1881년 5월 4일 심비르스크[3][4] 교사였던 표도르 케렌스키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배출해 낸, 일대에서는 나름대로 뼈대있는 가문이었다. 어머니의 가계에도 독일계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케렌스키의 외할머니가 농노 출신이어서, 유대인의 사생아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후일 케렌스키의 정적이 되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어린 시절 은사가 바로 케렌스키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해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중간에 법학과로 전과했다. 케렌스키는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정치범들을 변호해주면서 명성을 얻었고, 이를 토대로 트루도비키 소속으로 두마 의원직에 진출한다.

2.2. 2월 혁명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킨 1917년 2월 혁명 당시, 케렌스키는 주요한 혁명 지지 정치인 중의 하나이자 특별히 모난데가 없는 사람이었고 부르주아 계층 및 구 귀족 계층과 골고루 친했던 그의 성향 덕택에 어렵지 않게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겸 법무부 장관으로 선출된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케렌스키는 사형을 폐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보통 선거 도입을 노력하는 등, 민주주의 러시아에 이식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다.[5]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준 덕분에 2월 혁명부터 10월 혁명 사이의 짧은 기간은 러시아 문화 최후의 황금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가 적성에도 안 맞던 국방부 장관까지 겸직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1917년 7월에는 1차 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케렌스키 공세라고 알려진 대규모 공세를 지시하지만, 실패로 끝났다.[6] 1차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징집병들은 방한복이 없어서 감기가 걸린다던지 군화가 보급이 안돼서 발에 동상이 걸리는 와중에 이들의 고향에서는 물자 부족으로 고통이 심화되었다. 민중들은 전쟁을 최대한 빨리 종전시키기를 원했지만 케렌스키는 연합국들의 눈치를 보느라 전쟁을 계속시켰고, 이것이 물자부족과 패배로 이어지자 사람들이 케렌스키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케렌스키는 프랑스 영국에 대한 외교적 책무를 위해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민중들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7] 거기다 러시아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새로운 정부가 토지분배를 해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지주들의 반발을 우려한 케렌스키는 토지개혁의 의지가 없었다. 이때 볼세비키는 민중들에게 빵, 토지, 평화를 약속하며 러시아 민중들 지지를 받게된다.

또한 케렌스키는 무능한 통치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니콜라이 2세의 처형을 막았다. 니콜라이 2세의 무능하고 어리석고 비도덕적인 통치로 고통받은 민중들은 니콜라이 2세의 처형을 원했지만 케렌스키와 당시 볼셰비키를 제외한 주류 정치 세력들은 끝까지 니콜라이 2세의 처형을 막았고 이로 인해 민중들은 실망하여 러시아 정부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렇게 임시정부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임시정부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레닌과 독일이 공모했다는 증거를 수집하는 등 볼셰비키 당을 탄압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고[8], 마침 케렌스키 공세가 한창이던 7월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당이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요구하던 민중의 분위기에 휩쓸려 반정부 폭동에 가담하자 민심 달래기용으로 그나마 온건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케렌스키가 총리자리에 오르면서 레닌을 핀란드로 망명하게 하고 주요 볼셰비키 인사를 체포하는등 한숨 돌리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일선의 병사들과 후방의 민중들은 물자부족으로 전쟁을 수행할 의지를 상실했고, 전쟁 수행 능력도 떨어져 있었다. 거기다 1917년 7월 4일 케렌스키 정부는 전쟁중지를 외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무리수를 두면서 러시아 전국은 케렌스키 퇴진과 전쟁반대 시위로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했으며 1917년 가을이 되면 비공식적으로 200만 명 이상의 러시아군 병사가 탈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막기 위해 라보르 코르닐로프는 군정을 통한 치안의 확보와 임시정부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중재간의 오해로 이를 임시정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한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해임하고 총재정부를 설립한다. 결국 같은 해 9월 격분한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군대를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하였고 이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저지되었으나 이로서 임시정부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했다.

이 와중 7월에 핀란드 대공국에서 핀란드 사회민주당 정권이 독립을 추진하려 하자 9월에 군대를 보내 원로원(행정부)과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것은 핀란드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2.3. 10월 혁명

코르닐로프의 반란 진압 이후로 볼셰비키는 레닌의 주장을 수용하여 무장봉기를 시도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하기로 결정한다. 임시정부는 반란 직전 볼셰비키의 계획을 파악하였으나 이 시점에 임시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전무하였고 결국 케렌스키 혼자만이 간신히 페트로그라드를 탈출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케렌스키가 여장을 하고 달아났다는 중상모략을 펼쳤으나 실제로는 자동차를 타고 대사관을 거쳐 탈출했다. 이후 전선으로 가서 페트로그라드의 재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전선의 병사들 역시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고 결국 수병으로 변장한채 다시 탈출해야만 했다.

케렌스키는 융커로 불리는 사관학교 생도들과 카자크 기병대를 중심으로 군대를 소집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패배하자 프랑스로 망명한다.

2.4. 여생

케렌스키는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도 백군도 지지하지 않았고, 망명 이후에도 러시아 이민자들 사이에서 정치 관련 활동을 이어나갔다.[9]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 이듬해 1940년에는 두 번째 부인과 함께 뉴욕에 정착한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를 위해 나치 독일에 맞서자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도 보냈지만, 당시 스탈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2차대전 후에는 후버연구소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일하면서 각종 회고록과 러시아의 역사에 관한 연구자료를 남겼다. 케렌스키의 회고록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꽤나 중요한 1차 사료로 인정받는다.

케렌스키는 1970년 6월 미국 뉴욕에 있는 병원에서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 있던 해외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케렌스키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는 점과 러시아를 볼셰비키의 손아귀에 넘긴 장본인이라면서 교회 묘지 안장을 거부했다.[10] 케렌스키의 유해는 런던 퍼트니 베일 묘지(Putney Vale Cemetery)에 매장되었다.

3. 평가

오늘날 러시아에서 케렌스키는 러시아 혁명 시기 볼셰비키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다른 수많은 정치인들과 함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편에 속한다. 이는 10월 혁명 이후 소련 정부가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다른 정치 세력을 사실상 공식 역사에서 배제시켰던 영향도 크지만,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이후 역사적 흐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부정적인 방향으로라도 획기적으로(?) 악명을 떨쳤다면 모르겠으나 그런 사례도 없다. 케렌스키는 그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권력과 지지 기반부터가 없었다. 케렌스키 공세 정도가 실책으로 꼽히지만, 이는 케렌스키 본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러시아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

애시당초 리보프나 케렌스키의 국가 통치 역량 이전에 당시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이중권력(Двоевластие) 체제였고 몇 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케렌스키를 비롯한 임시정부 구성원들도 자신들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더라도 이대로 간다면 볼셰비키에게 밀려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기었기에 최대한 신사적으로 니콜라이 2세에게서 권력을 이양받아[11] 합법적인 정권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케렌스키 공세라는 도박수를 던지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위해 국운을 건 이기적이고 비겁한 짓일지언정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이미 그런 도박을 지탱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민심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볼셰비키 쿠데타에 정권을 빼앗겼다.

4. 대중매체에서

5. 기타



[1] 율리우스력: 4월 22일 [2] 출처 [3] 오늘날의 울리야놉스크 [4] 훗날의 정적이자 소련의 국부인 블라디미르 레닌도 여기 출생이다. 1924년 레닌의 원래 성인 울리야노프에서 따와 울리야놉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5]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사형제가 없었던 시절은 케렌스키가 임시정부의 구성원으로 재임하던 7개월 뿐이라고 한다. 다만 전선에서는 7월 위기 이후로 군사재판에 한해서 부활했다. [6] 혁명이 나서 뒤집혔을 정도로 나라 상태가 막장이었다보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갈 리도 없는데 거기서 케렌스키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칠 의지도 없이 엉뚱하게 여성의 힘을 빌어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겠다며 마리아 보치카레바의 청원을 받아들인 여성대대를 투입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히려 병사의 불신만 키웠다. 당시 병사들은 의미없는 전쟁에 불만을 품고 탈영하는 등 사기도 바닥이었다. [7]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황은 연합국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며 서유럽 각지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을 끝낼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서 러시아가 조금 더 항전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정작 당시 러시아의 상태는 연합국에서 가장 위태로운 상태였다. [8] 실제로 레닌은 집권 과정에서 직, 간접적으로 독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은 정황이 포착된다. [9] 하지만 레닌 이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적이자 라이벌이었던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해 자신의 독재 체제에 위협이 되는 수많은 정적을 암살했던 사례를 고려하면, 당시 스탈린은 케렌스키를 멘셰비키의 지도자였던 율리 마르토프와 같이 중요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듯하다. [10] 러시아 정교회는 소련 시절 대거 탄압받아 많은 성직자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하는 피해를 입었는데, 코르닐로프처럼 좀 더 확실하게 혁명을 막아줄 인물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표명된 측면이 크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는 그 지도층이 10월 혁명 뿐 아니라 2월 혁명 자체에 부정적인 성향이 컸으며, 전통적으로 친로마노프 황가 세력이었다. [11] 니콜라이 2세도 최후의 발악 정도는 해볼 여력이 있었다. 일어나지 않는 대체역사의 영역이지만 최소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도는 통제력을 회복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연합된 충성파들을 결집시켜 대항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두마 임시위원회가 자신들이 혁명을 통제하고 있으며 이미 상황 종료됐다고 블러핑을 쳤고, 황제 본인도 세계대전 와중 내전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정식으로 권력을 이양해 주고 충성파들에게도 조국을 위해 임시위원회에 순순히 따를 것을 요청했다. 이런 이유에서 퇴위 이후에 그 이전까지 라스푸틴이니 독일과의 내통이니 등의 온갖 비방을 일삼던 케렌스키와 파벨 밀류코프 등등이 니콜라이 2세에게 굉장히 조심스럽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12] 무려 게임 시작하고, 3일 뒤에 암살당한다. 심지어 게임을 켜면 나오는 로딩창 메시지에 '케렌스키 암살중'이라고 뜨기도 한다. [13] 1937년 즈음부터 생디칼리스트, 남부, 태평양 등지 간의 미국 내전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