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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3:24:00

존 웨인

존 웨인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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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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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파일:미국영화연구소 로고.svg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 7위 8위 9위 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파일:goldenglobe_cecildemil.png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1956년
세실 B. 드밀 월트 디즈니 대릴 F. 재넉 진 허숄트 잭 L. 워너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머빈 르로이 버디 아들러 모리스 슈발리에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주디 갈랜드 밥 호프 조셉 E. 레빈 제임스 스튜어트 존 웨인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찰턴 헤스턴 커크 더글러스 그레고리 펙 조안 크로포드 프랭크 시나트라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7년
앨프리드 히치콕 새뮤얼 골드윈 베티 데이비스 핼 B. 월리스 월터 미리쉬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레드 스켈튼 루실 볼 헨리 폰다 진 켈리 시드니 푸아티에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로런스 올리비에 폴 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바버라 스탠윅 안소니 퀸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도리스 데이 오드리 헵번 잭 레먼 로버트 미첨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로렌 바콜 로버트 레드포드 소피아 로렌 숀 코너리 더스틴 호프먼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셜리 맥클레인 잭 니콜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알 파치노 해리슨 포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진 해크먼 마이클 더글러스 로빈 윌리엄스 안소니 홉킨스 워렌 비티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모건 프리먼 조디 포스터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우디 앨런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메릴 스트립 오프라 윈프리
2019년 2020년 2021년 2023년 2025년
제프 브리지스 톰 행크스 제인 폰다 에디 머피 비올라 데이비스
}}}}}}}}} ||

파일:oscar_logo.svg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Actor]]'''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e5e5e5
제1회
(1929년)
제2회
(1930년)
제3회
(1931년)
제4회
(1932년)
제5회
(1933년)
에밀 야닝스
( 최후의 명령)
( 육체의 길)
워너 백스터
( 추억의 아리조나)
조지 알리스
( 디즈레일리)
라이오넬 배리모어
( 자유의 혼)
프레드릭 마치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월레스 비어리
( 챔프)
제6회
(1934년)
제7회
(1935년)
제8회
(1936년)
제9회
(1937년)
제10회
(1938년)
찰스 로튼
( 헨리 8세)
클라크 게이블
(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빅터 맥라글렌
( 밀고자)
폴 무니
( 과학자의 길)
스펜서 트레이시
( 굿바이 마이 라이프)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스펜서 트레이시
( 소년의 거리)
로버트 도나트
( 굿바이 미스터 칩스)
제임스 스튜어트
( 필라델피아 스토리)
게리 쿠퍼
( 요크 상사)
제임스 카그니
( 성조기의 행진)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제18회
(1946년)
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폴 루카스
( 라인의 감시)
빙 크로스비
( 나의 길을 가련다)
레이 밀랜드
( 잃어버린 주말)
프레드릭 마치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로널드 콜먼
( 이중 생활)
제21회
(1949년)
제22회
(1950년)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로런스 올리비에
( 햄릿)
브로데릭 크로포드
( 모두가 왕의 부하들)
호세 페레
( 시라노)
험프리 보가트
( 아프리카의 여왕)
게리 쿠퍼
( 하이 눈)
제26회
(1954년)
제27회
(1955년)
제28회
(1956년)
제29회
(1957년)
제30회
(1958년)
윌리엄 홀든
( 제17 포로수용소)
말론 브란도
( 워터프론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 마티)
율 브리너
( 왕과 나)
알렉 기네스
(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1963년)
데이비드 니븐
( 애수의 여로)
찰턴 헤스턴
( 벤허)
버트 랭카스터
( 엘머 갠트리)
막시밀리안 셸
( 뉘른베르크의 재판)
그레고리 펙
( 앵무새 죽이기)
제36회
(1964년)
제37회
(1965년)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시드니 푸아티에
( 들백합)
렉스 해리슨
( 마이 페어 레이디)
리 마빈
( 캣 벌루)
폴 스코필드
( 사계절의 사나이)
로드 스타이거
( 밤의 열기 속으로)
제41회
(1969년)
제42회
(1970년)
제43회
(1971년)
제44회
(1972년)
제45회
(1973년)
클리프 로버트슨
( 찰리)
존 웨인
( 트루 그릿)
조지 C. 스콧
( 패튼 대전차군단)
진 해크먼
( 프렌치 커넥션)
말론 브란도
( 대부)
제46회
(1974년)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제50회
(1978년)
잭 레먼
( 호랑이를 구하라)
아트 카니
( 해리와 톤토)
잭 니콜슨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피터 핀치
( 네트워크)
리처드 드레이퍼스
( 굿바이 걸)
제51회
(1979년)
제52회
(1980년)
제53회
(1981년)
제54회
(1982년)
제55회
(1983년)
존 보이트
( 귀향)
더스틴 호프먼
(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드 니로
( 분노의 주먹)
헨리 폰다
( 황금 연못)
벤 킹슬리
( 간디)
제56회
(1984년)
제57회
(1985년)
제58회
(1986년)
제59회
(1987년)
제60회
(1988년)
로버트 듀발
( 텐더 머시스)
F. 머레이 에이브러햄
( 아마데우스)
윌리엄 허트
( 거미여인의 키스)
폴 뉴먼
( 컬러 오브 머니)
마이클 더글러스
( 월 스트리트)
제61회
(1989년)
제62회
(1990년)
제63회
(1991년)
제64회
(1992년)
제65회
(1993년)
더스틴 호프먼
( 레인 맨)
다니엘 데이루이스
( 나의 왼발)
제러미 아이언스
( 행운의 반전)
안소니 홉킨스
( 양들의 침묵)
알 파치노
( 여인의 향기)
제66회
(1994년)
제67회
(1995년)
제68회
(1996년)
제69회
(1997년)
제70회
(1998년)
톰 행크스
( 필라델피아)
톰 행크스
( 포레스트 검프)
니콜라스 케이지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제프리 러시
( 샤인)
잭 니콜슨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제71회
(1999년)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제75회
(2003년)
로베르토 베니니
( 인생은 아름다워)
케빈 스페이시
( 아메리칸 뷰티)
러셀 크로우
( 글래디에이터)
덴젤 워싱턴
( 트레이닝 데이)
에이드리언 브로디
( 피아니스트)
제76회
(2004년)
제77회
(2005년)
제78회
(2006년)
제79회
(2007년)
제80회
(2008년)
숀 펜
( 미스틱 리버)
제이미 폭스
( 레이)
필립 시모어 호프먼
( 카포티)
포레스트 휘태커
( 라스트 킹)
다니엘 데이루이스
( 데어 윌 비 블러드)
제81회
(2009년)
제82회
(2010년)
제83회
(2011년)
제84회
(2012년)
제85회
(2013년)
숀 펜
( 밀크)
제프 브리지스
( 크레이지 하트)
콜린 퍼스
( 킹스 스피치)
장 뒤자르댕
( 아티스트)
다니엘 데이루이스
( 링컨)
제86회
(2014년)
제87회
(2015년)
제88회
(2016년)
제89회
(2017년)
제90회
(2018년)
매튜 매커너히
(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에디 레드메인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케이시 애플렉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게리 올드만
( 다키스트 아워)
제91회
(2019년)
제92회
(2020년)
제93회
(2021년)
제94회
(2022년)
제95회
(2023년)
라미 말렉
( 보헤미안 랩소디)
와킨 피닉스
( 조커)
안소니 홉킨스
( 더 파더)
윌 스미스
( 킹 리차드)
브랜든 프레이저
( 더 웨일)
제96회
(2024년)
제97회
(2025년)
제98회
(2026년)
제99회
(2027년)
제100회
(2028년)
킬리언 머피
( 오펜하이머)
- - - -
}}}}}}}}}}}}}}}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남우주연상 - 드라마(영화)
제26회
( 1969년)
제27회
( 1970년)
제28회
( 1971년)
피터 오툴
(겨울의 라이온)
존 웨인
( 트루 그릿)
조지 C. 스콧
( 패튼 대전차군단)

{{{#!wiki style="margin:-10px -10px" <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f2023>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존 웨인
JOHN WAYNE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541 Vine Street
}}}}}}}}}}}} ||


}}} ||
<colbgcolor=#000><colcolor=#efd88f> 존 웨인
John Wayne
파일:John_Wayne_Publicity_Photo_1952.jpg
본명 매리언 로버트 모리슨
Marion Robert Morrison[1]
출생 1907년 5월 26일
아이오와 주 윈터세트
사망 1979년 6월 11일 (향년 72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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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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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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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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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배우, 감독, 가수
데뷔 배우: 1926년, 〈Brown of Havard〉
감독: 1960년, 〈The Alamo〉
활동 1926년 ~ 1977년
신장 193cm
종교 개신교( 장로회) → 가톨릭( 세례명: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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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efd88f> 부모 어머니 메리 앨버타 브라운 (1885~1970)
아버지 클라이드 레너드 모리슨 (1884~1937)[2]
형제 남동생 로버트 E. 모리슨 (1911~1970)[3]
배우자 조지핀 웨인 (1933년 ~ 1945년, 이혼 / 1908~2003)
에스페란자 바우어스 (1946년 ~ 1954년, 이혼 / 1924~1961)
필라 팔레트 (1954년 결혼 / 1928~)
자녀 아들 마이클 웨인 (1934~2003)
메리 앤토니아 웨인 (1936~2000)
아들 패트릭 웨인 (1939~)
멀린다 웨인 (1940~)
아이사 웨인 (1956~)
아들 이선 웨인 (1962~)
마리사 웨인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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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화3. 개인적 사항들4. 작품들5. 대중매체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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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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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배우.

193cm의 큰 키와 장대한 체구, 서부극과 전쟁물에 다수 출연하며 얻은 마초적인 이미지로 가장 미국적인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배우 본인이 생전에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마초성 강한 터프가이 이미지를 추구하였고, 존 웨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서부극 역시 당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전통적인 영화 장르였다. 그래서인지 클래식 할리우드 남배우들 중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유명하며, 연기력 또한 우수했던지라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이다.[4]

건장한 체구에서 알 수 있듯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본래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소품담당 스태프로 일하다가 B급 영화 전문 배우로 활약, 이후 존 포드 감독을 만나고 포드 감독은 그를 단역배우로 기용하다가 역마차를 기점으로 그에게 계속 주연을 맡겼고 이후로 그는 승승장구한다.

2. 영화

대부분의 영화 내용이 지금 보면 뻔한 스토리의 서부극인데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출연한 대표작 중 하나인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 같은 영화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인디언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처럼 보여 당대에는 인종차별적인 영화라는 오해가 있었으며 크게 인정 받지 못했다. 그러나 태그 갤러거 같은 평론가의 끊임 없는 노력으로 오해가 점차 풀리고 현대에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부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월간 플래툰지의 필진 니미셀은 웨인을 다른 장르의 영화도 서부극으로 만드는 사나이라고 할 정도다. 서부극이 아닌 전쟁영화 혹은 서커스단의 단장(...)으로 나온 영화들도 서부극의 포스를 풍긴다. 심지어는 칭기즈 칸으로 나온(!) 영화까지 그렇다. 즉, 좋게 말하면 성격파 배우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타입캐스트(Typecast)다.

게리 쿠퍼에 라이벌 의식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출연한 ' 하이 눈'을 평가절하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과 같은 성향을 가진 하워드 혹스 감독과 함께 '리오 브라보'를 만든다. 참고로 혹스 감독도 하이눈 까. 후세에선 하이 눈, 리오 브라보 모두 걸작으로 평가 받고있다.[5] 2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쿠퍼의 최고 걸작으로 하이눈을 언급하면서 자기에게 캐스팅 제의가 오지 않은 게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상당히 많은 전시 선전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도 작품성이 존재하는 것은 "싸우는 해군공병대(The Fighting Seabees)"와 "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 정도. 웨인 사후 이 작품에 "유황도의 모래(Sands of Iwo Jima)"를 추가해서 3부작으로 컬러 작업을 해서 비디오 및 DVD로 출시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매우 지지하였기에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 그린베레(영화)'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당연히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만들던 영화이자 실제 그린베레 대원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니 베트콩은 무조건 악. 미군이 이기며 전쟁 홍보영화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정치성향을 제외하면 의외로 재미 있어서 유럽에서는 앞부분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정치성이 농후한 장면을 삭제한 채 개봉했다...로빈 무어 원작의 '그린베레'라는 논픽션을 느슨하게 영화화 했으며 배경이 되는 연대는 1965년 미군의 본격적 개입 이전의 시기이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 삽입곡인 ' 그린베레의 발라드'는 당시에 꽤나 유명곡이 됐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그린 베레 대원들은 그다지 안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인기있던 곡 중 매우 드물게 군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노래였지만 문제는 노래 가사가 전사하는 그린베레 대원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기장을 아들 가슴에 달아주고 미국 최고의 그린베레 대원으로 만들어 달라'란 유언을 전해달라는 내용이다.[6]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다. 당시의 실제 그린 베레 대원들의 수기를 보면 가끔 이 영화와 존 웨인이 언급이 되는데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존 웨인은 멋있다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유황도의 모래는 49년작 흑백영화였다. 저걸 보고 자원입대한다는 건 굉장히 영화 마니아였다는 것이다. 아니면 옛날 영화들을 싸게 틀어주는 허름한 극장에서 봤을 수도 있다. 이 유황도의 모래는 일본군과 싸우는 미 해병대를 다루는 내용으로 저 병사의 후일담도 있다. 위문공연 온 배우에게 면박을 줬다는 이유로 나중에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왜냐하면 병사들이 제일 신나는 때가 위문공연할 때인데 그때 분위기를 깼으니...

그의 마지막 영화는 《마지막 총잡이》(원제 : The Shootist,1976)[7]였다. 이 영화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총잡이로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진짜 암으로 죽었다. 그래서인지 죽기 얼마전에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지인들에게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 고른 영화가 내 미래를 상징했을 줄 몰랐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총잡이는 돈 시겔 감독의 영화로, 한국에는 '최후의 총잡이'란 제목으로 수입되었다. 초반부에는 웨인이 찍었던 서부영화들이 조금씩 나온다. 주인공 J.B 북스(존 웨인)는 암으로 죽어가는 건 사실인데 죽을 때 모든 원한관계를 정리하려고 총싸움을 하다가 기습으로( 더블 배럴 샷건) 맞아죽는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존 웨인 영화의 정리판은 앞에서 언급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로 보면 된다. 시대와 함께 쓸쓸히 퇴장하면서 영웅으로 남기를 거부하는 인물을 연기해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3. 개인적 사항들

터프한 이미지와 상반되게 병역을 기피한 군 미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징병 대상이었지만 연령과 부양가족 때문에 면제를 받았고,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자원입대를 공언했음에도 한편으론 영화 한 편만 더 찍고 입대하겠다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원입대를 연기했다.[8] 비슷한 나이에 자원입대한 영화배우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9]와 비교하면 겉모습만 터프한 겁쟁이인 셈이라 나중에 군필인 존 포드와 영화를 찍다가 미필이라는 이유로 스탭들이 보는 앞에서 갈굼을 겪고 나서야 이 문제로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전쟁영화 < 그들은 희생양이다> 촬영 때 있던 실화이다. 참고로 당시 공동 주연인 로버트 몽고메리는 2차대전 동안 함정 근무를 하며 무공 훈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이었고, 포드는 전투원이 아니다 뿐이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한 경험[10]이 있는 참전 용사다. 또 로버트 몽고메리는 영화 촬영 막바지 존 포드가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자 자신의 실전 경험을 요긴하게 살려 남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감독해서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기에 존 포드와 공동감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영화 사이트도 몇 군데 있다. 존 웨인이 촬영장에서 3살 연상인 몽고메리의 연기력에 지적질을 하며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가르치려 드는 꼬라지를 본 존 포드가 "니가 뭘 안다고 자꾸 나대냐!"며 직접 혼냈다. 그리고 존 웨인의 병역기피가 못마땅했던 포드는 그 후 촬영 내내 존 웨인을 갈궜다. 보다 못한 몽고메리가 뜯어말려서 간신히 넘어갔다. #

정확하겐 1943년 8월 2일, 미합중국 해군 OSS[11]에 지원한 적이 딱 한 번 있긴 하다. # 다만 클라크 게이블처럼 징병대상 나이를 훌쩍 넘겼음에도 최전방으로 자원 가는 영화인들은 즐비했던 마당에 존 웨인이 요구한 것은 군인이 아닌 요원으로 후방에서 "Like my friend Gary Cooper," he said, "I'm here to entertain the troops. I have no special act but hope to get by on appearances."("내 친구 게리 쿠퍼[12]처럼", 웨인은 말하길, "나는 군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진 않을 거지만, 군인들은 출전을 통해 버틸 수 있기를 바란다.")란 땡보직 주면 군복무 한번 때워보겠단 대놓고 군복무할 맘 없단 의사를 내비쳤다. 당연히 해군 측은 거절했다. 오늘날 존 웨인 빠들은 이 허접한 지원서 한 장으로 존 웨인을 옹호하려 들지만, 미국 현지에선 존 웨인의 이 행동은 오히려 존 웨인을 병역기피자로 낙인찍는 근거가 되고 있다. 육군, 공군도 있는데 해군에 지원한 거부터 존 포드의 후광 덕을 보려는 의도가 너무나 뚜렷하다..

존 포드 감독과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었던 존 웨인은 포드 감독한테만큼은 언제나 깍듯했다고 한다. 포드는 존 웨인이 유일하게 꼼짝 못 했던 사람이었다고.[13] 존 포드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던 거장으로 천하의 시민 케인을 재낀 장본인이다. 그리고 당시 할리우드 유명 영화 제작자들은 모두 존 포드를 거쳐갔대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그 당시 할리우드에서 포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했다고 한다. 이런 포드의 승은이 오늘날 존 웨인을 만들었대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럼에도 존 웨인의 지랄맞을무례한 행동들과 과격한 인종차별 발언들은 포드 감독으로 하여금 인종주의자 논란에 시달리게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단 사실을 부정하기만 해선 안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존 포드 장례식장에서 존 웨인이 추도문을 읊었다. # 반면 존 웨인의 장례식은 추도문 하나 읊어줄 동료 배우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비공개 가족장이었다. 다만 존 웨인의 3번째 부인 필라 팔레트(Pilar Pallete)는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1973년부터 존 웨인과 별거로 사실상 남남이었는데 일단 단역배우였고, 장례식장엔 참석했으므로 동료 배우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굳이 따지면 아니지만 자기 딴에 쌓아온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장례식인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살이 많이 덧붙여진 존 웨인 냉동인간설은 일단 사망 직후 나온 부고엔 없다. # 존 웨인 스스로만 라이벌로 의식한 게리 쿠퍼[14]의 장례식이 라이프(잡지)의 표현대로 왕족의 장례식이라 평가받은 것과 대조적.

캐서린 헵번, 존 레논, 스파이크 리, 클라크 게이블, 프랭크 시나트라는 공개적으로 존 웨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출처

존 웨인은 후배 배우 진 해크먼 매우 싫어했다. 로버트 듀발이 촬영장에서 메소드 연기를 한다며 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치킨 호크도 못되고 걍 싸움닭(...) 그 외에 영화 <혼도(Hondo)>(1953) 촬영 당시 10살짜리 아역배우 리 에이커(Lee Aaker)가 연기를 못한다며 현장에서 학대했던 적도 있는 등 존 웨인이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1976년 필 도너휴와의 인터뷰에서 존 웨인 스스로 선정한 영화 인생 최고작은 모두 3작품으로 역마차, 하타리(1962)[15], 말 없는 사나이 순이다. # 또 1977년 'The People's Almanac'이 보낸 설문조사에 보낸 답장에서 존 웨인이 꼽은 영화 역사상 최고 걸작은 모두 5작품으로 사계절의 사나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962), 수색자, 말 없는 사나이 순이다. # 스펜서 트레이시,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서린 헵번, 로런스 올리비에, 라이오넬 배리모어 순으로 역대 최고의 배우를 선택했다. #

스파게티 웨스턴에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 피자나 먹으려고 이탈리아로 갔냐?"라고 했다. 하지만 꽤 당찬 성격인 이스트우드는 되려 "선배님은 그럼 늘 햄버거만 먹습니까?"라면서 반격했고 웨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월간 키노에서 할리우드 스타들 대사로 나온 바 있다. 그밖에도 나중에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평원의 무법자를 미국이 무슨 지옥같은 서부 시대를 거쳤다고 왜곡했다며 흥분하여 악평한 것도 유명하다. 이에 이스트우드는 "어디건 자기 나라가 가장 멋지고 위대하게 포장하기 마련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외면하고 죽어라 못 본 척하고요."라는 말로 까면서 선배의 발악적인 비난을 무시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스트우드도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에 공화당원 경력이 꽤 길었지만, 그는 미국 만세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미국의 흑역사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편으로 이런 점은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열성 공화당원인 것과는 별개로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매카시즘의 찬성파로 까이기도 했고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도 빚었다. 이로 인하여 퍼블릭 에너미의 대표곡인 Fight The Power에서 대놓고 까인다.[16]

1971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흑인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교육을 받을 때까지 백인우월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광활한 이 땅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부당하게 취했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고 이 땅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데 인디언들은 이기적으로 차지하려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헨리 폰다한테 뺨 맞을 소리하고 있네 이외에도 1973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말런 브랜도가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하고, 할리우드의 아메리카 원주민 차별을 비판하며, 대리자인 서신 리틀페더를 통해 수상식장에서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에는, 존 웨인은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수상식장에 올라가 직접 리틀페더를 끌어내리려 하기도 했다가 진행요원 6명에게 본인이 들려서 내려왔다.(...)

KKK 소속이거나 거기 간부와 잘 안다는 소문도 많았는데 그것만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래도 엘리아 카잔처럼[17] 위증이나 무고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매카시즘으로 심하게 비난받지는 않지만,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자적 행보를 자주 보여왔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소수인종 배우들과 인종차별문제를 비판하는 배우들이 매우 싫어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여기다 자신은 병역기피인 주제에 베트남 전쟁 당시 적극적으로 모병 운동을 펼치기도 해서 히피 세대가 주축이 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쪽에서도 백안시 당했다. 심지어 존 포드는 좋아하더라도 존 웨인은 싫어한다는 식의 영화인도 많은 편.

그래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로 인한 인종차별 재조명 중 존 웨인 동상 철거 요구가 등장했다. # 이에 아들이 반박하는 등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

웨인은 심지어 자신과 데이트를 한 여자들을 영화에 기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고 세금 탈세 혐의도 있다든지 여러모로 안 좋은 일로 욕먹을 짓도 좀 저지른 바 있다. 성격도 좀 욱하는 면이 커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가지고 탈세라든지 여러모로 논란이 비슷한 후배 프랭크 시나트라와도 사이가 안 좋았다. 한번은 웨인이 머무른 라스베이거스 호텔방 바로 아래층에서 시나트라 일행이 머물며 파티를 벌였는데 너무 큰 소음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웨인이 전화로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어 직접 내려가서 시나트라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그때 웨인만한 덩치의 보디가드(6피트 4인치였다고 한다.)가 "누구도 시나트라 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라고 위협하자, 웨인이 의자로 보디가드를 가격해서 쓰러뜨렸고, 또 의자로 맞고 싶은 개색히 있냐고 일갈하는 통에 시나트라는 깨깽했다고. 해당 일화는 Carol Lea Mueller가 2007년 출간한 The Quotable John Wayne에 나오는 일화인데,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내용이라 한다. # 작가 Carol Lea Mueller는 "어느 호텔에서 언제 일어난 일인가?"란 질문엔 답이 없고, 해당 책에서도 분명 존 웨인이 뒤돌아 나가는 척하다가 뒤돌아선 프랭크 시나트라의 경호원을 의자로 내리쳤다고 나온다. 여담으로 존 웨인이 실제로 진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기소 및 소송은 둘째치더라도 프랭크 시나트라 뒤를 봐주던 마피아[18]들에 의해 제거돼 네바다 사막 어딘가에 파묻혔을 이야기다(...). 일단 라스베가스는 마피아들이 세운 도시고, 마피아들은 아버지 조셉 P. 케네디 RKO 픽처스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 할리우드 거물로 성장시키고, 그 아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당선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등등의 사건들에 깊숙이 연루돼있던 게 50년대~60년대에는 가능했던 조직이었다.[19] 하워드 휴즈 정도의 거물이라면 모를까 존 웨인 정도의 레벨은 그 경호원에게 치료비 명목으로 무시무시한 액수의 돈을 건네지 않고선 마피아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할리우드에 꽂아놓은 요긴한 빨대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위협을 가한 개망나니 한 마리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몇 마디 잘랐으면 잘랐지 곱게 보낼 이유 따윈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오렌지 카운티 공항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존 웨인 공항으로 불린다. 말년을 보낸 곳이 공항 근처의 뉴포트비치였기 때문이다.

중국계로 미국에서 활동중인 조이럭 클럽, 슬램댄스의 영화감독 웨인 왕은 바로 존 웨인 영화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정작 자신은 "존 웨인 영화 싫어하는데..."라며 쓴 웃음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1969년, 뉴욕 대학교( NYU) 강사 시절 뉴욕 대학교 영화과에 감독의 이름을 따서 개설된 단 네 개의 감독론 과목(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루이스 부뉴엘, 구로사와 아키라) 중 앨프리드 히치콕의 〈 이창〉에 대해 강의를 하려다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가짜 권총을 든 채 교실로 들어와 존 포드의 〈 수색자〉에 대한 강의로 바꾸겠다고 하자, 당시 〈수색자〉는 한창 재평가 받고 있던 중이었고 불과 3년 뒤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1972년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에서 18위를 기록하면서 공식적으로 역대급 걸작 반열에 오르게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뉴욕 대학교 영화과 학생들은 "존 포드는 좋지만, 가증스런 인종주의자 존 웨인이 연기하는 서부극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항의했고, 이에 마틴 스코세이지는 장난감 총을 겨누며 "안 보면 학점을 주지 않겠어."란 귀여운 협박(?)을 하기도 했다. 출처

빈센트 반 고흐를 유난히 싫어했다. 'Lust For Life(열정의 랩소디,감독-빈센트 미넬리. 1956년작)'에서 영화에서 고흐 역을 했던 후배 배우 커크 더글러스에게 "그딴 미치광이 역은 왜 했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정작 더글러스는 이 고흐 역을 위해서 고흐에 대한 책자도 엄청 읽어보고 연구도 하면서 연기하여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는데 선배가 이런 말을 하니 무척 기분나빠했던 건 물론이다. 그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폴 고갱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까지 받은 배우이자 실제 화가이기도 한 안소니 퀸은 이 말을 듣고 치를 떨었고 살아생전 존 웨인을 엄청 싫어했다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됐다시피 그의 사망 원인은 이다. 영화 '징기스칸'을 촬영한 무대였던 미국 황무지/사막지대가 당시 미군이 실험을 한 장소들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에는 잔류방사능에 의한 후유증이나 발암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그러나 존 웨인 자신은 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았고 그저 매일 담배 6갑을 피워서 폐암에 걸렸다고 믿었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그렇지만 그는 원발 폐암은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순조롭게 극복했고 사인이 폐암도 아니었다. '징기스칸' 찰영 당시 같이 있었던 스태프 220여명 중 절반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된 후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꽤 유명한 일화이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어쨌거나 방사능 피폭이든 극심한 흡연이든 암에 걸리기 매우 쉬운 환경이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이며 결국 암에 두 번이나 걸리며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선 존 웨인의 무덤이 비석만 있는 빈 무덤인 상태이고 워싱턴 DC 지하벙커에 냉동인간 상태인 존 웨인이 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를 주제로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근데 72살 노인 되살려서 뭐 할??

1976년, 존 웨인은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는데, 바로 무려 4000톤짜리 군함을 맨 몸으로 민 것이다. 정확히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초도함인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이하 '페리 함'으로 지칭)의 진수식이 1976년 9월 25일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하필 쭉 밀려 물에 풍덩 빠져야 할 페리 함이 조선대(Slip-way)에서 걸려 멈춰 서버린 것(...). 미 해군의 하늘을 책임질 최신예 방공 호위함이, 그것도 하필 초도함이 진수식에서 걸리게 된 거다. 미신 징크스에 민감한 뱃사람들로 가득한 해군의 특성상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고, 몇몇은 당시 '배가 물을 거부한다' 내지는 '물이 이 배를 거부한다'라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수식에 참관 중이던 존 웨인이 직접 나서서 밀자, 배는 잘만 밀려 바다에 무사히 떴던 것이다. 당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존 웨인이 직접 깬 것.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페리 함은 1997년 2월 20일 퇴역될 때까지 큰 사건 없이 잘 운용되었고, 기타 자매함들도 여러 사건사고들에 휘말렸을지언정 전량 퇴역이 결정될 때까지 1대도 격침되지 않은 채 적어도 제 밥값은 잘 해냈다. 그리고 일부는 현재도 미국의 몇몇 우방국들의 바다를 잘 지키고 있다.

P-38(캔따개)는 별명이 존 웨인이었다.

4. 작품들

5. 대중매체

유명하다보니까 1950년대를 다루는 대중매체에 자주 나오고 미국 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보니 자주 나온다.

6. 기타



[1] 보통 여자아이에게 붙이는 이름이 남자에게 붙었다. 터프한 이미지와 상반되는 본명. 소속사는 그의 본명이 Marion Michael Morrison(매리언 마이클 모리슨)라고 실수를 했지만 존 웨인은 'Michael'( 마이클)이 좋아서 지적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모든 자료들에는 이름이 Marion Michael Morrison이라고 되어있다. # [2] 약사로 일했다. [3] 영화 프로듀서로 일했다. [4] 그는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동시에 수여받았는데, 이를 모두 받은 배우는 밥 호프 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존 웨인뿐이다. [5] 하이눈: IMDB 평점 8.2 / 썩은 토마토 평점 96%, 리오 브라보: IMDB 평점 8.1 / 썩은 토마토 평점 100% [6] 이 노래를 작곡하고 부른 배리 새들러는 그린베레 베트남 참전 용사이며 가사는 1962년 베트콩에게 처형된 하와이 원주민 출신의 그린베레 대원인 제임스 게이브리얼 2세를 추모하며 쓰인 것이다. [7] 월간 키노에선 "마지막 카우보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8] 기피한 가장 큰 이유로는 존 웨인이 데뷔 연차에 비해 늦게 뜬 스타라는 점에 있다.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데뷔후 라울 월시 감독의 주역을 맡았다 크게 실패하고, 역마차(영화)로 각인시키기까지 13년이나 걸렸고 겨우 궤도에 올랐다 생각했더니 곧바로 전쟁이 터진 것이다. 때문에 참전했다가 죽거나 잊힐 공포감이 상당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근데 존 웨인보다 나이도 더 많고 더 늦게 데뷔한 영화인들 중 자원입대한 영화인들은 많다. 이들도 죽거나 잊힐 공포감은 엄청났다. 존 웨인만 특별 대접받을 이유는 없다. [9] 자고로 폰다는 민주당원, 스튜어트는 공화당원이었다. 정치 성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은 똑같은 셈. 실제로 둘은 무명 시절부터 같은 방을 쓰는 등 절친이었다고 한다. [10]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가할 당시 포드의 연세가 이미 만 50세였다.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관 계급을 달고 OSS소속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며 하와이,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노르망디, 베를린까지 누비며 준장까지 올랐다. [11] 스승 존 포드가 여기 소속이다. [12] 존 웨인은 생전 게리 쿠퍼도 군복무하지 않음을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졌지만, 사실 게리 쿠퍼나 클라크 게이블 이들은 모두 1901년생으로 1943년 이미 나이가 42살이었다. 이들보다 6살이나 어린 1907년생 존 웨인이 물고 늘어질 연배들이 아니다. [13] 포드는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걸로 유명하다. [14] 정작 게리 쿠퍼는 존 웨인을 그닥 의식하지도 않았다. 대신 쿠퍼는 동갑내기 클라크 게이블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둘 다 185cm가 넘는 장신, 굉장한 미남 등등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실제로 하나의 배역을 두고 경쟁도 많이 했다고. [15] 하워드 혹스 감독작. [16] 무려 Motherfuck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극딜했다. 함께 극딜당한 대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인데, 그는 흑인음악을 따와 백인음악으로 빌려와서 록 음악 자체를 백인의 전유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극딜당한다. [17] 카잔이 까이는 것은 전향 때문이 아니라 무고죄 때문이다. 매카시즘 문서에도 보이듯이 실제로 밀고된 사람중에 공산주의에 깊이 관여했거나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즉 카잔은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들에게 가짜 혐의를 덧씌워 팔아넘긴 것이다. [18] 특히 프랭크 시나트라의 뒷배 중 한 명이 바로 그 러키 루치아노였다(...). [19] 이동진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중에서 영상 [20] 실존인물이었던 밴더부트는 존 웨인이 자신을 연기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밴더부트는 존 웨인 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21] 미국 영화 및 드라마에서 크레딧 표기 방법 중 마지막에 and 혹은 with 로 표시되는 경우는 주연급의 스타이지만 작은 역할을 맡은 경우 혹은 주연과 동등한 위상이지만 주연의 다음에 표시하기 힘든 경우에 사용된다. 이 경우에도 존 웨인이 병역기피의 전력이 있음에도 엔딩 크레딧에 가장 먼저 올려주기를 요구하여 비웃음을 샀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그 역할 비중이 작지만 배우의 위상과 계약 관계로 인해 크레딧 마지막에 and John Wayne 로 타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22] 에드워드는 원래 전장에 직접나가려고 했다가 나이 때문에 후방에 배치되었다. [23]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존 웨인은 참전은커녕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도 미뤄서 군대 안 가려고 발악한 사람이다. [24] 베트남 참전을 독려한바있다. 물론 치킨호크인 웨인과 달리 하트먼 상사는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둘다 참전한 베테랑이고 하트먼 상사 담당 배우인 로널드 리 어메이진짜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다. [25] 왼쪽부터 존 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찰리 채플린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26] 단, 성우로 활동했던 1980년대까지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