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스탠윅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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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75356><colcolor=#ffffff> 바버라 스탠윅 Barbara Stanwy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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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Ruby Catherine Stevens 루비 캐서린 스티븐스 |
출생 | 1907년 7월 16일 |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 | |
사망 | 1990년 1월 20일 (향년 82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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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배우, 모델, 댄서 |
활동 | 1923년 ~ 1986년 |
신체 | 165cm |
배우자 |
프랭크 페이 (1928년~1935년) 로버트 테일러(1939년~1952년) |
자녀 | 아들 앤서니 디안 페이(1932년생)[1] |
지지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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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 시대에 가장 타고난 여배우
아서 홉킨스[2]
아서 홉킨스[2]
미국의 배우, 모델, 댄서.
잉그리드 버그먼, 에바 가드너, 비비언 리 등과 함께 194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다. 에미상은 3번이나 수상했지만 아카데미와는 인연이 없어서 주연상 후보로만 4번이나 선정되었음에도 공로상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연기상을 받지 못했다. 흔히들 아카데미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한 가장 뛰어난 여배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훗날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11위에 선정됐다.
진 티어니 등 일제 강점기 중후기인 1930-40년대에 인기를 끈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한국에선 제때 소개되지 못해 인지도가 낮은 감이 있다. 이 시절부터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전쟁이 나면서 영화 수출이 중단되었다. 일본에서도 전후 지각 개봉을 해야 했는데, 한국은 독립 후로도 일본을 거쳐야 개봉하는 경우가 잦았기에 소개가 더욱 늦어졌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07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루비 스티븐스는 어린 시절을 굉장히 불우하게 보냈다. 4살 때 어머니가 전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파나마 운하 건설 노동자여서 그녀를 봐줄 수 없었고, 큰언니 로러 밀드러드에게 길러졌다. 하지만 쇼걸이었던 밀드러드는 루비를 보육원에 자주 맡겼고, 어린 루비는 종종 그곳을 빠져나왔다.1916년과 1917년에 루비는 언니와 여행을 다니면서 언니의 일을 도왔다. 이런 일을 하며 학교 생활에 싫증이 난 루비는 14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브루클린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얼마 뒤, 루비는 브루클린 전화국에서 주급 14달러를 받는 일자리를 얻어 재정적으로 독립했으나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그의 드레스 수선일을 맡기도 했으나 고객들의 불평으로 해고된 적도 있었다. 당시 즐기면서 일을 했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녀의 진짜 꿈은 밀드러드의 쇼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이를 알아챈 밀드러드는 루비를 설득했으나 루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2.2. 브로드웨이 활동 시절
1923년, 루비는 타임 스퀘어에 있는 스트랜드 극장의 오디션을 봤다. 몇 달 후 댄서로 취직했고, 뉴암스테르담 극장에서 일을 했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저 살아남고, 먹고, 멋진 코트를 입고 싶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빌리 라히프라는 사람이 연극 'Noose'의 공동 주연을 제안하고 이를 수락하면서 처음 연극 주연을 맡게 된다. 초연 때는 연극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라히프는 연극의 성공을 위해 루비의 등장 씬을 늘렸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어 브로드웨이에서 1926년 10월부터 9개월 동안 무려 197회나 공연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때 루비는 연극 '바버러 프리치'와 연극 배우 '제인 스탠윅'의 이름을 결합하여 바버러 스탠윅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 후 스탠윅은 연극 몇 편에 더 출연해 연극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1927년 무성영화 <브로드웨이의 밤>에서 원래는 주연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스크린 테스트에서 떨어진 후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가 스탠윅의 첫 영화 출연이었다.
친구인 피아니스트 아스커 러밴트[3]에게 프랭크 페이라는 남자를 소개 받아 1928년 8월 26일에 결혼했고, 곧 할리우드로 이사했다.
2.3. 영화 배우 시절
할리우드로 건너간 스탠윅은 많은 작품들을 성공시켰고, 감독 및 배우들에게 극찬을 받는다. < 멋진 인생>과 <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등으로 유명한 프랭크 카프라와 < 십계>로 유명한 세실 B. 드밀 감독이 가장 좋아하던 여배우였으며, 35년 이상의 기간 동안 8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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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 Face>(1933) |
대표작으로는 <Baby face>(1933), <스텔라 달라스>(1937), <요조숙녀>(1941) 등이 있는데, 특히 빌리 와일더가 연출하고 에드워드 G. 로빈슨, 프레드 맥머리와 공동 주연을 맡은 < 이중 배상>(1944)에서 보여준 연기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팜 파탈 연기라고 불릴 정도이다. 월터 네프(프레드 맥머리 분)를 유혹하는 필리스 디트릭슨 역을 훌륭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4] AFI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악당 8위에 오르기도 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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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배상>에 출연한 프레드 맥머리와 바버라 스탠윅 |
이렇게 좋은 연기를 보여준 스탠윅은 당대 가장 많은 수입을 받는 여배우가 되었다. 이렇게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겸손함과 배려심이 넘쳤던 스탠윅은 스태프들과 상대 배우를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며,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모든 감독, 배우, 제작진 및 엑스트라의 사랑을 받을 운명이야. 할리우드 인기 콘테스트를 연다면 그녀가 1등을 차지할 것 같아."
ㅡ 프랭크 카프라
ㅡ 프랭크 카프라
당시 스탠윅의 인기와 배려심 넘치는 성격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외에도 데이비드 니븐, 로널드 레이건, 버트 랜캐스터, 커크 더글러스 등과 영화에 출연하여 합을 맞춘 스탠윅에게 점차 슬럼프가 찾아왔다.
2.4. TV 활동 시절
TV로 주 무대를 옮긴 스탠윅은 영화 배우 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재기에 성공했다. 본인의 이름을 건 '바버라 스탠윅 쇼'를 방송하고 이 쇼의 활동으로 에미상을 받는 등의 활동을 했고, 그 후에도 2개의 에미상을 추가로 수상했다.2.5. 말년
은퇴 시기가 가까워질 무렵에 자선 활동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조용히 이루어졌다.1981년 집에 강도가 들어 머리를 때리고 40000달러 상당의 보석을 훔쳐갔다. 다음 해인 1982년에 영화 촬영을 하다가 특수 효과에 사용하는 연기를 잘못 들어 마셔 기관지염에 걸리기도 했다. 이렇게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스탠윅은 1986년 은퇴를 선언하여 행적을 감추었다.
2.6. 사망
그렇게 4년이 지난 1990년 1월 20일,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있던 여배우는 심부전과 폐질환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항년 82세. 스탠윅은 지독한 골초였다. 에바 가드너, 오드리 헵번, 비비언 리 등도 담배를 폈었고 셋 모두 사망 원인 1순위가 담배였지만, 스탠윅은 무려 9살 때부터 죽기 4년 전까지, 즉 70년 동안 담배를 폈다.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었고 캘리포니아 론 파인 상공에서 스탠윅의 재가 날라갔다. 사망 후 정확히 3년 뒤에 오드리 헵번이 암으로 사망해서 둘은 기일이 같다.
2.7. 사생활
- 첫 번째 남편 프랭크 페이와의 결혼 직후 10개월 된 남자 아이 앤서니 디안 페이를 입양했는데 아이가 성인이 된 후에는 고작 몇 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1960년대에 꽤 스캔들 거리였는지, 밴드 몽키즈가 출연한 영화 <헤드(Head)>(1968)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앤서니 디안 페이는 2006년 사망했다.
- 프랭크 페이는 스탠윅과 함께 할리우드로 이사해 배우로 활동했지만 아내의 명성이 나날이 치솟는데 반해 자신의 경력은 곤두박질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페이는 이후 알콜 중독에 시달렸고 상습적으로 스탠윅을 학대했다. 그들의 결혼은 페이가 술에 취해 양아들 앤서니 디안 페이를 수영장에 집어던진 사건 이후 끝나버렸다.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유명한 영화 스타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
페이와 이혼한 후 자신보다 4살 어린 로버트 테일러를 만났는데 첫만남 때 스탠윅은 테일러를 "참 재밌는 사람"이라 기억했다. 평소 말과 승마를 좋아하던 스탠윅은 1937년에 개인 목장을 지었고, 테일러가 근처에 있는 목장을 사들이면서 본격적인 교제가 시작되었다.
세간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교제하던 두 사람은 1938년에 "할리우드의 미혼 남녀들"이란 기사가 그들을 저격하며 교제 사실을 퍼트리자 비로소 결혼했다.
-
로버트 테일러가 결혼 생활 중에
라나 터너와 불륜을 저지르자 분노해 한쪽 손목을 그은 뒤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탠윅은 생전 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했다.
이후 로버트 테일러가 이탈리아에서 <쿠오 바디스> 촬영 중 다시 바람을 피우자 남편과 대면하기 위해 단숨에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날아갔고, 거기서 6주 간의 합의 끝에 이혼을 결정했다.[6] 스탠윅은 이혼 후에도 테일러를 꽤 그리워했다.
- 로버트 웨그너에 따르면 1953년에 < 타이타닉의 최후>를 찍으면서 교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웨그너가 23살 연하였다. 그러나 4년 후 스탠윅은 양쪽 모두에게 미래가 없는 관계라며 웨그너에게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사망 후 화장될 때 스탠윅은 웨그너가 줬던 네잎클로버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다만 웨그너는 발언에 신빙성이 없는 걸로 유명하고 달리 증인은 없다.
3. 여담
-
보수적인
공화당파였으며,
프랭클린 D. 로저벨트의 대통령 당선을 반대하기도 했다. 매카시즘이 불어닥칠 때에는 할리우드 내 반공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탠윅 세대 배우 중에는 공화당 지지는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할리우드가 민주당 강세가 된 건
매카시즘 병크가 가장 크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전기에 따르면 스탠윅의 정치 성향[7]은 첫 남편 프랭크 페이와 이탈리아계 출신인 프랭크 카프라[8], 두 번째 남편인 로버트 테일러[9]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당부분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피나는 노력 끝에 스스로 극복한 그녀의 개인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10]
- 오빠도 배우였다. 활동명은 버트 스티븐스[11]. 스탠윅의 주연작 2편에 출연했다.
- 스트리퍼 역으로 자주 캐스팅되었다. 현재까지도 클래식 할리우드에서 섹시한 인물하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
- 무명 합창단 가수 시절, 알 졸슨[12]에게 안 좋은 일을 당했다. 자신의 차례를 마치고 내려오던 스탠윅을 본 알 졸슨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성추행을 시도했고, 그녀가 이를 뿌리치자 피고 있던 시가를 그녀의 가슴에 냅다 지져버렸다. 당시 다른 가수의 공연이 진행중이라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고, 스탠윅은 불에 타는 고통을 참다가 실신했다. 이 일로 그녀의 몸에 흉터가 남게 되었다.
- 양성애자라는 설이 있다. 그 당시 할리우드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모임인 ‘뜨개질 모임’[13]의 회원이었단 말도 있고, 조안 크로포드와 동성연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지금이야 이중 배상에서 연기 때문에 팜므파탈 이미지가 강하지만, 원래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이미지가 강했다. "요조숙녀"와 "볼 오브 파이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4. 주요 출연작
- 브로드웨이의 밤 (1927)
- The Locked Door (1929)[14]
- Night Nurse (1931)
- Illicit (1931)
- So Big (1932)
- Shopworn (1932)
- 옌 장군의 쓴 차 (1933)
- Baby Face (1933)
- Ever in My Heart (1933)
- A Lost Lady (1934)
- The Woman in Red (1935)
- 애니 오클리(Annie Oakley) (1935)
- Banjo on My Knee (1936)
- A Message to Garcia (1936)
- 스텔라 달라스 (1937)[15]
- The Plough and the Stars (1937)
- Always Goodbye (1938)
- 골든 보이 (1939)
- 그 밤을 기억하라 (1940)
- 요조숙녀 (1941)
- 볼 오브 파이어 (1941)[16]
- 존 도우와의 만남 (1941)
- The Great Man's Lady (1942)
- The Gay Sisters (1942)
- 이중 배상 (1944)[17]
- 크리스마스 인 코네티컷 (1945)
- My Reputation (1946)
- The Bride Wore Boots (1946)
-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 (1946)
- California (1947)[18]
- Cry Wolf (1947)
- 진실한 사랑 (1947)
- The Two Mrs. Carrolls (1947)
- BF의 딸 (1948)
- 살인 전화 (1948)[19]
- East Side, West Side (1949)
- The File on Thelma Jordon (1949)
- To Please a Lady (1950)
- No Man of Her Own (1950)
- 분노의 여신 (1950)
- The Man with a Cloak (1951)
- 밤의 충돌 (1952)
- Jeopardy (1953)
- 타이타닉의 최후 (1953)
- 황야의 선풍 (1953)
- 중역실 (1954)
- Witness to Murder (1954)
- Escape to Burma (1955)
- 앵커의 결투 (1955)
- There's Always Tomorrow (1956)
- Crime of Passion (1957)
- 40정의 총 (1957)
- 카니발(Roustabout) (1964)[20]
5. 어록
누구든지 날 영화 안에 15분만 출연시켜준다면, 그 어떤 배우라도 압도할 수 있다.
난 브루클린에서 온 터프한 늙은 여인일 뿐이다. 난 90살이 될 때까지 연기를 할 것이고, 사람들은 날 꾸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 경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너무 오만한 말이다. 연기는 내 직업이다.
다른 사람들이 날 총으로 쏴죽이기 전까지 연기를 계속할 것이다.
미국은 이제 젊은 나라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내 또래의 여성들을 위한 배역이 마련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숙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21]
[1]
입양
[2]
20세기 초반의 유명 연극 프로듀서.
[3]
Oscar Levant(1906~1972). 피아노 연주가 담긴 녹음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였다.
[4]
수상자는 <가스등>의
잉그리드 버그먼이었다.
[5]
1위는 <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역을 맡은
앤터니 홉킨스, 2위는 <
싸이코>의
앤서니 퍼킨스.
[6]
일설에 따르면 스탠윅은 그냥 홧김에 '이럴 거면 이혼하자'고 말했으나 로버트 테일러가 진지하게 이혼을 승낙하면서 매우 당황했고, 그를 설득하고 달래고 싸우느라 6주라는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7]
강력한 반공, 반노조, 반유대주의 성향 등
[8]
전기 작가에 따르면
무솔리니 지지자였다.
[9]
훗날 할리우드 내 반공단체인 ‘미국 이상 보존을 위한 영화협회’에 아내와 같이 참가한다
[10]
쉽게 말하면, 자신이 사회로부터 도움받지 않고 노력과 끈기만으로 성공했으니,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11]
Bert Stevens. 1905 - 1964.
[12]
Al Jolson,
재즈 싱어에 나온 배우 겸 가수
[13]
The Sewing Circle
[14]
첫 주연작, 첫 유성영화.
[15]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16]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17]
세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18]
노래는 더빙.
[19]
네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20]
대다수
엘비스 프레슬리 출연작들처럼 평이 좋지 않다.
[21]
1960년대에 <40정의 총> 촬영 이후 영화계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 것에 대해 기자가 묻자 이렇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