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레이엄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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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verend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K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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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윌리엄 프랭클린 그레이엄 주니어 William Franklin Graham Jr. |
출생 | 1918년 11월 7일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 |
사망 | 2018년 2월 21일 (향년 99세)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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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밥 존스 대학교 플로리다 성경연구소[1] (졸업) 휘튼 칼리지 ( B.A.) |
가족 |
부친 윌리엄 프랭클린 그레이엄 시니어(1962년 사망) 모친 모로 커피 그레이엄(1981년 사망) |
배우자 루스 그레이엄[2](1943년 ~ 2007년,
사별) 자녀 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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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목사 ( 침례회) |
종교 | 개신교 ( 남침례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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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템플턴상 (1982)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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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세기에 활동했던 미국의 개신교 남침례회 목사. 미국을 비롯한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정확히는 신복음주의의 대표격 인물. 이런 위상으로 인해 '개신교계의 교황'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0년대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이래 미국 대통령들에게도 여러 조언을 제공하였으며 아이젠하워의 임종 직전 그의 앞에서 마지막 기도를 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2. 생애
복음주의 성향으로 유명하지만 청소년 시절까지만 해도 '너무 세속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아 기독교 청소년 단체에서 내쫒기거나 고등학교 때는 고등학교 규칙이 너무 엄격한 것에 불만을 품어 퇴학 직전까지 갔다가 당시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 기독교 전도사였던 밥 존스의 말을 듣고 회심했다고 한다. 신학 석사 과정을 일리노이 주 위튼 칼리지에서 진행하던 중 성서무오설을 받아들였고 보수적인 남침례회 목사 인수를 받았다.개신교 목사였지만 반공 성향이라는 점에서 접점이 있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도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었으며 가톨릭 자체에 대해 호의적이기도 했다. 이런 점을 들어 반WCCㆍ반가톨릭 성향의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그를 (가톨릭과 야합한) 배도자라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트루먼, 아이젠하워, 닉슨 등 유력 정치인들과 스스럼 없이 만남을 가졌으며 밀월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몰락하면서 이미지에 타격을 받은 후 정치적 스탠스를 밝히는 데 신중해졌다고 평가된다.
정치권과의 유착, 복음의 단순화 등 비판받을 지점도 많지만 대형교회에서 있을 법한 재정적 문제나 횡령, 섹스 스캔들 등은 의외로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보수적인 신학관과 별개로 두루두루 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가톨릭과 성공회 사제들과도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공통점을 찾으려 했으며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력으로 인해 한국 개신교는 그의 짙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극우 교단 일각에서는 그를 배교자라고 평가절하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에는 1952년, 1958년, 1973년, 1984년 등 총 네 차례 방문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위의 영상은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5.16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을 주 강사로 대회장 한경직 목사, 통역 김장환 목사로 하여 매일 50여 만 명, 연인원 320만 명, 17개 교단이 연합한 초교파 대형 전도대회 장면이다.[3]
방북한 적도 있는데 1992년에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사전에 만나서 의견을 조율하여 구두 메시지를 김일성에게 전달하는 등 미국의 비공식 특사로 활동했고 1994년에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마찬가지로 비공식 특사로 미국의 입장을 북한 측에 전달하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핵 협상을 위해 방북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보수 성향의 개신교 인사이면서도 북한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특이 케이스다.
자녀 5명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인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1952년생)도 부친의 뒤를 이어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개신교 계열 구호 단체인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s Purse)' 대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슬람, 성소수자에 대한 강경 입장, 친트럼프 발언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전술한 한국과의 관계로 인한 인연도 있다. 그의 아내인 루스(Ruth Bell Graham)는 소녀 시절 평양의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방북했을 때도 이 연고로 북한 측에서 초청했다. 루스의 아버지, 즉 그의 장인인 넬슨 벨(Nelson Bell)도 개신교 선교사였다. 넬슨 벨이 김일성의 부모인 김형직과 강반석의 중매를 서줬다는 야사가 있으나 넬슨 벨은 한국에서 활동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