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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과 파키스탄의 관계. 파키스탄은 인도와 함께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47년에 인도와는 분리독립했다. 하지만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은 역사적인 이유로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다.2. 역사적 관계
2.1. 파키스탄 독립 이전
동인도 회사를 운영하며 무굴 제국과 무역하던 영국은 무굴 제국이 약체화된 것을 계기로 무굴 제국의 봉신국들을 차례로 병합하고 무굴 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에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펀자브, 신드 지역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 무렵 세포이 항쟁이 실패하면서 영국은 무굴 제국 마지막 황제를 귀양보내고 영국령 인도 제국을 건설한다. 이후 1870년대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듀랜드 라인을 세우면서 원래 아프가니스탄 두라니 왕조의 영토였던 오늘날의 발루치스탄 동부 및 파슈툰인들이 거주하는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지역이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 편입되었다.영국의 식민 지배 하에서 북인도 각지에서는 기근이 발생함[1]과 동시에 무굴 제국 시절 기득권을 누리던 무슬림 관료들의 입지가 새로 치고 올라온 힌두교도들에 의해 흔들리면서 인도 무슬림 사회 내에서는 반영 감정이 자라났다. 다른 한 편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하에서 인도 무슬림들은 영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20세기 들어서는 적지 않은 인도계 무슬림 지식인들이 영국 내 대학에서 수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도아대륙 무슬림 사회에서 영어가 페르시아어를 대신하게 되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등등의 해외 식민지 전쟁에서 펀자브 지방의 군인들을 동원하면서 자치권 확대를 대가로 제시하였으나 1차 대전 종전 이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기에 배신감을 느낀 인도인들은 인도국민회의 및 인도무슬림연맹 등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활발한 독립 운동을 진행하였으나, 무슬림들과 힌두교도 시크교도 삼자 측은 서로의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이 커져만 갔다. 인도 무슬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통일된 형태의 독립을 포기하고 대신 영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하는 서북부 지방을 묶어서 따로 독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슬림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은 1947년에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분리되었고, 1947년 준비 없이 이루어진 갑작스런 독립으로 무슬림 인구와 힌두교/시크교 인구가 어울려 살았던 펀자브 지방에서는 대대적인 인구 교환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난민과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분리 독립을 계기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또한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오늘날 방글라데시에 해당하는 동파키스탄 지역까지 파키스탄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반대로 무슬림 인구가 대다수인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로 넘어가서 후에 여러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파키스탄 자치령은 1956년 독립하여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에 영연방에 가입했지만, 수차례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게 되었다.
2.2. 파키스탄 독립 이후
영국내에서 파키스탄계 영국인은 인도계 영국인과 함께 영향력이 큰 편이다. 파키스탄과 인도가 서로 분리된 이후 60년대를 전후하여 상당수의 카슈미르인 무슬림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파키스탄계 영국인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영국 내 집시도 원조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집시는 이주 역사가 오래된 관계로 파키스탄인으로의 분류를 거부하는 편이다.현대에 들어서면서 파키스탄은 영국과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다. 거기에다 파키스탄은 영국의 지배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영국에 대해선 반영감정이 높다. 영국 식민 지배 시절 우민화 교육과 산업 해체, 농산물 징발로 세계적으로 부유한 펀자브/신드 지역은 빈곤 지방으로 전락하였다. 카슈미르 분쟁 역시 영국의 책임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거기에다 듀랜드 라인으로 파슈툰족의 거주지가 아프간과 파키스탄으로 나뉘어진 원인도 되었다.
파키스탄은 영국의 지배를 받아서 영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공용어에 포함되어 있다. 영국내에도 파키스탄계 영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파키스탄계 영국인들은 인도계 영국인들과 함께 영향력이 매우 큰 편이다. 일부 파키스탄계 영국인들중에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종하는 경우가 있으나 주로 자영업(요식업, 택시 기사 등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세속주의 온건 성향이 더 많은 편이다.[2]
멕시코에서 8살~13살 여자아이들이 임신 출산하는 경우들이 많아 아동 성범죄에 엄격한 미국 사회 내에서 멕시코인 이미지가 안 좋아진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 내 파키스탄인 커뮤니티 및 파키스탄 이미지도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 로더럼 아동 성착취 사건 때 일부 파키스탄계 영국인들이 성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고 이후 체포된 범인들은 영국으로 송환되어 영국 법원에서 징역 10년 ~ 20년을 선고받았다. # 이 사건 당시 영국에서 파키스탄에 대한 이미지가 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다만 사디크 칸이 런던 시장으로 당선된 사례, 파키스탄계 글래스고 시 의원이 치킨 티카 마살라를 영국-스코틀랜드 요리로 등재하려는 사례 등에서 보듯 많은 파키스탄인들이 능력 본위의 영국 사회 내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역사적 감정 외 실리적인 이유로 양국 간의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는 양국의 협력으로 파키스탄의 탄약과 물자들이 우크라이나로 공여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