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밈에 자주 쓰이는 짤방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다룬 게시글에서 인용된 짤이다. 훗날 이 작성자는 프레스 갱 편, 이란 편에서 다시 써먹었다. 이란 편 댓글에 따르면 제작자는 별 생각 없이 썼는데 밈이 되어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
"어… 미안하게 됐수다."[1] 웨스트 뱅크 한 마을에 있는 이스라엘군이 설치한 분리 장벽에 영국 정부를 상징하는 왕관과 함께 그려진 그래피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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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혐성국( 嫌 性 國)은 인터넷 역사 관련 커뮤니티, 포럼 등에 퍼져 있는 밈으로, 2018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역갤, 패독갤 같은 역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졌다. 주로 19세기 이후에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식민지를 착취하고, 더 나아가 현대 개발도상국들의 유혈 사태 등 내/외부 갈등의 단초까지 제공한 유럽 강대국들을 비판/풍자/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로, 대부분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두주자였던 영국, 시기상 대영제국을 가리킨다.어원을 해석해 보면 혐오스러운 인성 + 나라. 그 이전부터 흔히 인터넷 용어로 사용되는 혐성이라는 단어에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단서가 없듯 영국 외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 이를테면 프랑스[3], 19세기 제국주의를 넘어 중세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구유고 연방의 주자인 세르비아, 소련 붕괴 이후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패권주의 외교를 보이는 러시아, 전세계를 상대로 야욕을 드러내는 중국 등 맥락에 따라 다양한 국가를 풍자하는 데도 사용되기 때문에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말로 영국이 뭔가 안 좋은 일을 하면 '럭키 나치', '혐추장국'[4]이나 '별로 위대한 영국이 아니다' 라고 한다.[5]
해당 표현에 대해 대한민국 넷상에서나 쓰는 드립성 용어인 데다 제국주의 시대 국가들을 누가 더 나았네, 나빴네 진지하게 논하는 것부터가 의미없는 병림픽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스낵 컬처 형태로 1차원적이고 편향된 역사 이해 및 인식을 촉발하고, 해당 표현이 각종 매체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재생산 및 확산되었다는 문제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2. 배경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19세기는 영국의 산업 혁명이 본격화되어 서구가 그 폭발한 국력을 비서구 국가로 돌리고 무력을 동원한 침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제국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무력을 앞세워서 미개척지를 식민지화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건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기본 베이스로 세팅되어 있던 때였다. 사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벌인 각종 만행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비롯해 식민지를 보유한 전적이 있던 서방권 국가들이나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부 했던 행동이지만[6] 19세기 패권국으로서의 영국의 영향력과 본토 면적 대비 해외 식민지 영토가 가장 거대했기 때문에 더 주목받는 측면이 있다. 거기에다 영국도 일본과 똑같은 제국주의 섬나라라는 프레임과 현 패권국인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식민지로부터 출발한 만큼, " 미국의 제국주의도 뿌리를 따져보면 영국"이라며 끌어들이는 논리까지 더해졌다.다만 역사에 대한 평가는 현대적 도덕적 관점이 아닌 당시의 보편적인 시대상과 배경 등을 고려해야 하며, 정확하지 않은 루머나 공과 중 과만 선택 열거하면 그 어떤 국가도 악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점 역시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고려하라는 뜻이지, 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현대의 관점을 아예 배제해서는 안 된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상에서 퍼지는 혐성국이라는 밈과 별개로, 정작 영국은 영연방을 통하여 구 식민지 국가들과 경제적/문화적/사회적/정치적으로 깊은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피지배국들이 민간에서는 민족감정의 일환으로 영국을 비판하는 일은 많지만 영국과의 공식적 수교에서는 그런 감정을 접어두고서 일단은 깊은 교류를 이어나간다. 이것은 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그나마 식민지들의 평화로운 독립을 허용했다는[7] 역사적 맥락, 영국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 등 많은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하여간 타 식민제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영국이 구 식민지들과 관계가 원활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식민지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전쟁까지 거쳤던 역사와 대비된다.
한국과 일본도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밀접한 편이지만 영연방 국가처럼 서로에게 대놓고 다중국적 취득 우선권이나 취업비자 우선권이나 거주자 투표권 부여 등 상호 특권들을 부여하지는 않아서 한국인들이 영연방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영국과 함께 식민제국 투톱이었던 프랑스도 영국 못지 않는 혐성국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프랑스 식민제국도 스케일은 영국에 밀렸을 뿐 타 열강은 가볍게 압도하며 아이티를 비롯한 아프리카권 식민지에서의 만행 수준은 영국만큼 악랄했다.
게다가 전후 식민지가 해체되고 나서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지만 그 이후에 국제 외교에서 식민지에 관해 트러블을 별로 만들지 않은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끝까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고 옛 식민지 국가와 전쟁까지 불사하다가 끝내는 패전한 역사가 있는데도 현재까지 과거 식민지 국가의 내정에 대놓고 간섭하는 제국주의 시절의 외교를 유지하기 때문에 영국이 제국주의 건으로 비판받을 때 프랑스도 세트로 비판받으며, 영국이 '혐성국'으로 불리는 것처럼 프랑스도 현시대 중화인민공화국 못지않은 패악질로 인해 '유럽 짱깨'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성국' 드립을 꺼낼 때 주 소재는 보통 현 패권국인 미국이 중동, 남미에 저지르는 쿠데타 사주, 통수, 갑질이나 과거 패권국이었던 소련이 위성국에 저질렀던 패악, 21세기 중국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저지르는 사채놀음 및 아시아 일대에 저지르는 문화침탈 등 유사 제국주의적 정책, 그리고 파룬궁, 위구르, 티벳에서 현재진행형인 인권 탄압보다는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영국을 필두로 서구(주로 영국과 프랑스)가 행한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눠먹은 각종 밀약, 다중계약, 통수들의 역사이다.[8] 상술한 중국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세계구급 민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조롱성 밈을 넘어 깊은 혐오가 동반되어 조리돌림을 당한다. 미국은 민주주의/밈이 혐성국 드립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종종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영국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서방권 대부분 국가의 제국주의 시절도 인터넷에서 비난의 대상이다.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아프리카가 친중/친러인 것과 중동 난민 문제는 100% 서방권의 자업자득"이라는 반응도 존재하며 이슬람권 출신 난민과 이민자들 중 몇몇이 유럽에서 테러, 살인, 성폭력을 일으키면 이슬람을 경계하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의 업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9]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도덕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의 확산과 함께 과거 제국주의의 대표격 이미지 국가로서 영국에 대한 비판 여론이 증가했다. 이는 영국에서조차 다를 건 없어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노예무역상의 동상을 강바닥에 수장시켜버리는가 하면 벵골 대기근과 관련 있는 윈스턴 처칠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했을 때 옛날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의 일부 네티즌들이 조롱하기도 했다. # 다만 SNS 등의 현지 일부 누리꾼의 의견을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로서 일례로 반영 감정이 심하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조차 엘리자베스 2세의 붕어 소식에 총리와 대통령의 공식적인 조의 및 정부청사 역시 아일랜드 국기를 내리며 애도를 표시한 바 있고 # 2011년 엘리자베스 2세의 아일랜드 방문 당시엔 아일랜드 국민의 77%가 여왕을 환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듯 생각한 것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이미지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 200년 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9월 11일을 '국가 묵념의 날'로 지정하며 붕어에 애도를 표시한 바 있다.[10]
여담으로 이러한 혐성국 드립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를 재평가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이 서구에서는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관련 서적의 번역은 201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련 대표 학자는 니얼 퍼거슨인데, 정작 한국 인터넷에서는 그에 맞물리는 시기에 본 항목의 혐성국 드립 등 제국주의 비판이 대두한 관계로 비판의 대상으로 굴러 떨어졌다.
3. 못 믿을 알비온
역외국가(offshore state)로서 이런 장점에 대한 영국의 자유로운 활용은 많은 유럽의 대륙국가들이 배신자 알비온(Perfidious Albion)이라고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허풍전략(bluffing strategy)의 매력은 위기나 갈등순간이 역외국가가 철수하기에 가장 호소력 있는 때라는 점에 있다.
엘브리지 콜비, 거부전략, 47P
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못 믿을
알비온[11](Perfidious Albion)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 섬나라라는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유럽에서의 절대적인 강국의 출현을 막는 영국 특유의 외교전략은 자연스럽게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이에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의해 사용된 표현이다.엘브리지 콜비, 거부전략, 47P
Attaquons dans ses eaux la perfide Albion.
(그녀(브리튼)의 바다(Waters)에서 못 믿을 알비온을 무찌르러 갑시다!)
불신의 알비온이라는 표현은 히메네스의 후작인 오귀스탱이
1793년에 쓴 시의 구절로 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당 표현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이 초기에 영국식 자유주의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때 많은 영국인들은 혁명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왕정이 전복되고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혁명의 노선이 공화주의로 전환되자 영국의 여론은 혁명에 부정적으로 변했다. 뒤이어 프랑스 국민공회가 2월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자 영국은 유럽의 다른 군주제 국가들과 대불동맹을 맺으며 완전히 혁명과 갈라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불만을 가졌고 불신의 알비온이란 표현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그녀(브리튼)의 바다(Waters)에서 못 믿을 알비온을 무찌르러 갑시다!)
이후 불신의 알비온은 영국과 대립한 여러 국가들이 영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자신들에게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표현을 사용한 대표적인 국가 및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 제3공화국 - 파쇼다 사건 당시 선전.
- 독일 제국 - 세계 정책 추진 당시 여론전.
-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 - 비시 프랑스가 영국에대한 적대감을 유지하도록 사용했다. 비시정부의 수장 필리프 페탱도 사용했다고 한다.
- 파시스트 이탈리아 - 대영국 선전.
-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의 레오폴도 갈티에리 - 포클랜드 전쟁 당시 여론전.
- 브렉시트 - 브렉시트 당시 영국의 행보를 꼬집은 것이 최근의 사례라고 한다. #
4. 사례
4.1. 영국의 과오가 분명한 경우
- 영국 동인도 회사(1600~1874) - 영국의 인도와 동아시아 깽판의 주역 중 하나였던 만악의 근원인 기업.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답게 수많은 행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벵골을 시작으로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게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통치 비용을 메꾸기 위해 높은 토지세는 기본이고 식량을 재배할 경작지를 갈아엎고 쪽과 아편과 같은 상품작물 플랜테이션으로 전환했다.[12] 1770년 벵골 대기근엔 천연두와 가뭄으로 약 100만~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인도회사의 세금정책도 이를 가중시켰다.[13] 게다가 영국의 정치인들이 이 동인도 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악행을 방관하고 뒤에서 지원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단의 아편전쟁이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에는 동인도 회사가 소유했던 인도, 버마 지역은 영국 왕실령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고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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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1840~1842, 1856~1860) -
청나라의 무역 보호주의, 공행의 부정부패, 막대한 찻잎 수입 등으로 불어나는 무역 적자를 이유로 마약을 만들어 밀수출하고, 이 때문에 청나라에서 마약 중독과 국부 유출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내에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인데 이를 빌미로 1, 2차에 걸쳐 영국을 주도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에 전쟁을 일으킨 사건이다. 즉, 영국은 청나라가 마약 파는 걸 막았다고 전쟁을 개시한 거다. 의도와는 별개로 아편 판매만 놓고 보면 이는 당대 영국 내부에서도 논쟁이 심한 문제였다. 전쟁 반대파들에게서는 비록 "저 비문명인들을 계몽해 줘야 하는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는
백인의 의무 사상이 기반일지언정 매우 수치스럽다거나,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의 하원의원이었던 글래드스턴의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는 있어도 후에 영국의 위신과 명예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될 것이라며 이 전쟁의 불합리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영국 내에서도 있었으나, 결국 하원 예산투표에서 찬반 271/262라는 단 9표의 차이로 전쟁이 승인[14]되었으며, 예상대로 영국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킨 나라'라는 꼬리표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에도 중국의 아편중독자는 400~1,200만 명이 존재했던 걸로 추정하는데, 이는 난징 조약 이후 약 2배 가까이 늘었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편전쟁 이후 중독자의 수는 1,350만[15]~4,000만 명[16]까지 추정하고 있다. 반대로 다른 의견도 존재하는데 홍콩대 석좌교수인 프랑스 디콰터 (Frank Dikötter)는 모든 주류자가 알콜중독자는 아니듯이 중국내 심각한 아편중독자는 상당히 과장됐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예수회 선교사이자 아편 반대론자인 '존 터너' (John Turner) 역시 그의 중국기록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19세기 말 아편 무역항인 광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소수의 쇠약해진 사람들 중 평소 아편습관으로 인한 원인은 드물며, 대부분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아편만을 피울 뿐이라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인도인 역사가 '리처드 뉴먼'(Richard Newman) 역시 19세기 동안 상점에서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영국에서는 빈번하고 만성적인 아편 사용자가 아편으로 인한 해로운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19세기 중국 역시 아편이 대부분의 흡연자의 건강을 해치거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종종 영국이 아편의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여 자신들은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마약청정국인 중국에 마약을 투입한 사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이해는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는 중국이 영국의 아편 판매 이전에도 국가 내부에서 약물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부터 중국을 휩쓸던 담배 열풍에 많은 이들이 담배를 피웠고, 곧 담배로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서히 아편으로 기호품을 옮겨갔다. 이런 식으로 아편을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명 만력제, 청 도광제 등이 존재한다. 게다가 아편의 오남용 문제는 서양에서도 심각했는데 전쟁 이후 몇십 년이 지난 시대에 나온 셜록 홈즈에서도 마약을 하는 홈즈가 묘사되거나 아편굴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아편을 비롯한 극약들이 주 원료인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이란 약이 19세기의 대표적인 가정상비약으로 구비되었고, 현대 의약품의 선구자 격인 페니실린이 1928년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아편 전쟁은 무역 적자를 타개하려는 영국 상류층들이 중국의 높아지는 아편 수요에 주목해 가장 확실한 외화벌이 수단으로서 아편을 판매하였고, 그 결과로서 중국 내에 퍼져있던 약물 오남용 문제가 확산된 것이다.
사실 19세기에 아편은 유럽, 미국, 중동, 아시아 등 세계적으로도 재배나 사용이 금지되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아스피린 이전 진통제나 오락용으로 널리 사용됐었다. 예컨대 1830년대 영국에서는 한해 22,000 파운드의 아편이 인도와 터키에서 수입됐고 약국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구입이 가능했으며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도 없었다.[17] 그렇다면 유독 왜 당시 중국에서 아편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가에 대해 의문점이 남는데 중국인 사학자 '정양원'(Zheng, Yangwen) 교수에 따르면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도시화, 소비주의, 상업주의의 발달 및 주로 부유층과 젊은층 사이에서 하나의 세련되며 교양있는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진 아편의 서민층 확산 등의 사회적 변화를 원인으로 뽑고 있다.[18] 반대로 영국은 청교도적 윤리관이 중산층 이상에 팽배했던 사회상으로 인해 아편중독자를 자기 관리 및 절제도 못하는 인생의 실패자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자연스럽게 아편중독자의 비중이 하류층에 몰려 있었다. 중국의 '천쑹취안'(Chen, Song-Chuan) 교수에 따르면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 난징조약, 의화단 사건, 청일전쟁, 국공내전 등을 거치면서 발생한 중국 내 대혼란과 불안도 중국인들을 더욱 아편에 의존하게 만들었으며, 실제로 1830년대 아편 무역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상인, 갱단, 부패한 관리들은 동남아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아편을 밀수했고, 쓰촨성과 원난성 같은 내륙지방에선 아편이 현금 대체품으로 사용됐으며, 중앙정부의 노력에 불구하고 지방에선 아편이 농민들의 수입원이자 지방정부의 주요 세수원으로서 이용되는 일이 빈번했던 점을 지적한다.[19]
이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내 아편의 자체생산-소비는 영국의 아편 무역 규모를 압도하는데,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편무역은 수익성 상실로 결국 무역이 종식되는 결과를 낳았고 # 20세기에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내 '지방군벌, 국민당, 공산당 정권'에 의해 주 수입원으로 활용되거나, 중국 밖에서는 패전한 국민당 잔당에 의해 현재까지도 악명높은 동남아의 골든트라이앵글을 형성해 가며 그 규모를 더욱 키워나갔다. 이러한 중국 내 아편 문제는 1950년대 마오 아래 완전히 뿌리 뽑혀 현재까지도 마약에 대해서는 응보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20]
- 북아일랜드 분쟁(1960~1998), 피의 일요일 사건 - 영국의 억압과 차별 정치에 의해 촉발된 갈등. 이후 50년 만에 영국 총리가 공식 사과를 하며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건에 대해 영국군의 시민 살해를 인정했다. #
- 아일랜드 대기근(1845~1852) - 다만 오늘날 영국에서 과거사 문제를 인식하고[21] 과거 피식민국이었던 아일랜드의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에 21세기 들어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민 감정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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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 수감(1899~1902) - 영국의 식민지 점령정책에 저항하며 게릴라전을 통해 영국군을 괴롭히는 보어군을 차단하기 위해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를 운영하였다.[22] 당시 보어인은 인구 50만 명, 병력 7만명이였는데 이를 섬멸하기 위해 영국은 45만 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21만 명의 민간인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러나 전염병과 영국의 수용소 관리 능력 부족 등의 이유로 보어인 병사 27,000명과 민간인 28,000명이 사망했다.
다만, 영국이 보어인들의 떼죽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보어 전쟁 당시 랭먼 야전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펼친 아서 코난 도일의 기록에 의하면 영국군 병사자는 14,000명이 넘어 갔는데, 해당 수치는 영국군 전사자인 8천 명을 훨씬 상회한다. 이는 영국 또한 전염병에 대항할 뾰족한 수가 없던 상황이었던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23] 보어 전쟁의 수용소의 열악한 상황은 영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이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수렴해 영국 정부는 1901년 포셋 위원회를 조직하여 캠프 내 보어인의 사망률을 1902년 기준 2%까지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그 전까지의 보어인의 피해가 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199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00년 전 보어전쟁 때의 일에 대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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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강탈 사건(1914)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 제국이 대영제국에 주문했었던 전함 2척을 강제로 압류한 사건이다. 전쟁 때문에 군함 한 척이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멀쩡히 대금까지 다 양도하고 승무원도 다 승조한 전함을 강탈했다. 처칠은 오스만 측에 군함 대여비로 하루당 1천 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제시했는데, 해당 군함의 대금이 275만 파운드였음을 감안하면 2750일(7.5년)을 대여해 원금을 충당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상황상의 전력 공백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24][25] 당연히 이런 푸대접을 받은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반영 여론이 들끓었지만, 오스만의 대외적인 공식입장은 영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고 끝까지 중립을 고수했다.
오스만이 애진코트 강탈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독일은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 애진코트 사건을 빌미 삼아 오스만에 함선 2척[26]을 무상으로 양도했고 이들은 러시아 세바스토폴,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등의 항구를 선전포고 없이 무단 공격하며 오스만은 강제적으로 동맹국 편에 서게 되었다.
- 1876~1878년 인도 대기근 - 사망자 수가 560만에서 960만에 달하는 대기근.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상당수 지역에서 흉작이 이어졌는데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현지 지역 유지들은 오히려 식량이 부족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고의로 식량을 수출시켰다. 물론 기근은 한 차례로만 끝나지 않고 여러차례 진행되었다. 이상기후로 인한 가뭄으로 인도 외에 중국(간쑤성과 산시성), 남미(브라질 북부) 및 동아프리카(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에서도 1,900만에서 5,0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당시 영국령 인도정부는 재정난으로 이전 기근때 보다 적은 금액이 투입되면서 피해를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천만 루피가 투입되었고,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던 토후국인 마이소르, 하이데라바드에도 720만 루피의 지원이 이뤄졌다. 그 외 영국본토와 해외령에서도 840만 루피의 기금이 이어졌다.
-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1919) - 1919년 4월 13일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 중심가 잘리안왈라 바그 광장에서는 반영(反英)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영장 없는 체포 등을 허용한 롤럿법에 의해 체포된 민족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령 인도군은 이에 앞서 집회 금지령을 내렸지만, 시민 대다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추가로 이날은 시크교도들의 바이사키(Baisakhi)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에 광장에는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도 다수 모여 있었다. 사실 이 직전엔 당시 600명의 인도 어린이들을 돌보던 '마셀라 셔우드'라는 영국 여성 선교사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인도 시위대에 둘려싸여 집단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영국인들 분개하게 만들었고 그런 상황에서 인도의 시위대가 접근 금지선을 넘어 몰려들자 당시 흥분한 다이어 대령은 영국정부의 발포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격을 명령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379명이 숨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처칠은 이 사건을 영국 역사에 괴물같은 사건이며 비난했고, 인도 평의회의 일리엄 빈세트 경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또 당시 피살자 유족들은 옥신각신 끝에 1인당 37파운드 10실링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 페르시아 침공 - 중립국인 팔레비 왕조를 기습공격하고 점령한 후 식민통치를 했다. 자국의 행위 때문에 반영 정서가 뿌리깊음에도 협조 요청도 하지 않고 소련과 함께 기습해 해군 함정들을 전멸시키고 해군 사령관까지 사망하게 하고 왕도 쫓아냈다.
- 만현사건/만현학살 - 영국 상선이 과속 운전을 해서 중국 군벌인 양썬의 군대 소속, 수송용 목선 3척을 들이박아 군인 56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자, 양썬은 분노하여 곧바로 군ㆍ민 합동 감찰단을 파견하여 해당 선박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걸 배를 접수하는 걸로 오인한 상선단에서 곧장 사격을 개시,끝내 9월 5일, 양측의 교전이 발생하여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중국측 21명, 영국측 20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 함대는 애꿎은 만현에 함포 사격을 퍼부어 민간인 거주지를 초토화시켰고, 300여발의 소이탄이 포함된 사격 끝에 민간인 604명이 사망하고 1000여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덕분에 거의 모든 중국내 조계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조계지가 피해를 본 각국 열강들이 영국을 압박하여 영국 상선 비무장이 되는 걸로 끝났다.
- 이란 제국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 축출(1953) - 석유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미국을 끌여들여 정보기관의 공작질로 이란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선동하여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자본의 아라비안 아메리칸석유[27]가 1950년 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압박에 굴복해 수익을 사우디와 50대 50으로 반분키로 합의함에 따라 이란에서도 영국계의 앵글로-이란 석유 역시 같은 압박을 받았으나 영국은 거부하였고 이에 모사데크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뿔난 영국은 미국 정보기관인 CIA와 함께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친미정권인 팔레비 정권을 내새워 석유이권을 나누어 먹었다.[28]
- 노예무역 -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처음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들여 유럽 대륙으로 수송한 후 영국 역시 대서양 노예무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수송선의 국적별로 규모로 보자면 포르투갈 480만 명, 영국 230만 명, 스페인 130만 명, 프랑스 110만 명, 네덜란드 44만 명, 미국 40만 명으로 추정된다. # 영국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는 시 위원회 조사 결과 역대 시장 79명 중 무려 40명 이상이 대서양 노예무역과 관련된 인물이었으며, 글래스고 주요 건물 중 11개 이상이 노예상과 관련된 것이였다. 또 도시 곳곳에 노예상 8명의 기념비, 추모비가 있었고, 시내 대로 62개 중 대부분이 노예상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증기기관차를 발전시킨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도 흑인 어린이를 사고파는 데 관여했었다. # 게다가 영국의 최고 영웅이라는 넬슨 제독 역시 노예제를 옹호하고 다녔다.[29] 다만, 당시 이러한 노동력 착취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시대상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30]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노예무역의 폐지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주도한 나라도 영국이였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식민지인과 자국민 저소득층을 차출해 부려먹으면서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하였다.
- 포턴 다운 - 인도 식민지 시절 수백명의 영국군 산하 인도인을 상대로 겨자 가스 독성 평가를 위한 인체실험을 실행했다. # 이 사건은 Rawalpindi experiments로 불리기도 한다.
- 에티오피아 알레마예후 왕자의 유해 일방적인 반환 거부 - 영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영국에서 죽은 에티오피아 왕자의 유해를 왕자의 후손이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영국에서는 유해 발굴 시 다른 묘지들도 손상된다고 주장하며 거절했다. #
- 이라크 전쟁 - 미국과 함께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명분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들에게도 토니 블레어가 미국에 의존하게 만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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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티베트 침공 - 영국령 시킴 왕국과 티베트 사이의 국경 문제와 러시아에 대한 완충국 설정문제로 티베트를 침공한 사건. 당시 영국은 청나라
강희제의 티베트 정복이후 중국인으로 구성된 내정간섭 기관인 암반(Amban)이 존재하자 청나라와 협상 하였지만 티베트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탐험대 원정을 통해 다시 티베트와 독자적인 협상을 추진하였지만 몇 달간의 기다림에도 끝내 협상은 거부당했다. 러시아의 티베트 개입에 대한 영국의 의혹은 특히
달라이 라마 13세와 그의 영적 스승인 러시아계 궁정인 '도르지예프'(Agvan Dorzhiev)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커져 갔는데, 실제로 14대 달라이 라마는 의하면 13대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와 관계를 수립하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영국을 배격했는데 그 중심엔 도르지예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31][32]
달라이 라마는 1900년 러시아에게 티베트의 공식적인 보호를 요청하고 1년 뒤엔 차르의 궁전에도 방문해 환대를 받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커즌 경[33]은 달라이 라마에 편지 세 통을 보냈지만 그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반송됐다. 이에 커즌 경은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티베트에 사절단을 빙자한 침략군 파견을 압박했다.[34] 결국 원정 과정에서 양측간 충돌이 있었고 구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티베트군은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에 학살당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시대에 이르러 부상한 반전 여론과 맞물려 영국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거의 없었고, 제공된 소총 역시 30정이 전부인 수준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 결과로 체결된 1904 라싸 협정으로 중국으로부터 배상금과 함께 시킴 왕국과 티벳의 국경이 설정되었으며, 1906년에는 청나라 영토로서 재확정된다.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대한 학살 - 뉴캐슬 대학의 역사가 린달 라이언이 이끄는 호주 연구 위원회에 따르자면 영국 식민지 정착민이 호주에 정착한 1788년부터 독립 이후 1930년까지 유럽 정착민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충돌로 의해 약 304건의 크고 작은 원주민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22년 최신 기록에 따르면 토레스 해협에서 학살된 원주민 수는 412명으로 증가했다. #
- 프레스 갱 - 1797년부터 1815년까지 무려 22년간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절반에 가까운 영국 해군 수병 숫자의 급감과 미국으로의 탈영병 급증으로 외국인인 미국인들까지 강제징집해서 미영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35] 당시 프레스 갱은 영국의 사례가 유명하긴 하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있었던 서양문화권 해군의 부조리로서 미 해군도 미국 독립전쟁 당시 강제징집을 이용했다. 국가 행정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전쟁에서 강제징집을 했지만[36] 그 중에서도 영국은 도를 넘어서 외국 선박을 나포하여 외국인을 징집하는 추태까지 저질렀다. 결국 이러한 관행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 식민지 출신 유색인종 영국군 전사자들에 대한 인종 차별 # - 아프리카 및 중동ㆍ아시아 출신 전사자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받은 인종 차별. 영국 언론 가디언은 "전사한 모든 군인은 무덤 위에 비석을 설치하거나 실종자 추모비에 이름을 남겨야 하지만 백인과 달리 유색인종 전사자들은 공식적으로 기념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최소 11만 6,000만명, 많게는 35만 명이 이런 차별대우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유럽 전선 전사자에겐 개별 묘지 혜택이 주어진 반면 유색인종 전사자들은 기념관 서류에 등재되는 게 고작이었다. CGWC의 전신인 제국전쟁묘지위원회(IWGC)는 식민지 출신 전사자들을 매장할 묘역을 조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 국방장관 벤 월러스(정치인)은 공식 사죄와 함께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름 부족을 설명하는 명판을 기념비에 추가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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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 일명 서구의 배신(Western Betrayal)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에 의해 체코의 군사 동맹국으로서 체코가 독일에게 공격받을 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지만, 영국은 그런 의무가 없었는데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을 통해 체코 주데텐랜드를 일방적으로 독일에 넘겼다.[37]
다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생겨난 지 불과 20년밖에 안되는 신생국가로서 주데텐란트는 350만 주민 절대다수가 독일계에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원래 독일에 가까웠다는 점, 오히려 주민들 의사대로 독립을 허용하는 게 베르사유 조약 체계 이후 정립된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했다는 점[38], 당시 주데텐랜드는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 주데텐 독일인당' (SdP)까지 창설되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으며 합병에 찬성했다는 점, 독일과 합병을 위해 실제 주데텐 주민들의 무장봉기까지 일어나 이때 히틀러는 이미 체코의 침공을 지시했다는 점, 당시 연합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규모 군축 등을 통해 전쟁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 점, 당시엔 미국마저 외교적 고립노선을 고수하며 참전여부가 불분명했다는 점, 당시는 대공황 시기로서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젊은 한 세대가 아예 갈려나가 국내 반전여론이 절대다수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뮌헨협정은 체코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대표적인 외교실수로 기억된다. 다만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패전 당시 자신의 최대 패착을 바로 뮌헨 협정을 체결한 것이라고 고백한 바가 있다.
윈스턴 처칠, 1938년
- 제2차 중동전쟁 - 영국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일으킨 침략 전쟁. 수에즈 운하 건설 자체가 당시 제국주의 패권 국가인 영국·프랑스가 식민지와의 거리를 줄이고 경제적·국제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의 하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불만을 해결한답시고 이들이 폭력적인 전쟁을 택한 것은 이들의 명백한 잘못이였다. 결국 이들은 예상치 못한 국제사회 비난에 시달렸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 UN에서는 프랑스, 이스라엘, 영국의 철수를 결의했으며 #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향력 행사 우려와 당시 고조 중이던 소련과의 핵전쟁 위험, 그리고 이를 빌미로 중동을 비롯한 제3세계의 급격한 공산화 노선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총리 관저에 전화를 걸어 비난했으며, 그럼에도 영국이 고집을 피우며 전쟁을 포기하지 않자 결국 영국의 동맹국이였던 미국조차 영국을 제재하였다. 미국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영국을 비난하며 미국이 보유하던 영국의 파운드화를 매각하여 영국의 화폐와 경제를 궁지로 몰았으며 미국산 원유의 영국 판매도 중단하는 제재를 취한다. # 결국 전쟁은 이집트의 승리로 끝났으며,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즉시 철수하고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성공한다. 결국 영국 제국주의를 무너뜨린 것은 미국이었으며 이번 전쟁으로 지정학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내세우며 패권을 추구하면서 약소국의 주권을 누르는 제국주의 시대는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
- 마우마우족 봉기에 대한 무력진압(1952) - 영국은 케냐 식민 통치 시절인 1952년에 마우마우족 봉기를 무력 진압한 것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가 약 60년이 지나 영국의 한슬로프 문서 보관소에서 수천 건의 케냐 전쟁 문서가 발견되어 당시 생존해 있던 마우마우족 피해자들이 소송을 걸었고, 최종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난 뒤에서야 정부에서 인정했다. 이 사건은 영국 정부가 식민지와 관련해 사과하고 배상한 유일한 사건으로 # 피해자 5,228 명에게 1,990만 파운드(약 340억 원)를 배상했다. #
4.2.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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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점령 사건 -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영토를 무단 점거한 것 자체는 엄연한 침략이지만 오히려 당시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 해군은 거문도 현주민들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영국은 비록 무단으로 점령했어도 애초에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조선인과 무력충돌을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영국군도 일반적인 조선 지방관[39]들과 다르게 노동에도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고, 의료봉사나 식량 배급도 베풀었으며, 그 외에는 대민마찰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병사와 주민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런 인연 때문에 거문도 주민들은 거문도에 거주하다가 병사 혹은 자연사한 영국군의 묘지를 지난 120년 동안 자발적으로 우수한 상태로 관리 해주었는데, 후일 주한 영국대사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거문도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 고로 정부 차원에서는 분명 잘못된 침략 행위였지만 실제적인 통치는 평화로웠으며 오히려 영국군의 철수 이후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의 군정 통치를 그리워한 몆 안되는 사례이다. 영국 측도 영국군의 참전에 대해 감사하는 나라는 한국뿐[40]이라는 이야기를 남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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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전쟁, 그리스 독립 전쟁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복 및 침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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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제 병합에 대한 승인 및 방조 - 영국은 1923년까지 약 10년간 존속한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는 두
제국주의 국가가 영합하여 약소국의 주권을 멋대로 침탈한 것이므로, 한국과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한 행위이다.[41] 다만 당대 영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그레이트 게임 형국에서 영국 패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였다. 러시아-프랑스 동맹의 강화와 독일 제국의 팽창이라는 당대 동아시아 안보 질서 속에, 조선이 자신들의 적성국인
러시아에
아관파천으로 영합하는 것은 영국 제국의 극동 안보에 간접적으로 위협적인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42]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대응만으로도 벅찼던 영국은, 일본과의 공조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약소국의 운명을 팔아먹었다는 역사적, 인도적 측면의 비판과는 별개로,
정치현실주의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영국의 행동은 납득 가능한 결과이기도 하다.
40여년 후 일본이 적국이 되었을 때는 미국, 중국과 더불어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결의함으로써 종전 후
광복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하게 된다.[43]
물론 당시 이러한 강대국간 이권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부에 국한된 설명 외에도 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에서 보듯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조선의 내부상황 역시 어느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 왕가의 엄청난 사치와 부패 등으로 국고는 고갈 되어갔으며 # 때문에 병사들의 군료에 모래를 섞어 지급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임오군란이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동학 농민 혁명의 경우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하는 등 순전히 내치(內治)에 해당하는 문제까지도 외세에 상당부분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본질적인 책임은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에 있는 것은 자명하다.
해방 이후에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조선이 연합국이 아닌 제4분류[44]인 특수지위국[45]으로 분류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조선 독립운동의 내부상황,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결정적으로 조약 당시는 6.25 전쟁 와중) 냉전 상황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 수에즈 운하 - 이집트의 독재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하고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까지도 금지하였다. 문제는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의 막대한 자본, 기술을 투자하여 당시 이집트의 군주였던 사이드 파샤와 합의하에 진행한 사업으로서 이집트 정부와 5:5 지분으로 99년의 운영권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나세르는 프랑스-알제리 전쟁에서 반프랑스 게릴라 세력 지원과 이스라엘에 대해선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지원했다. 이에 이미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침공을 받은 전력이 있는 이스라엘은 이를 우려하였고 이스라엘 군대의 침공을 필두로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부대가 합세하였다. 수에즈 전쟁은 전쟁이며 프랑스, 이스라엘과 짜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 어떠한 논리를 들고 와도 영국의 변명 불가능한 과오이지만 전쟁을 제외한 수에즈 운하 자체에 대한 갈등은 영국으로서도 어느 정도 할 말이 있었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중동 아랍권 지역을 영국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눠먹자는 골자의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지역들을 보호령, 위임통치령이라는 명분 하에 사실상 식민지화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국 군인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통수친것은 덤이다. 이것으로 현지 종교, 민족, 역사를 고려하지 않아 현재 중동의 분쟁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사이크스 조약은 그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단지 레반트의 남북을 A, B지역으로 나눠 영국과 프랑스가 일정기간 통치하기로한 밀약에 불과했고, 현재 중동의 세부적인 국경은 오스만 제국때의 행정구역과 현지 지도자의 협상과 전쟁 등을 통해 결정됐다. 매우 복잡한 현재 중동의 분쟁과 정세를 모두 100년 전 사이크스 피크로 귀인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으로서, 고대때 부터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중동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후반부터 '유럽의 환자'라 불리며 각종 외세의 외침과 내부반란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 오스만의 정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당대 중동은 부족주의가 더 강했으며 민족 개념이 뿌리박은 것은 이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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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마흔 선언 -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승리를 위해 유대-아랍측과 이중계약을 했다고 알려진 서한이다. 이에 대해선 매우 복잡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맥마흔이 교환한 서신 원문
#을 보면 레반트의 특정 서부지역은 옛부터 여러 종교와 민족이 함께 살던 지역이므로 순수한 아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랍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46] 맥마흔은 이 지역을 유대인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는데, 이후 해석의 모호성으로 인해 이 지역이 팔레스타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문제가 되었다.
20세기 초만 해도 과거 팔레스타인은 현재의 요르단을 포함한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땅이었는데 # 1차대전 이후 레반트 관할은 UN의 전신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이관이 되었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에 대한 아랍의 자결권이 인정받았듯이 ①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내 '아랍, 비아랍계' 인구비를 고려해 70%에 해당하는 동쪽 팔레스타인(현재의 요르단)은 아랍측의 영토로 ②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서쪽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합법적인 국제법상 권리가 국제연맹 51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인정받고 있던 실정이었다. #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후 아랍측은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서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유권 마저 주장하며 충돌이 일어났는데, 당시 위임령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관리자의 지위에 있던 영국은 이를 중재하기 위해 1937년 아랍측에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으나 아랍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충돌이 심해지자 2차대전 이후 상황이 어려웠던 영국은 결국 이 문제를 다시 UN에 회부하였고, 1947년 UN 중재안이 나왔으나 아랍측은 이를 또다시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바로 주변 아랍국들은 연합을 맺고 이스라엘에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중동전쟁이다.
맥마흔-후세인 서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1915년 10월 24일에 양측간 합의한 다음 문장이다.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ama, Homs and Aleppo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should be excluded from the proposed limits and boundaries. (다마스커스, 하마, 홈스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는 순수한 아랍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요구한 경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부는 1915년의 시점의 오스만의 지도만을 보고 추측을 통해 당시 레반트 지역의 빌라예트 (vilayet)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데이르에조르' 4개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홈스와 하마'는 그보다 하위의 행정구역인 산자크(sanjak) 밖에 없었으므로, Districts는 모두 산작크에 해당하며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제외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1915년 10월 24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맥마흔과 후세인의 교신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1차자료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1915년 11월 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구상하는 아랍 왕국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를 보낸 서신 원문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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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 we renounce our insistence on the inclusion
(메시나와 아다나 빌라예트에 대해: 우리는 이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합니다)
1. Two Vilayets of Aleppo and Beirut and their seacoasts: refusing the exclusion since they are purely Arab Vilayets,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 Moslem and a Christian Arab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에 대해: 이곳은 순수한 아랍의 빌라예트이며, 무슬림과 기독교계 아랍인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배제를 거부합니다.)
― 1915년 11월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 보낸 편지
더더욱 확실한 증거는 아랍의 국경을 논의하기 위해 하심가의 아들이 아랍 대표로서 참가한 20세 초 파리평화회담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국제연맹의 회의록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도 하심가는 팔레스타인에 관해 “팔레스타인이 가진 만국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고려할 때, 이지역은 특별히 제외하고 아랍의 영토를 요구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50] 결국 파리 평화회담 및 후세인의 11월 15일자 편지기록 이라는 객관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1차 자료가 존재함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제하고 20세기 오스만 지도만을 보고 개인의 단순한 추측을 통해 해당지역을 산자크 (sanjak)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다. 근래 이스라엘과 주변국의 관계는 수니파의 수장국인 사우디가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 , '이집트, 요르단, UAE, 바레인' 등과도 평화협정 체결 및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관계는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된 편이지만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 비르 타윌 - 영국이 그은 경계선으로 인해 갈등이 초래됐다. (출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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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악
전쟁과
세균전 시도 - 프랑스와의
7년전쟁을 통한 재정고갈로 당시 영군군 장군
제프리 애머스트는 그동안 인디언에게 제공하던 선물제공과 사냥을 위해 필요한 탄약과 화약의 판매량을 줄였다. 이를 계기로 평소 애머스트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던 인디언들은 1763년 5월 다수의 영국인 정착지와 요새를 공격해 정착민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피트 (Pitt) 요새 역시 500명의 피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몰려들었고 인디언들에게 포위되어 점점 고립되어 갔는데, 이런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수비대는 인디언 협상 대표에게 600개의 식량과 함께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 2개를 제공했다.[51] 그러나 이 작전이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인데, 천연두는 이미 현지에서 10년주기로 이전부터 유행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반대로 인디언들에 의해서 수비대가 천연두에 감염됐다는 기록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대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에 의한 전파는 과학적으로 효과가 거의 없음이 밝혀졌다. 다만 애머스트의 편지와 어록에 비추어 보면 당시 그가 인디언들을 적대하며 극도로 증오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해충들은 인간의 권리에 관한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나는 어떠한 야만족이라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인디언 부락 전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1763년 7월 9일 북미 인디언 관리부장 윌리엄 존슨 경에게)
"그들을 근절하는 것은 속죄의 대상이 아닙니다."(1763년 8월 7일 인디언 문제 담당부 대리인 조지 크로한에게)
결국 폰티악 전쟁으로 약 4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전사했고, 50명은 체포된 후 고문으로 죽었다. 이 밖에 2,000명의 민간인 정착민들이 여성, 어린이를 할 것 없이 인디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다. 인디언은 약 200여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윈스턴 처칠 치하의 벵골 대기근에 대한 비판 - 벵골 대기근에 대한 대처가 형편없었던 것은 영국의 실책이 맞긴 하지만 애초에 인도의 내정은 1935년 인도정부법에 의해 영국령 캐나다, 호주와 같이 인도 현지 자치정부에게 이미 이양된 상태였으며, 2차 대전으로 인해 당시 영국 역시 보급제 시행에 미국에게 식량을 의존받던 상태란 걸 감안해야 한다. 또한 영국이 1941년 말레이 해전에서 패배하며 1944년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인도양 지역에서 제해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1942~1943년에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지원하기도 어려웠다. 기근을 처칠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음모론이다.[53] 국내외 웹에서 떠도는 벵골 대기근 당시 "처칠이 간디는 왜 안 죽었냐"라고 한 건 많이 와전된 말이다.[54]
- 윈스턴 처칠 치하의 쿠르드족 학살 연루 관련 비판 - 물론 쿠르드족은 무장봉기를 일으켰을 때 인명 살상을 줄이기 위해 최루가스를 쓰는 것이 어떻느냐고 제안한 것이 독가스를 쓰자고 주장했다며 루머로 와전된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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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 엘 케비르 해군기지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독일이 세운 꼭두각시 괴뢰정권인
비시 프랑스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세계 4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한
영국 해군은 북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의 메르 엘 케비르 해군기지에 찾아가 프랑스 함대를 영국의 구금하에 두거나 독일의 손이 닿지 않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 해군의 총사령관이자 향후 비시 프랑스 정권의 부통령까지 올랐다 암살당한
프랑수아 다를랑은 이를 계속 거부했는데, 결국 영국 전함의 공격으로 프랑스 해군
군함 4척이 격침당하고 프랑스군 1,500명이 전사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입장에선 분노할 수 있으나, 당시 프랑스 해군은 여전히 비시 프랑스의 명령 하에 있었다. 특히 실제 리슐리외급 2번함 장 바르는 비시 프랑스 편에 서서 횃불 작전때 미 해군과 포격전도 벌였다는 점, 당시 독일은 프랑스의 막강한 육군, 공군 전력을 노획하며 프랑스의 항구까지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프랑스 해군은 연합국에 붙을지 아님 비시 프랑스에 붙어 한자리를 할까하는 계산만 하고 앉았으니, 당시 영국으로서는 최악의 변수부터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일설 #에는 영국 해군이 오기전에 미리 미국으로 도주하기 위해 항해중이던 리슐리외급 전함도 격침시키기 위해 영국 함대가 추격을 실시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애시당초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 1942년 연합국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미 해군이 현대화를 위해 노획한 리슐리외급 전함을 미국으로 가져가 개장해 쓴 게 전부일 뿐이다. # 이는 한때 정설처럼 퍼진 처칠의 벵골 대기근 루머처럼 지엽적인 세계사에 대해 아무런 교차검증 없이 온갖 허위 정보가 난무하는 한국 커뮤니티에 역사를 의존했을 때 나타나는 오류로서, 애초에 한국 커뮤니티에서만 퍼진 신뢰성이 없는 주장일 뿐이다.
- 카렌족 - '앵글로- 버마 전쟁'에서 버마족에 적대적이었던 카렌족은 영국군을 도와 승리에 기여했는데, 영국은 버마 통치 기간 동안 카렌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카렌족의 기독교 개종 활동은 1813년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족이 점령한 지역에서 카렌족은 미국 침례교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고문과 살해를 당하는 등의 차별 대우가 심각했는데, 이 때문에 복수심을 가진 카렌족들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1886년 버마를 완전히 장악하도록 도왔다. 카렌족의 약 20%는 기독교인이고 75%는 불교도인데, 영국은 이 중에서도 특히 자신들 입맛을 잘 맞춰 주는 기독교계 카렌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나 미얀마의 독립 이후로도 미얀마군과 대립하던 같은 카렌족 중에서도 불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를 견제하거나, 혹은 불교도가 미얀마 정부를 지지하여 기독교를 믿는 동족들을 공격하는 등의 혼란한 상황도 일어났다. 다만 카렌족이라는 분류는 19세기 영국과 미국인에 의해서 붙여진 개념으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부류의 그룹이 아니었고 따라서 카렌의 다른 그룹들은 버마족이나 영국의 식민지 이전에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않았다.[55] 독립 직후만 해도 정부와 군에는 상당수의 카렌족 출신이 있었는데, 네 윈이 쿠데타로 버마족의 군 수뇌부로 등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카렌족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는 1949년 카렌민족연합(KNU: Karen National Union)의 주도 아래 일으킨 무장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 로힝야 -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면서 벵골인들을 데려와 친영파 중간계층으로 써먹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로힝야족은 일본이 아닌 아라칸족 학살을 저질렀고, 아라칸족 역시 일본군의 힘을 빌려 보복으로 학살을 저지르면서 감정의 골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들은 미얀마 독립 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집단이 되어 끝없는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먼저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여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하여 시비를 건 쪽은 영국이 아닌 다름아닌 버마족이었고 수십년 간의 전쟁을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를 괴롭힌 장본인도 버마족이었다. 당시 버마 왕국은 팽창주의로서 영토를 확장하며 주변국을 침공하고 다녔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미얀마의 인도계, 중국계 인구 탄압 정책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의 중국인과 베트남인 학살과 대동소이한 정책으로 옹호할 여지가 없는 짓이다. 독립 후 로힝야족을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겠다는 조약을 군부가 쿠데타로 들어선 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감안해야 한다. 군부세력은 수십년간 독재를 하며 미얀마 경제를 타락으로 빠뜨렸는데 이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버마족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로힝야족이나 타 민족을 탄압하는 성격이 있다. 미얀마 내전에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같은 버마족 시위대마저도 잔인하게 탄압했다.
- 카슈미르 분쟁 - 포스트모더니즘 사관에서 카슈미르 분쟁의 원인을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찾기는 하는데, 굳이 영국이 개입을 안 했더라도 카슈미르가 힌두교도의 성지인 이유로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인도가 독립한 시점에서 기존 토후국들은 인도 연방에 속할지 떠날지 결정해야 했는데 전통적으로 카슈미르의 인구 중 1/3은 힌두교도이고 2/3는 무슬림이었는데 전체 인구 1/3에 해당하는 힌두교도들의 입지가 훨씬 강했다. 이 때문에 힌두교도인 카슈미르의 번왕은 아예 카슈미르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에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로 민병대를 파견하고 번왕이 인도에 지원을 요청하며 분쟁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카슈미르인 문서로.
- 듀랜드 라인 -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 결정된 사건. 당시 아프간은 두라니 왕조때 부터 내부 확장정책과 외침으로 시시각각 국경이 변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군주이던 "압둘 라흐만 칸"과 명확하지 않는 영국령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의 사이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2년동안 국경 근처에서 합동조사단을 꾸려 협상을 통해 1,287㎞ 길이의 국경을 설정했다. 이로 인해 당시 넓게 분포했던 파슈툰족이 두 쪽으로 갈라져 다수가 영국령 인도로 귀속되었다. 후일 이 지역이 파키스탄이 되었는데 '북서 국경 주'(North-West Frontier Province - 현재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위주로 파슈툰 분리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로인해 아프간은 스와트, 치트랄 등의 영토를 잃었으나 반대로 역사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는 누리스탄, 와칸, 이스마르 영토를 얻었다. 1970~1980년대엔 아프가니스탄에 친소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우디와 함께 탈레반을 양성했고 아프간 탈레반 유입의 주요통로가 되었다.
- 베를린 회담 - 아프리카의 문화적, 자연적 국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 편한 기준대로 직선 쭉쭉 긋는 식의 국경 지정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족 간 내전과 분쟁 등 정정불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것도 영국이 적극 가담한 것은 맞긴 한데, 책임 소재를 자세히 따져 보면 영국만 잘못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회담을 주도한 주범은 회담의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당시 독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프랑스, 벨기에 등의 열강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 빅토리아 호 - 외래종인 나일농어를 빅토리아 호에 풀어놓아 호수 토종어류 감소를 조장하였다. 다만 영국이 처음 나일농어를 풀었다는 통설과는 다르게 누가 처음 나일농어를 풀었는지는 불분명한데 1950년대에 우간다를 통해 처음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나일농어가 호수에서 잡히며 존재했기 때문에 이후 별다른 반대없이 1960년대 식민당국을 통해 추가도입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빅토리아 호수는 급증하는 현지인구와 무분별한 어장 포획으로 인해 이미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나일농어 뿐만 아니라 남획과 개간을 위한 농수 확보로 인한 호수 면적 저하, 환경오염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였다. 또한 나일농어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이었으나 반대로 수백만명의 직간접적인 일자리와 빅토리아 호수 주변 3개국의 수출경제에 효자노릇을 하였다.
- 토끼전쟁 - 1859년 영국에서 영국령 호주로 이주한 토마스 오스틴(Thomas Austin, 1815~1871)이라는 사업가이자 농업인인 그가 사냥용으로 푼 토끼 24마리가 원래 정착해 있던 토끼들과 결합해 경이로운 번식률로 생태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오스틴은 사냥용으로 쓰기 위해 발빠른 야생 토끼들을 주문했는데 조카가 충분한 숫자를 조달 못해 번식이 굉장히 빠르고 튼튼한 집토끼를 섞어서 보냈다. 토끼는 일반 대륙과 달리 천적이 적은 호주에서 어마어마하게 번식하였고[56],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시켜버리는 바람에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토착종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호주 정부는 소탕전, 세균전 등 별의 별 조치를 다 취했지만 그때만 반짝 줄어들고 곧이어 무서울 정도의 번식력으로 개채수를 회복했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식량난 해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57]
- 산업혁명 - 초기 산업혁명 과정에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국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최악의 근로 환경에 노출되었고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결국 국민들은 해외 식민지로 도피하거나 남은 이들은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사실 시간이 달랐을 뿐 산업화에 성공한 전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이는 초기 자본주의 병폐로서 아담 스미스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을 최소화 하던 것이 미덕인 것이 당시 세계의 시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는 말할것도 없고 가장 잘 살던 서유럽에서도 네덜란드와 함께 가장 높은 소득을 자랑했는데, 각종 사회 개혁을 통해 꾸준히 사회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 아이슬란드와의 대구 전쟁 - 영국은 과거부터 아이슬란드 근처 바다에서 대구 조업을 했는데 1944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가 기존 1901년 '앵글로-덴마크 영해 협정'에서 인정한 상호간 3해리 영해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며 외국어선을 배제하자 영국은 군함을 파견시켜 자국어선 호위를 하였고 조업을 이어갔다.[58] 이에 아이슬란드가 항의차원에서 군함과 실탄위협 사격을 통해 대응 및 영국과 단교하거나 나토에서 탈퇴한다고 경고했고 심지어 소련에서 군함 사와서 한판 시원하게 붙어보자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영국 역시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여 물러섰고 아이슬란드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2차 대구전쟁은 아이슬란드가 1차 대구전쟁 이후 영국과 맺은 12해리와 국제사법소에 의한 분쟁해결 해결합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50해리를 주장한 것과 당시엔 영해나 베타적 경제수역에 기준이 현재보다 훨씬 협소하고 모호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59]
- 중화민국의 유엔 상임이사국 자격 박탈과 유엔 탈퇴(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 - 영국 혼자서 벌인 일은 아니지만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인도 등 전세계 76개 국가들과 함께 안건 가결에 표를 던져 자유주의 진영인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박탈에 찬성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맹이었던 중화민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60] 그 결과 상임이사국 자리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바뀌면서 21세기에 들어서도 중국, 러시아가 각종 안보이사회를 부결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중화민국 입장에서도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이 파기되고 외교적으로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당시 중소관계가 경색되어 중국이 독자 노선을 타면서 미중관계가 급호전된 분위기였으며, 장제스 체제의 중화민국의 부패와 독재 등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 케냐 식민지 독립 탄압 - 1950년대 영국령이었던 케냐의 독립 투쟁 단체 마우마우에서 1963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무장독립투쟁을 펼치면서 각종 고문, 무장 진압 등 영국의 탄압을 받았다. 이때 영국이 저지른 만행들은 수십년간 외교부가 비밀리에 보관해 오던 과거 마우마우 가담자 탄압 기록물의 영국 법원의 명령에 공개되면서 이뤄졌는데 비밀문건에 따르면 식민 통치에서 마우마우 조직원을 대상으로 한 영국 정부의 폭행, 구금, 학살 등의 범죄행위를 당시 영국 총리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마우마우라는 급진적인 무장단체는 정작 케냐 국민으로 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유럽인 농장주 학살이나 충성서약을 거부하는 현지인들을 여성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61] 때문에 마우마우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현지인으로 구성된 경비대가 조직되었고 이후 영국군에 편입되어 마우마우 군인들을 색출하고 심문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 과정에서 가학행위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대해 2013년 영국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배상판결이 이루어졌다. # #
- 안다만 제도 원주민과의 충돌.
- 말라야 비상사태 - 영국군 해병대가 말라야 공산당 게릴라의 목을 잘라 들고 사진 찍고 다니는 등 도를 넘는 진압이 있었다.
-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전쟁의 원인을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찾는 경우도 있는데 원래 비아프라 지역에서 살던 이그보족은 영국 식민지 시기에 영국이 친영파로 육성하여 나이지리아 국민 다수의 하우사족, 요루바족 같은 다수 민족들을 억압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영국 지배 이전 이웃 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침략과 노예 사냥을 당하던 피해자의 입장이었다. 비아프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요루바, 하우사족들이 부족주의 정치로 이그보족을 따돌리면서 정작 이그보족 거주지의 유전 개발 이익은 빼돌린 것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나이지리아 관계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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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 당시 인도인 학살과 처형 - 동인도 회사의 경비절감을 위한 세포이들의 퇴직 연금 지급을 중단·축소에 대한 반발과 앤필드 소총 탄약에 종교적으로 민감한 소와 돼지기름이 문혀 있다는 루머를 기점으로 발생한 사건. 이로 인해 영국군은 군법에 따라 반역을 일으킨 세포이들을 교수형·총살형 등으로 처형했는데 그 중 수십명을 대포를 이용하여 잔인하게 처형시켰다.
#[62]
다만, 대포를 통한 반역자 처벌방식은 영국이 인도에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고, 16세기 포르투갈 제국 식민지와 무굴 제국을 거치면서 수백년간 인도에서 집행되던 전통적인 처벌방식을 유지한 것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소와 돼지기름 루머도 단순 루머에 가까웠는데, 이에 따라 1857년 1월 27일 영국군 리처드 버치 (Richard Birch) 대령은 이러한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세포이가 원하대로 혼합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기름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카트리지 역시도 입이 아닌 손으로 찢일 수 있도록 장전 드릴을 수정했지만, 세포이들 사이에서 루머는 끊이지 않고 계속 재생산되어 확산되어 갔다.[63]
- 차고스 제도 원주민 강제 이주(1967~1973) - 1968년 미군기지 건설을 위한 미국의 요청으로 차고스 군도의 원주민을 강주이주 시켰다. 이에 1972년 영국정부는 모리셔스로 이주한 426명에게 보상금으로 65만 파운드를 제공했다. 이 돈은 원주민들에게 직접 지불하기로 합의되어 모리셔스 정부에 전달되었지만, 모리셔스 정부는 1978년까지 지급을 보류했다. 이에 영국은 섬 주민들의 소송에 대응하여 400만 파운드를 추가로 기부하였고 # 이 돈은 다시 모리셔스 정부에 인계되어 1982년과 1987년 사이 일련의 지출로 분배되었다.
4.3. 개그성 밈인 경우
-
영국 요리 - 이쪽은 자국민들도 인정하는 사례다. 자의 진 타의 반으로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으며 제1세계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요리로 악명이 높은 국가가 된 걸 풍자 및 희화화했다. 당연히 영국인들 모두가 요리치거나 전통적인 영국 요리의 문제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서 영국인 스스로 자학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대영제국 시절부터 전세계를 통치하는 수준에서 정작 현지인들의 식문화는 참조도 안 했다며 왜 아직도 맛없냐는 글이 많이 돌아다닌다. 심지어는
모 여왕님의
남편마저도 ‘
영국 여자는
요리를 못한다’[64]며 대차게 깠을 정도.[65]
물론 밈과 달리 세계적으로 매우 보편화된 영국 음식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샌드위치가 있으며, 탄산음료도 1767년 영국인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에 의해 처음 탄생하였다. # 우리가 보편적으로 아는 카레인 ' 커리 파우더'를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은 영국 회사 C&B (크로스 앤드 블랙웰)였으며, 감자칩 역시 1817년 영국인 요리사 윌리엄 키치너에 의해서 # 처음 탄생됐다. 또 서양에서 고기류와 함께 흔하게 즐겨먹는 우스터 소스, 그레이비 소스나, 세계적으로 즐겨먹는 체다 치즈 역시 영국 남서부 '체다' (Cheddar) 라는 마을에서 유래됐다. 전 세계 호텔 조식의 표준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나 피시 앤드 칩스, 로스트 디너, 비프 웰링턴, 패스티, 스콘, 파운드 케이크, 잉글리시 머핀, 클로티트 크림 등의 음식이 유명하며, 에일 맥주나 밀크티, 위스키 같은 음료 역시 영국에서 탄생했다. 특히나 영국의 고기 요리인 스테이크와 로스트 디너 같은 요리는 미식 자뻑이 심한 이웃 프랑스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훌륭한 요리로 손꼽히긴 하지만, 스테이크와 로스트 디너는 지배 계급의 요리이고, 일반 가정식이라고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나 피시 앤드 칩스를 제외하면 내세울 게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영포자 - 사실 영어 자체는 다른 유럽 언어들에 비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며 반미 국가를 가도 영어를 사용할 만큼 대중적이다. 그 많은 굴절을 다 외워야 하는 굴절어인 다른 유럽 언어들(특히 러시아어, 폴란드어)과 반대로 고립어라 굴절만큼은 편하게 학습할 수 있다. 다만 영어 발음은 표기 심도가 워낙 깊어 표기와 실제 발음의 불일치는 덴마크어, 아일랜드어와 함께 전 세계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을 정도로 난해하다.[66] 철자와 발음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수두룩하여, 단어를 외울 때마다 발음을 별도로 듣고 외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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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파운드법 - 통일된 단위의 부재로 인류의 소통을 방해하고 산업과 교육에서 낭비되는 요소가 생기게 한다.
SI 단위와 야드파운드에 따른 장비와 부품을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몇 가지 설계 프로그램만 들어가도 통일된 단위가 없으므로 옵션에서 SI 단위와 야드파운드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다룬 옵션 사항만 한 쪽을 차지할 정도. 이는 인류의 교육에서 낭비일 뿐만 아니라 도면 작성이나 광고지 제작 등 같은 산업현장과 국가간 교류에서 방해가 된다. 심지어 항공사고까지 야기하고
화성 기후 궤도선을 날려먹었다. 자세한 것은 각각
에어 캐나다 143편 불시착 사건,
대한항공 6316편 추락 사고[67], 화성 기후 궤도선 문서로. 다만 야드파운드법이 영국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현재 영국은 미터법을 사용하며 오히려 야드파운드법을 고집하면서 국가간 교류에서 많은 불편을 초래하는 나라는 미국이긴 하다.[68]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래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합리주의와 친프랑스 성향, 영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1793년 경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주도로 프랑스로부터 미터법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 과학자 조셉 돔비(Joseph Dombey)가 미터법 원기를 갖고 미국으로 향하던 와중에 4월 1일에 그가 탑승한 배가 영국 사략선에 나포당하여 미터법 원기째로 실종되어 버리는 통에 미터법 채용이 불발되었다. 다만 조셉 돔비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인 1793년 2월 1일에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에 돌입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공격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적반하장이다.[69] 게다가 당시 미국 의회는 통일된 도량형을 제정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1820년대 들어서야 서서히 도량형 통일에 관심을 가졌기에 조셉 돔비가 설령 미국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해도 미국이 미터법을 즉각적으로 채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여담으로 조셉 돔비는 이후 영국령 카리브 식민지의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 우핸들 자동차와 좌측통행 - 전세계 국가의 2/3 정도가 좌핸들 자동차와 우측통행으로 도로교통이 표준화되어 있는 반면 나머지 1/3은 우핸들 자동차와 좌측통행으로 표준화되어있는데, 당연히 그 나머지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이 차지한다.[70] 이로 인해 좌핸들 자동차와 우핸들 자동차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면 국경을 넘자마자 방향이 반대로 바뀌는 교통시스템 때문에 통일성 저해에 따른 불편함은 물론이고 사고를 유발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 세계사 시험 - 혐성국 밈의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의외로 정확한데 세계사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영국의 영향력이 큰 건 사실이다. 따라서 세계사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묻는 문제가 나오면 영국 관련 선택지를 고르면 정답일 확률이 높은 것도 맞으며 이에 파생된 프랑스 밈 역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혁명과 제국주의 행보 역시도 근현대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그성 밈으로 취급하는 동시에 문자 그대로에 근거하여 세계사 문제를 풀면 정답은 영향력이 컸던 영국이나 프랑스 관련인것도 맞다. 문서에서 전후술하다시피 이걸 진지하고 과장하기까지 하는게 더 근본적인 비판점이자 문제점인 것이다.
5. 반례 (긍정적인 사례)
반면 영국이 세계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세계 최초/외국의 경우 항목을 보기만 해도 고대 이전이라면 이집트, 중세 이전이라면 중국, 근대 이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의 발명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대부분 했을 정도. 몇몇 아래의 서술은 혹자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옹호로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 싱가포르, 인도 등 식민지 관계 및 인식은 나라마다 각기 상이하며, 실제로 공과 사를 모두 인정하는 역사관을 가진 나라도 상당하다.[71] 따라서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나라마다 별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를 한일관계에 그대로 동치시켜 단지 식민지였다고 하여 모든 것을 부정만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노예무역 폐지 - 영국 역시 과거 대서양 노예무역에 적극 가담하긴 했으나 15세기 포르투갈 이후 성행했던 노예무역을 덴마크 다음 2번째, 강대국 중 최초인 1807년에 금지시켰다.[72] 180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영국 서아프리카 함대는 노예선 1,600여 척을 나포하여 아프리카인 15만명을 해방시켰다. 노예무역 금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는 데 거부하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해, 50명이 넘는 아프리카 통치자들이 “反노예제 조약”을 체결하고, 비엔나 회의와 파리 조약(1815) 등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외교적 압박을 가하여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규탄하고 무역을 폐지하도록 촉구했다.
1833년 노예해방법을 통과하여 영국령 농장주들에게 당시 2천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노예를 해방 시켰고 한때 영국 정부는 이로인해 재정위기까지 갔는데, 이는 1860년대까지 노예문제로 치열한 내전을 벌인 미국과 대조적인 것이었다. 이후로도 영국은 일본에서 일어난 마리아 루스 호 사건에 연관되어 반노예무역의 움직임을 이어갔고, 그 여파로 일본에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본 유녀들에게 예창기해방령이 나타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73] 참고로 1839년 영국에서 설립된 '노예제 반대 협회' (Anti-Slavery Society)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이며, 1833년 영국 정부는 농장주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국가예산의 40%를 지출하고 막대한 채권을 발행했는데, 이를 2015년에서나 공식적으로 모두 갚았다고 한다. # 물론 이것도 삐딱하게 보면 노예무역 금지를 빌미로 오만, 보어인 등 타국에 혐성질 할 수 있는 명분작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현재 노예제라는 것의 인식을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불과할 뿐이다.
- 자본주의 -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자본주의는 현대 세계경제의 주류 시스템이 되었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 등 병폐도 심했고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없으나, 중세 봉건주의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감으로써 많은 국가가 경제 및 문화 양면에서 빠르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성과를 아예 부정하고서 자본주의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로 여기는 개념이 아니라, 초창기 영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그 병폐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출발한 개념이다. 자본주의 경험이 없거나 불충분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집권세력이 개발독재를 벌인 명분 역시 "우리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국가의 생산력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영국에서 탄생한 자본주의 이례 애덤 스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앨프리드 마셜 같은 학자들이 경제학이란 개념과 이론을 정립시키며 현대 경제시스템의 기반을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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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세계 해저케이블 지도
1차 세계화 - 1870년에서 1914년까지의 1차 세계화는 영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1,500년부터 1,800년까지 매년 1%씩 증가했던 세계무역은 18세기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19세기초 세계 GDP의 6%를 차지하던 수출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엔 14%로 뛰어 올랐고, 세계 '상품, 노동, 기술'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졌다. 특히 영국이 발명한 해저케이블, 철도, 증기선은 기존의 '통신, 이동시간,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줬는데, 해저케이블은 수개월이 걸리던 기존 대륙간 통신을 당일 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철도는 내륙간 빠른 이동과 대량운송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증기선은 기존에 해풍에 의존하던 배의 이동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기존 1달이상이 걸리던 대서양 여행을 1주일 이내로 줄여 1850년까지 약 129개국이 증기선을 이용하여 무역을 했고, 5,000개 도시에서 수출입이 이루어지면서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운임비용과 여행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다 보니 인력의 이동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이탈리아, 그리스, 아일랜드는 높은 이주율을 보였고,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과 호주엔 이민행 물결이 이어졌다.[74]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계 상인이나 중국계 상인 또한 이 시기 세계적으로 진출하면서 지금의 탄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 크게 이득을 본 것은 자본과 기술이 뛰어난 영국이었으나, 다른 나라들 역시도 자신들의 경쟁력 있는 상품을 전세계에 수출하면서 세계화의 혜택을 누렸는데,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광활한 초원에서 나오는 소고기를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국가의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 자유 무역 - 1800년대까지도 세계무역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대영제국 시절 제국 내 무관세,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이는 현대 자유무역 체계의 베이스가 되었다. 대영제국 내 역 뿐만 아니라 역외로도 자유무역이 이뤄졌는데, 독일인들은 독일 식민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제품을 인도에 팔았고, 프랑스 역시 알제리보다 인도에서 더 많은 판매량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대혼란은 20세기 초중반 당시 이미 세계 최대 경제를 자랑하던 미국이 대공황으로 보호 무역에 들어서자 시작되었다. 이런 자유무역을 통한 교역과 수많은 가치사슬로 인해 세계경제는 급격한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 자유 민주주의 -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기원은 18세기 유럽으로 올라가는데 당시 유럽 대다수의 국가는 군주제였으며, 정치권력은 군주 또는 귀족이 소유하였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권력자의 절대적인 통치권에 의문을 가지는 계몽주의 사상이 17세기 영국에서 태동되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628년 영국에서의 권리청원과 1679년 인신보호법, 1688년 명예혁명과 1689년 권리장전 과정을 거치며 특정 권리와 자유를 성문화하며 자유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과 신념은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주었다. #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 지수(Democacy index)에서도 구 영국의 식민지들이 다른나라 식민지 보다 상대적으로 순위가 높은 성향을 보이고 있다. 예외적으로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과는 비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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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00년부터 2000년대까지 인도의 인구추세 변화
인도 - 영국 이전 수백개의 독자적인 왕국들이 존재하던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통일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데 기여했다. 때문에 현재도 영어는 힌디어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다. 수백년간 지속되온 여행자들을 대상으로한 노상강도 조직인 암살단(Thug)을 근절시키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화장시키는 풍습인 사티(Sati), 과부재가 금지, 어린 소녀 성노예 풍습 등 잘못된 토속 관습을 형법을 통해 금지했다. 이는 문화상대주의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없는 명백한 인권 유린이자 철폐되어야 할 악습이다.
1892년에는 백신 강제 접종법안을 통해 인도에서 천연두의 피해를 막는 데 기여하였다. 불가촉천민 등 하급 카스트에 대한 차별을 1850년 카스트 제거법(Cast Disabilities Removal Act)등을 통해 개선해 교육이나 사원출입의 기회를 부여했다. 인도에 각 지역별로 기근코드를 부여해 관리하고 철도를 통한 빠른 식량공급 및 보건소등 위생사업 등을 통해 인도인의 평균수명을 11년 늘리고[75] 기근 방지에 도움을 주었다. 무굴 제국에 비해 인도의 관개비율을 8배이상 증가시켰다. 1914년까지 연간 1,600만톤에 달하는 인도의 석탄생산은 처음부터 영국인에 의해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막대한 인프라 투자로 뭄바이, 첸나이가 인도 최대의 상업도시로 탄생하게 되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연구를 바탕으로 비교언어학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도 영국이며, 인도에 1784년 아시아 학회, 1861년 인도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통해 잊혀져 있던 인도 고대사 발굴에 기여를 하였다.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수상인 자와할랄 네루 역시 영국이 인도에 서구적 의회정부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고, 인도인들 사이에 정치적 통일감을 발생시켜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 탈바꿈 시켜주고 민족주의 발단에 불을 지폈다는 영국인들의 주장에 "많은 진실이 있다"라고 인정했다. 영국이 인도에 서구를 향한 인도의 창을 처음 열고 '철도, 전신, 전화' 등과 같은 산업주의의 전령을 도입함으로써 인도에 서구 산업주의와 과학을 알려준 공로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네루의 자서전 - 《자유를 향하여(Toward Freedom), 1942》 中
- 1873~1874년 벵골 기근 - 벵골에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고, 약 2,150만 인구에 영향을 주었다. 벵골에 새로 부임한 "리차즈 탬플"경은 광범위한 구호활동을 펼쳤는데 그로 인해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거나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참고로 기근 문제는 수천 년 인도사에서 고질병이었는데, 북부 히말라야산맥 중부 데칸 고원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여름철 몬순에 대부분의 강수량을 의존하는 구조다. 국민 대다수가 극빈층에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낮은 행정력과 위생, 보건 관념으로 인해 전염병이나 한해 풍흉이 들면 대량 사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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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발전에는 영국의 공이 컸다.
영국 해군의 “동양함대 기지가 들어서고 거대한 “항만, 선박 수리, 물류 시설”이나, 연료를 보급하기 위한 거대 정유공장 단지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정유공장에서 생산된 정제유가 동남아 전체시장을 커버하고도 남았는데 1970년대까지 동남아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후엔 원조를 제공했고, 과거 영국이 닦아 놓은 무역루트 거점이나 영국령 시절 고무무역 같은 동남아 상품들이 싱가폴 선물시장에서 활발히 거래가 이루어지며 상업과 금융, 행정적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가 영국인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Raffles)이며,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 역시 철저한 친영주의자인 것으로 유명하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오랫동안 보어인들에 의한 가혹한 대우와 강제노동으로 고통받던 현지 흑인들을 노예제 해방과 1828년 차별철폐 정책, 백인과 동등히 재판을 받을 권리를 통해 인권을 향상시켰다. 영국은 1807년에 이미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1833년엔 영국의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를 금지시키고, 1834년엔 마찬가지로 케이프주 식민지에서도 남아 있던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는데, 이는 백인 우월주의로 점철된 보어인들에게 쉽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정책에 크게 반감을 샀던 보어인들은 결국 그동안 영국인들과 공존하며 살던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북쪽으로 흑인 원주민을 정벌하며 이주했는데 (Great Trek) 이는 향후 보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것이 보어 전쟁에서 많은 현지 흑인들이 영국 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케이프주는 수에즈 운하 개통 이전 인도로 가는 무역거점 역할을 하면서 무역과 경제가 번성하게 되었다. 이후 남아공의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앞장선 것은 덤.
- 잔지바르 - 오만 술탄의 점령에 의해 수백년간 탄자니아 노예 수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잔지바르를 1896년 술탄과의 전쟁을 통해 노예무역을 금지시키고, 1963년에 잔지바르를 해방시켰다.
- 아랍에미리트를 비롯한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페르시아만 국가의 성립엔 영국의 공이 컸다. 원래 그 지역은 해적이 난무하던 지역으로 '해적 소굴'로 불리며 약탈이 극심했는데 영국이 인도로 가는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 부족 추장과 '노예무역 금지, 포로학대 금지, 부족간 평화적인 분쟁해결, 외국 침략으로부터 보호' 등의 조약을 맺으며 영국의 영향력 아래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이란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99년엔 쿠웨이트 무라바크 국왕의 보호요청 아래 독립을 시켜주었으며, 이후 이라크의 침공때에도 미국과 함께 보호해 주었다. 이런 연유로 카타르와 바레인엔 현재도 영국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 사실 아돌프 히틀러는 2차대전 당시 대영제국에 대한 보존과 영국의 권리를 절대 침해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통해 끊임없이 영국을 회유하였다. 이를 모두 거절하고 항전하였는데 이는 제국의 해체를 각오한 결정이었다. 유럽에서 영국이 2년간 홀로 버티지 않았다면 대서양 건너 미국의 참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추축국이 승전하였다면 현재 세계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 주류사상이 되거나 그 영향력이 매우 오랫동안 잔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 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독일공군) 전력의 2/3 궤멸, ② 압도적인 해군전력 우위로 독일해군의 해양진출 의지 상실, ③ 에니그마 암호해독, ④ 미국에 “ 핵개발 관련 정보, 제트엔진, 마그네트론” 등 최신기술 이전 등을 통해 연합국 승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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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참전(남한 기준) -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벌어지자 영국은 전후 경제가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4일만에 참전을 결정하여, 연합국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영국은 연 10만명이 참전해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1,078명이 전사하고 2.00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3만7,000여명이 전사한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다. 특히
임진강 전투에서는 600여명의 글로스터 대대가 3만명의 중공군을 맞아 중공군 1만명을 전사시키고 59명만 전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을 3일간 막아준 덕분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방어 전열을 가다듬어 제2차 서울 함락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전투는 향후 6.25 전쟁 승패를 좌우한 지대한 공으로 평가받았다. 영국 해군과 공군도[77], 항공모함 전대까지 이끌고 와 지원을 퍼부었다. 전후에도 1957년까지 사단급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한국의 안보를 지켜 주었다.
한편 당시 영국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한국 국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남겼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 이후 영국군과 영국 의회, 외무부, 그리고 영국 언론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북진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공산당의 부역자로 몰아 벌였던 보복학살에 경악하고 국제사회에 이를 공론화하여 학살을 막는데 일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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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건 지원 - 전후에는 재건을 위해 한국에 2,600만달러를 지원하였다. 1971년엔 당시 국가신용도가 낮던 한국에 영국
바클리스 은행은
현대중공업의 조선소 건설에 4,300만달러 차관을 제공하였고 1975년엔 영국인 '잭 던컨'(William Jack Duncan)은 현대조선소에 광범위한 조선기술을 전수해 줬다. 이를 통해 한국 조선업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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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부사장이었던 영국인 조지 턴불도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인 현대 포니 개발에 기여하였다. 1961년부터 한국에 대한 영국의 대외원조 사업이 시작되어 1988년까지 과학기술자 485명이 영국에서 연수를 받아 한국의 과학 기술 기반을 다지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78] 그외 1948년 유럽에서 제일 먼저 대한민국을 승인한 국가 영국이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선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지지해주었다.
- 소말릴란드 - 소말리아가 총체적으로 엉망이 된 상황에서 소말릴란드는 독립국가를 선언하고 훨씬 안정적으로 국가로서 돌아가고 있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소말리아의 다른 지역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지만 소말릴란드는 영국의 식민지라는 점이다. 둘의 차이는 과거부터 있던 사회구조를 얼마나 건드렸냐이다. 영국은 간접통치로 기존의 사회체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분쟁을 중재할 수 있는 권위와 체계가 그대로 남아 타협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직접 통치하면서 기존의 사회체계를 다 없애버렸다. 그 결과 분쟁을 중재할 권위가 사라져버렸다.
- 나미비아 난민 - 1904년~1908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선 독일 제국의 강제노동, 강간 등 가혹한 식민지배에 반발하여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독일은 '로타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장군을 필두로 하여 나마족, 헤레로족에 대한 멸절에 가까운 인종학살을 벌였는데, 이는 20세기 초 최초의 대량학살로 유명했다. # 여기서 대규모의 난민이 발생했고 헤레족 수천명은 생존을 위해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으로 도망쳤는데, 이들은 당시 영국령이던 베추아날랜드(British Bechuanaland)로 망명하기를 희망하였다.[79] 영국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학살로부터 보호해준다.
- 홍콩의 발전 - 난징조약 체결 이후 홍콩이 영국에 조차 되면서 이전까지 해적 소굴로 유명했던 홍콩의 급격한 발전이 시작됐다. 19세기에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자유무역항 및 중국으로의 관문으로 선언되었다. 이때 구룡반도-광둥성 광저우 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영국식 “법률, 행정, 교육, 문화, 경제 시스템” 등이 홍콩에 도입되었다. 1870년대~18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전까지 홍콩의 '경제, 금융, 문화' 등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동양의 진주란 명칭으로 불렸으며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같은 중국의 大화마 속의 피해 역시 피해갈 수 있었다. 물론 영국령 기간 동안 현지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① 1997년 홍콩 여론조사에 의하면 90%에 달하는 홍콩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했으며 #, ② 2013년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여론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려 92%의 홍콩인이 영국령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응답했다. #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때에는 군중들 사이에서 유니언잭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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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더 트랜스포트 작전(Kindertransport) - 영국이 2차대전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9개월간의 구조활동을 통해 유럽에서 약1만명의 유대인 아동을 구출한 작전. 구체적으로 보면 1938년 11월9일 발생한
수정의 밤 사건 이후 독일 전역은
반유대주의 광풍과 함께 나치 폭도들에 의해 유대계 상점 7,000곳 이상에서 약탈과 방화 등이 자행됐고, 사유재산 몰수와 함께 유대인 3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했고,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전쟁 이전엔 비자만 있으면 독일을 떠날 수 있었지만[80]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들을 외면하며 비자를 내주지 않던 실정이었다.
이에 영국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17세 이하 보호자가 없는 유대인 아동에 대한 비자조건을 전면 면제하고, '난민 어린이운동' (Refugee Children's Movement)이란 조직의 긴급 형성을 통해 자금모집 및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표를 파견해 고아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활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1939년 9월 전쟁으로 유럽국경이 닫히기 전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에서 약 1만명의 고아들이 영국으로 이송되어 귀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81]
- 미국 독립 전쟁 참전 흑인 병사 처우 문제 - 미국 독립 전쟁이 최종적으로 대륙군의 승리로 끝나자 승리한 미국인들은 파리 조약에서 영국군 흑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이므로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반환시 이들의 운명은 뻔했는데, 영국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몸값지불을 통해 이들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정착시키며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다. 결국 군 복무시 흑인들에게 자유를 약속한 조건을 지킨 셈이 됐다.
5.1. 정치 외
1,4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계 1인당 소득추세 변화 | 산업혁명 이후 평균 소득변화 |
만약 산업혁명이 아니었다면 세계는 지금도 농업이 주류 경제 시스템으로서 봉건제를 유지하거나, 유럽과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 대다수는 저개발 지역으로서 매우 낮은 부가가치 창출과 함께 왕과 귀족 같은 일부계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구가 극빈층으로서 단순히 생계유지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 구세군 활동 - 전세계적으로 빈민 구호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구세군은 1865년 영국 감리회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국에도 1908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도 매년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모금활동 등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을 돕고 있다. 구세군은 현재 132개국에서 3만여명의 사관과 200만명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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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명 발전에 기여 - 18~19세기 근대 문명의 상당수는 영국에서 탄생하였다. 대표적으로
증기기관,
철도,
지하철,
버스, 위도와 경도, 전기동력,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컴퓨터
#,
관습법,
보험, 특허법, 노동법과
노동조합,
최저임금법, 수세식 변기,
마취제, 근대식 하수 시스템,
냉장고,
가스터빈,
방적기,
직조기,
탈곡기,
수력발전소,
진공관, 전기용접, 코크스제철법, 공기
타이어,
제트 엔진, 현대식
시멘트, 초기 기계식 TV, 합성염료
#,
연료전지,
플라스틱,
성냥,
가스레인지,
진공 청소기, 양철 통조림,
고무줄,
백열전구, 와이어 휠,
레이더,
탱크,
전신,
해저 케이블,
링거,
란제리[84],
뮤지컬,
정장 등이 있으며,
아이작 뉴턴,
마이클 패러데이,
맥스웰,
존 네이피어,
존 돌턴,
어니스트 러더퍼드,
로버트 보일,
켈빈 남작,
톰슨,
폴 디랙, 조지 스토크,
토마스 영,
로버트 훅,
찰스 다윈 등의 과학자들도 과학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또한 현대 주류 정치체계인
의원내각제도 영국에 탄생되어 보급되었다. 20세기 이후엔
월드 와이드 웹(www),
문자메세지,
팩시밀리,
온라인 쇼핑몰 등이 영국에서 탄생되어 보급되었다.[85]
영국의 발명 및 발견에 대한 설명은 여기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 근대 스포츠와 뮤지컬의 탄생 – ①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축구를 비롯, 골프, 럭비, 배드민턴, 탁구, 핸드볼, 크리켓, 컬링, 스쿼시, 복싱 같은 현대 스포츠는 영국에서 탄생되어 보급되었다. 때문에 축구협회(FA)란 말 자체가 아예 축구협회(잉글랜드)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축구의 규칙을 정하는 국제축구평의회에서도 영국의 종주국 지위를 인정하여 FIFA와 함께 8명 위원중 절반의 영국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배트민턴이란 단어 역시 영국 글로스터의 Badminton란 마을에서 유래됐으며, 럭비 역시 영국 워릭주의 Rugby란 마을에서 유래됐다. ② 또한 노래, 춤, 연기가 어우러진 뮤지컬 역시도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탄생됐는데, 런던 웨스트엔드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뮤지컬의 양대 메카로 유명하며,“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맘마미아, 지킬 박사와 하이드”같은 유명 뮤지컬들도 영국에서 처음 탄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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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혁신 - 고대부터 현대까지 약 10억 명 이상을 죽인
천연두는 영국의 의학자
에드워드 제너가 발견한
우두법를 기점으로 인류는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류최초의
백신 (vaccine)으로도 유명한데 이것이 에드워드 제너가 사용한 라틴어 젖소(Vaccinu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86] 백신 발명 이후 19세기~20세기에 걸쳐 대규모의 백신접종이 이루어지면서 세계 천연두 감염자는 현격히 줄어들었고 결국
WHO는 1980년 천연두의 박멸을 공식 선언했다.
더불어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 역시 영국인 알렉산더 플레밍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각종 감염증에 의해 조기사망하던 인류의 평균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렸고, 최초의 마취제 역시 영국인 의사 제임스 심슨 (James Simpson)에 의해 발명되어 인류는 비로소 수술로 인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 '공중보건학, 현대역학, 간호학'은 영국인 의사 존 스노우 (John Snow)와 간호사인 나이팅게일 (Nightingale)에 의해 처음 정립 되었으며, ' 장티푸스 백신, 시험관 아기시술법, 조지프 리스터의 무균수술법, MRI, CT 촬영기. 링거액' 등도 영국에서 처음 탄생됐다. 그 외 '비타민의 발견,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론, 제임스 린드의 괴혈병 치료법, 프레더릭 생어와 프랜시스 크릭의 DNA 구조발견과 염기서열 분석' 등 역시도 현대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영문학 - 영국이 세계 소설사 분야에 기여한 바는 절대 폄하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근대 유명 영문학 작품들이 독문학/불문학 작품들과 함께 근현대 문학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영문학 작가로는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아서 코난 도일, 제인 오스틴,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토머스 모어, 톨킨, 에밀리 브론테, 윌리엄 골딩, 아가사 크리스티, 서머셋 몸 등이 있으며, 보물섬, 로빈슨 크루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글북, 피터 팬, 걸리버 여행기, 플랜더스의 개 같은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 고전문학도 영국에서 탄생했다.
- 록 음악, 헤비메탈 - 브리티시 인베이전 문서로. 1960년대 비틀즈의 Hey Jude 실황 라이브 영상을 한 번 보자. 5분 20초경에 백인 청년과 흑인 청년이 함께 어깨동무하며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거나, 두건을 쓴 아랍 청년도 나오고(5분 10초) 양쪽 귀에 꽃을 꽂은 할아버지가 청년들 틈에 껴서 자연스레 어울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등(6분 24초) 2020년대 들어 많이 개방된 한국에서도 쉽사리 보기 힘든 장면이 나오고 있다. 영국 출신 유명 가수로는 ' 비틀즈, 레드 제플린, 퀸, 데이비드 보위, 에릭 클랩튼,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비 지스, 딥 퍼플, 섹스 피스톨즈, 듀란 듀란, 엘튼 존, 오아시스, 뮤즈, 블랙 사바스, 주다스 프리스트, 라디오헤드, 에드 시런, 콜드플레이, 스팅, 조지 마이클, 필 콜린스, 아델, 스파이스 걸스, 사라 브라이트만, 에이미 와인하우스, 올리비아 뉴튼존' 등이 있다.
- 대한매일신보 - 영국인 기자 어니스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통해 국제사회에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단, 이것은 일개 개인의 분투이기 때문에 국가적 공적으로 치부하기는 애매하다. 게다가 당시는 영일동맹 시기였던지라 영국 정부는 베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묵인하거나 적극 협조하였다.
-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도입 – 한국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는 1877년 영국의 목사 '존 로스'(John Ross, 한국이름 '라요한')가 펴낸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란 책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 이 책에서 그는 한글 문장과 함께 영어 단어로 그에 해당하는 발음을 표기하는 한편 영어식 띄어쓰기를 도입했는데, 이게 바로 한국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였다.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도입 이후,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서는 최초의 한글을 띄어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고대 유물 발굴 및 보존 - 내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부패한 이란 카자르 왕조와 쇠퇴기의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방치되고 있던 이라크 남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고대 유물들을 발굴했던 것도 영국의 공이 컸다. 고대 이라크 유물 발굴의 첫 삽을 뜬 것은 19세기 이라크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아시리아인 기독교인 호르무즈 라삼이다.
- 차 문화 - 찻잔에 손잡이를 달게 된 것이나 녹차 외에도 홍차를 마시는 문화 등은 영국 등 서구 국가의 영향이다. 영국에서도 하루에 여러 번 컵케이크, 과자, 케이크 같은 간식들과 함께 즐기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영상을 시청하자. 영국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 세계사에 도움을 주게 되었는지 요약했다.
6. 문제점
6.1. 시대착오적 관점
20세기 독일이나 일본처럼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에만 기초해서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나라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반면 몽골, 로마 제국, 영국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국가 체계의 토대로 삼았으며 성공했습니다.
―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영국이 활동한 18~19세기는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로서 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삼국시대처럼 전쟁으로 인한 영토확장과 축소가 보편적이던 시절이었다. 현대와 같은 민족국가는 20세기 초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형성된 개념으로서 그전까지는 세계 대다수는 다민족 제국 및 전제 군주국가 혹은 유목민이나 부족사회 상태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현대의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전근대 이전엔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야만적이던 ―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가령 노예제는 영국을 콕 집어 비난할 수 있겠지만, 19세기 후반까지를 노비제를 유지한 조선을 비롯해 전세계가 보편적으로 이런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영국이 그나마 노예제 철폐를 위해 선구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고대부터 가장 분쟁이 많았던 지역 중 하나인 중동의 문제를 모두 영국 탓으로 귀인하나 역사란 것은 어느 특정시점에만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종교갈등, 독재, 반인권, 극단주의 세력, 자원분쟁, 미소 대리전'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까지를 입체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 삼팔선을 그었으니 한반도 모든 분쟁의 원인은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급진적으로 평가받듯이 기본적으로 '혐성국' 이니 '만악의 근원'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매우 단편적인 넷상의 정보에 의존하는 일반화의 오류이자 비약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오류는 굳이 세계사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시대상은 빠르게 변하기 마련인데 무려 수백년 전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기본자세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개입한 세계분쟁 지도 |
만악의 근원이란 말은 다르게 보면 그만큼 당시 영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뜻인데 영국이 철저히 이익을 위해 행동한 측면 외에도 당시엔 현재 UN 같은 국제기구도 없었기 때문에[87] 초강대국, 패권국이라는 생리상 국제분쟁에 있어 중재자로서 영국의 입김이 클 수밖에 없었다.[88] 이는 현재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중국, 러시아, 북한, 필리핀, 베트남, 아프간, 이란, 베네수엘라,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발칸반도, 쿠바, 남미' 등 사실상 전세계 모든 분쟁에 개입되고 있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해당국가의 역사적 전후배경과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고려 없이, 중간에 영국이 개입된 부분만을 선택편취하여 모든 것을 귀인하여 비약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미국이 현재 세계 가장 많은 분쟁에 개입한다고 미국을 혐성국이라 칭하며 세계 모든 분쟁의 원흉이라며 악마화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것과 궤가 같다. 물론 미국에게 당한 국가의 국민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영향력과는 별개로 현재의 미국처럼 다른 나라가 패권국이 되었을 때보다 영국이 가장 나았다는 관점도 존재한다.[89] 기본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들 중에 그래도 상대적으로 경제나 민주주의 지수, 세계의 자유에서 발전된 나라들이 많으며 근대문명에 기여한 것도 많다는 것과[90] 20세기 이후 식민지들의 독립도 비교적 깔끔히 해결하였는데 기타 열강들의 사례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미국은 오히려 과거의 대영제국과 같은 포지션에 있지만 악행을 많이 저지른 건 맞다.[91] 먼저 신대륙 적응에 도움을 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은 뒤, 이웃 국가인 멕시코를 박살 내고 멕시코 국토의 절반 정도를 강탈하였으며, 영국도 포기한 노예제를 끝까지 고집하려는 주가 이탈하여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정치현실주의라는 명목 하에 과테말라, 베트남, 칠레에 개입하였고, 이 가운데 특히 과테말라는 개입의 여파로 36년간이나 내전에 시달려야 했으며, 중남미에 개입하면서 풀어놓은 마약 및 중남미의 경제파탄 때문에, 중남미는 마약 카르텔의 소굴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쓸데없이 국공내전에 개입하여 중국 국민당이 다 이긴 전쟁을 놓치게 만들어서 결국 중국 전체의 공산화를 초래했고, 이는 결국 21세기 들어서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그리고 공산당)과 정치적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였다가 9.11테러의 여파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였는데, 이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명백한 명분이 있었으나, 이라크는 그럴 명분조차 없었기 때문에 많은 반발을 받았고, 그 여파로 이슬람 극단주의가 재확산되어 중동정세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림은 물론 아프리카 까지 이슬람 극단주의를 확산시켰다. 다만 미국의 제국주의 시절에는 식민지 경영이 아주 느슨한 편이었다.[92][93]
- 프랑스는 식민제국 중에서도 통치방식이 가장 잔인한 편이었고, 식민지 독립의 뒤끝도 강했다. 아이티 혁명 당시에는 실존 여부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최초의 가스실 학살을 벌였으며, 패한 뒤 물러났다가 숨 좀 돌린 뒤에는 독립을 조건으로 아이티에 막대한 독립배상금을 요구해 실제 아이티는 없는 살림에 국가예산의 80%를 1947년까지 122년간 지불해야 했으며, 기니가 독립했을 땐 이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현지에 설치했지만 이동이 불가능한 자산들인 '학교, 병원, 도서관, 농장' 등의 인프라 상당수를 파괴하며 철수한 적이 있다. 또한 이를 넘어 2차대전 이후에도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지역 식민지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수십에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베트남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 출신 국가는 분쟁이 유독 잦거나, 가난한 국가, 그리고 강한 반불감정을 가진 국가가 많아 사실상 반서방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스군은 2차 대전 후에도 독립전쟁 탄압 과정에서 현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고, 1961년에는 알제리 독립운동 탄압 과정에서 파리 중심부에서 수십~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21세기인 현재까지도 CFA 프랑을 통해 아프리카 구식민지에서의 정치, 경제에 깊게 관여하여 서아프리카에 잇따른 반서방 쿠데타를 촉발시켰고, 아직도 프랑스령 기아나 같은 해외영토를 버젓이 가지고 있다.[94]
- 러시아는 20세기에 정치적 목적으로 대숙청을 통해 최소 70만의 자국민을 학살했고, 굴라크(Gulag)라는 정치범수용소를 통해 약 1,800만 명의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 또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수정주의 정책을 펼친다는 이유로 탱크를 보내 무자비한 진압을 벌여 같은 사회주의 사회에도 충격을 남겨 탱키(Tankie)라는 멸칭이 붙었다. 21세기에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주변국을 침략하며 타국의 영토를 강제병합하고 있다.
-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압록강 근처까지 진격했던 남한-유엔군을 지금의 휴전선까지 몰아냈다. 엄연한 주권국이었던 티베트를 침략하여 국권을 피탈하고 21세기에도 시민들의 언론 및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자 수용소를 짓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으며, 타국에 대한 문화공정, 내정간섭과 침탈, 산업 스파이를 집단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받은 마셜 플랜 지원금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막는 데 사용하였다.
- 포르투갈은 1960~70년대까지 식민지인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에서 독립을 막기 위해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
-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 집권 시절 콩고에서 당시 제국주의 사상에 물든 유럽인들조차 분노할 정도로[95]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 독일은 20세기 나미비아 #와 탄자니아 #에서 반란과 독립운동을 이유로 멸절에 가까운 학살을 벌였고, 이후엔 양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우생학을 기반으로 한 끔찍한 체계적인 공장식 학살을 벌였는데, 이는 세계사에 전례가 없는 것으로서 이런 행위는 심지어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 시절인 1915년에 아르메니아인들을 말살시키려 했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현재까지도 학살 자체를 아예 부인하고 있으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도 아르메니아를 작살내겠다며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했다. # 튀르키예가 지배했던 발칸반도와 아랍에서의 튀르키예에 대한 이미지는 그야말로 악의 축이다. 혐재도 중동 산유국은 튀르키예에 석유를 수출하지 않아 더 멀리 있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수입해야 하는 신세다.
- 일본은 일본 제국 시절 같은 아시아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 강간, 강제노동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지금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청산하지 않고 있다.[97]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한 동시기 영국과 일본의 지배가 겹쳤던 나라들의 현지인식을 보자면 ① 인도, 말레이시아, 버마는 영국에 적대했던 일부 반영-친일세력들 조차도 나중에 일본군의 '현지인 약탈, 민간인 수만명을 죽게 한 강제노동[98] #, 강간'과 같은 만행이 밝혀지자 치를 떨고 영국에 전향해 일본군에 싸운 역사적 사실이 있으며, ② 싱가포르의 경우엔 일본이 점령하자마자 숙칭 대학살을 통해 항일분자라 의심되는 민간인 2.5만에서 5만명을 즉각 학살했다. 때문에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조차도 "긴 영국통치 기간보다 3년 반 동안의 짧은 일본 통치기간이 더욱 부당하고 악의적으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자신들을 다뤘다며, 차라리 영국에게 다시 지배받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99]
지금의 영국은 이와 같은 행보를 보이진 않고 있으며[100] 다른 식민지 열강들과 달리 21세기에도 영국의 구식민지들이 주축인 영연방 국가가 인구 약 24억명, 54개국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이 그나마 나았다는 관점이다.[101] 때문에 제국주의를 누구보다 혐오하며, 평소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했던 조지 오웰조차 기존 대영제국이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보다 나았음을 시인했다. 대영제국이 가장 스케일이 커서 대표적으로 꼽히며 까일 뿐이지, 제국주의 시대 자체가 저러한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다는 뜼이다.
나는 이미 제국주의는 사악한 것이며, 내가 일을 때려치우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것에서 더 잘 벗어날 수 있으리라 결심하였다.ˑˑˑ 이론적으로 나는 미얀마인들을 지지했고, 영국인들에 반대했다. ˑˑˑ 내가 하고 있던 일에 관해 나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싫어했다. ˑˑˑ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전망할 수 없었다. ˑˑˑ 나는 영제국이 사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고, 영제국을 밀어내려 하는 더 젊은 제국들보다 영제국이 훨씬 낫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조지 오웰 - 《코끼리를 쏘다》 中
조지 오웰 - 《코끼리를 쏘다》 中
6.2. 반서방 진영의 악용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했던 과거 일본 제국의 갖가지 학살과 범죄 행위 역시 명목상으로는 귀축영미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벌어졌다. 즉, 근대 영국의 제국주의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덮거나 제3세계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에 악용하는 세력이 나와서 문제가 된다. 당장 라다비노드 팔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이러한 논리로 일본 제국이 저지른 범죄를 옹호하는 악영향을 주었다.오늘날 유사 사례로 시진핑의 일대일로 외교 정책 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과거 아편전쟁을 계속 우려먹는데, 중국은 티베트나 위구르 인권 탄압 관련해서도 "아편전쟁을 일으켰던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정당한 영토권 행사에 참견할 자격이 없다."라는 주장으로 논점일탈성 논리이다. 위구르와 티베트는 아편전쟁과 하나도 관련이 없지만[102], 아편전쟁을 벌였던 영국이나 청불전쟁을 벌였던 프랑스가 중국을 비난할 수 없다는 논점일탈 피해의식이 중국인들을 내부적으로 결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중국의 해당 주장은 시대적인 맥락도 고려하지 않는다. 유럽/미국의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19세기는 인종 차별과 제국주의, 약육강식 등이 당연스럽게 받아졌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앞서 언급한 것들의 비인간성에 대해 규탄하고 인권, 평등 등이 주요한 아젠다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21세기이다.[103][104] 즉, 중국은 21세기의 주요 국가들 다수가 공식적으로나마 목표로 설정하지 않는 제국주의적인 가치관을 시대착오적으로 들이밀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러시아도 이와 같은 점을 악용한다. 푸틴의 측근인 구룰로프 장군은 "세계에 대한 위협은 앵글로색슨족으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며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런던을 제일 먼저 타격하겠다고 위협했다. # 자국은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이면서 영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적반하장적인 태도를 보인다.
6.3. 서구에 대해서만 비판적인 역사관
사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비판의 원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사관 등의 수정주의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최근 미국을 예로 들자면 조지 워싱턴 등 과거 미국의 위인들을 노예주라고 비난한다든가, 아프리카 노예가 최초 미대륙에 도착한 날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하려는 극단적인 시도까지 존재한다. 심지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시위자들이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노예제에 반대했던 폴란드계 미국인 겸 폴란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막연히 노예주 동상이겠거니 생각해서 반달하는 사례가 발생해서 폴란드 대사관 트위터가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논란이 있는 영국인들의 행적이 조명받고 이들의 동상을 세워진 것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 # #가령 한국만 보더라도 서양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훨씬 역사와 규모가 컸던 중동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이나[105]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3백년간 150~200만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던 이슬람의 크림 칸국이나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에 대한 인지도는 터무니없이 낮은 편이다. 당장 바르바리 해적 문서를 보자. 마그레브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해적국가처럼 굴러가던 북아프리카 지역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중해를 떠돌며 수백만에 달하는 유럽인, 유대인, 심지어 지중해를 벗어나서 저 멀 리있는 영국인, 러시아인, 심지어 미국인들까지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106] 21세기보다 세계의 절대적인 인구수가 지금보다도 훨씬 적었던 당시에 수백만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인구들이 납치된셈이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노략질을 하다가 산업혁명을 통해 압도적으로 우수한 무기들을 보유하게 된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등 서구 국가들이 1차 바르바리 전쟁 등으로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기 시작하기 시작했고[107] 마침내 1830년에 프랑스가 저들의 본진이었던 알제리를 완전히 토벌함으로써 이들의 패악질도 막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상 엄청난 규모의 학살과 잔인성으로 유명한 몽골 제국은 부정적인 면보다 오히려 그 용맹성과 진격전 속도, 그리고 서양을 침공한 동양의 상징성을 더 부각하는 등 한결 다른 태도가 존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108][109]
현대인들 사이에서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 과거의 사건보다 더욱 관심받고 언급 빈도가 높은 경향성은 있지만, 영국의 논란이 현재까지 언급되고 확산되는 이유는 들쑤시고 다닌 규모도 규모지만 그 시기가 국제화가 진행되는 시기라서 전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영국이 어떤 일을 벌였는가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 데다 밝혀지지 않았던 것들도 지속적인 발굴로 알려지고 공유되고 있으며, 영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로 인한 문제가 지금까지도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6.4. 부정확한 정보와 확증편향
위의 여러 사례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통설로서 퍼져 있는 상당수의 정보가 부정확하며 실제 만물을 영국의 탓으로 몰아가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다수의 정보가 교차검증 없이 그저 단순히 신뢰성이 없는 한국 인터넷상 몇 줄짜리 짤방을 통한 학습이나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통해 점점 확산된 점이 크기 때문이다. 일부는 한국의 네오나치, 일뽕 성향 유저들에게 악용되기도 했다. # 이는 타국의 매우 지엽적인 역사 문제에 대해 한글로 된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과 평소 대중의 관심도도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스낵 컬처라고 불리는 단순 일회성의, 자극적인 컨텐츠 소비 성향 등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전세계인이 참여하는 영어 위키백과만 하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정보와 신뢰성 있는 레퍼런스를 얻을 수 있는데, 실제로 같은 주제에 대해서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퍼진 통설과는 사뭇 다른내용으로 기술되어 있거나 한국의 악의적인 주장이 아예 없는 경우도 상당하다.
또 다른 문제는 정보의 확증편향이 있다. 인도양의 노스센티널섬처럼 외부와 아예 고립되어 살아온 섬이 아닌 이상 어느 나라나 현대적 기준으로 흑역사나 과오는 존재하며, 나쁜 것만을 부각시킬 경우 어느 나라나 악마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나 위인에 대한 평가도 결코 예외가 아닌데 한국의 부정적인 면모, 예를 들어 보도연맹 학살 사건, 삼청교육대 등 과거 독재정권의 국가폭력이나 갑질, 똥군기, 사회복무요원, 노동권 침해 등의 문제들만을 제시하며 한국은 소수의 사악한 기득권층이 국민을 극심하게 탄압하고 학살하며 착취한 최악의 국가 중 하나라고 주장하거나, 역사 속에서 보자면 카르타고나 유대인 학살 등에 한정해 로마 제국을 평가하거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과 코소보 전쟁 당시 학살로 세르비아를 평가하거나, 인디언, 라틴아메리카, 베트남, 중동 등의 사례만 가지고 미국을 악마라고 평가하는 것이 부적절하듯이 공과 과가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선 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과정이 필요하며, 어느 나라나 나쁜 점만 선택 편취하여 열거할 경우 악마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영국을 비롯한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적인 행패를 부린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유튜브와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등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출처 불분명의 왜곡된 정보나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서술이 상당히 많은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이 때문에 웹 상에서는 영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악역의 캐릭터성을 어느 정도 부여받은 상태이며 많은 인터넷 매체들도 이에 편승한 컨텐츠를 쏟아내기 때문에 비판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을 구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7. 기타
- 진보 성향 사이트인 레딧에서 영국이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양분된다. 2022년경 "영국인들이 인도 같은 영국 식민지 출신 국가에 사과해야 하냐"는 여부를 묻는 투표가 올라왔는데 사과해야 한다가 약 4500명, 사과 안 해도 된다가 3900명으로 찬성:반대가 1:0.87 수준으로 나왔다. # 2023년 영연방 식민지 출신 12개국의 지도자들이 찰스 3세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우리 이전 세대에 걸쳐 행해진 일에 대해 어떻게 사과할 수 있냐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베플을 먹었고 "그러면 바이킹과 로마, 원시인이 저지른 일들도 (그들의 후손들이) 사과해야겠네?"는 투로 연좌제와 비슷하게 바라보는 댓글들도 수두룩하게 올라왔으며( #) 호주 원주민들이 영국에 사과를 요구한 기사( #), 찰스 3세가 케냐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했다는 기사( #)[110]도 반응은 마찬가지다.[111][112]
- 일본에도 브리티시의 일본 발음인 ブリティッシ에서 ブリ, 쓰레기를 뜻하는 カス를 합쳐 ブリカス라는 비슷한 단어가 있다. 대충 한국어로 해석하면 "나쁜 영국"이란 뜻으로, 혐성국이라는 단어와 뜻이 거의 일치한다.
8. 관련 문서
- 대영제국
- 반제국주의
- 수정주의
- 반서방
- 일뽕: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전쟁범죄 같은 물타기가 심하다.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의 얕은 지식으로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에 행패 부린 게 심했으니 일본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 독빠: 독일의 전쟁범죄를 가리기 위해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 시절 행패를 부린 것을 얘기하며 도긴개긴이라고 하거나 영국,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절해야 한다는 얘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물론 히틀러로 인해서 프랑스 본토는 비시 프랑스와 프랑스 군정청로 바뀌었고 기존의 프랑스 제3공화국은 자유 프랑스로 망명 정부가 되었으며 영국도 런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은 국가이다.
- 유럽의 짱깨: 혐성국이라는 단어만큼은 아니지만 이 단어 역시 오용이나 남용이 심각한 편이다.
[1]
본래 ER 은 Elizabeth Regina, 즉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뜻하는 모노그램이다. 이를 영어로 운을 뗄 때 쓰는 "Er…"와 엮은 말장난.
[2]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가져온 암살용
플라스틱 폭탄이 영국제라는 것을 두고 그의 부관이 하는 작중 대사로, 플라스틱 폭탄 말고도 전쟁사에서 영국이 하도 흉악하고 무식한 물건을 많이 만들었다 보니까 밀덕계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지진폭탄뿐만 아니라 강력한 독가스인
VX,
블록버스터,
백린탄,
확산탄(클러스터 폭탄),
산소어뢰,
클레이모어,
전차,
수류탄,
맥심 기관총, 최초의 현대적 화학무기인 시안화카코딜탄도 영국이 처음 만들었고,
포스겐도 영국이 만들었다. 모두
대량살상무기. 또 해전의 판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아예 한번 리셋해버린
드레드노트급 전함도 영국이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현대 해전에서 대체불가능한 함종인
항공모함도
영국이 최초로 만들었다.
[3]
이쪽은
유럽의 짱깨라는 다른 멸칭으로도 불린다.
[4]
영국 국왕이
피지의
피지 대추장직을 겸임한 데서 나온 말이다.
[5]
어느 영국 이슬람 이민자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표현이다.
무슬림들이 늘어난 영국의 한 지역에서
여긴 영국에서 독립된 샤리아 존임을 선포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샤리아 존에서 추방하고 샤리아 자경단들이 지역에서 영국 법을 무시하고 샤리아를 강제하자 한 시민이 "여기는 영국(Great Britain)이다"라고 말했는데 자경단이 "
상관없다. 별로 위대한(Great) 영국이 아니다."라고 되받아쳤다. 다른 버전으론 "별로 위대한 논영이 아니다."가 있다.
논영.jpg 반대로
6.25 전쟁 파병군 최초 투입 등 가슴이 웅장해지는 일을 하면 여기는 대영제국이라고 말하거나 참으로 위대하다! 등으로 말한다.
[6]
심지어 약소국이었던 조선의
고종마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끝내고 청나라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간도를 점령해 영토로 편입하려고 시도했다.
[7]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이 추락한 측면이 가장 컸지만 이는 전후에도 식민지 고수에 집착한 타 유럽국가도 비슷한 상황이었고, 영국은 1931년부터 이미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통해 식민지에 적어도 독립할 역량을 봉쇄할 수 있는 선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며 현재의 영연방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다.
[8]
그러나 당시의 일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수가 일을 벌인 건수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하기에 마냥 과거의 일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9]
특히나 아프리카에서 옛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러시아를 가까이하고 프랑스를 몰아내려고 하는 움직임은 단순히 드립으로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10]
다만 어디까지나 인도정부의 공식적, 외교적인 입장이 그렇고, SNS상에선 영국 여왕의 추모에 관해서 부정적인 여론도 비등하다.
# 이에 대해 한국 일부에선
일본의 우경화에 앞장서 한국에서 비호감스택을 쌓을 대로 쌓은
아베 신조 피살 사건 당시조차도 한국도 공식적으로는 정부 차원에서 조의를 표했을 정도로 공식/외교적 입장은 국민 정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절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베는 최소 한국인의 긍정적인 평가가 인도처럼 절반이 아니며, 거의 모든 나라가 단순 형식상 표하는 조의와 한 나라가 외국정상의 서거에 대해 아예 "국가 추모의 날"을 지정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서 이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틀린 비유이다. 더욱이 인도는
콜카타에 있는 여왕을 기리는 거대 기념관인 '빅토리아 메모리얼\'(Victoria Memorial)을 현재까지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해당 아베를 통한 비유 주장은 더더욱 넌센스에 가깝다.
[11]
영국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다.
[12]
사실 아편 농사에 인도인 지주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는데 쌀농사 내수시장 보다 환금작물로서 아편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게 훨씬 수익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에 대한 아편무역은 영국 뿐만 아니라 인도계 상인, 유대계 상인, 청나라 상인도 적극 가담했다.
[13]
이렇게 앞뒤 안 따지고 이익만 추구했던 정책으로 인해 동인도회사는 파산위기를 맞고 제대로 된 통치를 하기 위해서 정치영역을 관장할 총독이 파견되기에 이른다. 장기적으로 동인도회사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14]
이 투표가 끝나고 글래드스턴은 "262. 우리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라는 명언이자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15]
The Covert Netherworld as Invisible Incubator for Illicit Commerce, Alfred W. McCoy.
[16]
The Peasant Production of Opium in Nineteenth-Century India, Rolf Bauer, 43-44p
[17]
실제 중국에서도
건륭제 시기까진 아편이 오락용으로 사용되었고, 미국에서도 아편 흡입이 금지된 게 1909년이었다.(1909, Opium Exclusion Act)
[18]
Zheng, Yangwen (2003). "The Social Life of Opium in China, 1483-1999"
[19]
Chen, Song-Chuan (1 January 2017). Merchants of War and Peace: British Knowledge of China in the Making of the Opium War|#
[2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에 미국 등 서양에서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펜타닐(Fentanyl)의 주요 원료 수출국이 과거 아편으로 곤욕을 치른 중국이라 서구와 중국 사이의 갈등이 점화되고 있다. 그러나 원료 수출이라 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21]
아일랜드 독립운동사의 비극을 다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영국에서 제작된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22]
수용소를 건설한 이유는 게릴라전의 특성 때문으로, 게릴라 세력은 그들을 지원해 줄 민간 및 외부세력과의 연계가 필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국은 수용소를 건설하여 게릴라 세력과 민간 세력과의 연계를 단절해 게릴라 세력을 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의 수용소 운영은 1830년에 미국이 인디언을 상대로, 1896년에 스페인이 쿠바인을 상대로 이미 시행한 바 있으며 후대의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도 전략촌 건설 등을 통해 민간인을 해당 지역에서 소개시키는 것을 게릴라전 대응책의 기본으로 시행하였다.
[23]
앞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항생제의 기본이라 불리는 페니실린의 첫 발견이 1928년이다. 이전까지의 인류는 전염병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불결한 환경이 될 수 밖에 없는 전장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24]
심지어 동시대에 칠레의 함선을 강제로 압류했었을때는 최소한 대금만큼은 돌려줬다. 이건 대놓고 엿먹어 보라는 행위였다.
[25]
사실 영국이 오스만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영국이 오스만을 가상 적국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고 최종적으로 오스만의 참전으로 이득을 본 유일한 나라라는 점 등. 자세한 건
애진코트 항목 참고.
[26]
순양전함인 SMS 괴벤과 경순양함인 SMS 브레슬라우. 다만 말이 양도지 해당 선박들은 여전히 독일인들이 지휘했으며 오스만 황궁을 향해 함포를 겨누며 협박하는 등 사실상 독일 해군의 명령을 받는 독일의 함선들이었다.
[27]
아람코. 1980년 사우디 정부에 의해 국유화
[28]
당시 미국 국무부에서도 석유 이익을 나누는 데 대한 영국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모사데크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을 정도
#로 영국의 이란 석유 이익에 대한 집착은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
[29]
폴란드계 미국인 작가가 쓴
테메레르 시리즈가 해당
위선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한다.
[30]
일례로
조선만 하더라도 19세기 말까지 5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자국민 대상 노비제를 운영했으며, 성리학자인
이황만 하더라도 부리던 노비만 370명이 넘었다.
[31]
Laird, Thomas (2006). The Story of Tibet: Conversations with the Dalai Lama, p. 221. Grove Press
[32]
그 밖에 나가르제 요새 (Nagartse Dzong)에서 러시아제
베르단과 후장총포가 발견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33]
커즌 라인과
파시스트
오스왈드 모슬리의 장인인 그사람 맞다.
[34]
Bell, Tibet Past and Present (1924) , p. 66. 참고
[35]
당시 영국군 탈영병 상당수는 신분세탁을 통해 미국 선박에서 일했는데, 미국은 이들 모두를 귀화한 미국인으로 보았으나 영국은 미대륙에서 태어난 사람만 미국인으로 인정하여 갈등의 원인이 됐다.
[36]
참고로 당시 조선도 남자는 60세까지 군역이 부과되었다.
[37]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넘어가면서 300만에 달하던 인구와 함께 오헝제국 시절부터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던 유수의 산업시설들과 독일을 막기위해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까지 전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독일의 체코 침공 이후 독일의 유명한 전차인
38t와
헷처는 체코 조병창에서 만들어졌고 오스트리아, 폴란드뿐만 아니라 체코에서도 독일은 금과 시민들의 사유재산 및 노동력을 약탈하여 만기가 도래한
메포어음을 지불하게 된다. 결국 해당 조약 이후에도 결국 독일은 체코를 집어삼키고 그들의 독립을 파괴하면서 속칭
우리 시대의 평화는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된다.
[38]
정작 베르사유 조약 당시에는 허락해주었는데 이는 체코가 주데텐란트가 없다면 자립할 수 없다고 봤으며 같은 이유로 폴란드인이 다수인 테센도 체코의 영토가 된다.
[39]
다만 당시 거문도는 격오지 취급이라 세금도 안 걷었고, 지방관도 파견되지 않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자치로 운영되었다.
[40]
우리는 6.25 전쟁에서 2번째로 많은 파병이 온 나라가 영국이기에 이를 감사해하는 입장이다.
[41]
미국 역시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미일 양국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였다.
[42]
다만 고종은 영국과도 좋은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했으나
영일동맹을 우선시한 영국은 어니스트 사토와 존조던등을 이용해 한국과 거리를 둔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광무개혁 역시 친일파 영국 고문 맥 리비 브라운의 트롤링 때문에 고종의 사비로 진행해야 했다.
[43]
당시 영국이 한국 독립을 반대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영국은 조문에 '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걸 반대했을 뿐이다.
[44]
추축국과도 다르다.
[45]
이탈리아 왕국,
발트 3국,
핀란드,
태국,
오스트리아 등. 하필이면 저 국가들이 추축국이거나 추축국의 전쟁수행에 동조(i.e.
오스트리아 나치당,
발트 3국의 현지 '풀뿌리 부역자' 등) 했다던가 추축국에 호의적이었던 국가들이라(다만 이탈리아 왕국은 파르티잔이 무솔리니정부를 몰아내고, 핀란드는 손 털었고, 태국은 친일행각이 당시
피분 독재정권의 독단적인 행위였던 등 각자의 사정은 있다) 일각에서는 조선을 사실상 추축부역국으로 분류했다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스리랑카처럼 딱히 추축국과 관련이 없었던 지역들도 있다.
[46]
비슷한 예로 코소보가 있다. 팔레스타인이 순수한 아랍의 땅이 아닌 것처럼 코소보도 순수한 알바니아인의 땅이 아니다.
[47]
심지어 그 조차 '아다나 빌라예트'의 산자크에 불과한 '메시나'를 빌라예트로 표현하는 등 엄격한 구분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8]
예루살렘 산자크가 오스만제국 시절에도 다른지역과 달리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서 특별취급 받은 것도 결국 오래 전부터 여러 민족과 종교인들이 함께 살던 이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49]
만약 혹자의 추측대로 '다마스커스, 홈스, 하마, 알레포'를 작은 도시단위인 산자크(sanjak)로 가정해 이곳을 기준점으로 잡는다면 그럼 여기서 맥마흔-후세인이 애초에 아랍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로 서로 합의한 '서쪽지역'(West of the districts)은 그럼 어디인지가 의문이 남는데 이렇게 되면 이 서쪽지역은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 전역”이 해당되게 된다.
# 따라서 이 주장에 따라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서 빼더라도 결국 현재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에 위치해야야 하며, 시리아 역시 바다가 없는 내륙국 상태가 되어야 한다.
1) 또 이 주장은 후세인이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가 속한 '베이루트 빌라예트' (Vlayet of Beirut)를 순수 아랍인들의 영토라며 완강히 제외를 거부한 11월15일자 편지내용에 완전히 자기모순적이 되며,
2) 시리아에 대해선 후세인은 처음부터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를 구상 했다는 건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며,
3) 그렇다면 아랍측은 반드시 팔레스타인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간에 합의본 바에 따라 '레반트의 서쪽지역'을 포기해 그 땅을 유대인에게 햘양 했어야 했는데, 그런것도 없이 국제연맹 마저 인정한 서부 팔레스타인 30% 마저도 모두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은 아랍측이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50] David Hunter Miller: My Diary of the Peace Conference [51] 단 이것은 제프리 에머스트의 명령이 아니었고, 이를 처음 고안해서 독단적으로 실행한 것은 미국인 민병대 용병인 모피상인 윌리엄 트렌트였다. Ranlet 2000, Knollenberg 1954, Mann 2009 [52] 애머스트 본인이 편지 원문에 강조 표현을 삽입했다. [53] 버마 대공세로 인도가 공격받고 있으며, 이미 일본의 동맹군으로 투신하여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는 인도 국민군이 있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학살을 저질러서 영국에 대한 반감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54] 원래는 투옥 되었을 때 건강이 악화되어 풀려났을 당시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다시는 정치활동을 못할 것이라고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정치활동을 이어나가자 여기에 대해 대충 "건강이 안 좋아서 정치활동 못할 거라고 풀어줬는데 어떻게 된 거냐?"라고 총독 Archibald Wavell 아치볼드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낸 거 가지고 나중에 총독이 "처칠은 내가 인도 식량 상황에 대해 어쩌냐고 물은 전보에 대해 대답도 않고 간디 왜 안 죽었냐고 물었다!"라고 왜곡한 것이 많이 와전된 것이다. "Winston sent me a peevish telegram to ask why Gandhi hadn't died yet! He has never answered my telegram about food." 처칠이 실제로 보낸 전보는 이렇다: "Surely Mr. Gandhi has made a most remarkable recovery, as he is already able to take an active part in politics. How does this square with the medical reports upon which his release on grounds of ill-health was agreed to by us? In one of these we were told that he would not be able to take any part in politics again." [55] 이전 타이와 버마족 명칭에 따르면 산과 숲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사용됐다. [56] 그 수가 구대륙의 전체 토끼수에 필적할 만큼이다. [57] 호주 대륙은 지리적인 고립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외래종에 취약했는데 토끼뿐만 아니라 들개(딩고), 야생 고양이, 앵무새, 물소, 들쥐, 잡초 등과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또 외래종에 의한 생태계 교란은 현대에도 빈번한 편으로서 최근 북미의 가물치와 칡, 우리나라의 베스, 뉴트리아, 황소개구리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호주의 왈라비가 영국의 생태계를 교란한 바 있다. [58]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 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이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당시 아이슬란드가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자 NATO의 모든 회원국 역시 이를 비난하였다. [59] 그리고 여론이 영국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단순하게 이 때까지 아이슬란드의 주산업은 어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어업이 아니더라도 먹고 살 길이 있던 반면 아이슬란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나온 것이다. 그러니 타국 입장에서는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60]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박탈엔 마찬가지로 동의하나, 대신 유엔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이중 대표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61] 대표적인 사건이 '라리학살'이다. 때문에 당시 대다수의 식민지를 협상을 통해 독립시켰던 영국은 케냐에는 무장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62] 제도권 언론인 연합뉴스는 이를 두고 마치 김정은의 고사포 처형과 똑같다고 비꼬았다. # 다양한 사진자로가 남아있으며 가장 유명한건 반제국주의자이자 종군화가인 바실리 베레샤긴이 남긴 기록화가 유명하다. [63] 참고로 인도에서 대포에 의한 처형방식은 인도인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자면 1798년 마드라스 보병 제1대대 소속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 병사가 대포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포이 항쟁 당시 몇몇 영국측 기록에 의하면 영국 민간인들 역시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에서 반란군에 의해 대포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64] British women can’t cook! [65] 필립 마운트배튼은 본래 그리스 왕족이었다. 사실 필립 공이 이 발언을 내뱉은 것은 엘리자베스 2세의 요리가 진짜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부부의 음식 취향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 필립은 생전 스스로 요리하는 것을 즐겼으며, 여왕도 모 미국 대통령이 레시피를 물어보게 만들 정도로 요리에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66] 대표적으로 B와 V, C나 K로 시작하는 단어의 발음이 겹치는 경우 [67] 영상 참조. 서울고등법원 제6특별부 사건번호 2003누15401 판결은 KE6316편 사고의 조종사 과실설을 부정한다. 해당 사고의 CVR 기록상 1500m를 1500ft로 착각해서 발언하는 등의 착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500ft(약 457m)로 잘못 발언한 것은 실제로는 단 1차례뿐이고, 그마저도 "3000ft 홀드." 발언을 한 뒤 기체의 고도가 1310m 지점에 이른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라 실제로는 기장과 부기장 모두 1500m로 인식하는 상태에서 말만 1500ft로 실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 이륙 전 계기판에 비행계획을 입력할 때는 미터법으로 제대로 입력한 점을 고려할 때 고도 착각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다. 오히려 "빨리 돌려봐, 이거 안 돌아.", "오늘 비행기가 이상해.", "야, 이거 엎어지겠다. 비행기 왜 이러냐?", "Unusual(조종 불능)." 등 승무원들의 의지와 무관한 기계적 결함이나 기타 외적 요인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화가 지속적으로 오갔을 뿐 아니라, 사고조사보고서가 반중력에 의한 실속 가능성 등을 섣불리 배제했다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68] 심지어 영국과 미국의 야드파운드법은 단위가 서로 다르다. 당장 휴대폰의 단위 계산기를 켜면 영국 갤런과 미국 갤런이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편차도 상당히 크다. [69] 사략선은 해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준군사조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정규 해군은 징집 및 지원만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기 어렵고 국가의 재정을 들여 군대를 훈련시켜야 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사략선은 국가의 정식 해군이 아니라 해군 육성 및 유지에 드는 국가의 재정을 그만큼 아낄 수 있는데다가 이미 해상 경험과 전투 경험이 모두 충분한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각국 해군은 사략선 제도를 금지하는 1856년 파리 조약 이전까지 사략선을 제2의 해군으로서 요긴하게 사용했기에 당시 국제법 체계에서도 사실상 군인으로 간주되어 전시 국제법의 보호를 받았다. 따라서 사략선의 나포 행위를 각국의 전쟁 상황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전쟁 중의 사략 행위는 오히려 정당했다. [70] 물론 영연방 소속이 아닌 국가로는 일본, 영연방 국가와 이웃한 일부 국가들 정도가 있으며, 예외적으로 캐나다는 영연방 국가임에도 좌핸들 우측통행을 채택했다. [71] 일례로 인도의 경우 간디는 떠나는 영국을 친구라 표현했으며, 초대 수상인 네루는 영국의 근대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고, 인도의 전총리 만모한 싱 역시도 공개연설에서 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인도의 여론도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은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를 찬양했는데 그 반대 목소리는 오히려 소수파로서 국민 대다수에게도 배격당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 # [72] 이에 따라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서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미국 노예해방/흑인운동의 시발점인 underground railroad(몰래 캐나다로 탈출하기 위한 경로)가 시작될 수 있었다. [73] 당시 일본 유녀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요시와라 유곽 문서 참조. 참고로 이 "인간 취급도 못 받았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해방 포고문에서조차 유녀들을 "생긴 건 인간이지만 일신의 자유를 상실한 소나 말 같은 가축". 즉, 끝까지 법적으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74] 대양간 뿐만 아니라 유럽 내 이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75] 영유아 사망률 감소가 결정적이었다. 무굴 제국은 1년에 유아 100만여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200만여 명이 불구가 되었는데 항 말라리아제인 퀴닌이 영국 식민 지배 시절 도입되면서 사망률이 감소하기도 했다. [76] 참고로 국가행정의 기초인 인구조사도 영국령 시절 처음 실시되었다. [77] 다만 미 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형태라 육군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78]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 (KAIST)이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진을 영국 서리 대학교에 파견하여 위성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별 1호를 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79] 현 보츠와나에 해당한다. [80] 물론 재산은 가져갈 수 없었다. [81] 런던 리버풀가 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제 막 기차역에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82] 카를 마르크스는 "뉴턴의 발견 이후 100년 동안 창조된 인류의 생산력은 이전 모든 역사가 창조한 전체 생산량보다 많은 것이었다"고 평론했고, 첸청단 북경대 교수 역시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사회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83] 예를 들어 산업화에 필요한 철강, 구리, 납, 보크사이트, 주석 등 주요 자원의 거의 98% 정도를 유럽에서 자급자족했으며 석유 이전 주력 동력이었던 석탄의 경우 영국과 독일은 최대생산국에 되려 제3세계로까지 수출하는 입장이었다. 1800-1938년 사이 유럽 선진국의 전체수출의 17%만이 유럽 밖 제3세계로 향했고, 그 중 절반 정도가 식민지로 수출 되었는데 결국 유럽 총수출의 9%만이 식민지로 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선진국들의 총수출은 GDP 중 8-9%를 차지했는데, 결국 식민지로의 수출은 국민 총생산의 불과 0.6-0.9%에 머물렀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지배는 약간의 수익성이 있는 사업이었지만, 서유럽이 산업화를 이룬 원인에는 식민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건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84] 19세기 말까지 란제리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리넨으로 제작된 속옷을 의미했을 뿐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용 속옷으로 의미가 변화하다가 68 운동 이후로 란제리가 선정성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85] 군사력이 강한 패권국은 전반적인 문명의 수준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근대의 영국이 산업화에 힘업어 다른 시기의 패권국에 비해서 유달리 빠른 속도로 과학과 산업의 수준을 발전시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86] 특히 제너는 특허를 포기하고 이 방법을 전세계에 공유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려 존경을 받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당시 영국의 앙숙이던 프랑스 나폴레옹조차 천연두의 공포를 종식시킨 에드워드 제너에 명예훈장을 수여한 것과 그의 편지 한 통으로 영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87] UN의 전신이라고 평가받는 LN조차도 1차 세계대전 직후에야 국제 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도 아래에 만들어졌다. 심지어 LN도 탄생 과정에서 나타난 부실함 때문에 전쟁을 막는 것을 실패하여 무너졌다. [88] 영국의 식민지라고 불리는 나라들 중 상당수는 먼저 보호를 자처한 보호령인 것도 좋은 예가 된다. [89] 당장 인도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위시한 인도 국민회의의 반영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영국에게 히틀러가 저항세력이 일소될 때까지 모두 사살하면 된다는 제안을 했다. 당연히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후일 나치 독일은 국가판무관부를 세운 모든 지역의 저항 운동을 이런 식으로 진압하며 학살을 자행했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90] 당장 아프리카 국가 중 독립할 때부터 민주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갔던 유이한 국가들인 보츠와나와 모리셔스가 영국 식민지 출신이다. 영국의 식민지 중 GDP Top 15 안에 드는 주요 국가만 무려 4개국( 미국, 인도, 캐나다, 호주)이나 있으므로 영국 본토까지 합하면 15대 경제대국 중 무려 1/3을 영국&영연방 계열이 독점하는 셈이며, 심지어 미국 역시 세계 현대사의 주인공격이므로 아직도 세계 정세에는 대영제국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셈이다. [91] 당연히 미국이 중국, 러시아 등 패권국을 꿈꾸는 경쟁자들보다 더 낫다고 해도 미국의 흑역사들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92] 그러나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 무슬림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미국 반대파들을 탄압하긴 했다. [93] 사실 조지 W. 부시가 한창 깽판을 치고 다니던 2000년대 후반까지는 현재 한국 인터넷에서 영국이 갖는 위치에 미국이 있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이후 미국이 주도적인 대외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 러시아 등 신흥 패권국들에 맞서는 히어로 포지션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인식이 사라졌고, 근세 서양사 관련 지식이 어설프게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그 자리를 영국이 채운 것. [94] 다만 프랑스가 역사에 관해 영국보다 덜 까인다고 보는 건 무리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지는 프랑스 특유의 패권주의, 국수주의 성향을 비꼬는 유럽의 짱깨라는 비하 표현이 혐성국보다 훨씬 유서깊기 때문. '세계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국이 원인'이라는 말도 거의 항상 뒤에 '영국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프랑스'라는 첨언이 따라온다. [95] 영국에서 레오폴드 2세를 식인종으로 묘사한 캐리커쳐가 그려졌을 정도다. [96] 이쪽은 동맹국들이 개막장의 끝을 달렸기에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는 것도 있는 데다가 식민지를 획득하기도 벅찬 오합지졸들의 나라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 오히려 다른 의미로 조롱당하는 케이스다. [97] 물론 일본은 영국보다 식민지가 적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부상한 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서 후발주자였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98]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 의해 약 18만에서 25만 명의 동남아 민간인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혹한 노동과 환경으로 인해 약 9만 명이 사망했다. [99] 특히 이 중 독일, 중국, 러시아의 경우 학교 교육 과정(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히틀러, 6.25 전쟁에서의 중공군 개입)이나 현대의 뉴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이들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악행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지라 독빠/ 중뽕/ 러빠들이 자신들이 추종하는 국가들의 만행을 덮기 위해 역사적으로 해당 국가들과 사이가 나쁜 영국으로 물타기하려고 혐성국 밈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남유럽권은 대부분 국가 팬덤 자체가 약해 이런 경향이 거의 없고 한국의 일뽕들은 영일동맹이라는 역사도 있고 애초에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본의 제국주의에 피해를 본 한국에서 일뽕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지라 철면피를 뒤집어쓰고 영국의 만행까지 대놓고 옹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빠들은 미영관계의 역사가 워낙 복잡한지라 언급을 피하는 편. [100] 물론 영국도 21세기에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어난 이라크 전쟁과 같은 과오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의 동맹국 일원으로서의 참가로서 주목적이 독재자 사담 후세인정권의 교체였다는 것과 실제 전쟁 후 현지정부에 정권이 자연스럽게 이양됐다는 점에서, 현재도 타국의 영토를 아예 병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 중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101]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 빅토리아 기념관'이 버젓이 있는 것은 물론 만모한 싱 총리가 200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놓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설파하는 연설을 했는데도 아주 큰 논란으로 번지지 않았을 정도로 영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다만 이는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절을 'British Raj(영국인 왕조)'로 부르며 무굴 제국,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애초에 혐성국 밈 만큼의 악행을 실제로 영국이 저질렀다면 당연히 단순한 이민족 왕조 정도로 생각했을리가 없다는 것을 보면, 이것까지 따질 이유는 없다. [102] 단 훗날 소련과 영국이 해당지역을 자신의 이권지역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적은 있다. 자세한 건 영국의 티베트 침공, 성스차이 문서 참고. [103] 물론 이런 시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서구 국가들이 자유·인권·평등을 주장하는 것조차 위선이라면서 더 악질적이고 교활하고 영악한 약육강식이라며 깐다. [104] 그러나 그런 논리를 정작 반서방 국가의 수뇌부들이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자기들이 추구하는 행위들도 결국 과거의 서방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몰락했던 냉전 시대 당시에 자기들을 민주 진영, 서방을 파쇼 진영이라고 부르며 서방의 자유, 인권, 평등의 논리에 대항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인권, 평등의 나라라고 주장했다가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냉전 시절 당시의 제3세계와 똑같은 처지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서방의 입장에서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아닌 이상 반서방권이 저지르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태도에 콧방귀만 뀌어주어도 충분한 셈이다. [105] 무아마르 카다피가 괜히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아랍의 노예무역에 대해 사죄했던 게 아니다. [1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있는 흑인 인구는 미국이나 남미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인데 그 이유는 이렇게 데려온 흑인 남자 노예를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보이는 족족 거세시켰기 때문이다. [107]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 국가들은 이들에게 노략질을 자제해 달라며 돈을 주며 달랠수밖에 없었다. [108] 한 추정치에 의하면 13세기 몽골의 침략 도중 혹은 직후 세계인구 11%가 사망했으며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수는 약 1900만명 전도로 추정되며 이에 부가적인 사망자 수를 합치면 약 3,775만~6,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109] 물론 이는 영국에 비해 훨씬 예전에 존재했던 국가에서 일어난 것도 있고, 당시의 국제정세는 소속 대륙 일부에서나 영향을 미쳤지 현재처럼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복잡하게 얽힌 것도 아니어서 다른 고대 정복군주들과 같이 한때의 역사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동슬라브에서야 명군 블라디미르 1세의 무덤을 파괴한 건 때문에 몽골 제국을 부정적으로 보고, 한국에서 원 간섭기를 이유로 몽골 제국을 비판할지언정 현재의 몽골 공화국을 비판하는 여론은 거의 없다. 현재의 몽골은 진작에 붕괴된 몽골 제국과는 별개인 외몽골 일부나 통치하는 약소국에 불과하므로 그때의 몽골과 지금의 몽골은 다르다고 보지만, 영국은 국가 멸망을 아예 겪지 않아 대영제국이나 현재의 영국이나 같은 영국인데다, 현재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국가이고, 벌인 일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이러한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110] 대세인 반응이 "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찰스 3세가 사과해야 하냐?"다. 사실 케냐의 독립 당시 찰스 3세는 10대였지만 패전 당시 12세였던 아키히토, 패전 당시 태어나지 않았던 하토야마 유키오도 과거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식민지 국가들에 사죄했다. [111] 영국 일은 아니긴 하지만 알제리가 프랑스에 사과를 요구한 글에 달린 댓글의 논조도 전술한 내용과 똑같다. # 일본인들만 과거 식민지들의 사과 요구에 반발하는 게 아닌 것이다. [112] 재밌게도 과거사 청산을 잘 했다고 평가받는 독일도 1차 대전 당시 식민지배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이다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들어먹었다. 근래에는 사과는 하고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사과하고 있잖아. 그때 일을 왜 우리가 배상해 줘야 하니?'라며 배상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2차 대전에만 집중된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점으로 꼽히고 있다.
1) 또 이 주장은 후세인이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가 속한 '베이루트 빌라예트' (Vlayet of Beirut)를 순수 아랍인들의 영토라며 완강히 제외를 거부한 11월15일자 편지내용에 완전히 자기모순적이 되며,
2) 시리아에 대해선 후세인은 처음부터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를 구상 했다는 건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며,
3) 그렇다면 아랍측은 반드시 팔레스타인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간에 합의본 바에 따라 '레반트의 서쪽지역'을 포기해 그 땅을 유대인에게 햘양 했어야 했는데, 그런것도 없이 국제연맹 마저 인정한 서부 팔레스타인 30% 마저도 모두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은 아랍측이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50] David Hunter Miller: My Diary of the Peace Conference [51] 단 이것은 제프리 에머스트의 명령이 아니었고, 이를 처음 고안해서 독단적으로 실행한 것은 미국인 민병대 용병인 모피상인 윌리엄 트렌트였다. Ranlet 2000, Knollenberg 1954, Mann 2009 [52] 애머스트 본인이 편지 원문에 강조 표현을 삽입했다. [53] 버마 대공세로 인도가 공격받고 있으며, 이미 일본의 동맹군으로 투신하여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는 인도 국민군이 있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학살을 저질러서 영국에 대한 반감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54] 원래는 투옥 되었을 때 건강이 악화되어 풀려났을 당시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다시는 정치활동을 못할 것이라고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정치활동을 이어나가자 여기에 대해 대충 "건강이 안 좋아서 정치활동 못할 거라고 풀어줬는데 어떻게 된 거냐?"라고 총독 Archibald Wavell 아치볼드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낸 거 가지고 나중에 총독이 "처칠은 내가 인도 식량 상황에 대해 어쩌냐고 물은 전보에 대해 대답도 않고 간디 왜 안 죽었냐고 물었다!"라고 왜곡한 것이 많이 와전된 것이다. "Winston sent me a peevish telegram to ask why Gandhi hadn't died yet! He has never answered my telegram about food." 처칠이 실제로 보낸 전보는 이렇다: "Surely Mr. Gandhi has made a most remarkable recovery, as he is already able to take an active part in politics. How does this square with the medical reports upon which his release on grounds of ill-health was agreed to by us? In one of these we were told that he would not be able to take any part in politics again." [55] 이전 타이와 버마족 명칭에 따르면 산과 숲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사용됐다. [56] 그 수가 구대륙의 전체 토끼수에 필적할 만큼이다. [57] 호주 대륙은 지리적인 고립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외래종에 취약했는데 토끼뿐만 아니라 들개(딩고), 야생 고양이, 앵무새, 물소, 들쥐, 잡초 등과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또 외래종에 의한 생태계 교란은 현대에도 빈번한 편으로서 최근 북미의 가물치와 칡, 우리나라의 베스, 뉴트리아, 황소개구리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호주의 왈라비가 영국의 생태계를 교란한 바 있다. [58]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 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이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당시 아이슬란드가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자 NATO의 모든 회원국 역시 이를 비난하였다. [59] 그리고 여론이 영국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단순하게 이 때까지 아이슬란드의 주산업은 어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어업이 아니더라도 먹고 살 길이 있던 반면 아이슬란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나온 것이다. 그러니 타국 입장에서는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60]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박탈엔 마찬가지로 동의하나, 대신 유엔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이중 대표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61] 대표적인 사건이 '라리학살'이다. 때문에 당시 대다수의 식민지를 협상을 통해 독립시켰던 영국은 케냐에는 무장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62] 제도권 언론인 연합뉴스는 이를 두고 마치 김정은의 고사포 처형과 똑같다고 비꼬았다. # 다양한 사진자로가 남아있으며 가장 유명한건 반제국주의자이자 종군화가인 바실리 베레샤긴이 남긴 기록화가 유명하다. [63] 참고로 인도에서 대포에 의한 처형방식은 인도인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자면 1798년 마드라스 보병 제1대대 소속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 병사가 대포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포이 항쟁 당시 몇몇 영국측 기록에 의하면 영국 민간인들 역시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에서 반란군에 의해 대포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64] British women can’t cook! [65] 필립 마운트배튼은 본래 그리스 왕족이었다. 사실 필립 공이 이 발언을 내뱉은 것은 엘리자베스 2세의 요리가 진짜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부부의 음식 취향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 필립은 생전 스스로 요리하는 것을 즐겼으며, 여왕도 모 미국 대통령이 레시피를 물어보게 만들 정도로 요리에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66] 대표적으로 B와 V, C나 K로 시작하는 단어의 발음이 겹치는 경우 [67] 영상 참조. 서울고등법원 제6특별부 사건번호 2003누15401 판결은 KE6316편 사고의 조종사 과실설을 부정한다. 해당 사고의 CVR 기록상 1500m를 1500ft로 착각해서 발언하는 등의 착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500ft(약 457m)로 잘못 발언한 것은 실제로는 단 1차례뿐이고, 그마저도 "3000ft 홀드." 발언을 한 뒤 기체의 고도가 1310m 지점에 이른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라 실제로는 기장과 부기장 모두 1500m로 인식하는 상태에서 말만 1500ft로 실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 이륙 전 계기판에 비행계획을 입력할 때는 미터법으로 제대로 입력한 점을 고려할 때 고도 착각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다. 오히려 "빨리 돌려봐, 이거 안 돌아.", "오늘 비행기가 이상해.", "야, 이거 엎어지겠다. 비행기 왜 이러냐?", "Unusual(조종 불능)." 등 승무원들의 의지와 무관한 기계적 결함이나 기타 외적 요인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화가 지속적으로 오갔을 뿐 아니라, 사고조사보고서가 반중력에 의한 실속 가능성 등을 섣불리 배제했다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68] 심지어 영국과 미국의 야드파운드법은 단위가 서로 다르다. 당장 휴대폰의 단위 계산기를 켜면 영국 갤런과 미국 갤런이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편차도 상당히 크다. [69] 사략선은 해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준군사조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정규 해군은 징집 및 지원만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기 어렵고 국가의 재정을 들여 군대를 훈련시켜야 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사략선은 국가의 정식 해군이 아니라 해군 육성 및 유지에 드는 국가의 재정을 그만큼 아낄 수 있는데다가 이미 해상 경험과 전투 경험이 모두 충분한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각국 해군은 사략선 제도를 금지하는 1856년 파리 조약 이전까지 사략선을 제2의 해군으로서 요긴하게 사용했기에 당시 국제법 체계에서도 사실상 군인으로 간주되어 전시 국제법의 보호를 받았다. 따라서 사략선의 나포 행위를 각국의 전쟁 상황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전쟁 중의 사략 행위는 오히려 정당했다. [70] 물론 영연방 소속이 아닌 국가로는 일본, 영연방 국가와 이웃한 일부 국가들 정도가 있으며, 예외적으로 캐나다는 영연방 국가임에도 좌핸들 우측통행을 채택했다. [71] 일례로 인도의 경우 간디는 떠나는 영국을 친구라 표현했으며, 초대 수상인 네루는 영국의 근대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고, 인도의 전총리 만모한 싱 역시도 공개연설에서 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인도의 여론도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은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를 찬양했는데 그 반대 목소리는 오히려 소수파로서 국민 대다수에게도 배격당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 # [72] 이에 따라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서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미국 노예해방/흑인운동의 시발점인 underground railroad(몰래 캐나다로 탈출하기 위한 경로)가 시작될 수 있었다. [73] 당시 일본 유녀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요시와라 유곽 문서 참조. 참고로 이 "인간 취급도 못 받았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해방 포고문에서조차 유녀들을 "생긴 건 인간이지만 일신의 자유를 상실한 소나 말 같은 가축". 즉, 끝까지 법적으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74] 대양간 뿐만 아니라 유럽 내 이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75] 영유아 사망률 감소가 결정적이었다. 무굴 제국은 1년에 유아 100만여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200만여 명이 불구가 되었는데 항 말라리아제인 퀴닌이 영국 식민 지배 시절 도입되면서 사망률이 감소하기도 했다. [76] 참고로 국가행정의 기초인 인구조사도 영국령 시절 처음 실시되었다. [77] 다만 미 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형태라 육군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78]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 (KAIST)이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진을 영국 서리 대학교에 파견하여 위성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별 1호를 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79] 현 보츠와나에 해당한다. [80] 물론 재산은 가져갈 수 없었다. [81] 런던 리버풀가 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제 막 기차역에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82] 카를 마르크스는 "뉴턴의 발견 이후 100년 동안 창조된 인류의 생산력은 이전 모든 역사가 창조한 전체 생산량보다 많은 것이었다"고 평론했고, 첸청단 북경대 교수 역시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사회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83] 예를 들어 산업화에 필요한 철강, 구리, 납, 보크사이트, 주석 등 주요 자원의 거의 98% 정도를 유럽에서 자급자족했으며 석유 이전 주력 동력이었던 석탄의 경우 영국과 독일은 최대생산국에 되려 제3세계로까지 수출하는 입장이었다. 1800-1938년 사이 유럽 선진국의 전체수출의 17%만이 유럽 밖 제3세계로 향했고, 그 중 절반 정도가 식민지로 수출 되었는데 결국 유럽 총수출의 9%만이 식민지로 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선진국들의 총수출은 GDP 중 8-9%를 차지했는데, 결국 식민지로의 수출은 국민 총생산의 불과 0.6-0.9%에 머물렀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지배는 약간의 수익성이 있는 사업이었지만, 서유럽이 산업화를 이룬 원인에는 식민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건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84] 19세기 말까지 란제리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리넨으로 제작된 속옷을 의미했을 뿐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용 속옷으로 의미가 변화하다가 68 운동 이후로 란제리가 선정성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85] 군사력이 강한 패권국은 전반적인 문명의 수준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근대의 영국이 산업화에 힘업어 다른 시기의 패권국에 비해서 유달리 빠른 속도로 과학과 산업의 수준을 발전시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86] 특히 제너는 특허를 포기하고 이 방법을 전세계에 공유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려 존경을 받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당시 영국의 앙숙이던 프랑스 나폴레옹조차 천연두의 공포를 종식시킨 에드워드 제너에 명예훈장을 수여한 것과 그의 편지 한 통으로 영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87] UN의 전신이라고 평가받는 LN조차도 1차 세계대전 직후에야 국제 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도 아래에 만들어졌다. 심지어 LN도 탄생 과정에서 나타난 부실함 때문에 전쟁을 막는 것을 실패하여 무너졌다. [88] 영국의 식민지라고 불리는 나라들 중 상당수는 먼저 보호를 자처한 보호령인 것도 좋은 예가 된다. [89] 당장 인도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위시한 인도 국민회의의 반영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영국에게 히틀러가 저항세력이 일소될 때까지 모두 사살하면 된다는 제안을 했다. 당연히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후일 나치 독일은 국가판무관부를 세운 모든 지역의 저항 운동을 이런 식으로 진압하며 학살을 자행했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90] 당장 아프리카 국가 중 독립할 때부터 민주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갔던 유이한 국가들인 보츠와나와 모리셔스가 영국 식민지 출신이다. 영국의 식민지 중 GDP Top 15 안에 드는 주요 국가만 무려 4개국( 미국, 인도, 캐나다, 호주)이나 있으므로 영국 본토까지 합하면 15대 경제대국 중 무려 1/3을 영국&영연방 계열이 독점하는 셈이며, 심지어 미국 역시 세계 현대사의 주인공격이므로 아직도 세계 정세에는 대영제국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셈이다. [91] 당연히 미국이 중국, 러시아 등 패권국을 꿈꾸는 경쟁자들보다 더 낫다고 해도 미국의 흑역사들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92] 그러나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 무슬림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미국 반대파들을 탄압하긴 했다. [93] 사실 조지 W. 부시가 한창 깽판을 치고 다니던 2000년대 후반까지는 현재 한국 인터넷에서 영국이 갖는 위치에 미국이 있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이후 미국이 주도적인 대외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 러시아 등 신흥 패권국들에 맞서는 히어로 포지션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인식이 사라졌고, 근세 서양사 관련 지식이 어설프게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그 자리를 영국이 채운 것. [94] 다만 프랑스가 역사에 관해 영국보다 덜 까인다고 보는 건 무리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지는 프랑스 특유의 패권주의, 국수주의 성향을 비꼬는 유럽의 짱깨라는 비하 표현이 혐성국보다 훨씬 유서깊기 때문. '세계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국이 원인'이라는 말도 거의 항상 뒤에 '영국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프랑스'라는 첨언이 따라온다. [95] 영국에서 레오폴드 2세를 식인종으로 묘사한 캐리커쳐가 그려졌을 정도다. [96] 이쪽은 동맹국들이 개막장의 끝을 달렸기에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는 것도 있는 데다가 식민지를 획득하기도 벅찬 오합지졸들의 나라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 오히려 다른 의미로 조롱당하는 케이스다. [97] 물론 일본은 영국보다 식민지가 적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부상한 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서 후발주자였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98]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 의해 약 18만에서 25만 명의 동남아 민간인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혹한 노동과 환경으로 인해 약 9만 명이 사망했다. [99] 특히 이 중 독일, 중국, 러시아의 경우 학교 교육 과정(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히틀러, 6.25 전쟁에서의 중공군 개입)이나 현대의 뉴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이들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악행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지라 독빠/ 중뽕/ 러빠들이 자신들이 추종하는 국가들의 만행을 덮기 위해 역사적으로 해당 국가들과 사이가 나쁜 영국으로 물타기하려고 혐성국 밈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남유럽권은 대부분 국가 팬덤 자체가 약해 이런 경향이 거의 없고 한국의 일뽕들은 영일동맹이라는 역사도 있고 애초에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본의 제국주의에 피해를 본 한국에서 일뽕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지라 철면피를 뒤집어쓰고 영국의 만행까지 대놓고 옹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빠들은 미영관계의 역사가 워낙 복잡한지라 언급을 피하는 편. [100] 물론 영국도 21세기에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어난 이라크 전쟁과 같은 과오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의 동맹국 일원으로서의 참가로서 주목적이 독재자 사담 후세인정권의 교체였다는 것과 실제 전쟁 후 현지정부에 정권이 자연스럽게 이양됐다는 점에서, 현재도 타국의 영토를 아예 병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 중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101]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 빅토리아 기념관'이 버젓이 있는 것은 물론 만모한 싱 총리가 200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놓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설파하는 연설을 했는데도 아주 큰 논란으로 번지지 않았을 정도로 영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다만 이는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절을 'British Raj(영국인 왕조)'로 부르며 무굴 제국,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애초에 혐성국 밈 만큼의 악행을 실제로 영국이 저질렀다면 당연히 단순한 이민족 왕조 정도로 생각했을리가 없다는 것을 보면, 이것까지 따질 이유는 없다. [102] 단 훗날 소련과 영국이 해당지역을 자신의 이권지역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적은 있다. 자세한 건 영국의 티베트 침공, 성스차이 문서 참고. [103] 물론 이런 시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서구 국가들이 자유·인권·평등을 주장하는 것조차 위선이라면서 더 악질적이고 교활하고 영악한 약육강식이라며 깐다. [104] 그러나 그런 논리를 정작 반서방 국가의 수뇌부들이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자기들이 추구하는 행위들도 결국 과거의 서방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몰락했던 냉전 시대 당시에 자기들을 민주 진영, 서방을 파쇼 진영이라고 부르며 서방의 자유, 인권, 평등의 논리에 대항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인권, 평등의 나라라고 주장했다가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냉전 시절 당시의 제3세계와 똑같은 처지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서방의 입장에서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아닌 이상 반서방권이 저지르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태도에 콧방귀만 뀌어주어도 충분한 셈이다. [105] 무아마르 카다피가 괜히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아랍의 노예무역에 대해 사죄했던 게 아니다. [1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있는 흑인 인구는 미국이나 남미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인데 그 이유는 이렇게 데려온 흑인 남자 노예를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보이는 족족 거세시켰기 때문이다. [107]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 국가들은 이들에게 노략질을 자제해 달라며 돈을 주며 달랠수밖에 없었다. [108] 한 추정치에 의하면 13세기 몽골의 침략 도중 혹은 직후 세계인구 11%가 사망했으며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수는 약 1900만명 전도로 추정되며 이에 부가적인 사망자 수를 합치면 약 3,775만~6,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109] 물론 이는 영국에 비해 훨씬 예전에 존재했던 국가에서 일어난 것도 있고, 당시의 국제정세는 소속 대륙 일부에서나 영향을 미쳤지 현재처럼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복잡하게 얽힌 것도 아니어서 다른 고대 정복군주들과 같이 한때의 역사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동슬라브에서야 명군 블라디미르 1세의 무덤을 파괴한 건 때문에 몽골 제국을 부정적으로 보고, 한국에서 원 간섭기를 이유로 몽골 제국을 비판할지언정 현재의 몽골 공화국을 비판하는 여론은 거의 없다. 현재의 몽골은 진작에 붕괴된 몽골 제국과는 별개인 외몽골 일부나 통치하는 약소국에 불과하므로 그때의 몽골과 지금의 몽골은 다르다고 보지만, 영국은 국가 멸망을 아예 겪지 않아 대영제국이나 현재의 영국이나 같은 영국인데다, 현재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국가이고, 벌인 일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이러한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110] 대세인 반응이 "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찰스 3세가 사과해야 하냐?"다. 사실 케냐의 독립 당시 찰스 3세는 10대였지만 패전 당시 12세였던 아키히토, 패전 당시 태어나지 않았던 하토야마 유키오도 과거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식민지 국가들에 사죄했다. [111] 영국 일은 아니긴 하지만 알제리가 프랑스에 사과를 요구한 글에 달린 댓글의 논조도 전술한 내용과 똑같다. # 일본인들만 과거 식민지들의 사과 요구에 반발하는 게 아닌 것이다. [112] 재밌게도 과거사 청산을 잘 했다고 평가받는 독일도 1차 대전 당시 식민지배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이다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들어먹었다. 근래에는 사과는 하고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사과하고 있잖아. 그때 일을 왜 우리가 배상해 줘야 하니?'라며 배상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2차 대전에만 집중된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점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