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Le massacre du 17 octobre 1961مجزرة باريس عام 1961
1961년 10월 17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비시 정부 하에서 나치에 협력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모리스 파퐁 당시 파리 경찰서장의 명령으로 프랑스 파리의 경찰들이 알제리인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정부가 인정한 것만 48명, 통계에 따라선 최대 300명 이상의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2. 전개
2.1. 학살 전의 상황
1961년 8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알제리의 독립운동 단체 국민해방전선(FLN)은 프랑스군이 알제리 전쟁에서 저지른 학살에 항의하며 파리에서 경찰 11명을 죽이고 17명을 다치게 했는데 1961년 10월 5일에 파퐁은 '알제리 테러리스트들의 범죄 행위를 지체 없이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명목으로 프랑스 전체의 알제리인과 무슬림에 한해 오후 8시 30분에서 오전 5시 30분까지 통행금지를 '권고'라며 사실상 강제했고 직업상의 의무로 인해 이 시간 동안 외출해야 하는 사람들은 현지 당국에 요청을 하여 인증서를 받게 했으며 알제리인들의 단체 여행을 금지하고 무슬림이 소유하거나 자주 방문하는 술집은 오후 7시만 되면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이에 1961년 10월 17일 저녁 8시에 FLN이 주도한 약 2만~3만 명 규모의 알제리인[1]이 통행금지에 항의하는 시위를 비폭력적으로 일으키자[2] 파퐁은 시위 현장에 1,658명의 무장 경관들과 보안요원들을 투입하여 11,538명의 시위 참여자들을 강제로 연행하고 수용소, 병원과 스포츠 센터, 축구 경기장을 개조한 임시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구금했으며 심지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평화롭게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직접 발포까지 승인해 가며 유혈 진압을 명령했다.
2.2. 진압의 참상
알제리인의 공격 1번에 프랑스 경찰은 10번의 공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모리스 파퐁 당시 파리 경찰서장, 1961년 10월 2일에 알제리측에게 살해된 경찰 하사관의 장례식에서 남긴 말
진압 지시를 받은 파리의 경찰들은 보조경찰대(FPA),[3] 보안군, 소방관, 자경단원들과 함께 파리의 중심부에서 평화 시위를 하는 알제리인들에게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퍼부었는데 이렇게 자행된 진압은 뒤에 일어날
그리스에서의
1973년 아테네 국립기술대 학살[4],
중앙아프리카 제국에서의
1979년 방기 학살,
대한민국에서의
1980년 광주 학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전술한 학살들은 각각 신흥 선진국+중견국의 수도/최빈국+약소국의 수도/중진국 하위권+중견국의 지방도시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파리 학살은 (당시 기준으로는) 선진국이자 주류 국가의 수도 중심부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는 파리 학살이 아테네 학살, 방기 학살, 광주 학살보다 더 악질이라 볼 여지도 충분하다.[5] 2020년대 국제정세로 치환하면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보다 더 잔혹한 일이 유럽 주류국가의 수도에서 벌어진 격이다.모리스 파퐁 당시 파리 경찰서장, 1961년 10월 2일에 알제리측에게 살해된 경찰 하사관의 장례식에서 남긴 말
경관들은 시위대에게 길이 80~85cm, 직경 4cm의 긴 나무 곤봉과 개머리판, 곡괭이 손잡이, 쇠창살로 머리 위주로 무자비한 구타를 퍼붓거나 리볼버나 기관총을 발포했고 심지어 브레이크 케이블로 시위대의 목을 조르거나 나무에 강제로 목을 매달기도 했으며 사망한 시위대의 시신들을 센강에 유기한 것도 모자라 살아 있는 시위대들까지 손과 발을 묶고 센 강에 던지며 이틀 밤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이렇게 유기된 시체들은 '손상되고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라울 레타르드(Raoul Letard)라는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진압군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냥하고 쏘았으며 쏠 사람이 없을 때만 떠났다고 하며 다른 사람은 "내 눈으로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이미 피를 흘리고 있는 가장 약한 사람들을 계속 구타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고 생후 3개월 된 아이를 안은 채 시위를 목격한 프랑스인 여성은 "그들이 여자든, 아기와 함께 있든, 남자든 상관없었다."고 증언하며[6] "그 아기가 죽을까 봐 두려웠다."는 말을 덧붙였다.
수용소나 임시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도 끔찍한 대우를 당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찰은 고문 중 수감자가 다치면 치료를 받게 한 후 다시 고문했으며 심지어 임시 수용소로 개조된 스포츠 센터에서는 수감자들을 화장실로 끌고 가고는 구타해 죽여 시체가 창고에 쌓일 정도였다. 수감자 중 1천~2천 명이 알제리로 강제로 추방당했으며 경찰들은 법의학 의사들이 시신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센강에 시신을 유기한 데다 심지어 사망자들의 시계와 돈을 훔치기까지 했다. 당시 사망자 중 50명은 파리의 경찰 본부 안뜰에서 구타나 총격으로 사망했다.
심지어 다른 북아프리카인들과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이탈리아인까지 '알제리인처럼 갈색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었고[7] 경찰들은 거리에서 여자와 어린이들, 경찰에게 항의하는 구경꾼들에게까지 총구를 겨눈 후 이송 버스에 던져 수용소로 이송했으며 알제리인들의 빈민가에까지 경찰들이 습격해 빈민가 주민들을 강제로 경찰서로 끌고 가 무자비하게 구타를 가하는 일도 있었던 데다 문자 그대로 부상자를 치료하는 의사들까지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게다가 파퐁은 진압하던 경찰들을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알제리인들이 파리에서 경찰에게 총을 쏴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거짓 보도를 경찰 라디오에 유포하기까지 했다.
사건 발생 직후 프랑스 정부는 '시위대 중에서는 총에 맞아 죽은 2명만이 사망했으며 그것도 시위대의 경찰에 대한 총격에 대응한 경찰의 정당방위였다'는 거짓 발표를 했고 이후에는 '3명 사망, 64명 부상(경찰관 인명피해는 사망 0, 부상 12)'으로 보고되었다. 파퐁 본인은 1961년 11월 13일에 파리 지방 의회에서 "우리는 파리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며 이 사건에 참여한 경찰 중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22년 6월 6일에 메디아파르지가 공개한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이 학살에 대해 통보받고 서면으로 '죄인'인 파퐁을 기소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 기소가 그의 지지자 대부분을 분열시키까 봐 파퐁을 처벌할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3. 학살 이후
이 학살 후에도 프랑스 정부는 언론을 검열하여 언론에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거의 하지 않게 하고 언론인들의 구치소 접근을 막거나 이 학살에 대해 다룬 책의 판매와 다큐멘터리 상영을 금지하고 이 학살에 대해 증언하고자 하는 목격자들에게 기소 위협까지 가하는 등 37년 동안 진실을 은폐해 오다가 자크 시라크 대통령 집권기인 1998년에야 40명의 사망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같은 해에 프랑스 정부 위원회는 공식 사망자 수를 48명으로 정정했다. 2001년 10월 17일 사회당 소속의 베르트랑 들라노에[8] 파리 시장은 생미셸 다리에 이 날의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는 명판을 설치했는데 이 명판에는 '1961년 10월 17일 평화적 시위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사망한 수많은 알제리인들을 추모하며'라고 적혀 있다. 학살이 공론화된 후 학살 피해자들의 유가족이 소송을 걸었지만 이 소송들은 '반인도 범죄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만 해당된다'는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이유로 모조리 기각당했다.2012년 10월 17일에 프랑수아 올랑드는 "1961년 10월 17일, 독립운동을 하던 알제리인들이 피비린내나는 탄압 속에 살해당했습니다. 공화국은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올랑드의 후임인 에마뉘엘 마크롱은 학살 60주기인 2021년 10월 17일에 "그날 밤 모리스 파퐁의 휘하에 저지른 범죄는 공화국을 위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마크롱의 성명이 발표된 후에도 찜찜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이 성명이 '파퐁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학살에서 국가의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출처
한편 이 학살을 지시한 당시 파리 경찰서장이었던 모리스 파퐁은 처벌은 커녕 오히려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정권의 예산 장관으로까지 임명되면서 더욱 승승장구했으나 1981년에 비시 프랑스에 협조하며 약 1,600명의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1997년에 재판에 회부되어 1998년에 금고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나치 협조에 대한 혐의만 적용된 것이었고 파리 학살에 대한 혐의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참고로 파퐁은 형 선고 후에도 이 학살의 책임자가 파퐁이라는 글을 쓴 역사학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2002년에 건강 문제로 석방되었고 2007년에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2024 파리 올림픽의 개회식 때 알제리 선수단이 배를 타고 입장하면서 센강에 붉은 장미를 던졌는데, 1961년에 파리 경찰이 알제리 독립을 위해 시위하던 사람들을 학살하고, 센강에 시신을 버린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4. 정확한 사망자 수는?
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학살 사실을 인정한 후에도 파리 경찰 기록 보관소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엄격히 제한되어 이날의 정확한 사망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일각에서는 실제 사망자가 최소 200명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프랑스의 역사학자 장뤽 에이나우디(Jean-Luc Einaudi, 1951~2014)는 이 학살에서 최대 200명이 사망했고 1961년 가을에 파리 경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325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고 1999년 프랑스 총리실의 조사는 10월 17일과 18일에 센 강에 버려진 시체는 48구에 1961년 한 해 동안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운동과 관련해 사망한 사람은 246명이라고 집계했으며 1961년에 FLN 프랑스연맹은 이 학살의 인명피해가 알제리인 200명 사망, 400명 실종, 2,300명 부상으로 추정했다.5. 매체
6. 관련 문서
[1]
당시 파리에 살던 알제리인이 15만 명이었다.
[2]
이는 FLN이 이 시위에 참여한 모든 알제리 남성에게 '어떤 무기도 휴대해서는 안 되며 어떤 도발에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3]
1959년 만들어진 경찰 부대.
미셸 드브레 총리의 지시와 파퐁의 비준을 통해 만들어졌고, 총리에 직속된 채 운영되었다. 알제리인으로 구성되어 프랑스 본토에서 활동하는 FLN과 싸웠고, 1962년 해체되었다.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의 일부였으므로 사실상
자국민 학살 부대였으며, 알제리판
간도특설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4]
이것도 갓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 국가의 수도에서 일어났으나 당시 그리스는 군사독재 국가였다.
[5]
물론 사망자 수와 순수 잔혹성으로 보면 파리 학살은 저 셋보다는 양반이다. 하지만 학살이 일어난 국가의 경제력과 국제적 입지 차이까지 감안하면 이 상대적인 '우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6]
당시 사망자 중에는 파티마 베다르(Fatima Bedar, 1946~1961)라는 이름의 15세밖에 안 된 소녀도 있었다. 그녀는 구타를 당하고 산 채로 강에 던져져 죽었으나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던 그녀의 부모는 '딸이 1961년 10월 31일(파티마의 시체가 발견된 날짜다)에 강에 투신자살했다'는 허위 진술서에 강제로 서명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 학살의 가장 어린 희생자였다.
[7]
당시 파리에 살던 모로코인들은 반복되는 경찰의 급습을 피하기 위해 문에 "모로코인"이라는 표지판을 붙여야 했다.
[8]
Bertrand Delanoë, 1950~. 2001년부터 2014년까지 파리 시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