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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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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의 가톨릭 라디오 방송(KRO)이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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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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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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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파일:VanGogh_1887.jpg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빈센트 윌럼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출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주 쥔더르트
사망 1890년 7월 29일 (향년 37세)
프랑스 센에우아즈 주 오베르쉬르와즈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두아즈 주)
묘소 프랑스 오베르쉬르와즈 묘지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네덜란드
]][[틀:국기|]][[틀:국기|
속령
네덜란드
]]
신체 170cm[1][2]
직업 화가, 종교인[3]
부모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4]
형제자매 아나 코르넬리아, 테오, 리스, 빌, 코르
종교 개신교 ( 네덜란드 개혁교회)[5]
서명
파일:빈센트 반 고흐 서명.svg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어린 시절3.2. 구필 화랑 시절3.3. 전도사 시절3.4. 화가의 길로
3.4.1. 브뤼셀과 헤이그 시절3.4.2. 뇌넨 시절3.4.3. 파리 시절3.4.4. 아를 시절3.4.5. 생레미 시절3.4.6. 오베르 시절
3.5. 죽음과 논란3.6. 생전 화가로서의 실패3.7. 요한나 반 고흐 - 봉허의 노력과 사후 재평가
4. 평가5. 화풍6. 주요 작품 일람
6.1. 전기(1885년 이전)6.2. 파리 시절(1886-1888)6.3. 아를 시절(1888년 2월-1889년 5월)6.4. 생레미 시절(1889년 5월-1890년 5월)6.5.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 (1890년 5월-7월)
7. 기타
7.1. 고흐는 정말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를 좋아했나?7.2. 한국인 진품 소유 사건
8. 대중매체에서
8.1. 뮤지컬
9.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편지 638, 1888년 7월 9일 또는 10일[6]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편지 712, 1888년 10월 25일[7]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2. 이름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르면 '핀선트 빌럼 판호흐'지만, 관용을 인정해 예외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로 적는다. 관련 글.[8] 여기서 성씨인 반 고흐는 '고흐·호흐(Gogh) 출신'이라는 의미인데, 고흐·호흐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뒤셀도르프 현 클레베군의 고흐(Goch)[9]라는 도시를 가리킨다.

80년대만 해도 한국 중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자에서 고호라는 이름으로 나온 바 있다.[10] 혀뿌리와 뒤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만든 후 성대를 떨지 않으며 공기를 내쉬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흡사 가래 끓는 소리) [x]를 지금은 '흐'로 통일해서 쓰나 과거엔 앞의 모음이 'a, o, u'일 때 각각 '하, 호, 후'로 달리 썼기 때문.[11] 그래서인지 80년대 후반에 나온 표절 해적판 만화 쿤타맨에서 괴도가 훔쳐가려는 그림을 그린 화가 이름이 '방고호'라고 한국화하여 나온 적도 있다. 조용필의 노래 <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참고로 영국식 영어로는 '/ˌvæn ˈɡɒx, ˈɡɒf/(밴 고흐 또는 고프)',[12] 미국식 영어로는 '/ˌvæn ˈɡoʊ/(밴 고우)'로 읽는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Zundert)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13] 목사 테오도뤼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와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사실 차남이지만, 진짜 장남인 형(1852년생)이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장남으로 대우받았다. 이 형의 이름도 빈센트 빌럼이었다. 형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흐는 살면서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한다. 그게 고흐의 불행을 자초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14]. 고흐는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멋쟁이이고 미남자이긴 했지만 개신교( 칼뱅파) 목사로서의 능력은 범상한 수준이었다. 고흐가 태어난 쥔더르트는 벨기에 국경 근처의 별볼일 없던 마을인 데다가 여타 노르트브라반트주[15]의 마을들이 그렇듯 가톨릭의 세가 더 강한 곳이었고, 그나마도 테오도뤼스가 이 지역에 부임하게 된 건 역시 개신교 목사였던 고흐의 할아버지[16]가 여기저기 찔러서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어릴 때의 고흐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고흐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여동생 아나 코르넬리아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에 고흐의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가 된 남동생 테오가 태어났다. 흔히 고흐가 어릴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고흐는 미술가보다는 장 앙리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될 자질이 보이기도 했다. 여동생 중 한 명인 엘리사벳의 회고로는 고흐는 모든 곤충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곤충들을 과학자처럼 자세히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처럼 꼼꼼하게 수집하고 분류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나중에 고흐의 그림에서 자연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흐는 상당한 독서광이었다. 신학서적과 문학작품을 많이 탐독했는데 이 또한 고흐의 나중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흐의 미술적 재능은 직접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는 직접 야생화를 스케치하거나 직접 만든 꽃다발을 수채화로 그리는 등 미술을 취미생활로 즐겼으며 어린 고흐가 9살 때 개를 보고 그린 스케치는 어머니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희귀한 자료다.[17]

고흐가 11살이 되자 부모는 그를 쥔더르트에서 25km 떨어진 제벤베르헌(Zevenbergen)의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기숙학교로 보냈다. 이곳에서 고흐는 프랑스어 영어를 기초부터 갈고 닦아서 나중에는 모국어 네덜란드어 만큼이나 유창하게 말할 정도가 되었고 독일어도 상당히 능통한 수준이 되었다.[18]

13살이 된 1866년에 제벤베르헌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쥔더르트에서 더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Tilburg)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미술이 교과 커리큘럼에 하나로 도입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리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가 눈이 먼 아버지를 돌보려고 고향으로 돌아온 화가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이 학교의 미술교사였는데 고흐는 하위스만스 밑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즐거운 수업이긴 했지만 원근법 만큼은 익히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8년 3월, 고흐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왜 자퇴했는지는 밝혀지지않았지만 학자들은 이때 고흐가 정신장애나 발작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한다.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는데 이게 고흐에게도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발작이 지나가자 집에서의 생활이 따분해지던 차였고, 아버지도 아들녀석이 다 컸는데 학교에 보내자니 돈은 많이 드니 일이라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져서 16세 때인 1869년 7월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미술상인 구필 화랑(Goupil & Cie)에서 수습 사원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3.2. 구필 화랑 시절

흔히 '센트 삼촌(Oom Cent, 1820–1888)'으로 불리는 이 큰아버지의 본명은 빈센트 반 고흐로 고흐와 똑같은 이름이다.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와 우애가 남달랐던 센트는 헤이그에서 화상(畵商)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특히 센트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를 접하고나서 바르비종파의 화풍이 득세할 것을 예측하고는 바르비종파의 그림들을 수집해 헤이그에서 판매했다. 센트는 단순히 바르비종파의 그림을 파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네덜란드에 바르비종파의 화풍을 들여와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육성했는데 이러한 센트의 생각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바르비종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아틀리에 안에서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던 방식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점차 대세가 되어갔는데 센트는 이런 추세를 놓치지 않아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센트는 후에 고흐의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흐의 미술에서 자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과 바르비종파의 대부인 밀레의 영향을 받게 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구필 화랑은 센트가 파리의 화상인 아돌프 구필(Adolphe Goupil, 1806–1893)과 동업하여 만든 화랑으로,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판매할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네덜란드의 전설의 화가인 렘브란트 베르메르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프랑스에 아직 남아있었다는 점을 간파한 센트의 도전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친아들이 없던 센트는 동생의 아들들인 빈센트와 테오를 자식처럼 생각하며 아꼈고 빈센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는 생각까지도 했다. 만약 고흐가 이런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화가로서의 고흐는 없었겠지만 고흐 자신의 인생은 매우 편안하고 안락했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이 시기 고흐는 안정적으로 구필 화랑에서 일하면서 전도 유망한 화상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중에는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지만 이 시기에는 빈센트가 테오를 도와줬으니 말 안 해도 알 만하다.

아돌프 구필은 당시 샬롱 수상작들을 판화로 만들어 찍어서 파는 판화 인쇄업도 겸했는데 이때 고흐를 유난히 감동시킨 것이 바로 밀레였다. 바르비종파를 네덜란드에 소개한 큰아버지 센트의 영향도 있었지만 고흐는 구필 화랑에서 판화로 복제된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고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고흐는 밀레를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밀레의 그림은 고흐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72년 8월, 자신과 같은 일을 하게 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평생에 걸친 두 형제의 편지 교류가 시작된다.

1876년 3월 말유난히 미술의 관점에 대해 손님과 논쟁을 자주 벌였던 탓에 그는 화랑에서 해고된다... 라고 알려진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이때의 일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 힘들며 그 바탕에는 상당히 복잡한 뒷배경이 숨어있다. 전도 유망한 화상의 길을 가고 있던 고흐는 1873년 6월 구필 화랑의 런던지점을 내기 위해서 런던에 파견되었으나 고도로 산업이 발전한 런던에서 본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충격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예(당시 19세)를 사랑해 청혼까지했지만 실연을 당하게 된 아픔이 겹치면서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고흐의 일평생을 괴롭히게 되는 정신질환 증세도 영향을 끼쳤다. 앞서 말한 노동자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훌륭한 그림을 보호하고 작가를 후원하는 이상적인 방식이 아닌 크게 가치 없는 그림이라도 돈을 위해 감언이설로 팔아야 하는 화상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미술의 관점이란 것도 고흐가 어떤 새로운 미술적 사조를 접했던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있는데 이런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하는 식의 생각에 좀 더 가까웠다. 구필 화랑이 취급하던 살롱 수상작 같은 엘리트 중심적인 그림에 동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정신적 충격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종교에 매달린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큰아버지 센트의 연줄 덕으로 구필 화랑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3.3. 전도사 시절

구필 화랑을 그만둔 후 고흐는 에덴에 있는 부모 곁으로 돌아갔다가, 자연이나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고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서 종교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했다. 고흐는 영국에서 교사 일자리를 구하다가 램스게이트라는 곳의 기숙학교에서 무급 견습교사로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램스게이트의 학교는 고흐에게 실망감만을 안겨주었고 고흐는 보조목사나 런던의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선교단체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 데서도 퇴짜를 맞다가 고흐의 일생에서 그를 이해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영국 감리회 소속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Thomas Slade Jones) 목사를 만나서 그의 보조목사 겸 존스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존스 목사는 자신이 순회하던 감리교회에서 고흐가 설교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이때 고흐는 안정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잘하면 목사가 되어서 자신의 생각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고흐에게 조울증이 찾아왔다. 결국 이 때문에 잘해나가던 보조 목사직도 그만두고 다시 네덜란드의 가족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아들이 광신적인 목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는 다시금 형 센트에게 도움을 구해서 센트는 빈센트를 위해 로테르담 근처의 도르트레흐트 근처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브라트에게 부탁해 서점에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하지만 그 일에마저도 흥미를 잃으면서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서점 일에서 쫓겨난 것으로 빈센트와 큰아버지 센트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고흐는 이때 목사수업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던 데다가 목사고시까지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고흐가 고집을 꺾지 않자 결국 아버지는 고흐의 이모부인 암스테르담의 요하너스 스트리커르(Johannes Stricker, 1816–1886) 목사에게 도움을 구했다. 스트리커르는 조카의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인맥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를 붙여서 고흐가 목사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목사의 딸인 코르넬리아 보스스트리커르(Cornelia Vos-Stricker)[19]에게 빈센트가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정신적 혼란이 일어났고 시험준비도 끝장나고 말았다. 코르넬리아(케이)가 고흐의 사랑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그는 깊은 상처를 입었고 이 일로 가족은 물론 친척들과도 갈등을 겪었다.

그가 전에 근무하던 화상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이에게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명인데도 그런 전도보다는 실질적으로 전도에는 불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래야만 성직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에 진저리를 내서 일부러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합격할 수 없겠다는 식으로 빠져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일례로 고흐는 그의 가정교사는 별 문제가 없다고 봤음에도 굳이 스스로의 라틴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차마 신학대가 바리사이파 양성소라 싫다고 할 순 없었지, 내가 그깟 라틴어 갖고 애먹을 리가 있니?'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다시 아버지가 나서서 벨기에의 공업지대나 탄광지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단체에 전도사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고흐를 조수 목사로 쓴 적이 있던 존스 목사가 아버지와 함께 나서서 브뤼셀에 있는 선교단체에서 전도사 양성학교에 빈센트를 입학시켰다. 그곳에서는 전도사를 양성해 벨기에의 악명 높은 탄광지대인 보리나주(Borinage)로 파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고흐가 목사의 아들인 탓에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선교단체에서는 결국 고흐를 탄광에서 무급 조수로 쓰기로 결정했다. 보리나주에서 고흐는 탄광의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광부들처럼 극단적인 세계로 밀어넣었다. 이런 극단적인 고행은 한편으로는 고흐의 내부에서 신앙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광부들에게 헌신하려는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극단적 고행 등으로 고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던 와중에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로 시찰관을 파견했고 고흐의 상태를 본 시찰관은 선교단체에 고흐는 전도사로 부적절하다고 보고를 올렸다. 선교단체에서 해고당한 고흐는 중재를 부탁하려고 브뤼셀까지 걸어서 아는 목사를 찾아갔고 그 목사는 고흐가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럼에도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목적에서 성직의 길을 계속 가고 싶다면 보리나주로 돌아가서 무급으로 조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하다보면 선교단체에서 다시 일을 맡겨줄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성직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보리나주로 돌아간 고흐는 이제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기울게 되었다. 보리나주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적인 훈련이 부족한 탓에 그것이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화가가 되겠다는 열의가 강해져 결국 고흐는 만 27세이던 1880년 10월,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 된다.

3.4. 화가의 길로

3.4.1. 브뤼셀과 헤이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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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8월 그림
브뤼셀로 온 고흐는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조언을 구했다.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상식적이고 일반적 코스이긴 했지만 고흐는 독학으로 실력을 쌓는 것을 더 좋아했다.[20] 고흐가 브뤼셀에 왔을 때 동생 테오는 화상의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승진 중이었다. 이때부터 테오의 지원이 시작된다. 한편으로 테오는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편지를 통해 형 고흐에게 알려주기도 했지만 원래 미술이란 게 글로 쓴다고 이해할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흐의 인상주의나 새로운 미술사조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고흐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881년 12월부터는 헤이그로 가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에게 몇 년간 그림을 지도받았다. 모베는 가축 그림과 수채화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기에 수채화와 유화의 원리를 배웠다. 하지만 고흐의 괴상한 성격 탓에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모베는 어려운 고흐를 돕기도 했고 나름대로는 그림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모베는 고흐를 화실로 불러 정물화를 그리게 했는데, 고흐가 난생 처음 화가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었으며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1882년 1월 고흐는 모베와 구필 화랑 지점장 테르스테흐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아틀리에를 얻어 정착했다. 이때 상시에가 쓴 밀레의 전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농촌생활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평생 밀레의 전기를 진정한 예술의 길잡이로 여겼다.

같은 해 7월에는 처음으로 수채화에 도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유화도 그렸다. 새로운 장르에 매료된 고흐는 일주일에 7점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주로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모델을 찾으며 100여 점에 이르는 인물화 습작을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처음으로 석판화를 제작해서 테오에게 시험쇄를 보냈고, 석판화 <슬픔>을 본 화상이 특별 주문을 의뢰해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런데 고흐가 '크리스티네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매춘부인 데다가 알코올 중독 매독 환자로, 이미 딸이 하나 딸려 있었고 고흐와 만났을 때는 임신 중이었다.[21] 그녀는 딱히 용모가 뛰어나다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고흐에겐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데다가 고흐 자신이 비극적인 풍모의 여성들에게 끌렸던 점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목사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동안 그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던 동생 테오마저도 시엔과의 동거를 반대하면서 그녀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모베는 고흐가 매춘부와 동거한다는 사실에 그와 절교를 선언했다.[22] 설상가상으로 고흐의 구필 화랑 시절 상사이자 좋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테르스테흐가 고흐가 시엔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과도한 분노를 표출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고흐의 아버지가 시엔과의 동거를 알게 된 것도 테르스테흐가 편지를 보내서였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리되자 고흐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마침내 완전히 미쳐버렸어라면서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소식이 테오의 편지를 통해서 고흐 귀에 들어가자 고흐는 아버지에게 격한 분노를 품었고 이때껏 아버지를 존경해오던 고흐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물론 조직화된 기독교회 자체에 심한 분노와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매춘부 생활로 돌아가려는 시엔과 시엔의 가족들 때문에 시엔과의 관계는 결국 파탄나고 큰 양심의 가책을 안고서 고흐는 그녀와 결별하게 된다.

3.4.2. 뇌넨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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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5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3년 9월, 시엔과 헤어진 고흐는 드렌테 남부의 호헤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고흐는 알베르튀스 하르트소이케르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숙하며 화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곳에서 보름 후에 화가들이 있다는 곳을 전해들은 고흐는 다시 호헤벤에서 니암스테르담까지 가게 된다. 니암스테르담에서 고흐는 운하 도개교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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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 1883
이 시점에서 고흐는 유화를 그리고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법상으론 물감으로 소묘를 하는 것이라서 유화라고는 해도 결국 소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직 고흐는 색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는 미숙했던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고흐는 혼자서 그림의 기법을 익혀나갔다. 외딴 시골의 황야와 습지에서 고흐는 순수한 자연을 동경하면서 고독하게 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림 실력에 다른 화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동생 테오가 구필 화랑을 때려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자적으로 화랑을 세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고흐는 놀라서 어찌할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날씨가 나쁘고 작업실도 없고 유화나 데생을 할 재료도 부족한 환경, 테오의 경제적 형편도 불투명하고 무엇보다 고독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그는 결국 뇌넨으로 옮겨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12월에 뇌넨의 가족 곁으로 가게 된다.

뇌넨에서 고흐는 그리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시엔의 일로 아버지를 존경하던 마음이 싹 가셔서 아버지의 신앙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던 고흐와 작은 동네 뇌넨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고흐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간의 감정이 편치는 않았겠지만. 안 그래도 힘들던 아버지는 고흐의 가혹한 반감에 더 힘들어지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와 대화 끝에 잠정적으로 타협해 아버지를 격하게 비난하지 않는 대신 고흐의 기행을 놔두기로 해서 평화가 찾아왔다.

당초엔 드렌테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고흐는 뇌넨에 눌러 살기로 마음을 바꾸고 목사관 뒤뜰의 헛간을 아틀리에로 삼아 그곳에서 독서를 열심히 하고 그림을 그렸다. 드렌테에서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였던 그림은 뇌넨에서 다양한 색채가 더해져 좀 더 발전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가족들과의 사이는 여전히 불편했지만 병든 어머니를 고흐가 돌보게 되면서 화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고흐보다 10살 연상인 노처녀 마르호트 베흐만이 고흐에게 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런 가운데 동생 테오는 결국 형 때문에 굴복하여 구필 화랑에 남아서 계속 형을 후원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고흐가 소묘와 유화를 파리로 보내면 테오가 그것을 구입하는 식으로 일종의 봉급을 주라는 과도한 요구에도 테오는 승낙했을 정도다. 게다가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졌고 고흐는 마르호트 베흐만과의 관계 때문에 아버지의 걱정을 더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고흐는 목사관을 나와서 뇌넨의 성당 관리인이던 요한네스 스하프라트에게 방을 빌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고흐는 이곳에서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거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우면 산책하면서 가져온 갖가지 잡동사니를 가지고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마르호트 베흐만은 고흐에게 푹 빠졌고 이는 말썽을 야기했다. 마르호트의 집에선 고흐의 꼬락서니 때문에 고흐에게 마르호트를 줄 생각이 없었고 이는 고흐의 가족들도 매한가지였다. 고흐 자신도 마르호트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것 때문에 그녀를 별로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급기야 1884년 여름, 고흐와의 연애가 제대로 되지 않자 불안정하던 마르호트의 정신이 그만 폭발해 음독 자살 미수를 저지르고 신경발작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작은 마을에서 이는 심각한 스캔들이었고 고흐는 뇌넨을 잠시 떠나 아인트호벤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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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먹는 사람들, 188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이런저런 우여곡절들이 있던 가운데 고흐는 이때까지의 작업들을 총결산하는 의미의 대작을 구상하게 된다. 대작의 실마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는데 1885년 3월의 어느 날에 고흐는 호르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치다가 그 집에 들어갔다. 그때 호르트의 가족들은 석유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었다. 고흐는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이런 와중에 3월 26일, 고흐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목사관 정문에서 쓰러진 후 사망했다. 장례식에 나타난 삼촌들이 고흐를 마구 쪼는 가운데 고흐는 그나마 테오의 위로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런 우울한 시점에 고흐는 하나의 정물화를 그렸는데 꽃병에 꽃을 꽂고 아버지의 파이프 담배와 담배쌈지를 놓은 정물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누그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고흐는 창작열이 쇠퇴했다. 이를 만회하려고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색채론을 탐독했다. 이런 가운데 미완성이던 감자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감자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전기를 정리하는 대작이자, 고흐가 보리나주에서부터 그토록 원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의 성취였다. 물론 헤이그 시절에 사귄 화가 친구 반 라파르트는 이 그림을 밀레식으로 해석해 엄청난 혹평을 퍼부었다.

고흐는 나름대로 감자먹는 사람들로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지만 테오에게 보낸 그림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감자먹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준 호르트 가족 중에 결혼하지 않은 딸인 시엔이 임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고흐가 헤이그 시절에 동거했던 매춘부 시엔과 동명이인이다. 이 사건은 고흐와는 무관한 일이었으나 뇌넨 사람들은 고흐가 괴상한 차림에 해괴한 기행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 일을 고흐의 소행이라 믿었다. 이리 되자 뇌넨의 신부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흐의 그림 모델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고 고흐는 뇌넨에서 더 이상 인물화를 그리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고흐는 안트베르펜으로 옮기기로 하고 1885년 연말에 뇌넨을 떠났다. 뇌넨을 떠나기 전 고흐는 아인트호벤의 케세르마케르스라는 사람에게 찾아가 직접 그린 가을 풍경화 한 점을 선물로 주었다. 케세르마케르스가 왜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것은 사실 필요없다. 나중에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그림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만일 오래 살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 보일 것이다."

1885년 11월, 서른 두 살의 고흐는 유럽의 주요 항구 도실 분주하고 활기 넘치던 안트베르펜에 도착한다. 이 곳은 17세기 바로크 화가를 대표하는 루벤스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고흐는 도시 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게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품었다. '스테인성', '빨간 리본을 한 여자', '노인의 초상화',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의 머리' 등을 그렸다. 이 작품들은 모두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자화상에도 몰두했으며, 1886년 1월에 이곳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신경과민 증세가 심해져 두 달도 못 채운 2월 말에 그곳을 떠나 파리로 갔다.

3.4.3. 파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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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날의 다리 1887년
파리에 온 고흐는 탕기(그는 탕기 영감이라고 불렀다)가 운영하던 크로젤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로트렉, 앙크탱, 베르나르, 러셀 등을 만났다. 이들은 1870년 <니벨룽겐의 혼인>이라는 작품으로 살롱전에서 상을 받은 바 있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4월에 이들과 합류하면서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화실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없어서 4개월 만에 이곳을 떠났다. 여름에는 색 다루는 연습을 위해 꽃을 다룬 정물화 연작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고흐는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을 받아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한때 점묘파의 기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베르나르와 가깝게 지내던 고흐는 클리시 거리에 있는 포세라는 대중식당에서 그와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고흐가 그 식당의 주인과 다투는 바람에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그 선술집의 주인이자 이탈리아 화가의 모델이었던 세가토리와 사귀다가 헤어지기도 했다.

1886년 6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의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아 그 동안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이 주류였던 인상주의를 밝은 화풍으로 바꾸었다. 11월에는 샬레 레스토랑에서 <쁘띠 불르바르의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전시회르 열었는데, 고흐의 작품과 함께 앙크탱, 베르나르, 드 코닝, 로트렉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고갱, 기요맹, 쇠라 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에 온 지 1년 6개월이 지나자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그는 남프랑스의 시골 아를로 이주한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가 네덜란드나 파리의 광선이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화풍이 변화함에 따라 밝은 광선의 남프랑스를 동경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생에게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사회적으로는 거의 백수 취급받는 시아주버니가 신혼집에 있는건 민폐이기 때문에 떠났다는 얘기도 있다.

또 고흐와 테오는 불화라곤 없이 사이가 좋았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이때 테오집에 얹혀 살면서 밤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테오를 붙잡고 미술 얘기를 떠들어대는 통에 테오에게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 평생 가치관이 맞는 진정한 화가 친구를 갈망하던 고흐가, 테오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보고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해석 또한 있다. 테오를 보고 '너의 길은 화상이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권유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파리에서 고흐가 남긴 작품은 자화상, 정물화, 몽마르트르 풍경 등 200점이 넘는다.

3.4.4. 아를 시절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아를에 도착했다. 이때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꽃이 핀 과일나무 연작을 그렸다. 1880년대 말, 모네가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렸던 것처럼 고흐도 꽃나무 그림을 각각 분리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연작으로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3월 말에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23]에 다른 인상파 화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고흐는 '노란집'을 아틀리에로 꾸며서 그가 꿈꾸던 화가 공동체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고흐는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써보내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딱 한 명, 폴 고갱 정도였다. 사실 고갱의 입장에서는 이 제안이 나쁠 게 없었는데 고갱은 늘 돈 문제로 고생하던지라[24] 고흐와의 공동생활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참고

9월 16일 고흐는 고갱이 와주기를 기대하며 노란집으로 이사했고 10월 23일 도착한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두 사람 모두 작업에 몰두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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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가 일어나면서 이 공동생활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한 반면에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두 사람의 관점 차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를에서 고흐가 친하게 지낸 카페 여주인 지누의 초상화였다. 두 그림 모두 1888년 11월에 그려졌으며 왼쪽은 고흐가, 오른쪽은 고갱이 그린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살뜰하게 대해 준 마담 지누에게 인간적 호감을 느꼈고 이후 그녀가 병으로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자책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마담 지누를 그릴 때 책을 소품으로 써서 교양을 어느 정도 갖춘 부인으로 묘사했다. 반면 고갱은 아를에 온 이후 마담 지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술잔과 술병을 소품으로 썼고 얼굴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곁눈질을 치는 뇌쇄적인 술집 마담으로 그려냈다. 위의 두 그림은 고갱이 고흐에게 마담 지누의 초상화를 그리자고 제안한 결과물인데 이 두 그림은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그린 초상화가 화가의 시선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묘사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시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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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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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4번째 해바라기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그림은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조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고갱이 온 지 고작 두 달여 만인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끔찍한 자해를 하고 만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 듯해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간의 통설처럼 왼쪽 귀를 완전히 자른 건 아니고 귓불만 잘랐다. 고흐가 귀를 완전히 잘라버린 걸로 오해를 받은 것은 그의 자화상에서 왼쪽 귀[25]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지만 여러 기록으로 보면 귓불만 자른 게 분명하다. 테오가 후에 고흐를 방문했을 때 귓불만 잘려서 얼핏 보면 귀를 잘랐던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상처가 안 보인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2016년 7월 암스테르담 소재 반 고흐 미술관에서 새로 공개한 당시 의료기록을 보면 왼쪽 귀를 귓불만 남기고 다 잘랐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기사

왜 하필이면 귀를 잘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갱의 회고가 맞다면 고갱을 찔러버릴 의도였던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귓불을 잘라버렸는데 정신과적인 분석에 의하면 자신의 신체를 자르라는 명령적인 환청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긴 하다. 또한 고흐가 이 사건을 일으키기 불과 얼마 전에 그린 그림인 "아를 투우장의 관중"에서 고흐의 의도를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투우에서는 소의 귀를 자르는 게 승리의 표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고흐가 어쩌면 고갱의 압박이라는 것을 벗어나려는 차원에서 고갱을 찌르려다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그것으로 고갱의 압박에서 벗어나 승리했다는 상징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이다.

테오의 결혼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설도 나왔다. # 동생인 테오를 너무나 아껴 테오가 결혼할 때[26] 가족들이 그 사실을 고흐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고흐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세 번이나 졸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 테오의 아내와 그 아이도 많이 사랑했으며 고흐는 대체로 테오의 가족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그러나 이런 우애는 자신을 이해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던 바로 아래 동생 테오와 자신과 같이 예술가의 길을 가려는 작가 지망생 여동생 윌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아를 시절, 뜨거운 햇볕 아래서 모자도 안 쓰고 그림을 그리던 게 정신병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압생트를 많이 들이켜마시며 스스로 망가진 것도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90년대에 나온 국내 위인전에서는 주로 고갱이 그린 고흐의 그림과 연결시켜서 '내 귀는 이렇게 안 생겼어!' 라고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귀를 잘라서 그림과 나란히 대조해서 보여주려고 했다는 설이 자주 보였다.

2009년 고흐의 귀는 사실 폴 고갱이 펜싱검으로 잘라냈다는 주장이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에 보도되었고, 2011년 TV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이 방영되었다. 독일 역사가 Hans Kaufmann과 Rita Wildegans는 2009년 책 "Pakt des Schweigens"(침묵의 협정) 출간 및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의 증언들과 당사자들의 친구, 가족에게 쓰인 편지들을 분석하여 판단한 결과, 당일 밤 어두운 조명 아래서 논쟁이 격렬해지며 고갱이 본의 아니게 무기로 고흐를 다치게 하였고, 고흐는 고갱이 처벌받지 않기를 원하는 우정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자해 사건 이후 고갱은 급히 파리로 떠났고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2주 만인 1889년 1월 7일에 퇴원했다. 아를 시립병원의 레이는 고흐의 예술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는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퇴원하고 싶다는 고흐의 열망을 받아들여주었다. 노란집으로 돌아와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양파가 있는 정물>, <자장가> 등을 그렸다. 그러나 고흐는 여전히 환각 증상으로 물감이나 석유를 먹으려 드는 발작 증세를 보였고 결국 아를 시민들이 고흐를 강제로 입원시키라고 민원을 넣을 정도였다. 결국 2월에 고흐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레이는 낮에는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 병원에 돌아오게 하는 식으로 안정을 취하게 해주었다.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한 아를 사람들이 강제 입원시키라고 청원한 것에 고흐는 불만을 터트렸고 아를 시립병원에도 불만을 가진 고흐는 테오에게 다른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결국 테오는 형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릴 만한 정신병원을 알아보았고 생레미의 생폴 드 무송 요양원을 추천받아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로 가게 되었다.

아를에서 고흐와 그나마 친하게 지낸 건 룰랭 집배원 가족 정도였다. 룰랭 가족이 이후 마르세유로 옮겨가면서 연락이 뜸해졌지만 고흐는 이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고흐는 아를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곳에서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3.4.5. 생레미 시절

생레미에 대해서 고흐는 처음에는 괜찮게 생각했지만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요양원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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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 나무
한편으로 생레미 시절에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여러 개 나왔다. 그 유명한 " 별이 빛나는 밤"이라든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 등이 그것들이다. 별이 빛나는 밤의 경우는 미국의 시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기 그림들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고흐의 죽음에 대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별과 사이프러스 나무인데,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양에서는 한번 자르면 다시는 뿌리가 나지 않는 탓에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아를 시절에 강렬한 색채의 해바라기를 그린 것과는 상반된 태도라는 지적이다. 또한 별은 영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죽음을 은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살아생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은 듯한 느낌이 강한 고흐지만 이 시기에는 슬슬 몇몇 전시회에 그의 그림이 초청받고 호평받으며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1889년 9월,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이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즈음 고흐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가 지극히 호의적으로 쓴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실렸다. 평생 단 한 점의 유화만 팔 수 있었던 그의 생애에서 그 그림이 팔린 시기도 바로 이때. 오히려 그는 거기에 신경쓰기보다는 화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데 더 집중했다고 하는데, 건강악화로 인해 우울증이 온 건지 이때까지의 그의 그림에 스스로 혹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림이 생각대로 안 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관도 심했다고 한다. 또한 화가가 된 지 10년 가까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그가 테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또한 주기적인 발작도 문제였다. 1889년 12월 말에는 일주일이나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다. 간질성 발작이 점점 잦아지는 가운데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다시 일으킨 발작은 장장 두 달이나 이어져 4월 말까지 갔다. 본인도 많이 불안했는지 '만일 내게 정말 심각한 발작이 일어나서 그림을 아예 못 그리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동생 테오에게 가뜩이나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있는데 잘못하면 아예 거동이 안되는 반신불수 상태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정신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3.4.6. 오베르 시절

파일:Vincent_van_Gogh_(1853-1890)_-_Wheat_Field_with_Crows_(1890).jpg
까마귀가 나는 밀밭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퇴원할 날이 가까워지자 동생 테오는 형이 지낼 만한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테오의 권유로 5월 17일 파리의 피갈 8번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으나, 여기에서도 머물지는 않고 또 떠나기로 했다. 인상파의 선구 주자인 화가 카미유 피사로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자 피사로는 파리에서 가까운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인 오베르쉬르우아즈를 추천했다.

오베르는 파리에서 가까운 편이면서도 밀밭과 자연 풍광이 좋은 시골 마을이라 이미 여러 유명한 화가들이 오베르에 가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고흐가 존경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던 도비니도 오베르에 화실을 두고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의사이자 화가이며 화가들과 교분을 나누던 폴 페르디낭 가셰가 있었기 때문에 가셰라면 고흐를 이해해주고 병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피사로의 판단이었다. 결국 피사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테오는 1890년 5월에 생레미의 요양원을 퇴원한 고흐를 오베르로 보내게 된다. 고흐는 라부 부부의 여인숙에 방을 얻어 살면서 가셰 박사의 치료를 받는다.

가셰 박사는 의사고시에 합격한 후 여러 정신병원을 돌며 근무하다가 우울증에 관한 박사논문을 쓴 후 파리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한 상태였다, 실천적 사회주의자로서 파리의 빈곤층 전문 병원에서 무료봉사를 했고, 예술가 카페에 종종 드나들면서 그들과 교분을 가졌다.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이 그의 환자였다.[27]

이처럼 폴 가셰는 예술가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험이 많은 의사였기에, 고흐는 가셰박사와의 만남에 대해 신의 섭리인 것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셰 박사의 치료는 고흐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가셰의 치료는 단순히 환자를 진정시키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가 겪는 장애에 대해서도 단순한 설명만 늘어놓았다.

고흐는 가셰에 대해 "근심으로 경직된 얼굴의 소유자로서 노이로제를 앓고 있고, 나보다 더 아프거나 최소한 나와 비슷하게 아픈 사람으로 보인다"고 묘사했다. 그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2점 그렸는데, 그 중 한 점은 1990년 8250만 달러에 팔렸다. 고흐는 가셰 박사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그의 치료법에 대해선 회의감을 가졌다고 한다.[28]

그와 별도로, 가셰 박사는 고흐의 그림을 높게 평가했다. 고흐는 1주일에 한 번씩 가셰의 집을 방문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가셰 박사의 딸 마그리트를 흠모해서 그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도 역할을 했다.[29] 그리하여, 고흐가 모델을 두고 그린 마지막 그림인 '피아노 치는 가셰' 가 탄생하였다. 고흐는 이 작품을 마그리트에게 주면서 작품과 같은 크기의 일본 판화 두 점도 곁에 함께 걸어두라는 말을 덧붙인다. [30]
또한, 가셰박사는 답례 차 고흐의 집을 찾아가 그의 그림들을 칭찬했고, 가셰가 자신에게 특별히 마음을 쓰고 있다고 여긴 고흐는 종종 가셰에게 그림을 선물하곤 했다. 가셰 박사는 이후 1909년에 사망하는데 그의 고흐 작품 컬렉션을 보면, 그 중 10점의 작품은 가격이 10억 달러 이상 나갈 것으로 평가받았다.[31]

3.5. 죽음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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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자살하였다는 속보를 담은 기사 (1890년 8월 7일)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베르의 성 뒤쪽에 있는 밀밭에서 프랑스제 권총인 7mm의 Lefaucheux à broche 리볼버 자살한다.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쏘았지만 놀랍게도 즉사하지는 않았는데,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척추에 걸려 손상을 입은 채 피투성이로 무려 거리가 1.6km에 달하던 Auberge Ravoux[32] 여관으로 와서 쓰러졌는데, 다락방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그를 라부의 가족이 발견했다. 여관 사람들이 가셰 박사와 마제리 박사, 두 의사를 데려왔고 총알을 빼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테오가 고흐를 찾아왔으며, 고흐는 자신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고흐는 의식도 있었고 스스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았지만 곧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고통스러워 하였다. 형제는 이때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고, 고흐는 그날 밤 의식을 잃고 이틀 만인 1890년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33][34][35] 형의 너무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반 고흐는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며 형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 서른 넷의 나이로 형의 뒤를 따라갔다. 다만 형처럼 직접적인 자살을 한 것은 아니다. 1914년 테오의 화장된 유해는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빈센트와 테오 두 형제의 죽음에 매독이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매독은 그 당시에는 워낙에 흔한 질병이었으며, 무수한 예술가들이 이 병으로 시달렸기에 예술가라면 당연히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에 따라 매독에 걸리고도 장수한 경우도 있는데,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고야는 매독에 걸리고도 82살까지 장수를 누리고 갔다. 그러나 매독설은 신빙성이 없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고흐의 발작 증세는 매독과 무관하고, 테오의 죽음은 형의 죽음에 의한 충격과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그가 권총 자살이 아닌 살해당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가설은 2015년 2월 8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2014년에 총상 분석 전문가인 범죄과학자 빈센트 디 마이우 박사는 고흐가 동네 청소년들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맞았는데 그는 그 소년들에게 죄를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 자살한 것으로 가장했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좋아하던 고흐의 성미로 본다면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반론이 있지만, 박사가 주장했던 증거 ①권총이 사라짐 ②총알이 몸을 관통하지 않았다 ③화약 반응이 없었다 등, 이 3개만 본다면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총기 기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거니와, 특히 증거 2와 3을 정확하게 해명한 사람도 없다. 이것을 조금 변형해서 사냥꾼들의 오발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고흐가 쏜 리볼버는 1965년에 발견되어 경매에 6000만 원이 넘는 금액으로 낙찰되었다.

심지어 일본의 한 고흐 연구가는 고갱이 고흐를 죽였다라는 비약이 아주 심한 주장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에 의하면 고갱은 고흐가 여전히 자신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하며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귀 자른 사건 등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파탄난 상황에서 고갱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갱은 고흐가 자신을 찾도록 명분을 만들려고 고갱과 고흐를 모두 잘 알고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자 자신의 측근인 라발에게 엽총을 주고 오베르의 고흐 숙소에 몰래 가서 갖다두고 오게 했다는 것이다. 고갱의 계산은 엽총을 보면 고흐는 자살 충동이 일어서 엽총을 쏘아 자살 시도를 할 것이지만 엽총의 성능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중상을 입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고흐는 고갱을 찾게 될 것이고 고갱은 고심하는 척하다가 중상을 입은 고흐를 위해서 찾아가는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이야기지만 대부분의 고흐 연구가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갱은 작가로서의 생의 대부분을 타히티 섬에서 보냈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빴다. 고흐의 삶에서 고갱이 미친 영향에 비해 고갱의 삶에서 고흐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냥 같이 그림 그리던 괴짜친구 정도? 게다가 고흐가 자살에 사용한 총은 엽총이 아니라 권총이었다. 기사

또 다른 고흐 연구가 고바야시 히데키는 저서 "고흐의 증명"에서 그의 대표 자화상 중 하나인 왼손잡이 자화상이 정교한 위작이라 주장하면서, 이 배후에 테오의 아내이자 빈센트와 테오의 서간집을 출간해 그를 알린 요한나 반 고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 위작의 제작 동기가 요한나가 반 고흐의 자살에 동기를 제공한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상화에 대한 그의 위작 주장은 나름의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의 독자적 가설은 서양권에서는 별달리 언급되지 않았다.

실제 고흐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고흐가 북방(즉 네덜란드)을 회상하면서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던 차에 총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고흐가 자살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생레미 시절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의 그림, 그리고 오베르에서 그린 최후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기 때문에 결국 고흐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와는 별개로 오베르의 가셰 박사에 대한 비판도 많다. 고흐가 중상을 입고 왔을 때 가셰가 총알을 적출하는 외과 수술을 받게 했다면 살 수도 있었지만 외과 수술 반대론자였던 가셰가 외과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 고흐 자신도 가셰에게 그다지 신뢰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최근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도 다뤘다. 그 영화에서는 고흐가 "내가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겠지"라며 치료를 거부했다고 나온다.

최근 또 다른 연구에는 사망 전 18개월 동안 조울증이나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이런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에 이르게 됐을 것이라고 미술사가와 의학계 전문가들이 주장해오고 있다. #

3.6. 생전 화가로서의 실패

살아있을 당시 고흐는 화가로서 실패했다. 그의 유화는 살아생전 단 한 작품 팔렸는데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400프랑에 구입했다. 유화를 제외한 것까지 친다면 화상이던 센트 삼촌의 주문으로 헤이그 풍경을 담은 스케치 12점으로 20길더를 받은 바 있다.

평론가가 전시회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고 평론한 글이 하나 남아있다. "반 고흐는 색의 명암이나 색조의 정확성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붓을 격렬하게 놀려서 거대한 풍경을 그렸다. 양탄자를 향해 얼룩덜룩한 책 더미가 놓여있다. 연구에는 괜찮을 법한 모티프이지만 회화의 소재로는 적합치 않다.(귀스타브 칸, 1888년)" 그런데 밑에 재평가를 보면 알겠지만 사후에 생각보다 빨리 인정받았다. 사후 11년 쯤 후엔 거장으로 여겨졌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고물상에게 그림을 팔았는데 고물상이 물감을 긁어내고 중고 캔버스로 팔았다는 이야기, 파리의 카페 뒤 탕부랭에서 경매로 그림을 팔 때 그림 10장 가격이 50상팀(커피 두 잔 가격)이었다는 이야기, 뉘마 크로앵 영감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을 수 없자 대신 그림을 수레에 실어서 여러 장 보냈는데 그냥 돈 받은 셈 치겠다고 하고 그림은 돌려보낸 이야기 등이 있다. 고흐를 치료했던 의사 펠릭스 레이는 고흐의 그림 딱 하나만 성의로 받고 다른 그림은 항상 거절했다고 한다.

동생 테오는 형의 사후 한 달 뒤인 1890년 8월 자신의 파리 아파트에 고흐의 그림 350점을 전시하는 회고전을 열었다.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친구였던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테오의 아내 요한나에게 테오가 세상을 떠난 지 한달 쯤 지난 시점에 고흐의 회고전을 한 번 더 열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지난 회고전으로 고흐의 이름이 알려졌고, 고갱이 당시 명성을 얻으면서 고갱과 같이 작업했던 고흐의 이름도 덩달아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없었던 요한나는 이 회고전을 거절했다. 베르나르는 1911년 자신이 고흐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책으로 출간하며 고흐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이다. 초창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로부터 계산하면 고흐가 대작을 그렸던 기간은 약 5년이다. 사람들에게 빨리 인정 받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 무명 기간을 거친 후에 인정 받는 화가도 적지 않다. 고흐 사후 1930년대에 전세계에서 사랑 받고 있던 것을 고려했을 때 고흐가 장수했더라면 말년에 명성을 누렸을 수도 있다. 물론 고흐의 정열적인 성격이 (목숨을 빨리 앗아간 만큼) 걸작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긴 했지만.

3.7. 요한나 반 고흐 - 봉허의 노력과 사후 재평가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누어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이제 책임만이 남아 있다.
아들 반 고흐 주니어가 인용한 어머니 요한나의 일기. 1928년.
아이가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부숨에 왔다. 그리고 우리 둘이 먹고 살기 위해 하숙생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빨래하고 청소하는 기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끊임 없이 정신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테오는 내게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아니,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고 함이 옳다. 그는 내게 아이 말고도 또 하나의 유산을 물려줬다. 빈센트의 작품. 나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테오와 빈센트가 평생 동안 모은 이 보물들을 아기를 위해서라도 잘 보존해야겠다. 그게 나의 일이다.
요한나의 일기. 1891년 11월.

테오의 아내 요한나(1862~1925)에게는 한 살이 안 된 아들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36]와 무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수백점이 남았다.[37] 요한나는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테오와 친분이 있던 미술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고흐의 작품을 소개했고 1892년 네덜란드의 큰 화랑인 뷔파 화랑과 올덴젤 화랑에 고흐의 그림을 전시하는데 성공한다.
정말 대단한 밤이었다. 브라이트너, 이즈라엘, 얀 베트 등 내가 원한 모든 사람이 참석했다.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이 그림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요한나의 일기. 1892년 2월 26일.

사후 15년인 1905년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무려 484점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유럽 전역에서 평론가들이 찾아왔고 고흐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 회고전 다음에 작품 가격이 2, 3배 올랐다고 한다.

1914년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을 합장하며 두 사람의 형제애와 예술에 관한 열정을 알렸다.

1916년 미국으로 이동하여 3년 동안 전시회를 열며 고흐의 그림을 홍보했다.

요한나는 고흐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고흐가 남긴 편지를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663통의 편지 대부분 날짜가 없었기 때문에 요한나는 엄청난 시간을 들여 당시 일을 떠올리고 상황을 짐작하면서 순서를 정리했다. 1914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고흐의 명성이 올라가는데 기여했다. 요한나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영문판을 출간하는 것을 목표로 손수 번역하다가 526편의 번역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나의 예상대로 이 책의 영문판이 출간된 후 고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30년대부터 빈센트 반 고흐는 전세계적 인기를 가진 대중적인 화가가 되었다.

조카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는 물려받은 그림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하여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을 세웠다. 이곳은 현재 네덜란드의 대표 관광 명소가 되었다.

4. 평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고 후기 인상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색채, 힘찬 붓놀림, 그리고 왜곡된 형태는 현대 미술에서의 표현주의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 고흐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 놀라울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고,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 경매에서 기록적인 금액으로 팔렸으며 블록버스터급 순회 전시회에 출품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의 광범위한 출판된 편지들 때문에, 반 고흐는 또한 전형적인 고통을 겪은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상상력으로 신화화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후기 인상파 화가이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영어 위키백과 #

5. 화풍

고흐가 화가가 된 방법은 순전히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것을 묘사하면서 기교를 익혀나가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그 발전속도가 느려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고흐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 수 있었다. 만약 고흐가 처음부터 파리로 가서 인상파 조류를 접했다면 자신의 개성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흐가 일관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는 것'을 하나의 화두로 아카데미즘을 계속해서 부정해왔고, 인상파를 접할 때도 훌륭하다고는 생각하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됐든 그는 개성있는 화풍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실 그는 안트베르펜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많은 것을 배우고자 주/야간 강의를 모두 수강하기도 하는 등의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그의 성격과 개성(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은 이번에도 역시 강사들의 분노를 사 얼마 안 가 퇴출당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대인배인 화가가 제자로 삼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국 독학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38]

초기 고흐에게 영감을 준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로 이들에게서 기본적인 고흐의 스타일인 거친 붓 스타일[39]이라든지 음영이 뚜렷한 기법 같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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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밀레 습작
다른 한편으로 영향을 크게 미친 화가는 바로 밀레였다. 고흐의 밀레에 대한 존경은 대단해서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였고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물론 밀레의 스타일을 고흐가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밀레는 고흐에게 고흐 그림의 중요한 소재인 자연, 그리고 자연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고흐는 파리에 와서야 인상주의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비록 인상주의 스타일에 유보적이긴 했으나 그 영향을 받아들였다. 파리 이후로 고흐는 인상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색채의 활용에 능해졌고 쇠라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 쇠라에게는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붓터치가 점 모양을 띄는 양상으로 나아갔고 들라크루아에게서는 대담한 색채의 활용이라는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그림자의 생략, 가는 선으로 둘러싸여진 얕은 채색, 풍경과 대비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크기의 인물 등의 일본적 스타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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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병원[40], 1889
아를 시기에 이르러 고흐의 화풍은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선 터치 등을 사용했는데 특히 아를 이후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선이다. 생레미 시절에 특히 두드러지는 이런 선들은 나선, 원, 물결 등의 모양으로 형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 이런 독특한 선으로 구성된 대표적 작품이다.

6. 주요 작품 일람

6.1. 전기(1885년 이전)

6.2. 파리 시절(1886-1888)

6.3. 아를 시절(1888년 2월-1889년 5월)

6.4. 생레미 시절(1889년 5월-1890년 5월)

6.5.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 (1890년 5월-7월)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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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인 1873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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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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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반 고흐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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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영감의 초상, 1887년

7.1. 고흐는 정말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를 좋아했나?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고흐가 좋아하고 즐겨 마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셔야 고흐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커피 애호가나 고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밥 한 끼 먹기 힘들 정도로 그림 1점 못 팔았던 고흐가 과연 그런 사치를 부렸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오히려 커피를 먹었다면 싸구려 커피일 것이다. 이런 부분은 한국의 3대 커피 반열에 올리기 위한 사업적 마케팅이라는 설이 강하다. [48]

많이들 언급되는 커피 떡밥으로 고흐의 편지를 언급하는데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1권, pp.140-141)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5년 12월 28일
여기까지 보면 고흐가 호밀빵과 함께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편지의 전체 내용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오는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그러나 모델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되면 갑자기 나약한 감정이 나를 덮치곤 한다.
즉 고흐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며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런 언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용했던 호밀 흑빵을 먹는 것이 고흐를 가장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또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커피를 좋아해서 자신이 자주 애용하는 카페를 그렸다는 밤의 카페[49] 일화는 실제 편지 내용을 보면 고흐 입장에서는 카페라는 곳에 이미지가 부정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또는 와인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또 부드러운 녹색과 베로네즈 녹색을 노란빛 도는 녹색과 거친 청록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일본 회화 특유의 경쾌함을 담고 있다.
편지 677, 1888년 9월 9일[50]

참고

7.2. 한국인 진품 소유 사건

고흐의 작품 중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의 진품을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해 화제가 된 사건. 자세한 내용은 빈센트 반 고흐 진품 한국인 소유 사건 문서 참고.

8.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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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많은 걸 봤지만 이렇게 당신이랑 보는 세상만큼 멋진 세상은 없어요."
- 11대 닥터

8.1. 뮤지컬

9. 외부 링크



[1] 출처 [2] 19세기 중후반 네덜란드 남성 평균 키가 164cm 였음을 감안하면 그 시대에 170cm는 큰 키이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남성 평균 키가 183cm 이므로 고흐의 키는 현재로 치면 시점에서 190cm 정도라고 볼 수 있다. [3] 과거 보조 목사 일을 했다. [4] 혼전 성은 '카르벤튀스(Carbentus)'. [5] 고흐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목사가 될 목표로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공부를 했으며 벨기에 몬스 탄광으로 개신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전도 사역을 하기도 하였다. [6]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나를 꿈꾸게 하는 밤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Mais toujours la vue des étoiles (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But the sight of the stars always로 시작한다. [7]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Le jour viendra cependant (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The day will come, though로 시작한다. [8] 실제 네덜란드어 발음은 자음동화로 인해 [vɑŋ ˈɣɔx\]에 가까우나 네덜란드어 표기법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표기한다. [9] 지리상으로는 독일에 위치하고 있지만 네덜란드와 붙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저지대 지역 도시들 중 하나이다. [10] 사실 '고호'라고 하는 것은 양반이고, 심지어는 그를 반 고그라고 부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고흐는 평생 자신을 '빈센트'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반 고흐'라고 하면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탓. 유럽 화가들은 완성한 그림에 성으로 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고흐는 거의 '빈센트'로 서명했는데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1]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 방식에 촉음 표기까지 적용하여 'Bach(바흐)'는 'バッハ', 'Gogh(호흐~고흐)'는 'ゴッホ', 'Huch(후흐)'는 'フッフ'로 쓴다. [12] 후자의 경우 'tough(/tʌf/)' 등에서 'gh'가 [f\]로 발음되는 경우를 적용한 듯. [13] 링크된 교회가 바로 테오도뤼스가 목회생활을 하던 교회로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14] 그러나 고흐의 동생이 고흐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짓은 것을 생각하면, 고흐는 자신의 이름을 항상 저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15] 옆의 림뷔르흐주와 함께 골수 가톨릭 주로 통하는 곳이다. [16] 할아버지도 똑같이 이름이 빈센트(Vincent Ferdinand Jacob van Gogh, 1789~1874)다. 빈센트의 동생 테오(1857~1891)의 아들도 똑같이 이름이 빈센트(Vincent Willem van Gogh, 1890년 1월 31일~1978)이다. [17] 이때 작품들만 봐도 웬만한 미대생들보다 좋은 기본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 네덜란드는 특성상 인근국가들과 교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인근국가들의 언어인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함께 배우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에선 영어와 프랑스어 정도는 할 줄 아는 국민들이 대부분이다. [19] 케이 보스스트리커르(Kee Vos-Stricker)라고도 불린다. [20] 다만 그림실력은 조금 떨어졌다. [21] 이때 시엔이 임신한 아이가 고흐의 자식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일었지만 고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서 시엔의 임신한 아이가 고흐와는 무관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22] 물론 모베와의 절교가 오직 시엔과의 동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흐는 모베가 자신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강요한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큰 골이 깊어져 있던 차였다. 시엔과의 동거는 결별을 위한 핑계거리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23] 관선(官選) 살롱에 대항하여 신파 화가들이 1884년에 창립한 전람회 [24] 고갱은 본래 증권 회사에서 일하던 회계사였다가 만 34세에 회계사 일을 접고 화가로 전업하면서 이로 인한 재정 부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25] 거울을 보고 그렸으니 오른쪽편 [26] 1889년 4월 17일 조안나 봉제르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7] 가셰는 마네의 다리 절단 수술을 반대하는 소견을 냈는데, 마네는 그의 조언을 듣지 않고 수술을 받은 후 10일 후 사망했다. [28]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겠어? 그러니 가셰 박사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절대로 안 돼!"라고 가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29] 하지만 가셰의 딸은 고흐를 좋아하지 않았고 고흐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서 기대하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30] 마그리트는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이다. [31] 많은 화가들과 교류를 가진 만큼 고흐 그림의 가치를 전문가적 관점에서 정확히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32] 이 여관과 오베르 마을 전체가 현재는 고흐 테마 관광명소이며, 고흐의 묘지도 이 마을에 있다. 여관에는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앉았다는 의자도 있으며, 고흐를 제외해도 마을이 경치가 매우 좋고 파리에서도 가까운 편이니 파리에 있을 때 시간이 난다면 당일치기로 들러 보자. [33] 죽기 직전 테오에게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이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도 실패하다니." 라고 말한 기록이 테오의 일기에 남아있다. [34]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같은 해 11월 23일 빌럼 3세의 서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35] "집에 돌아가고 싶다"(혹은 "죽고 싶다")라고 유언을 했다고 설명한 전기도 있다. [36] 1890~1978.테오는 아들에게 형 이름을 붙였다. 조카는 후에 인터뷰할 일이 있으면 삼촌의 이름을 피해서 자신을 '엔지니어'라는 별칭으로 불러달라고 하였다. [37] 빈센트 반 고흐는 10년간 900점 가량의 유화, 천 점 이상의 드로잉을 그렸다. 물감도 많이 쓰는 화풍이라 동생 테오의 지원이 대단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38] 안톤 모베에게 배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창녀인 시엔을 도우는 걸 두고 모베가 "자네는 타락했어."라고 한 뒤 교류가 끊겼다. [39] 실제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렘브란트가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린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 [40] 현재는 Espace Van Gogh라는 이름의 문화센터로 변하였으며, 그림에 나와 있는 테라스와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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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그 그림의 다른 버전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42] 참고로 사이토의 기업이었던 다이쇼와제지(大昭和製紙)는 그가 죽은 후 재정난에 빠져 다른 미술품들을 연이어 팔아야 했을 정도로 몰락했고, 결국 닛폰제지에 흡수합병되었다. [43] 이는 사이토가 죽자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엄청난 항의와 질문 끝에 유족들이 맹세한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고흐를 아끼고 연구를 많이 하며 소장도 많이 하고 있기에 그의 발언은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비난받았다. 심지어 사이토와 친한 다른 일본 재벌들에까지 개인적 자리에서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안 되죠. 인류문화유산을 겨우 장작으로 쓰신다고 하는 건 파렴치한 이기주의 아닙니까"라는 쓴소리까지 듣었다고 한다. [44] 일본은 최고 상속세율이 50%에 달해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45] 400 프랑에 팔렸는데,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이었다. 물론 현재 고흐의 그림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단 고흐의 그림이 한 점만 팔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고흐가 알게 모르게 싼 값에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밥 한끼 값으로 대신 지불한 그림도 많았기 때문에, 고흐의 전기작가들 가운데에는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허무맹랑한 전설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전술했듯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10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뭐 돈 안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46] 고흐는 예전부터 종종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의 맛을 보곤 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먹은 게 아니라 마약 성분이 있는 압생트를 금지 당하자 금단 현상 때문에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 자체가 당대 프랑스의 와인 제조업자들이 당시 파리에서 희석식 소주 정도의 포지션이었던 압생트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자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마약성분이라고 주장하는 쓴쑥에 들어있는 투존 성분은 흔히 알려져 있듯 환각과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물론 분명히 과도하게 음용했을 때 어지럼증, 발작, 혼수상태,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압생트만으로 이 정도로 다량의 투존을 섭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투존 성분이 들어간 쓴쑥 자체도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베르무트나 빅스 베이포럽(코막힘 치료제) 등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또한 저 투존 성분의 부작용이라는 게 사실 보면 습관성 과음의 증상과 다를 것도 없다. 즉 압생트야말로 음모론의 희생자라는 이야기. 실제 압생트의 맛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향신료인 아니스이다. [47] 파일:attachment/빈센트 반 고흐/목포반씨.jpg
현재는 수정되었다.
[48] 예멘 내전으로 인하여 국가에서도 커피 원두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를 안 하고 있어 저품질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마타리라는 명칭은 커피 애호가 사이에서는 고품질 원두가 아닌 단지 베니마타르 지역에서 나온 원두라는 인식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애초에 이런 이유로 예멘 모카 마타리 원두의 질은 좋지 않은 편인데 원두 크기도 다르고 색상도 다르며 인력 부족으로 전통 가공법으로 아직도 맷돌로 갈아서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마타리에 특유의 복잡한 맛도 이런 크기, 색상, 저급등이 섞인 고르지 않은 원두로 인한 맛으로 이런 질 안 좋은 원두가 유통도 좋지 않아 가격도 올랐는데 이런 고흐 떡밥까지 포장해서 프리미엄이 되었다. [49] "밤의 카페 테라스"와는 다른 그림이다. [50]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파괴와 광기의 공간, 밤의 카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Dans mon tableau du café de nuit (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In my painting of the night café로 시작한다. [51] 책을 읽은 그날 밤, 너무나 가슴이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하룻밤 만에 이 노래를 완성했다고 한다. [52] 최초개봉일은 2018년 11월 16일 미국 [53] 작품 《영원의 문, Sorrowing Old Man (At Eternity's Gate) (1890)》에서 제목을 붙였다. [54] 공감각에 가까운 톡특한 색채 감각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는 설정. [55] 참고로 이를 해설하는 큐레이터는 빌 나이가 배역을 맡았다. [56] 실제로 고흐가 살아있을 때 팔렸던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고, 모두 고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본 그림이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더 감동적인 장면인 셈. [57] 이러한 스토리(평범한 시간여행, 과거의 실존인물 등등) 덕분에 60년간의 설정으로 쌓여 입덕하기 힘든 닥터후를 일반인들에게 추천할 때, 입덕 에피소드로 자주 뽑힌다. [58] 아마도 시간의 틈과 같이 판도리카가 열리고 타디스가 폭발하는 것과 관계된 듯. [59] 어쩌면 꿈에서 전송된 정보들 중에서 에이미 로마병사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배로 입어서 정신이 망가진 것일지도... [60] 추측이지만, 고흐가 원래 자살하는 원인이 에이미랑 닥터에 의해 타임 패러독스 때문에 인과적인 원인이 변경되었지만, 가변 역사와 불가변 역사의 법칙 때문에 판도리카가 꿈을 통해서 전송받은 미래의 정보를 보게 된 충격으로 정신붕괴로 인해 자살하는 것으로, 자살하게 되는 인과적인 원인이 우회적으로 교체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 [61] 굳이 판도리카라는 먼 주제가 아니라도 평소에 자신을 멸시하는 주변의 반응에 비해 사후 자신이 유명해진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62] 시기상 저 그림 자체를 에이미를 위해서 그린 건 아니고 이미 그려둔 해바라기 그림을 에이미에게 선물한 것이다.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린 때가 '오베르의 교회'를 그린 때보다 2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