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2:04:25

찰스 린드버그

찰스 린드버그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국 육군 명예훈장.jpg
<colbgcolor=#00518f><colcolor=white> 날짜 1928년 3월 21일
이름 찰스 린드버그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영웅들 & 아이콘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90614_400.jpg
에멀린 팽크허스트 헬렌 켈러 로자 파크스 서굿 마셜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가이
무하마드 알리 마릴린 먼로 마더 테레사 빌리 그레이엄 이소룡
찰스 린드버그 재키 로빈슨 미군 펠레 안네 프랑크
빌 윌슨[1] 안드레이 사하로프 체 게바라 다이애나 스펜서 하비 밀크
같이 보기: 지도자 & 혁명가 부문,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folding [각주 보기] }}}}}}}}}

[1]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설립자

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 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tablebordercolor=#e90606>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인물 ( 192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20's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nopad>파일:공백500x666.png 파일:공백500x666.png 파일:attachment/time-person-of-the-year-1927-charles-lindbergh.jpg 파일:Person Of The Year 1928.jpg 파일:Person Of The Year 1929.jpg
<rowcolor=#fff> 1927년

대서양 횡단
1928년

크라이슬러 빌딩
1929년

영 안
파일:Time_Inc_white.png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찰스 린드버그
Charles Lindbergh
파일:lindbergh.helmet.0014.jpg
본명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1]
Charles Augustus Lindbergh
출생 1902년 2월 4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사망 1974년 8월 26일 (향년 72세)
미국 하와이주 마우이섬 키파훌루
직업 비행사, 작가, 발명가, 탐험가, 사회운동가
신체 191cm
학력 위스콘신 대학교 기계공학(중퇴)
배우자 앤 모로 린드버그 (1929년 결혼)
자녀 9남 4녀[2]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찰스 린드버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대서양 횡단2.2. 아들 유괴사건2.3. 2차대전 전후의 행보
3. 가족4.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wasco.co.kr/HIS_007_1.jpg
자신의 비행기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와 함께
비행기로 대서양(뉴욕-파리 구간)을 착륙 없이 단독으로 횡단한 세계 최초의 주인공.[3]

기본적으로는 항공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비행사지만,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대외 고립주의자로서 그 연장선상에서 2차대전을 앞두고 반유대주의 및 친나치 행보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파일:chales August.jpg
아버지인 찰스 오거스트 린드버그와 함께 찍은 사진
당시 미네소타 주에서 하원의원을 지낸 찰스 오거스트 린드버그와 이밴절린 로지 랜드 린드버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텍사스의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고[4] 1925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arles_Lindbergh_1925.jpg
1925년의 모습

1925년 10월, 우편항공기[5] 조종사로 일했다. 얼마 뒤 33시간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이주하여 생리학자 알렉시 카렐과 함께 장기를 몸밖에서 산채로 보관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었다.[6] 이렇게 육군 본부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국에서 민간인으로 살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미국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하는 등 한 마디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비행에 쏟은 인물.

2.1. 대서양 횡단

파일:UCLYi39.jpg
1927년, 33시간 무수면 단독 비행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한 뒤 린드버그의 비행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린드버그는 후술한 명언 인용구에서 보듯 파리 시간으로 밤 10시에 도착했으므로 도착 순간은 아니다.
"날개여, 저것이 파리의 불빛이다."

1927년 5월 21~22일에 걸쳐 약 33시간 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을 날아서 횡단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린드버그는 67번째로 대서양 비행에 성공한 사람이며, 정확히 표현하면 무착륙 단독으로서는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대서양을 비행기로 무착륙 횡단한 것은 린드버그보다 거의 10년 전인 1919년, 존 알콕과 아서 브라운이라는 두 영국인이 영국회사 빅커스 비미의 비행기로 뉴펀들랜드를 출발하여 아일랜드에 도착한 것이 처음이다. 사실 도착지가 파리였던 덕에 유명해져서 앞의 66명이 희미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탓에 린드버그의 횡단이 최초인 것처럼 알려져버린 탓이 크다. 참고로 도착지가 파리였던 것은 대서양 횡단에 25000달러의 상금을[7] 건 대부호 레몽 오르테그(Raymond Orteig, 1870~1939년 6월 6일, 당시 뉴욕시티 호텔 소유주)가 목적지를 뉴욕-파리 코스로 지정했기 때문이다.[8][9] 웃긴 것은 리플리('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의 그 리플리 맞는다)가 비행선을 포함해 당시 린드버그의 비행 이전 25명이 대서양을 날아 횡단했다고 하자 미국에서 애국심의 부재를 질타하는 편지 2만 5천통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사실 대서양 최초 무착륙 횡단이 영국인들이 영국제 비행기로 영국 식민지(현 캐나다)에서 영국(현재 아일랜드)까지 비행해 영국인이 건 상금을 받은 것이었고, 린드버그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제 비행기로 대서양 위의 섬들 따위가 아니라 진짜 북미와 유럽대륙인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날아 미국인이 건 상금을 받은 것임을 고려하면, 이는 국민적 자존심 대결의 성격이 짙었다.

아무튼 대단한 모험이기는 한데, 린드버그가 탔던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Spirit of St.Louis)"[10]는 굉장히 작고 가벼운 비행기였기 때문에 2명 이상이 탑승할 크고 엔진이 여러 개 달린 비행기를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돋보였다.[11] 린드버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출발하기 전에 시도한 르네 퐁크가 4명이나 탑승할 수 있고 침대까지 탑재한 비행기를 사용했다가 중량이 너무 무거워 이륙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인 사례가 나오는데, 린드버그는 그래선 안 되고 1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를 선택한 건 교대할 수 있는 예비 조종사가 타거나 엔진이 추가로 달려 비행기가 크면 클수록 연료 소비량이 오히려 더 커진다는 판단 때문. 실제로 린드버그는 육분의, 조명탄, 무전기, 전등, 심지어 위험에 대비한 낙하산조차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짐을 모두 버리고 지도조차도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내버리는 철두철미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해서 그 작은 비행기에 1703리터(2750갤런)의 연료를 실었고 항속거리는 7200km가 되었다. 필요한 비행거리는 5760km이므로 비행기의 능력은 충분했다.[12] 이때 어찌나 연료를 많이 실었는지 연료통이 시야를 가려 잠망경을 개조해서 앞에 단 뒤 그것에 비행을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13] 게다가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비행 전날 정비공이 연료를 넣던 도중 실수로 호스를 놓쳐 연료관이 호스로 막혔고, 이에 정비공은 몰래 그 부분을 절단한 뒤 다시 납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납땜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하마터면 비행 중에 비행기 연료가 샐 뻔 했다.

린드버그의 비행에서 가장 큰 난관은 혼자 있으면서도 33시간 동안 을 자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조종간 잡고 있는 사람이 린드버그 뿐이고 특별히 자동 조종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깜빡 잠들기라도 하면 그 즉시 대서양으로 다이빙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잠자지 마! 잠들면 죽어!" 무게를 줄이려고 음식물도 샌드위치 다섯 조각과 물 1 리터밖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픔과 갈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화장실 변기도 없는 만큼 나올 게 있어서도 곤란했고.

비행 도중에 각성제를 좀 쓰기도 했는데 크게 도움은 안 되었던 듯.[14]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비행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고 일단 호텔에 가서 잠부터 푹 자고 나왔다. 이래서 린드버그 위인전을 읽으면 "잠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이 업적으로 1928년 3월 21일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게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

2.2. 아들 유괴사건

여기까지는 인터넷 백과사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린드버그에게는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charles-lindbergh-son-kidnapped.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 유괴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3. 2차대전 전후의 행보

파일:1937.jpg
1937년, 독일을 방문한 찰스 린드버그[15]

미국우선위원회에서 활동하며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열렬히 고립주의, 참전 반대를 주장했고, 히틀러 나치를 편들었으며 우생학에 바탕을 둔 인종차별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 흡족해한 나치가 제국 훈장을 수여할 정도. 반면 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린드버그의 행실을 비판하였고, 당시 육군 항공대 대령이던 린드버그는 군을 떠났다.
파일:external/www.charleslindbergh.com/medal.gif
“나치 포장, 참 잘했어요
삽화 왼쪽의 '인류를 위하여' 문구가 압권이다.
그러다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전의 태도와는 달리 참전하겠다고 나섰다. 나치가 옳다는 견해는 그대로고 나치와 싸우려는 것은 미국의 실수지만, 자기는 미국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참전을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군 출신이긴 하지만 나름 나이도 40대고 유명인물이고 해서 입대는 거부당했는데, 그 대신 조종교관과 기술고문 역할을 맡았다. 민간 기술고문으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초기형의 개량을 담당하기도 했다. 종전 무렵에는 꾸준히 군부를 설득해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태평양 전선의 전투기와 폭격기 조종을 맡아서 50여 차례 임무를 수행했으며, P-38으로 정찰기 1기도 격추한다.

민간인이 어떻게 전투 임무에 참가했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린드버그는 대서양 횡단을 성공시킨 만큼 비행기 연료절약과 항속거리 증가에는 전문가 취급을 받았고 항속거리 문제가 중요한 대서양 전장에서 이 관련 연구와 교육을 위해 비행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되는가를 봐야 하니 전투임무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적기와 마주치면 당연히 자기방어도 할 수 있어야 했으니 격추도 할 수 있었던 것.

종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추천으로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했다. 이후 말년에는 당시 미국 플래그 캐리어였던 팬 아메리칸 항공[16] 자문도 하고[17] 자서전도 집필하는 등 노년을 보내다가 1974년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

4. 기타


파일:aviator-charles-lindbergh-1902-1974-famed-for-making-the-first-solo-BN684R.jpg

파일:1024px-Charles_Lindbergh_and_the_Spirit_of_Saint_Louis_(Crisco_restoration,_with_wings).jpg


[1] 다른 이름은 찰스 A. 린드버그 2세. 이름과 이니셜이 같기 때문인데, 아버지 이름을 물려받은 건 아니다. 중간이름이 다르기 때문. 이 문서의 인물은 Augustus이고 아버지 쪽은 August이다. [2] 4남 2녀는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5남 2녀는 사생아. [3] 사실 이전에도 대서양을 비행하여 횡단한 사람은 몇 명 있었다. 린드버그는 현상금이 걸려 있던 뉴욕-파리(이 경우 뉴펀들랜드-아일랜드보다 훨씬 길어진다) 구간을 정복한 최초의 비행사다. 후술 참조. [4] 당시 미국에는 아직 공군이 독립 군종이 아니었다. [5] 처음에는 우편사업을 정부에서 진행했으나, 점점 오고가는 우편물이 증가하고 잦은 실수로 인한 배송사고도 많았던지라 민간 항공기업에게 면허제로 맡기는 '항공 우편법'이 제정되었다. 린드버그야 불세출의 비행사였던 만큼 실수는 별로 없었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힘든 야간 비행, 수도 규모도 시원찮은 비행장들, 어긋나기 일쑤인 기상예보 등 꽤나 열악한 비행 환경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6] 다만 당시에는 장기 이식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7] 1919년에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한 2명의 영국인들 역시 데일리 메일지가 건 1만 파운드의 현상금을 노리고 참가했었다. [8] 오르테그 상은 1919년에 선언됐으며, 무착륙으로 뉴욕과 파리를 연결하기만 하면 그 외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린드버그 1인승 비행기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은 대형기를 준비한 것이다. [9] 여담으로 린드버그가 오르테그 상에 도전하려고 한 동기는 큰 비행기를 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비행기가 매우 비쌌으므로. 헌데 사실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호도 그 대형기에 비해 싸다 뿐이지 엔진과 부분품 없이 1만 달러 견적이 나오는 비행기였다. 딱 소형기에 걸맞은 가격인 셈. [10] 린드버그의 비행을 후원하고 비용을 대 준 사람들이 세인트루이스의 기업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다. 린드버그는 본래 당대의 최고 비행기 제작사였던 드라이모터나 벨란카의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름도 없는 놈이 지원은 무슨"이라는 냉대만 받았다고 한다. 린드버그가 이 상에 도전한 이유도 벨란카의 항공기를 살 돈이 필요해서였는데. 이 비행기의 값은 무려 2만 9천 달러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린드버그의 경쟁자였던 버드 중령은 백화점 재벌 워너메이커의 지원을 받아 린드버그가 갖고 싶어했던 바로 그 비행기를 이용해 도전하려고 했는데, 린드버그가 출발하기 전까지 비행기가 준비되지 않아 출발도 못하고 패했다. [11] 당장 린드버그 바로 다음에 시도한 체임벌린도 엔진이 2개인 크고 아름다운 비행기를 사용했다. 린드버그 직전에 도전한 프랑스 비행사들인 샤를 뇡제세(Charles Nungesser), 프랑수아 콜리(François Coli)도 이인조 팀으로 시도했으나 이들은 대서양 어딘가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다른 설로는 대서양은 건넜는데 메인주쯤에 추락한 거 같다는 설도 있다. 추측으로는 연료가 바닥나 추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앞의 4인승 비행기와 더불어 린드버그가 연료의 탑재량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다만 린드버그보다 1주일 뒤에 시도한 2인승의 컬럼비아호도 성공했다. 이쪽은 조종사 1명에 승객 1명이었으므로 교대를 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이 조종사도 혼자 대서양을 건넌 셈이다. [13] 정확히는 린드버그 본인의 요청으로 주연료통이 좌석 앞에 설치되었다. 다른 도전자가 좌석 뒤에 있던 연료통이 앞쪽으로 쏠려 압사당하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좌석문과 프로펠러까지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이 부분에 연료통이 들어가있는 구조였다. [14] 이 시절에는 각성제가 전혀 금지품목이 아니었다. 심지어 2차대전 때는 추축국이건 연합국이건 병사들에게 마구 때려부었다. 심지어 구 동독군에서는 1988년까지 지급했다. 히로뽕 또한 일본 제약사의 상품명이며 자세한 것은 히로뽕 참조. [15] 시대상을 반영한 듯, 뒤쪽에 하켄크로이츠가 찍혔다. [16] '팬암'이라는 약칭으로 더 유명하며, 1991년에 경영난으로 파산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거의 모든 항공 루트와 보잉 747의 개발에 참여하는 등 항공 역사에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으며, 전성기에는 코카콜라와 비견될 정도로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진 항공사였다. [17] 팬암이 최초로 발주한 최초의 현대식 제트 여객기인 보잉 707의 개발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한다. [18] 린드버그의 독일 사생아들 사진. 거의 붕어빵인 듯... # [19] 도서관에서 인간들의 책을 읽을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생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