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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 |
영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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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브리타니아를 환영하는 컬럼비아를 묘사한 풍자화.[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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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흰머리수리와 사자로 묘사된 미국과 영국 |
미영관계 ( 美 英 關 係)
United Kingdom–United States relations
British–American relations
Anglo–American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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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nited States-United Kingdom relations미영관계는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지칭한다. 1940년대부터는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라고도 부른다.[2] 현 초강대국과 전 초강대국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순서를 바꿔서 영미관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단순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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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항목 | 미국 | 영국 |
면적 | 9,833,517km² | 243,610km² |
인구 | 326,865,153 | 66,475,760 |
수도 | 워싱턴 D.C. | 런던 |
언어 | 영어( 미국식)[3] | 영어( 영국식)[4] |
명목 GDP | 20조 4,128억 달러 | 2조 9362억 달러 |
1인당 GDP | 6만 2152 달러 | 4만 4177 달러 |
국방비 | 6045억 달러 | 525억 달러 |
민주주의 지수 | 7.85 (30위) | 8.28 (18위) |
정치 체제 | 대통령제 |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
국가원수 | 조 바이든 대통령 | 찰스 3세 국왕 |
정부수반 | 키어 스타머 총리 |
3. 역사
3.1. 식민지 시대
미국 독립 전 식민지인들은 소수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영국 시민들이었고 각 식민지 별로 동떨어져 아메리카인이란 인식도 없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사건들도 처음에는 본국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속령의 저항 정도였다. 이들이 처음에 내건 슬로건도 어디까지나 ' 영국 시민으로서의 권리 회복'이었다.
그러나 보스턴 차 사건 같은 여러 가지 분쟁으로 인해 미국의 국가 원형이 형성되면서 반영 감정이 강해졌다. 사실 독립 전쟁 발발 이후 렉싱턴-콩코드 전투까지만 하더라도 새뮤얼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과 자유의 아들들을 비롯한 혁명 주동자, 주동 단체들도 자신들이 영국 식민지인으로서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했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아메리카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건국의 아버지와 혁명가들이 식민지에 사는 영국인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 미국의 독립을 위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건 전쟁 중 토머스 페인의 저서 <상식>이 대표적인 수많은 지식인과 문필가들의 투쟁과 논쟁으로 인해 생긴 변화였다. 토머스 제퍼슨을 필두로 한 미국 초기의 열렬한 공화주의적 사상은 이렇게 단시간에 격렬한 전쟁과 함께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뀐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3.2.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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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전쟁 당시 백악관을 불태우는 영국군. |
독립 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 미국은 영국과 미영전쟁을 치르고 프랑스의 반 영국 정책에 협조하였으며, 이 시기 미국은 영국이 서양의 패권을 잡는 걸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7년 전쟁 패전으로 퀘벡 등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영토를 뺏기고 나폴레옹 시절 돈이 없던 프랑스는, 영국보다는 자신들에 더 우호적인 미국에 루이지애나를 싼값에 팔아넘겼고, 오리건 국경 분쟁 당시도 미국은 영국을 견제하려던 프랑스와 알래스카 점령 이후 캐나다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남진하던 러시아와 공조하여 오리건 분쟁 당시 영국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표현이 이 무렵에 생겼는데 대영정책에 대해 미국 정치인들 중 강경파를 매파로, 온건파를 비둘기파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가 크림 전쟁 패전 직후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 건 땅보단 재정에 관심이 많았던 타 국가에 비해 명백한 운명 운운하며 아메리카 영토 점령 및 영토 확장에 관심이 많은 미국이 구매 욕구가 높을 거라는 예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차피 영국령 캐나다에 알래스카를 뺏기느니 영국과 사이가 안 좋은 미국에 팔자는 계산이었다. 1895년 영국[5] - 베네수엘라 국경분쟁 때는 베네수엘라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충돌할 뻔 했으나, 영국이 한발 물러서며 일단락되었다.
물론 미국 쪽에서만 영국을 견제하고 도발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남북 전쟁 때, 영국은 남부연합을 지원하는 것을 몰래 획책했었다. 미국 독립 전쟁 때 열세였던 미국을 프랑스가 원조하여 미국의 독립이 일어났듯이, 남부가 아무리 열세였어도 초강대국인 영국이 각 잡고 지원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지 아무도 모른다. 영국이 타국의 내전 개입까지 고려했던 것에는 '미국이 너무 커버리기 전에 밟아놔야 한다'는 정치가들의 생각이 한 몫 했고, 실제로 미국이 분열했다면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국의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앨버트 공의 사망으로 인한 조문 정국으로 국내 상황이 어수선했고, 미국 남북전쟁의 규모가 크림 전쟁 쌈싸먹게 대규모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무엇보다 30여년 전에 윌버포스의 활약으로 자국에서 노예제를 폐지했으면서 타국의 ‘노예제 유지’를 위해 군사 개입을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국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을 때려버려 완전한 도덕적 명분 우위를 점했고, 전쟁은 예상대로 북부의 우세로 흘러가 미국의 재통일로 이어진다. 영국 입장에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
미국과 영국의 관계가 좋아진 건 양차 세계대전부터지만 청일 전쟁 이후부터는 미영관계가 좋아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이후까지 고립주의를 표방하던 미국은 흑선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이나 아메리카 바깥 세계에 진출을 시도하는데, 러시아가 청일전쟁 이후 프랑스, 독일과 삼국간섭으로 영일 동맹을 압박하자 미국이 자신들의 아메리카 바깥 세계 진출을 위해 일본을 지지한 시점에서 미국과 영국은 동맹이 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전성기에 이르렀던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임을 자처하며, 전 세계에 자국의 힘을 과시한 반면 미국은 19세기 말이 돼서야 미국-스페인 전쟁 등을 통해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 시기 미국의 강해진 위상을 상징적인 사건들은 대표적으로 영-미 베네수엘라 위기, 영불의 대미 파나마 운하 양보, 미국-스페인 전쟁, 영국의 알레스카 국경분쟁 양보, 결정적으로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을 뽑을 수 있다. 영국은 먼로 독트린을 인정하였고, 이를 거치며 20세기 초 부터 서반구에서 영국의 역할이 점차 희미해져가게 되었다.
미국은 대영제국과 더불어 당대 초강대국의 패권경쟁격인 그레이트 게임 대러전에서 일본의 채권을 사주는 등 일본/영국을 지원하였으며, 이후 당대 열강인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을 중재해 핵심적인 유럽열강들의 지정학적&군사적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위치까지 맡게 된다.[6]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미국의 산업화가 상당수 진행되면서[7] 미국의 경제력이 영국 본토를 뛰어넘게 되었지만[8] 여전히 경제력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영국이 우위에 있었다.
3.3. 20세기 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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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배경의
1969년 영국 뮤지컬 영화인 오! 왓 어 러블리 워(Oh! What a Lovely War)에서 미군이 등장하는 장면[9] |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기를 전후해서 강대국에 걸맞은 힘과 명성을 가지기 시작한다.[10]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그간 쌓여온 경제적 잠재력을 대백색 함대 등 군사력으로 전환하여 영국을 제외한 프랑스, 독일 등의 해군력과 견줄정도로 성장시켰다.[11] 또한 서유럽 강대국들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줘서 서반구에서 쫓아낸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12] 첫번째 루즈벨트는 미국을 강대국으로, 두번째 루즈벨트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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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전 세계의 명목 GDP 변화 미국이 타국에 비해 선명한 우위를 차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13]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대영제국의 규모는 비록 최대절정기를 구가하지만 끝내 미국에 추월당해 절대 패권이 흔들린다.[14]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정체와 혼란을 발판삼아 미국 경제는 활황을 맞았고, 뉴욕 증시 규모는 런던 증시는 물론 유럽 전체 증시 규모를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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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의 기업상장 시가총액 변화[15] |
사실 시가총액 거품이 지나치게 있지 않는 경우[16]가 아니라면 그 나라 경제적 국력을 보여주는데 GDP보다 더 유용한 지표일 수 있는데, 나라의 국력기반인 기업의 유망성과 실력이 수치로써 표현된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뉴욕은 런던의 입지를 뛰어넘게 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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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위상, 세계인들과 각국 정부에서의 기축통화 위상의 변천 global public debt, foreign exchange reserve currency./글로벌 외환보유 준비통화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80%에 가깝게 유통되던 절대적인 기축 통화인 파운드의 위상과 지역 내 통용 화폐에 불과했던 미국 달러의 위상이 전쟁 발발로 인해 크게 좁혀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거의 양강체제를 구축하면서 1920년대 중반에 역전됨을 알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금보유량이 상당 부분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점도 있고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대세가 미국으로 급격히 기운다. 1925년에 영국은 금본위제로 복귀하지만 이미 한풀 꺾여버린 영국의 위상과 신용, 부상한 뉴욕과 미국 달러의 대세는 되돌릴 수 없었다. 전비로 영국이 휘청이고 미국이 급성장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변화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일제강점기 사용화폐 역시 중국 위안, 미국 달러/센트 등 이였다. 독립공채 역시 미 달러화로 이루어졌다 알려진다. 위키 참고
한편으로는 1944년 이전까지는 굳건했던 대영제국의 영토, 국제적 위상과 아직은 건재한 영국의 경제, 문화, 외교, 군사력 등으로 인해 파운드도 나름대로 위상을 유지하였고, 파운드의 사용에 대한 관성, 이 시절 미국의 국력이 1940년대부터 이어져오는 진정한 의미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과 국력에까지 미치던 시기는 아니었기에 오히려 경합 상황에 가까웠고, 결국 1944년 브레튼 우즈 협정을 통해 미국 달러가 확실한 승기를 잡으면서 현재의 기축통화 체제가 형성된다.[18][19][20]
당시 미국 경제는 급상승하면서 서유럽을 추월하였고, 미국 달러의 강세가 돋보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등극하면서 국제 외교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였다. 미국의 소프트파워 역시 크게 성장하여 그간 유럽에 '촌놈들' 내지는 '깡촌' 취급받던 미국이 반대로 이제는 미국이 아닌 서유럽이 미국 문화를 즐기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란의 2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사라지는데, 당시 디즈니, 재즈, 헐리우드[21], 뉴욕시[22] 등 미국의 문화 산업이 발달하게 되고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산업, 과학기술 역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광란의 20년대를 거치며 미국 경제의 규모는 전세계에 영향을 줄 만큼 성장하였으며, 이는 세계 대공황으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미국이 유럽을 진작에 따라잡은 산업기술이나 산업생산력과는 달리, 첨단 과학 기술의 근간인 기초과학은 1920년대까지는 미국이 대표적인 서유럽 내 과학 강국 독일, 영국에 비해 열세였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의 경제력이 강해지고 미국의 학술, 대학, 연구 수준이 강화되면서, 1930년대 중반 정도에는 독일, 영국과 동등하거나 조금 더 우세했다.[23] 특히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전체주의의 광기와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피해 아인슈타인 같은 유명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기초과학은 한층 진일보한다. 이 무렵에서부터 세계 학술과 연구의 중심지로 미국이 서유럽을 제치기 시작한다.
군사력은 남북 전쟁 이후로 미 육군은 강대국의 군사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2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상향화되었다. 사실 군대 내 급양, 공업화를 비교해보자면 미국이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강한 편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미국 해군 육성정책을 통해 미 해군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미국 해군 역시 영국 해군과 거의 동등한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25] 당시 공군은 태동하는 시기였지만 전반적인 항공우주기술은 미국 위주로 발달하였다.[26]
이렇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미국이 부상하고 영국이 흔들리는 원인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초반부터 전쟁에 개입해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반면, 미국은 전쟁 막바지에 참전했기에 영국보다 손실이 적었고 그 대신 전쟁 내내 협상국 측에 막대한 자금을 원조하면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은 서유럽에 있었고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회피할 수 없었지만, 미국은 대서양 건너 북아메리카에 있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당초 제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독일의 건함 경쟁으로 인한 전 세계 바다와 서유럽의 주도권 패권 경쟁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군사력과 산업능력으로 바라볼 때 영국을 제외하곤 유럽 내 독일 국력의 절대우위에 대항할 적수가 없었으므로 영국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군수 산업을 도맡았던 미국 기업들 또한 1차 대전을 기점으로 거대하게 성장하였다. 이게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 아닌 미국의 군사 기술이 크게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innica)가 붕괴되었으며 영국의 힘과 위상이 초강대국에서[27] 하나의 강대국으로 쇠퇴하였고[28]'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가장 상징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미국이 당대 최강대국이자 패권국인 영국에게 대등한 조건을 강요할 정도로 미국의 외교적 입지가 컸다는 의미이며, 영국이 미국에 영일동맹을 파기하는 조건을 달아 타협을 요구할 정도로 오히려 아쉬운 쪽이 영국이였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사실 이 협정의 순간부터 영국의 범 세계적 해상패권이 무너졌기에 팍스 브리태니카는 늦어도 이 협정을 맺고 실질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대등한 해군을 건설한 1920년대 중반부터 종료된다. 전간기의 영국은 19세기의 영국이나 2차대전 이후의 미국처럼 전 세계의 바다패권을 독차지한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플레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은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아시아태평양지역과 서반구에서의 영향력이 해군조약 이후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미국이 이미 그 지역에서 영국을 제치고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영국 내에선 "위신을 위한 해군(미국)과 생명 같은 해군(영국)이 어떻게 같을 수 있냐"며 한탄하는 목소리도 많았고, 저 조약에 오히려 대영제국이 타협을 구걸하는 듯이 비쳐지는 모습에 충격을 먹었다.''' 그렇게 부상하는 미국의 위상에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인들은 상당한 반미감정을 지녔고, 또한 미국의 국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도 지녔다. 그렇게 영국 주도의 일극 해상 패권과 금융/무역질서가 붕괴되고 여러 세력들이 균형을 이루는 세력균형의 장으로 변모하며 영국의 외교적 입지는 축소되었다.] 미국의 부상과 국력역전의 트리거가 만들어지며, 대공황을 통해 미국의 비중이 증명된다. 이후 1930년대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영국과 미국의 치열한 경쟁과 몇년의 조정기를 거쳐 1937년~ 1939년 경에 미국이 국력의 우위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들어가는 1940년대부터 미국이 본격적으로 격차를 벌리며 대영제국을 압도하기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미국이 고립주의를 깨고 본격적으로 국력투사를 시작한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더 이상 아무도 미국이 초강대국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전후 국제질서를 완전히 미국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2차대전에서 승전국 지위로 역시 동구권의 패권을 장악한 소련과 함께 냉전 체제가 성립되며, 미국의 체재하에서 영국과 서로간의 특별한 관계가 구축되었다.
전후 국제 외교무대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영국은 더이상은 식민제국을 유지하기 힘들다 판단하여 이제는 그만 적자만 나던 식민지들을 정리하고 인도(시장)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고 식민제국을 영연방으로 재편성하고 미국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영제국이 나치독일과 일본 제국과는 달리 명목상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 주체는 바로 " 미국"인셈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질서에 흡수당해진 핵심적인 원인은 대영제국이 더 이상 절대적인 위치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이 온전히 강대국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며, 영국이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온전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미국의 체제에서 금융으로 그 영향력과 매개가 일원화되었을 뿐이다. 런던 금융가의 파워로 영국의 기업 및 글로벌 기업들에 대한 투자, 구 영국 식민지 권역 및 영연방 국가들에게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로써 영국 및 영연방인들 개개인의 삶의 질 뿐 아니라, 정치외교적인 레버리지(경제제재[29] 등)수단 뿐 아니라 영국은 세계적인 대학, 과학기술과 스타트업들, 전지구적 소프트파워, 군사력과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지위와 역량,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다.
4. 특별한 관계( 제2차 세계 대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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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에서의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 |
영국과 미국이 오늘날 같은 혈맹으로 발전한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세계 지역의 상당수가 열강의 식민지였을 뿐더러 나치 독일이 전 유럽을 지배하고 동아시아는 일본 제국의 손에 들어가 있었음과 동시에, 같은 연합국인 소련조차도 그저 추축국이라는 같은 적을 두고 있었기에 협력하는 것일 뿐, 전쟁이 끝나면 결국 대립해야할 공산주의 국가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강대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당시엔 미국과 영국 뿐이었다.[30]
2차 대전 이후부터 냉전 시기를 지나며 미영관계는 혈맹이라 불릴 정도[31]로 돈독해졌으며 현대에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는 제로섬 문제가 아닌 이상 거의 없다.
1960년대 초의 존 F. 케네디와 해럴드 맥밀런 사이의 관계도 매우 가까웠다. 당시 수에즈 전쟁과 미국의 스카이볼트 개발의 일방적 취소로 양국 관계가 파탄 직전까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맹 관계가 유지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함도 한 몫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케네디 대통령이 맥밀런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진행 상황을 알려주기도 하였으며[32] 스카이볼트의 여파로 맥밀런의 총리직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에는 그다지 득될 일이 아님에도 케네디가 영국에 UGM-27 폴라리스 미사일 판매를 결심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신자유주의의 두 거두로 꼽히는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밀월관계가 있었다.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로널드 레이건의 지지도 받고 트라이던트도 미국으로부터 확보하였다. 21 세기 들어서는 토니 블레어와 조지 W.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끈끈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물론 데이비드 캐머런과 버락 오바마의 관계 역시 끈끈한 편이다. 영국 총리와 미국 대통령은 소속 정당과 무관하게 매우 끈끈한 편이다. 현재는 보리스 존슨과 조 바이든의 밀월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다만 현대 영국이 미국의 국제 정책에 언제나 협조적인 건 아닌데,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이 있다. 영국 입장에서 공산 베트남이 영국의 최우선 이권 수호 지역인 홍콩, 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호주 본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참전에 매우 미온적이었다. 전쟁의 명분이 매우 적은 탓에 미국이 영국이 돕지 않는다고 압박하기도 어려웠다.
영국과 미국이 사이가 좋은 것은 영국이 유일 초강대국 미국에 대해 양보하고 지속적으로 외교와 안보 노선에서 공조를 하였기에 이뤄진 것이다. 물론 미국도 영국의 양보와 외교 노선의 공조에 대해 지지 선언 및 협조 등으로 확실하게 보답하는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이 있다.
오늘날 안보 문제에서도 미국과 함께 파이브 아이즈라 불리는 앵글로색슨 국가들만의 공동 첩보망을 이끄는 등 이익관계를 넘어 절대적인 운명 공동체로 묶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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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 때에는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에게 책임을 물어 미국과 영국내의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냉전이후에 러시아의 위협이 커지자 영국은 미국과 협력하고 있다. 크림 합병, 돈바스 전쟁때에는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를 제재하기도 했다. 2020년 7월 23일에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위성 공격용 무기를 우주에 띄워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위협했다고 비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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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8일, 리시 수낙 총리와 바이든 대통령이 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
5. 갈등
물론 현실에서 미국과 영국이 마냥 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외교인데 영국은 2차대전 이후 수에즈 위기 사태로 세계에 대한 주도적인 영향력은 상실하고 미국의 세력권에 종속된 강대국으로 위치가 내려간 반면,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였고 현재는 소련의 몰락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인 만큼 양국이 서로 동등할 리가 없다. 실제로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영국을 깔보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번번히 있었다. 현재의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영국이 국제 정세에서 스스로의 독자 노선을 거의 포기하고 미국의 국제 전략에 대해 지지를 선언하며 동참한 것이 매우 크다. 대신 미국도 영국을 많이 존중해주는 편이고 영국 역시 그에 따른 이익도 상당히 챙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핵무기 개발과 수에즈 전쟁이다. 첫째는 영국의 핵개발 항목 참조. 당시 미국이 영국에 핵개발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정작 1946년 미국 의회에서 원자력법[33]을 통과, 핵무기 기술을 타국에 넘길 수 없다고 의결해서 취소시켰다. 이에 발끈한 영국이 호주와 손을 잡고[34]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미국이 반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1958년 원자력법 개정으로 대영 핵외교 노선을 수정한 미국은 영국과 핵무기 협약을 맺어 공동 핵무기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국은 미국에게 당했던 것을 그대로 프랑스에게 행한다. 물론 미국과 영국의 무시에 분노한 프랑스도 좌우 성향을 막론하고 핵무장을 지지하여 핵개발에 성공하였다.
또한 수에즈 전쟁 당시, 영국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무리하게 중동에서 미국에 통보나 상의도 없이 이집트와의 전쟁을 일으키자[35], 이에 대해 미국이 반발하여 영국에 압력을 행사해 전쟁을 강제로 종결시킨 일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영국의 유럽 공동체 가입이 가속화되고[36] 친유럽 성향의 에드워드 히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잠시 미영관계가 소원해졌다. 히스는 영국 역사상 가장 친유럽 성향 총리로 평가받으며 영국의 미래는 유럽과의 협력에 달렸다고 판단, 영국이 2차대전 이래로 유지해 온 유독 미국과 영연방과의 관계에 치중하는 외교를 탐탁지 않아 했다.[37] 그는 영국이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주요 유럽 국가들의 경계와 불신을 산다고 믿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같은 서방 진영임에도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과 유럽공동체(EEC)간에는 갈등 요소들이 존재했다. EEC는 공격적인 농업 보조금, 보호무역 정책을 유럽 단위로 실행하고 있었고 대유럽 무역 적자가 늘어나던 미국에게 이는 눈엣가시였으며, 유럽 입장에서는 1971년 닉슨 쇼크로 금본위제와 브레튼우즈 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자 충격의 한방을 먹었다는 인식이 있었다. 또 닉슨 행정부가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을 어르기 위해 미군의 유럽 주둔 비용을 더욱 공평히 분담하자고 유럽 측에 제의했으나 영&프는 어차피 자국 이익 수호를 위해 유럽에 주둔하는 미군 붙잡자고 경제적 양보는 할 수 없다고 하나같이 쌩깠다. 프랑스는 아예 60년대 샤를 드골 정권 때부터 영국을 통한 미국 이권의 유럽 공동체 잠식을 우려하여 두 번이나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신청에 퇴짜를 놓은 전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는 미영관계에 버금가는 영-유럽 관계를 쌓고자 하였고, 이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서방 경제·안보 질서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당시 외교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충돌을 빚는다.
양국 관계는 1973년 4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유럽의 해'(Year of Europe)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면서 더욱 험난해졌는데, 유럽의 해란 즉슨 신 대서양 헌장 발표를 통해 미영간의 특별한 관계를 미국과 하나의 유럽[38] 사이의 특별한 관계로 업그레이드해 서방 민주주의 동맹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유럽의 해' 구상과 발표는 유럽 국가들과의 상의도 없이 키신저의 독단으로 진행됐고, 그렇게 나온 개념도 모호하기 짝이 없어 막상 발표되고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에게 뜬금포 취급을 받았다.[39] 또한, '유럽의 해'의 의도는 뭔가 그럴싸하지만 당시 영국, 프랑스 정부[40]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이를 유럽의 독자적 외교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냉전 구상에 종속시키기 위한 계획으로 받아들였다.
시대적 배경을 덧붙이자면, 당시 MBFR[41], SALT 논의 등으로 미국과 소련의 양자 데탕트가 진행되자, 유럽 내에서는 초강대국끼리 담합하는 과정에서 유럽 안보 보장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게다가 1973년 6월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사이좋게 핵전쟁 방지를 위한 합의[42]를 통해 핵무기 사용 최소화를 선언하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내 핵전쟁 발발시 미국 핵우산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힘을 얻었다. 이에 대응해 스스로 살 길을 찾고자 한 조르주 퐁피두 정부는 드골 때부터 이어져 온 독자적인 소련 및 동구권과의 데탕트에 몰두했다. 서독 또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위시하여 나름대로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 나갔다. 미국 입장에서는 서방 국가들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유럽의 해는 이렇게 따로 노는 유럽 각국의 외교를 미 외교정책과 더욱 일관되게 하여 동맹을 강화하자는 키신저의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무튼 키신저는 '유럽의 해' 연설을 통해 유럽 안보 문제에 상술된 무역적자, 미군 주둔 비용 문제까지 얹어 미- 유럽 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논의를 각각의 유럽 국가와의 1:1 협의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즉 안보를 지키고 싶으면 보호무역도 손보고, 분담금도 더 내라는 것. 또, 유럽 공동체 차원에서 논의할 것 없이 개별 국가가 미국의 큰그림에 종속될 것을 약속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추구했던 영국은 미국에 즉답을 하기 전에 유럽 국가들의 의견 조율을 통해 미국에 대한 유럽 공동체의 통일된 입장을 도출하고자 하였고, 수개월간 지지부진한 논의만이 이어진다. 특히 프랑스가 정치적 유럽 공동체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독자외교노선과 유럽 내 지위 보장을 최우선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유럽 통합과 미국과의 혈맹 유지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던 영국의 외교적 노력은 결실을 얻지 못했다.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시간을 끌었고 이는 키신저의 신경을 자극한다. 키신저 입장에서는 '유럽의 해'는 서방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을 다짐하는 상징적 선언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럽 좋자고 시작한 이 간단한 일을 왜 못하냐고 답답해했지만, 그는 유럽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갈리며, 동맹국들이 순순히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했다. 유럽의 해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자 키신저는 7월 방미중이었던 영국 내각장관 버크 트렌드 경[43]을 친히 불러 매우 분노하기까지 했다.[44] 그리고 같은 날 키신저와 닉슨은 미국을 만만하게 보는 영국과의 특별한 관계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후 ‘유럽의 해’는 키신저에게나 영국에게나 흑역사로 남았다.
또한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미영관계는 더더욱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은 자연스레 이스라엘을 지원했지만 아랍 산유국의 눈치를 더 봐야 했던 영국은 이에 협조하기를 공개적으로 거부, 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관계에 결정타[45]를 날렸다. 상황 종료 이후 미국, 특히 키신저는 영국의 처신을 괘씸히 여겨 영국에 대한 온갖 외교적, 경제적, 정치적 보복을 구상했는데, 이쯤이면 이전의 혈맹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렇듯 유럽 공동체 문제와 중동 문제로 1973년은 미영관계에서 유난히 험난했던 한 해로 손꼽힌다. #
현재 시점에서 두 나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혈맹 관계이다. 미국이 독립 후 100여년 간의 어마어마한 발전으로 영국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점점 갖추게 된 상태에서 조금씩 교류를 늘려 나갔고 두 번의 세계 대전, 특히 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을 제외한 사실상의 서유럽[46]을 다 먹어버렸던 강적 나치 독일에 맞서 같이 싸운 경험은 두 나라를 혈맹으로 만들었다. 승전 후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보다 미국이 군사나 경제 등 여러 부분에서 엄청난 우위에 서게 되자 영국은 미국을 눈치를 봐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 후에는 NATO의 일원으로 소련에 맞서 같은 입장에서 처리하도록 노력해야 했고,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며 유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영국이 미국에게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미국의 우위를 인정한 것이 현재 원만한 미영관계를 구축한 발판이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미국인들이 영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명백한 힘의 격차로 인해 영국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리스 존슨이 총리가 되는 것을 지지하자 영국 정부에서는 반발하는 기류가 생겼다. 외국의 국가원수가 자국의 선거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다. #
주미 영국대사쪽은 도널드 트럼프 당선 이후에 트럼프를 노골적으로 폄하한다는 외무부 보고서가 공개되자 곤혹을 치렀다. 결국 주미 영국대사는 사임했다. 2020년 2월 7일에 영국 외무부는 주미 대사에 캐런 피어스 유엔 대표부 대사를 임명했다고 밝혔다. # # #
2020년 1월에 보리스 총리가 미국의 반대에도 화웨이 장비를 쓰겠다고 밝히자 미국에서는 실망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 또한 영국 국방장관은 미국 없이 전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국 공화당의 일부 상원의원들은 영국이 5G 구축 사업에 화웨이를 참여시킨다는 이유로 최신예 전투기의 영국 배치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
영국이 유럽연합을 완전히 떠나면서 2021년부터는 미영관계가 예전같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
6.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
사실 영국이 영연방의 주도국 지위를 포기하고, EU의 전신인 EC에 가입한 것이 미국의 의지가 투영된 결과물로 보는 시각이 많았고, 실제로 미국은 유럽의 일원인 영국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럽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하지만 영국이 브렉시트 국민 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하고, 호주, 인도, 말레이시아 등 영연방 국가들 뿐만 아니라 한국, 멕시코, 중국 등 여러 국가들과 직접 접촉을 하며 소극적인 독자 노선을 시도할 기미가 보이자 영미 외교 관계에 파열음이 나기도 했다. 특히 국민 투표 직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영국이 유럽 연합을 탈퇴하게 된다면 미국과의 교류 줄 가장 뒤에 서게될 것"이라고 밝히며 내정 간섭 논란을 일으켰다.[47]
그런데 영연방이라고 하는 것이 미국, 북미(캐나다), 호주, 중동 등을 제외하고는 그렇게까지 영국의 이익이나 이해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시절처럼 더이상 인도에서 함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국이 최근 동아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시하고는 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영국과 가까운데다, 영국에 대한 친밀함과 브렉시트 지지 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에 브렉시트 이후 혼란을 겪던 미국의 대영 외교 정책이 또다시 뒤집힐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대영 외교 성향은 "미국의 직접적 이익만 침해하지 않으면"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와 독자 노선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쪽으로 파악되고 있어 향후 양국 관계의 변화에 이목이 쏠린다.
7. 미국의 영연방 가입 여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다소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고,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굳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할 이유도 없다. 미국이 영연방이 아닌 것은 영연방 개념이 생기기 한참 예전에 독립했고, 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과정이 지극히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괜히 영국의 집나간 큰아들이라는 별칭이 있는게 아니다.대부분의 영연방 국가들은 청원이나 데모같은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형식으로 독립의지를 표현했지만 미국처럼 대대적으로 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를 보고 독립한 경우는 드문 편이다. 하지만 미국은 '서로 두들겨 패면서 싸우다가' 독립했으니 형식상이나마 '형님으로 계속 대우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독립전쟁은 유럽 각국, 특히 프랑스가 주도적으로 미국과 연합해서 진행된 전쟁이라 규모가 상당히 컸다. 미국이 수십년 뒤 훨씬 큰 땅에서 벌였던 침략 전쟁인 멕시코 전쟁보다 독립전쟁이 훨씬 더 사상자 규모가 컸을 정도니까. 이거, 한국으로 치자면 일연방 가입 논쟁이 있는 한국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개척정신이란 건 이런 독립 및 영토 확장 전쟁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또한 독립 이후에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민도 많이 받는 바람에 미국 시민의 정체성도 많이 바뀌어 국가 속성 자체가 너무 크게 바뀌어 버렸다. 미국 대통령들은 여전히 영국 후예의 핏줄이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대기업이나 금융계 같은 곳에서는 다른 민족의 후예들이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언어나 문화에서 영국과 공유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미 미영전쟁이 끝난 1800년대 중반부터는 이민은 타 유럽 국가들이나 아시아 국가들에서 받지만, 문화적인 교류나 정치적 협력, 경제적 교역은 영국과 함께하는 경향을 보여왔으며, 혈연과는 별개로 문화적으로는 영국을 위시한 앵글로 색슨 문화권에 속해있다.[48]
또한 20세기, 두 번의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영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크게 희석되고 긍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된데다, 영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미국인들도 공감하는 편이라 19세기나 20세기 초반처럼 영연방 가입이 미국의 국가 정체성에 문제를 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여전히 역사적 앙금이 조금이나마 남아있고, 영연방 내에서의 서열 정리 문제가 있어, 미국의 영연방 정회원 가입은 영국과 미국 둘 다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영연방 가입 여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며, 영연방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1997년 에든버러 선언 이후 미국을 "신청만 하면 언제든 영연방 회원국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국가"로 분류해왔다. 미국이 동부 13개 영국령 식민지의 연합으로 시작한 국가라는 점을 감안해 이렇게 분류했다고 한다. 어차피 영연방 대부분의 국가가 혈연적으로는 영국과 별 상관이 없는 나라들이다. 심지어 1990년대 이후로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들도 문화적 연결성이나 정치적 연관성 등의 이유로 영연방에 받아주고 있다.
현재 언급되는 미국의 영연방 가입 여부는 2017년 11월로 예정되었던, 그리고 그 이후 2018년 8월 진행 된 트럼프 대통령의 영국 방문과 엘리자베스 2세 알현 이후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였으나, 미국 내 정치사정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정책 포커스가 중국과 동아시아로 옮겨가면서 흐지부지 된 것으로 보인다.[49]
8. 여담
미국이 최고의 동맹으로 여기는 네 나라가 이른바 ABCN(Australia, Britain, Canada, New Zealand),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이다. NSA 기밀자료 폭로사건 당시 미국은 자국을 포함해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50]만큼은 제외하겠다고 밝힌 바 있을 정도이다.[51]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에는 뉴욕 - 런던 항공편 수송량이 서울, 부산 - 제주 노선보다 더 수요가 많을 정도로 미어터진다. 당장 영국항공의 뉴욕 - 런던[52] 노선 하나[53]만 해도 세계 항공 노선 중 수익이 가장 많다. 그것도 보유하고 있는 A380[54]을 전부 미국 노선에만 올인해도 공급량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즉 미국 내에도 영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영국 내에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 내 상호 교류도 많고 친척들의 이동도 많은 편이다. 비단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수요가 매우 많은 편이며 리처드 커티스[55]의 러브 액츄얼리도 그런 모습[56]을 보여준다. 당장 하일, 인요한과 같이 5대조 이상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에 기반을 두는 사람들도 많고 이들이 독립 이전이나 직후에 왔다보니 미국족[57]로 설문조사에 응답한 것을 감안하면 아직까지도 이들이 미국의 주류이다. 심지어 부시 가문의 경우 먼 친척이 영국 왕실 인원과 연관되어 있을 정도다.
5대 영미권 중 역사가 깊고 대영제국을 건설한 영국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네 나라인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중 미국이 일찍 독립하여 독자적인 힘을 키웠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세계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영연방 왕국인 캐나다와 호주와 뉴질랜드는 그렇지 않다.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비중있는 역할이지만 나머지 영연방 왕국은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비중이 작은 편이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영미권 국가는 미국과 영국만 등장하다가 6번째 작품인 문명 6에서 캐나다 문명이 처음 등장했을 때 시드 마이어가 캐나다인임에도 왜 이제야 나왔냐는 반응도 나왔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미국과 달리 독립이 늦고 인구도 적어 선진국은 맞을지언정 강대국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5대 영미권 인물들도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나머지 3국 출신은 상대적으로 적다. 세계 고전문학 전집만 봐도 영국과 미국이 아닌 곳에서 만들어진 영문학은 캐나다에서 만든 빨간머리 앤 외에는 없다.
다만 경제적 수준은 같은 영미권으로 묶이기에는 미국과 영국의 격차가 매우 심해졌다. 총 경제규모는 양국이 인구수 차이[58]가 크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개인의 소득을 나타내는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이 63,000달러 영국이 약 43,000달러로 격차가 매우 크다. #
물론 미국의 경우 자유지상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의료비가 비싸고 직장에서 해고된 후 재취업을 하지 못하면 빈곤층으로 전락할 정도로 사회 안전망이 취약하다는 점이 있지만 식료품, 집, 공산품 가격이 영국보다 더 저렴하다. 그렇다보니 같은 경제적 조건이면 미국인이 영국인보다 더 잘 산다고 볼 수는 있다. 물론 영국이 저렴하고 미국이 더 비싼 품목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생활하는게 가능한 인구 비율이 영국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다는 것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이 미국보다 못 산다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미국과 서유럽의 격차가 심해진 것은 2차 IT 혁명을 거의 미국이 독점한 이후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그나마 영국은 독일, 프랑스와 비슷하게 어느 정도 선방하고 있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단 독일은 제조업 위주 국가이고 영국은 서비스업 위주 국가라는 차이가 있다.
간혹 미국과 영국이 각각 식민 모국과 식민지 출신 국가였다는 점 때문에 미영관계를 한일관계와 비슷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59] 당연히 전적으로 다른 경우이다.
미국은 영국계 백인들의 지배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저항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라 영국계 백인들이 본토와의 갈등 때문에 독립한 나라다. 오히려 영국-캐나다 관계, 프랑스-캐나다 관계, 영국-호주 관계, 영국-뉴질랜드 관계, 영국-남아프리카 공화국 관계, 영국-싱가포르 관계, 영국-홍콩 관계와 같이 식민 모국이 자국 영토를 연장할 목적으로 생긴 식민지와의 관계이다. 참고로 한일관계를 다른 경우로 대입하려면 영국-아일랜드 관계와 같이 이웃나라이면서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관계로 비교해야 한다.
영국 측이 USMCA 협정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 캐나다는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멕시코에서는 미국, 캐나다가 영국을 가입시키면 자국이 불리할까 생각한다. #
좋아하는 스포츠에서도 확연히 다른데, 영국은 축구, 럭비, 크리켓 위주인 반면 미국은 농구, 미식축구, 야구 등 차이점이 크다. 물론 미식축구나 야구는 럭비, 크리켓의 영향[60]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미국과 가장 비슷한 국가는 오히려 영국이 아니라 캐나다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캐나다도 미국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많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정치 제도적으로는 연방제, 대통령제, 양원제를 채택한 필리핀과 비슷하다.
2021년 영국에 사는 미국인 유튜버가 물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우유를 부은 후 티백을 넣자, 영국인들이 이렇게 차를 끓이는 게 아니라고 댓글[61]을 달았다. 이에 대해 카렌 피어스[62] 주미영국대사가 대사관 트위터 계정에 차를 올바르게 끓이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미영관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피어스 대사는 "미영관계는 차로 정의된다.[63]"를 읊은 후 영국 육군 - 영국 해군 - 영국 공군 순서대로 차 끓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64]
9. 관련 기사
10. 관련 문서
- 영미권
- 미국/외교
- 영국/외교 / 영국/외교/옛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
- 5개의 눈
- AUKUS
- G7
- 영국계 미국인
- 미국/역사
- 영국/역사
- 미국 독립전쟁
- 상임이사국
- 미국/경제
- 영국/경제
- 미국/문화
- 영국/문화
- 미국인 / 영국인
- 영어 / 미국식 영어, 영국식 영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메리카 국가/북아메리카 국가
[1]
미국을 비교적 젊은 여인으로, 영국을 비슷하게 생겼지만 안경을 낀 노년으로 묘사했다.
[2]
미국,
영국 양국이 모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했기 때문인데, 그 전까지 미국은
고립주의 성향(
먼로 독트린)이 강했다. 1차 대전 이전의 영국도
고립주의 성향이 강했던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부분.
[3]
영어는 미국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실질적 공용어이지 연방에서 법적인 지위를 가진 언어는 아니다. 실제로 주마다 공용어가 제기각각이며 영어가 공용어로 체택되지 않은 주도 있다. 이베리아 문화권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곳에서는 영어가 잘 안 통하는 경우도 많고 911서비스나 월마트 등의 기초생활 및 응급 관련 상황에서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로도 대화가 오간다. 동유럽계 이민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러시아어나
폴란드어 구사자가 응답하기도 하고 차이나타운의 경우에도 비슷한 개념으로
중국어 구사자들이 근무한다. 물론 대다수의 미국민은 영어를 모어로 한다.
[4]
영국에도
스코트어,
웨일스어 등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지만 공용어는 영어이다.
[5]
영국령 기아나.
[6]
미국의 세력이 더 이상
서반구에 그치지 않게 된 사건이다. 이후로도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산업, 재정, 군사적으로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많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외교 무대에서의 입지가 올라간다.
[7]
이 시기에
경영학이라는 학문이 미국에서 발생했다.
[8]
미국의 경제 규모가
대영제국 전체를 확실히 뛰어넘는 것은 1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9]
Over There을 부르면서 당당하게 영국군 본부 안까지 행진해 들어가는 미군의 모습과 그걸 어이없다는듯이 지켜보는 영국군 장교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영국인들이 생각하던 미국의 이미지가 코믹하게 표현되어있다.
[10]
실제로도 미국사에 상당히 의미있는 대통령이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조지 워싱턴과 더불어
러시모어 산에 초상이 각인되어있다.
[11]
이는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미 해군이
영국 해군과 공식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받는 배경이 된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
미국-스페인 전쟁도 루스벨트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13]
자세히 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의 GDP가 2배 가까이 뛴다.
대공황 직전에 이르면 전세계 GDP의 42%로,
대영제국이나
서유럽전체 GDP 총합의 2배까지 달하게 된다.
[1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미국의 기초과학이나 학문, 과학지식기반 산업기술이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고 독자적인 문화가 전무하여 문화적인 부분 역시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뿌리부터
유럽의 문화적 아류취급을 받았었다. 패권도전 측면에 있어 오늘날의
중국 조금 다른게 있다면,
미국은 독립이후 서부개척시대인 건국 초기에도 산업 부분에서는 뛰어난 성과도 있었으며,
미국의 1인당 GDP/PPP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뛰어났던
영국을 늦어도
1905년 경에 뛰어넘었기에 인구 뿐만이 아니라 삶의 질만큼은
미국이
영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에 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열등감은 여전했다.
[15]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과
서유럽의 비중이 극적으로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대공황 직전엔 미국이 유럽의 2배에 달한다. 심지어
대공황으로 폭락한 시절에도
서유럽과 대등한 규모다. 미국은 대공황으로 시총이 9분의 1토막 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비율이라는 것은
미국의
대공황 여파가 유럽의 시총 역시 4분의 1 수준으로 토막냈다는 뜻이다! 또, 시총의 투기성 거품을 제거해도 미국 기업들의 자산 규모와 시장에서 평가받고 있던 기업들의 종합가치가 유럽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의 경제의 선두주자가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음을 상징한다.
[16]
또는 외국계 기업들이 지나치게 많이 상장된 경우, 투기성 거품 등
[17]
정확히는 양분한 것에 가깝고, 단지
뉴욕의 금융파이가
런던의 금융파이보다 커졌다 라고 보는게 더 맞겠다. 수백 년간 쌓여있던 전통적 위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당장 오늘날에도
런던은
뉴욕과 함께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18]
원래 독보적인
기축 통화로 불리려면 오늘날의
미국 달러와
유로처럼 2등 통화의 2배 이상의 보유량은 나와야 한다.(달러: 60~70% / 유로: 20%)그 이하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뜻이고, 환율변동이나 다른 요인들로 비중의 차이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 이런 관점으로 볼때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까지도
파운드 스털링은
미국 달러와 더불어 핵심 화폐 역할을 지켰다. 그 시절까지도
파운드 스털링을 들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졌었다는 뜻이다.심지어
브레튼 우즈 협정기간에도 초기에는 달러와 더불어 파운드도 기축통화로 정하는 안이 제기되었었다. 그만큼 세계인들의 인식 속에서
파운드 스털링에 대한 신뢰도, 즉
영국의 위상이 그 시절까지도 굳건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 순간까지도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19]
1919~1944년은 이 때문에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우위라기보다는
미국 달러와
영국 파운드 양강의 시기,화폐 패권 이동의 과도기적 순간이라고들 한다.
1920년대는 달러와 파운드가 비슷한 위상을,
1930년대는 미국으로 대세가 기울지만
대공황 때문에 잠시 조정기,
영국과
미국 둘 다 다시 1931년,1933년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미국 달러가 다소 우세한 상태로 지속,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미국 달러가 1.5배 이상 더 쓰이기 시작하다가 비교적 저평가 되어 있던 미국의 힘이 전세계에 보여지자
1940년대로 접어들며 환율이 요동치고 화폐 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1944년
브레튼 우즈 협정 시기 경에는 달러가 파운드보다 2배 정도 더 보유되고 거래됨을 알 수 있다. 일각의 주장처럼 달러는 1944년에 갑자기 부상한 기축통화가 아니다.
[20]
1944년에서야
미국 달러가
파운드를 추월했다는 견해나 연구도 있는데, 이는
대영제국과 이후의
영연방 내의 거래를 포함한 계산량이여서 그렇다. 당시
인도 등 식민지들은
영국의 파운드 블록 등 블록경제로 인해
영국 파운드만 보유할 수 있었으며, 영국의 정책 하에 경제거래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즉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닌 국내용 화폐 거래를 포함한 수치다. 당시
대영제국은 하나의 국가였고, 모든 식민지들과 연방들은 영국이 하나의 주권을 가진 상태였다. 일반적인 외국 간 거래, 시장에서는 1920년대 되어서
파운드 스털링과
미국 달러 간의 위상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보여지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파운드 스털링은 제국과 영연방 외에서는
미국 달러보다 우세한 기축통화는 아니었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국내거래에 불과했다.
[21]
헐리우드는
1930년대부터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시작의 발판은 1910~20년대였다.
[22]
뉴욕시는 1920년대부터
파리,
런던 등과 같이 세계 예술, 음악, 미술 분야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23]
일례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1924~1926년
영국,
독일, 즉
서유럽으로 유학을 갔지만, 1936~1938년에는
앨런 튜링이
미국으로 유학올 정도로 역전된다.
[24]
동시대
유럽의 전쟁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크림전쟁의 2배 이상의 규모였다. 게다가 미국은 서부개척시대부터 엄청난 총기 강국이였다.
[25]
이 때
영국은 재정난에 봉착했고,
미국 내에서는 반전 및 군비 축소 여론이 높았다. 그리고
영국은
영일동맹을 파기해줌으로서
미국의 핵심 이익인
미국의
태평양 패권을 보장하였다. 그렇게
대서양은
영국과
미국이,
인도양은
영국이,
태평양은
미국이 패권을 잡으므로서 전세계 바다 패권을
미국과
영국이 양분하게 된다.
[26]
1926년
로버트 고다드의 로켓 기술이나
찰스 린드버그의 1927년 대서양 횡단은 인류 항공역사에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27]
물론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였고, 규모면에서는 오히려 절정기를 구가하지만
[2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영국이
미국에 재정적 목덜미가 잡혀 외교무대에서 끌려다닌 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영제국과
영국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인 해군우위 "Two power standard"를 외교무대에서 공식적으로 상실하고
미국과 대등한 조약을 맺는다고 선언한
[29]
우크라이나 사태 영국의 대러시아 경제제재
https://www.yna.co.kr/view/AKR20220225005352085
[30]
게다가 서로
영어를 주로 사용하니 교류가 쉬운것도 한몫했다.
[31]
특히
OPEC 국가들과 대립하는 석유 개발 문제는
미국과
영국이 뜻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32]
케네디가 미사일 위기 중 연락한 유일한 타국 정상이었다.
[33]
발의자인 브라이언 맥마흔 상원의원 이름을 따 맥마흔법으로도 불린다.
[34]
호주가 핵실험 부지와 핵무기 원료 물질을 제공하였다.
[35]
소련의 눈치를 봤다는 학설도 있으나, 존 루이스 게디스 교수의 저서 "냉전의 역사"에 따르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소련과의 관계보다 영국이 미국과 상의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36]
1973년 1월 1월 유럽경제공동체 (EEC) 가입
[37]
히스의 미영관계에 대한 인식은 그가 1973년 전 미국 외교 안보 보좌관이었던 월트 로스타우(Walt Rostow)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서한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25년간 영국은 주로 미국에게 잘 보이고자 여러 제국 영토에서 철수, 독립국들을 모아
영연방을 구성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국 국익 증진은 미미하였고, 손실은 일정 수준 이상이었습니다. (For the last 25 years Britain had been divesting itself, largely to the please the Americans, of imperial responsibilities and creating a Commonwealth of independent countries. The result was of little benefit and of some liability to the United Kingdom.)
[38]
경제공동체를 넘어선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유럽
[39]
히스 총리는 '헨리 키신저가 대상 국가들과의 상의도 없이 유럽의 해를 공포한 일은 내가
트라팔가 광장의 사자상 사이에 서서 '미국 구원의 해'를 선언하는 격이었다'라고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For Henry Kissinger to announce a Year of Europe without consulting any of us was rather like my standing between the lions in Trafalgar Square and announcing that we were embarking on a year to save America.)
[40]
당시는 미 패권주의와 미-소 양극단적 국제질서 형성을 극도로 경계한 샤를 드골 대통령이 사임한 지 불과 4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고, 그의 독자외교 노선은 지금까지도 프랑스 외교정책의 기본 기조로 자리하고 있다.
[41]
Mutual and Balanced Force Reductions, 상호균형군축
[42]
Agreement on the Prevention of Nuclear War
[43]
Sir Burke Trend, Cabinet Secretary, 장관급이지만 여당 하원의원이 장관에 임명되는 타 부서와 달리 관료 출신 공무원이 맡는다. 버크 트렌드 경은 1974년 트렌드 남작(Baron Trend)에 임명된다.
[44]
'영국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가 적국을 대하는 태도 같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유럽은 고통스러운 결과(유럽 주둔 미군 감축)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영국 외무부 내에서도 키신저의 독단성이 마치 동맹이 아닌 적국을 대하는 태도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45]
전쟁 발발 즉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을 전면 금지하여 당시 항구에서 이스라엘행 배에 선적을 기다리고 있던 무기마저 동결.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이런 조치를 당한 주영이스라엘대사는 그 무기만이라도 가던 길 가게 해 주면 안 되냐고 빌었지만 이런 상황을 수년 전부터 상정해 중립 노선을 굳게 결심한 영국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영국 정부는 중립을 매우 중요시해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작전[65]이 먼 거리와 중간기착지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미군 수송기가 자국 공군기지는 물론 영공상에 한 발짝도 못 들게 하였다. 아랍 국가들에게는 우리 절대 이스라엘 편든 적 없으니 석유수출 금지만은 제발 말아달라는 절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46]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튀르키예,
키프로스,
몰타,
아이슬란드,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핀란드를 제외한 서유럽 전체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수하에 있었으며,
스페인의 경우
내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바스크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당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이 나치와
프랑코의
팔랑헤를 비판했다.
[47]
이는 버락 오바마 정부의 외교 실수로 일컬어지는 것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분명히 할 말을 하기는 했지만, 너무 지나친 수준이었다는게 중론이다.
[48]
당시 미국에서 영국과의 안 좋은 감정 때문에 프랑스, 프로이센, 스페인 등과의 교류를 시도했으나, 결국 영국이 자신들과 가장 잘 맞는다는 걸 깨닫고 결국 남북전쟁을 전후해 감정이 어느 정도 희석된 뒤에는
영국과의 교류를 1순위로 복귀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장
미국 백인들의 조상 대부분이
영국에 있어서 명절때
뉴욕 -
런던 항공편 수송량이
서울,
부산 -
제주 노선보다 수요가 더 많다.
[49]
사실 애초에 영연방은 영국과 회원국들이 국익 도모를 위해 모인 정치적 연합체이지 절대로 완전히 좋아서 가입한건 아니다. 미국은 오히려 영국에도 미군을 파견시킬 정도로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미영관계가 현재보다 더욱 좋아진다 하더라도 가입할 이유는 없다.
[50]
전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들이다. 그리고 전부 파이브 아이즈 소속이다.
[51]
현재도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미국은 최대의 우방이지만, 4차 중동전쟁 당시 이미 미국은 한 번 이스라엘을 소련과의 합의하여 갈아버리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이 네 국가들은 모두 영연방이다. 미국의 최우방국인 영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케이스.
[52]
코로나 이전에는 영국항공이
비즈니스석으로 만 32석인
A318을
런던 -
섀넌 -
뉴욕 노선을 띄웠다.
[53]
더 무시무시한 것은 영국항공 외에도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도 이 항공 노선을 운영하고 있고,
유나이티드는
뉴어크 -
런던 노선을 운영하고 있고, 히스로가 부족하면
영국항공에서
개트윅 착발 뉴욕 노선도 운영한다.
[54]
A380 퇴역 후
보잉 777이나
A350 XWB으로 대체되었다.
[55]
정작 리처드 커티스는
영국계
뉴질랜드인의 후손이며 어릴 때 영국에
정착했다.
[56]
그의 작품 중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브리짓 존스의 일기-열정과 애정 모두
미국인과
영국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57]
American Ethnicity
[58]
미국은 3억 2000만 명이 넘어가는데 영국은 6500만 명 정도이다.
[59]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한국과 다르게 식민모국인 영국과 잘 지낸다는 식으로 말하는 등
[60]
물론 그렇다고 미국이 축구를 더럽게 못 한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지만, 미국은 아무래도 다른 스포츠들이 더 강세고 축구는 전력 외 스포츠 취급을 받는 경향이 크다.
[61]
홍차는
캐나다의
메이플시럽처럼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핵심 품목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홍차 수급 문제가 영국의 주요 과제였고, 지금도 홍차 가격 인상은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
[62]
Dame Karen Pierce
[63]
Anglo American Relation is defined by tea
[64]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영국 정부의 과도한 차
관세로 인한
보스턴 차 사건인 걸 보면 공교롭다고 볼 수 있다.
[65]
니켈 그라스 작전, Operation Nickel Gr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