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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1:56:02

레자 샤 팔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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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9f40><colcolor=#fff> 이란 제국 팔라비 왕조 초대 샤한샤
레자 샤 팔라비
رضا شاه پهلوی | Reza Shah Pahlavi
파일:Reza_shah_uniform.jpg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 1878년 3월 15일
이란 숭고국 마잔다란
사망 1944년 7월 26일 (향년 66세)
남아프리카 연방 요하네스버그
재임기간 이란 제국 샤한샤
1925년 12월 15일 ~ 1941년 9월 16일
서명
파일:레자 샤 팔라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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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B0000><colcolor=#fff> 왕명 레자 샤 (رضا پهلوی)
배우자 마리암 사바드쿠히
님타즈 카눔
투란 아미르솔레이마니
에스맛 도울라트샤히
자녀 장남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포함
슬하 7남 4녀
종교 시아파 이슬람 ( 세속주의)
소속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 }}}}}}}}}
1. 소개2. 생애3. 사후4. 가족5. 평가6. 매체에서

[clearfix]

1. 소개

이란 팔라비 왕조의 초대 이자 초대 샤한샤.

2. 생애

1878년 페르시아 북부 마잔다란 지방의 알라슈트라는 산마을에서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압바스 알리 칸(1814~1879)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8개월에 아버지를 잃고 테헤란으로 이사했다. 16살에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에 일개 병사로 입대했다. 기관총의 명수로 알려졌으며 40세 이전에 고속 승진을 해 준장까지 진급했다. 장교 시절에는 레자 칸(Reza Khan)으로 불렸다.

당시 페르시아는 카자르 왕조의 무능과 부패[1],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2] 영국 등 열강의 획책으로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레자 칸은 1921년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 휘하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점령, 스스로 육군대신이 되어 1919년 체결된 영국-이란 협정을 무시하며 치외법권을 철폐하는 데 성공한다. 쿠데타 동지였으나 정적이 된 지아울딘 타바타바이 총리를 물리치고[3] 1923년 10월부터는 본인이 총리대신을 겸직하였으며, 총리 취임과 함께 국회에서 전하 칭호를 받았으며[4] 내정 개혁에 착수한다.

1925년 10월 31일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의회에서 의결하였는데, 그 무렵 레자 칸은 케말 파샤를 건국 롤모델로 삼은 바 있으며 튀르키예처럼 공화국으로 이행하려 했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확실치 않고,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한 보수 성직자들과 이란 민족주의의 득세로 석유이권을 침해받을 것을 염려한 영국의 반대를 등에 업고 동년 12월 12일 이란 국회에 의해 왕(= )으로 추대되였으며, 사흘 뒤인 15일 정식으로 즉위,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1926년 4월 15일에 대관식을 가졌다.

왕위에 오른 레자 샤는 본격적으로 국내 개혁에 착수하였다. 1926년 사법 개혁을 단행하고, 1927년 국립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929년에는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미국에서 재정 고문관을 초빙하여 재정 개혁을 하였고, 차별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성 해방을 결의하고 1936년에는 히잡 금지령을 내리는 한편[5], 1934년 테헤란 대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개혁에 노력했다. 또한 중앙집권을 추진하며 1938년에는 이란 횡단 철도를 완성해서 사회간접자본 육성에도 진력했다.

대외적으로 국제연맹에 가맹하였으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하고 국왕(king)으로 번역되던 왕호인 황제(emperor)를 의미하는 샤한샤로 격상하였다.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지지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황제 독재가 강했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다. 특히 일련의 세속주의 정책 때문에 이슬람 성직자들과 충돌이 매우 컸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나치 독일과 거래하였고 소련의 물자 수송 요구도 거부하였다.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자 불안해진 영국과 소련이 1941년 8월 사전 경고나 선전 포고도 없이 무단으로 이란을 침공해 나라가 두 쪽이 나고 레자 샤는 영국과 소련에 굴복해 추축국과 단교했다. 게다가 두 나라의 압력으로 황태자 모하마드 레자에게 양위하고 퇴위, 모리셔스를 거쳐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망명해 1944년 그곳에서 별세했다. 이란 제국 정부는 7월 31일을 애도일로 선포해 모든 공공기관과 사업체가 이 날 문을 닫았다.

3. 사후

1950년 5월 7일 이란으로 이장되었으며, 이때 이란 국회에서 대제(رضا شاه بزرگ) 칭호를 헌정했다. 테헤란 교외 레이(Rey)에 영묘가 세워졌으나 1979년 이슬람 혁명 때 파괴되었다. 반(反) 제정주의자들이 그의 유해를 찾는 데 실패했었는데, 이집트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었지만 2018년 옛 영묘 부근에서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미라가 나와 파문이 일기도 했다. # 해외로 망명 중인 레자 팔라비 전(前) 황태자는 할아버지의 유해가 맞다고 말했다. #[6]

4. 가족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마리암 사바드쿠히
(Maryam Savadkoohi, 1894년 결혼, 1904년 사별)
1녀 함담살타네 팔라비
(Hamdamsaltaneh Pahlavi)
1903년 2월 22일 1992년 4월 5일 슬하 2남 1녀
님타즈 카눔
(Nimtaj Khanoum, 1916년 결혼)
2녀 샴스 팔라비
(Shams Pahlavi)
1917년 10월 28일 1996년 2월 29일 슬하 2남 1녀
1남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Mohammad Reza Pahlavi)
1919년 10월 26일 1980년 7월 27일 파라 디바
슬하 2남 3녀
3녀 아슈라프 팔라비
(Ashraf Pahlavi)
1919년 10월 26일 2016년 1월 7일 슬하 2남 1녀
2남 알리 레자 팔라비
(Ali Reza Pahlavi)
1922년 3월 1일 1954년 10월 17일 크리스티아네 클로에프스키
슬하 1남
투란 아미르솔레이마니
(Turan Amirsoleimani, 1922년 결혼, 1923년 이혼)
3남 골람 레자 팔라비
(Gholam Reza Pahlavi)
1923년 5월 15일 2017년 5월 7일 슬하 2남 3녀
에스맛 도울라트샤히
(Esmat Dowlatshahi, 1923년 결혼)
4남 압둘 레자 팔라비
(Abdul Reza Pahlavi)
1924년 8월 19일 2004년 5월 11일 슬하 1남 1녀
5남 아마드 레자 팔라비
(Ahmad Reza Pahlavi)
1925년 9월 27일 1981년경(일자 불명) 슬하 3남 2녀
6남 마무드 레자 팔라비
(Mahmoud Reza Pahlavi)
1926년 10월 5일 2001년 3월 15일 2번 결혼
자녀 없음
4녀 파테메 팔라비
(Fatemeh Pahlavi)
1928년 10월 30일 1987년 5월 27일 슬하 4남 2녀
7남 하미드 레자 팔라비
(Hamid Reza Pahlavi)
1932년 7월 4일 1992년 7월 12일 슬하 2남 2녀

5. 평가

무기를 잘 다루는 북방 출신의 무장으로, 쿠데타 4년 후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이후 아들에게 양위했다는 점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공통점이 있다.

다만 본인이 염두에 둔 롤모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였고, 사실 왕정에 더해 오스만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한 케말 파샤가 현대 튀르키예사에 미친 입지에 비하면 이란 혁명으로 인해 과소평가 당하는 측면이 있는 인물이다.

아타튀르크가 롤모델이었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는지, 아들 모하마드보다도 더 강경한 세속주의자였다.[7]

세속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히잡 뿐만 아니라 이슬람 남성의 전통 복장 역시 금지시키면서 남자들의 양복 프랑스군 캐피 군모를 닮은 챙모자, 일명 팔라비 모자 착용을 강제시킨 바 있다. 때문에 이 당시 이란 남성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군모처럼 생긴 챙모자를 쓰고 있으며, 해당 모자를 보급시킨 레자 샤 본인 역시 이 모자를 즐겨 썼다.[8]

강한 반(反) 성직자 정책을 펼쳐서인지 201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이슬람 신정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시위 구호 중에 "레자 샤!! 신께서 당신의 영혼을 보호하길!!", "오오, 이란의 샤여!! 이란으로 돌아오라!" 같은 레자 샤를 그리워하거나 찬양하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샤와 팔라피 왕조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 열풍이 불게 된 건 일명 히잡 시위로 알려진 2022년 이란 시위로, 손자인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와 며느리인 파라 팔라비가 시위 지지를 천명하고 언론 인터뷰 등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부터이다.


레자 샤의 롤모델이자 꽤나 절친한 사이였던[9] 아타튀르크와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는데, 레자 샤는 아제르바이잔어를,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며 통역없이 소통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이 있다. 당시에는 튀르키예 언어정화운동이 한창 진행중이던 터라 오스만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아제르바이잔어나 튀르키예어나 페르시아어 계열의 단어들이 상당수 중복되었기 때문에 소통하기도 더 쉬웠다. 레자 샤는 어머니가 아제르바이잔인이었으며 이전 왕조인 카자르 왕조도 아제르바이잔계 왕조라 아제르바이잔어에 매우 유창했다.

6. 매체에서

파일:Reza Shah Pahlavi(Hearts of Iron IV).jpg
Hearts of Iron에서 이란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소련 영국에게 각각 이란 침공 선택지가 있지만, 그저 합병하거나 괴뢰화할 뿐이고 공동 행동 따위도 없어서 실제 역사대로 전혀 안 굴러간다. 아들인 팔라비 2세에게 양위하는 것도 당연히 없다. 앞으로의 패치가 필요한 부분.


[1] 팔라비 왕조도 현 이란 신정정부에 의해 부패했다고 까이지만 현 이란 신정정부의 부정부패보단 훨씬 양호한 수준이고, 카자르 왕조는 문서에서 보듯이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땅바닥의 땅바닥까지 떨어진 수준이었다. [2] 러시아 혁명 이후에 이란 북부에 군사 개입을 해서 길란 지방에 이른바 페르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 [3] 타바타바이는 20년 가까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머물다 레자 샤가 퇴위한 뒤에 귀국했다. [4] 영어로 번역된 호칭이 Highness였으므로 각하가 아닌 전하가 맞다. [5] 히잡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남성의 전통 복장 역시 성직자를 제외하면 금지시켰다. [6] 이후 재매장되었다고 한다. [7] 아들인 팔라비 2세 절대왕정을 이룩하기 위해 백색혁명이라는 이름 하에 이슬람 성직자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완전히 거세시키려다 이란 혁명으로 역풍을 맞고 몰락한 인물이다. 이전 세대다 보니 성직자들을 바로 탄압하기 어려웠을 뿐 팔라비 1세는 아들보다 한술 더 뜨는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8] 아래 매체 문단의 HOI4에 등장하는 초상화에서 레자 샤가 쓴 모자가 바로 팔라비 모자다. [9] 레자 샤가 1878년생, 무스타파 케말이 1881년생. 세 살 차이밖에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