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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0:38:08

렉싱턴-콩코드 전투


파일:Lexington-by-William-Barnes-Wollen.jpg
렉싱턴 전투 기록화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미국 민병대
4. 진행5. 결과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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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세계에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콩코드 찬가(Concord Hymn) 中[1]

렉싱턴-콩코드의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는 1775년 4월 19일,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 보스턴 근교 미들섹스(Middlesex)의 렉싱턴 콩코드에서 맞붙은 전투로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전투이다.

2. 배경

7년 전쟁 이후 막대한 빚에 시달린 영국 정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764년부터 13개 미국 식민지에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설탕조례, 인지조례, 홍차조례 등 일련의 법안을 제정했다. 이에 식민지 주민들은 "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특히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과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진 보스턴은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 이에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을 증강시켰고, 1774년 6월 보스턴 항구 폐쇄를 지시했으며, 보스턴이 속한 매사추세츠 식민주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영국의 조치에 분노한 메사추세츠 주민들은 영국에 맞서기 위해 보스턴 인근 지역에 민병대를 결성했다.

1775년 4월 14일,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지휘관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다트머스 백작 윌리엄 레지로부터 반란군의 무장 해제 및 반란 주모자들을 투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게이지는 4월 18일 아침 미첼 소령이 이끄는 20여 명의 기마 순찰대를 파견했다. 이 순찰대는 명목상으로는 메사추세츠 주의 치안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파견되었지만, 과거 보스턴에서 온 순찰대와는 달리 해가 진 후 외출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새뮤얼 애덤스 존 핸콕의 위치를 물었다. 주민들은 이런 순찰대의 행동에 크게 놀랐으며, 영국군이 자신들을 해치러 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렉싱턴 민병대는 4월 18일 저녁 일찍 집결해 영국군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보스턴에서 최대한 은밀하게 콩코드로 가서 모든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파괴하시오. (중략) 그러나 병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사유재산을 빼앗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같은 날 게이지 장군은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에게 위와 같은 비밀 지령을 내렸다. 게이지는 반란군 지도자를 체포하라는 서면 명령은 내리지 않았는데, 주민들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지령을 받은 스미스 중령은 700여 명의 군인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콩코드로 이동했다.
파일:올드 노스 교회.png
보스턴의 올드 노스 교회(Old North Church).

한편 보스턴의 은세공사로 식민지 저항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폴 리비어(Paul Revere)는 동료 3명에게 성공회 교회인 노스 교회(North Church, 현 올드 노스 교회)의 첨탑에서 등불을 밝힐 것을 지시했다. 영국 군대가 찰스 강을 넘어 진군할 경우 렉싱턴과 콩코드의 민병대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등불은 스미스 중령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4월 18일 밤 잠시 동안 밝혀졌는데, 영국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매우 짧은 시간 유지되었으나 수 마일 밖의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다. 같은 시간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스가 이끄는 전령은 보스턴을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콩코드로 말을 몰고 달려가면서 여러 마을을 지나며 "정규군이 온다!"[2]고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경종을 울리고 북을 치면서 영국군이 진군함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때 밝혀진 등불과 관련해 미국의 시인 헨리 롱펠로우(Henry W. Longfellow)가 독립 전쟁의 발단이 된 일화를 시적으로 표현했는데, 미국에서는 여러 학교에서 이 문장을 가르칠 정도로 유명하다.
One if by land, and two if by sea.
육지로 오면 등불 하나, 바다로 오면 등불 두 개.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가 진군하던 영국군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미국 독립 전쟁 최초의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미국 민병대

4. 진행

1775년 4월 19일,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은 핏케언 소령 휘하의 경보병 부대에 콩코드 강변의 다리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핏케언 소령은 렉싱턴에서 민병대 77명과 조우했다. 여기서 역사적인 첫 교전이 발생했고 민병대는 8명이 전사, 영국군은 1명이 경상을 입었다. 콩코드 서쪽으로 후퇴하는 민병대를 추격한 스미스 중령은 병력을 분산시켰다. 10연대 소속 척탄병 부대는 문디 폴 대위의 지휘하에 사우스 브릿지로 진격했고, 파슨스 대위 휘하의 경보병 100명은 노스 브릿지로 진격했다. 4연대와 10연대 소속 2개 부대는 퇴로를, 로리 대위가 이끄는 1개 부대는 교량을 지켰다.
파일:콩코드 올드 노스 브릿지.png
콩코드의 올드 노스 브릿지(Old North Bridge).
민병대가 첫 번째 승리를 거둔 곳으로, 문화유산으로 복원되었다.[3]

핏케언 소령 휘하의 경보병 부대는 콩코드 마을에 진입하여 민병대가 숨겨 놓았을 무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24파운드짜리 대포 3문을 파괴하고 총탄 몇 발을 불태웠으며, 밀가루 100배럴과 소금에 절인 음식들을 파괴하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파슨스 대위 휘하의 부대는 무기고로 사용되었던 바렛 대령의 농장에 이르렀지만 이렇다 할 물자를 찾지 못했다. 이때 노스 브릿지 상류의 펀카타셋(Punkatasset) 고지에 매복해 있던 제임스 바렛 대령의 부대는 마을 방향에서 영국군이 자신들의 물자를 불태우는 것을 목격하고 다리로 진군했다. 로리 대위의 부대는 스미스 중령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노스 브릿지에서 민병대와 교전하였으나 다리를 사수하지 못했다.

이후 스미스 중령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콩코드 강변을 따라 민병대 3개 중대와 대치하면서 바렛 농장으로 간 원정 부대를 퇴각시켰으며, 더이상 작전을 이어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오후 즈음해서 영국군은 콩코드의 남은 보급품을 소각하고 완전히 철수해 보스턴으로 향했다. 영국군이 철수를 진행하는 동안 민병대는 인근 마을에 지원병을 요청하여 많은 병력이 몰려들었다.

증원된 민병대 수천 명이 영국군의 퇴로를 추격해 곳곳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영국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기를 든 적군은 잡히는 대로 처형, 주변의 민가들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렇게 스미스는 렉싱턴으로 후퇴해 휴 퍼시가 지휘하는 증원군 800명과 합세했지만, 민병대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찰스타운까지 퇴각했다. 민병대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다가 어둠이 깔리자 비로소 물러났고,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재빨리 찰스타운의 고지에 2개의 포대를 건설하고 다가올 민병대의 공세에 대비했다. 이리하여 렉싱턴-콩코드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군은 73명이 전사하고 53명이 실종, 174명이 부상당했으며 민병대는 49명이 전사하고 5명이 실종, 39명이 부상당했다. 영국군은 대포 3문을 비롯한 무기와 탄약을 상당수 파괴했지만 민병대는 이 손실을 금방 복구했고, 영국군에 의해 집과 재산을 잃은 주민들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후 조지 워싱턴이 대륙의회로부터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보스턴 인근에 모인 민병대를 규합해 보스턴 탈환 작전에 착수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6. 여담


[1] 실제로 최초 교전은 하술하다시피 렉싱턴에서 77명의 민병대원이 영국군과 조우하여 충돌한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한 발의 총성은 이후 노스 브릿지에서 민병대원들이 첫 번째 사격 명령을 받고 영국군에 응사하여 다리를 사수한 것을 말한다. '전 세계에 울려퍼졌다'는 것은 이 전투로서 정규군과 민병대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독립 전쟁의 막이 오르고, 프랑스 등 유럽 국가가 끼어들었으며, 결국에는 미국이 신생국가로서 독립하여 아메리카의 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상징이다. 바로 여기서 '울려퍼진 총성'이라는 말이 큰 영향을 미친 유혈사태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 표현이 쓰인 대표적 예시가 바로 '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려퍼진 두 발의 총성'이다. [2] "영국군이 온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는 정규군이 온다고 외쳤다. [3] 오늘날 콩코드 민병대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근처에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