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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1:38:29

르네 퐁크

제1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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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white,#191919>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colbgcolor=#b8860b> 1위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독일 80대
2위 르네 퐁크 프랑스 75대
3위 빌리 비숍[1] 캐나다 72대
4위 에른스트 우데트 독일 62대
5위 에드워드 메녹 영국 61대
6위 레이먼드 콜리쇼우 캐나다 60대
7위 제임스 멕커덴 영국 57대
8위 앤드류 보샹-프록토르 남아프리카 54대
9위 에리히 뢰벤하르트 독일 54대
10위 도날드 맥라렌 캐나다 5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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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11위 조르주 기느메르[2] 프랑스 53대
12위 윌리엄 조지 버커 캐나다 50대
13위 조제프 주콥스 독일 48대
13위 베르너 포스[3] 독일 48대
15위 로버트 리틀 호주 47대
15위 조지 멕슬리 영국 47대
17위 로드릭 댈러스 영국 45대
17위 프란츠 루메 독일 45대
19위 알버트 볼[4] 영국 44대
19위 루돌프 베스홀드 독일 44대

[1] 후에 캐나다 공군 중장이 된다. [2] 에른스트 우데트와 교전 중, 우데트의 기관총이 고장난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그냥 놔줬다. [3] 리히트호펜의 절친으로, 1917년 9월 23일에 격추당해 사망했다. 당시 영국의 에이스인 제임스 맥쿠덴이(격추기록 57대로 1차세계대전 파일럿중 7위의 기록을 보유했으며 베르너 포스보다도 격추기록이 높긴 높다. 물론 포스가 일찍 절명한 탓이 크지만) 이끄는 편대와 7대1로 싸워서 2대를 불시착 시키고 모든 적기에 총탄을 박아 넣는 괴력을 보이지만 결국 협공 끝에 영국 에이스인 아서 리스 데이비스에게 격추당해 사망한다. 포스의 포커 삼엽기는 선회전에 특화되어 전투기 여러 대가 뒤엉켜 싸우는 난전에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포스의 괴물같은 실력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4]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동생인 로타 리히트호펜에게 격추되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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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n%C3%A9_Fonck_02.jpg
René Fonck
1894년 3월 27일 ~ 1953년 6월 18일

파일:external/img.wp.scn.ru/21_6.jpg
그의 스패드 (SPAD S.XIII C1) 전투기.

1. 개요2. 평가3. 논란4. 훈장5.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군인.

2. 평가

독일 붉은 남작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르네 퐁크가 있었다. 종전까지 르네 퐁크는 붉은 남작보다 적은 75대 격추기록[1]을 달성했지만 실력만으로만 따지면 붉은 남작보다 훨씬 뛰어난 조종사였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하에 나올 45초 동안 3기 격추, 3시간만에 6기 격추 같은 기록은 1차대전 에이스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한 것이다.

르네 퐁크의 전투 스타일은 적기와 정신없이 선회하며 싸우는 근접 전투보다는 높은 고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끈질기게 쫓아다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단숨에 달려들어 격추시키는 일격 필살의 방법을 선호했다고 하며 다른 조종사들이 보지 못하는 먼 거리에있는 적기도 잘 발견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항공기에 관한 기계적인 지식에 뛰어났던 덕분에 공중전의 상황에서 자신의 기체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공중전과 수학적 원리를 접목시킨 덕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실력을 자랑했었다.

그리고 르네 퐁크가 붉은 남작을 뛰어넘는 최고의 에이스로 평가받기도 하는 이유는 단 5발의 기관총 사격으로 적기를 격추시키는 믿기 힘든 사격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속도가 비교적 느린 1차대전의 항공기들도 교전상황에서는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속도로 싸웠으며 스패드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은 속도가 굉장히 빨랐기 때문에 적기를 명중 시키려면 적기의 예상 비행경로 앞으로 사격을가해야했는데 르네 퐁크는 예측 사격의 실력이 정말 기가막힐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뛰어난 사격실력 덕분에 르네 퐁크는 다른 조종사들에게 조종하기 불편하다는 평가를 받아 소수만 생산되는데 그쳤던 스패드 S.XII 전투기를 굉장히 잘 이용했다고 한다. 스패드 S.12 전투기는 37mm 포와 7.7mm 빅커즈 기관총을 장착한 덕분에 1차대전 전투기들 중 가장 강력한 화력을 지녔었지만 37mm 포의 탄환은 탄속이 느렸기 때문에 적기를 맞춘다는건 거의 운에 가까운 일이었고 연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발 쏘고 나서는 조종사가 직접 재장전 과정을 진행시켜야하는 불편한 사항들이 많았다. 적기의 뒤를 물기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황을 판단해야하는 조종사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강한 쓸모없는 무장이었던 것인데 르네 퐁크는 S.12 전투기에 장착된 37mm 포를 이용해 11대의 독일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초인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안개가 잔뜩 끼어있던 어느날 퐁크는 후세에 남을만한 격추기록을 자랑하게 된다. 안개 때문에 하루종일 지상에 발이 묶여있었지만 오후가 되자 날씨가 개인 덕분에 퐁크는 15:00시 정각에 이륙해서 초계 임무를 수행했는데, 16:00~16:05의 짧은 시간 동안 세 대의 독일군 정찰기를 격추시키는 믿기 힘든 격추기록을 달성한다. 두 시간 뒤, 정찰기가 수행하는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던 퐁크는 프랑스군에게 곧 포화가 쏟아질거라 예상하고 다른 정찰기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는데 덕분에 3시간 동안 여섯 대의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르네 퐁크와 다른 조종사들과의 차이점은 순간적인 사격으로 적기를 격추시켰다 보니 다른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격추 기록을 공유하는 사례가 단 세 번 뿐이었으며 대부분의 에이스 조종사들이 한 두 번쯤은 부상을 입거나 죽었던 반면 르네 퐁크는 부상을 입지도 죽지도 않았다. 퐁크가 교전중 입었던 피해는 오직 단 한 발의 총알이 퐁크가 조종하던 스패드 전투기에 박혔던 일 뿐이었다.

또한 다른 조종사들과 달리 정찰기구를 격추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르네 퐁크의 격추 기록에는 오직 적 항공기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정찰 기구의 경우 고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딱 그 높이에 신관을 설정해 둔 대공포대가 정찰기구를 집중적으로 방어했고, 따라서 굉장히 위험한 임무였다. 당연히 정찰기구를 격추시키는 것 또한 격추수에 포함되었고, 프랭크 루크(미국)와 같이 기구 격추 전문가로 명성을 떨친 에이스들도 있다. 다만 기구 자체가 불이 붙기 쉽고 늘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만큼 적 에이스와 교전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3. 논란

퐁크는 전후 독일 공군의 에이스들과 잦은 교류를 하며 인맥을 쌓았는데, 문제는 이게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1940년 프랑스가 패망할 당시에는 이러한 독일군 고위층과의 인맥을 이용해서 비시 정부와 독일이 협상하는 중재 역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친독일적인 라발 대신 보다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의 페탱이 먼저 히틀러와 회담을 할 수 있게끔 노력하였다. 덤으로 회담의 결과 페탱을 신임한 히틀러가 라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라발은 한동안 다른 공직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전후 퐁크가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그를 옹호하는 주장도 많이 나오긴 하나 이러한 정치적 논란은 퐁크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아주 약간 그를 비호하자면, 사실 전쟁 당시에는 서로 적으로 싸웠던 군인들이 전후에 서로 우정을 나눴다는 이야기는 그리 드문 이야기가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기사도 정신을 지녔던 당시 에이스들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우정을 나눌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로 여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공군 에이스였던 아돌프 갈란트와 영국 공군 에이스였던 더글러스 베이더의 우정만 봐도 훈훈한 미담으로 여겨질 정도. 르네 퐁크 본인 역시 이와 다르지 않게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헤르만 괴링이나 에른스트 우데트 같은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나치당 핵심 인사였다는 게 문제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퐁크는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조르쥬 기네머를 뛰어 넘는 격추 기록을 달성했으며 1차대전 조종사들 중에서 붉은 남작 다음으로 많은 격추수를 보유한 뛰어난 에이스로 역사책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4. 훈장

르네 퐁크가 받은 훈장들은 다음과 같다.

- Medaille Militaire : 무공훈장

- Legion d'Honneur : 레지옹 도뇌르 훈장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

- Officier de la Legion d'Honneur : 레지옹 도뇌르 2등 훈장

- Military Cross : 무공 십자훈장 (세계 대전 초기 영국에서 제정)

- Distinguished Conduct Medal : 청동 수훈 십자장

5. 여담

붉은 남작처럼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던 프랑스의 유명한 조종사인 조르주 기느메르와 달리 르네 퐁크는 굉장히 내성적이었다고 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다고도 한다. 다른 조종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놀기 보다는 다음 임무에 대한 전술 계획을 짜거나 제복을 다림질했다고 하며 체조 활동 등을 했다고 한다.

때문에 퐁크는 자신의 수줍은 성격에 대해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끊임 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 놓았다고 하며 이런 행동들 때문에 퐁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퐁크를 보게 되면 거만하고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퐁크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가졌었던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적은 편이었고 대중에게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붉은 남작에 비해서 초라할 정도의 인기를 가지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대전 후에 르네 퐁크는 뉴욕-파리간 무착륙 비행에 도전하기도 했다. 호텔 경영자인 레이먼드 오티그가 특별한 상을 제정하여 공표했는데, 뉴욕과 파리간 무착륙 비행을 성공한 조종사에게 상금 25,000달러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1924년까지 도전자가 없자 오티그는 기간을 5년 연장했고, 르네 퐁크가 첫 도전자였다.

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시코르스키 S-35 삼발기를 가지고 1926년 9월 21일 루스벨트 비행장에서 시도한 도전은 아쉽게도 비행기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폭발하면서 끝난다.[2] 르네 퐁크와 부조종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통신사와 정비사 두 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도 총 6명의 젊은이가 이 상을 타려다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 이 상을 탄 사람은 도전자 중에서는 나이도 어리고 비행 경력도 짧은 편이었던 찰스 린드버그였다.


[1] 부하들에게 양보한 것들, 미확인 기록까지 합하면 130여기로 붉은 남작을 아득하게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런 비공식 기록은 모든 에이스들에게 있는 만큼 붉은 남작 역시 100여기가 훨씬 넘는 적을 격추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야스타 11이 에이스 집합소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2] 덤으로 이 기체의 사고 원인은 이륙하기에 기체 중량이 너무 무거워서 였다. 4명이나 탈 수 있는 기체에 침대까지 실었다. 최대이륙중량이 11톤인 기체인데 초과중량이 무려 1.8톤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이 사고는 린드버그가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호의 중량을 극한까지 줄이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