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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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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IMPERIVM ROMAN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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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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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년 서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1]
395년~4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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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7년/286년[2]/395년[3] ~ 476년[4]/480년[5]/486년[6]/1453년[7]
<colbgcolor=#a00201> 별칭 서로마 제국(Imperium Romanum Occidentale)
위치 남유럽, 서유럽, 북아프리카
명목 수도 로마[8]
실질 수도 메디올라눔( 밀라노) (395년 ~ 402년)
라벤나 (402년 ~ 455년)
로마 (455년~473년)
라벤나 (473년~476년)
제국 동방 동로마 제국 (395년~1453년)
언어 라틴어 (공용어)
갈리아어
게르만어
베르베르어
기타 지방 언어
종교 고대 로마 다신교 (380년 이전)
니케아 그리스도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9]
국가원수 (로마인의) 황제
주요 황제 호노리우스(395년 ~ 42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422년 ~ 455년)
마요리아누스(457년 ~ 461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년 ~ 476년)
주요 실권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395년 로마 제국 최종 분할
397년 북아프리카 반란
399년 브리타니아 침공
401년 알라리크 1세 제1차 이탈리아 전쟁
406년 제2차 이탈리아 전쟁
410년 서고트족에 의한 제1차 로마 약탈
410년 서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포기
418년 서고트인 정착
433년 프랑크족 갈리아 북부에 왕국 건설
439년 서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상실
449년 훈족 서로마 침공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
455년 반달족에 의한 제2차 로마 약탈
461년 마요리아누스의 제1차 반달 원정 실패
468년 제2차 반달 원정 실패
469년 서고트 왕국 독립 선포
473년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남부 상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486년 수아송 왕국의 멸망
성립 이전 분할 통치 이전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오도아케르의 정권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수에비 왕국
반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수아송 왕국

1. 개요2. 특징3. 역사
3.1. 역대 황제3.2. 최종 분할 이전의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상황3.3. 스틸리코 알라리크 1세3.4. 아틸라 훈족 아에티우스3.5. 최후의 순간
4. 멸망 이후5. 관련 문서6. 관련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은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일컫는 용어로, 395년부터 476년까지의 기간 동안 존속한 로마 제국의 서방 관할 행정 기구와 서방 황제의 휘하 정부를 가리키는 학문적인 별칭이다.

395년 1월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이 제위를 승계하면서 최종 분할된 로마 제국 중 서부 지방을 서술한다. 로마 제국의 서방 황제와 휘하 영토는 81년간 존속했고, 476년에 상실되었다.

파일:서로마.gif

분할 이후 속주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상실한 속주에 게르만족들이 개별 왕국을 건국해 빠르게 쪼개졌다. 그럼에도 최후까지 갈리아 북부와 이탈리아 반도, 달마티아 지역은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고, 아직 게르만족들이 점령한 영토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황제에게 조금 더 오랜 시간이 주어졌다면 훨씬 더 오래 존속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로마 시기처럼 제국의 수도가 그대로 로마였다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질적으로는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밀라노, 라벤나, 로마 등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동했다. 다만 관념적으론 당대인들은 로마를 언제나 수도로 인지했다.

2. 특징

서기 4세기 이후의 후기 로마 제국 등으로 불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로마 제국에서 분담 통치는 낯설지 않은 국가 통치 방법 중 하나였다. 실제 서기 395년 이후의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로마 황제들의 정부 분할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래에서의 동·서 분할 이전부터 있었다. 따라서 이런 점만 생각해보면, 테오도시우스 1세가 두 아들을 위해 만들어낸 제위 계승 방식이 아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흔히 로마 제국의 분할로 불리는 서기 395년 1월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로마법과 국제 개혁의 조치 아래에서 2명 이상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두정치로 번안되는, 테트라키아(Tetrarchia)인데, 로마 제국은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부제)로 삼았다가, 이듬해 아우구스투스(정제)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서로마 일대의 관할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이는 과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두 손자들인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후계자인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사후 공동 집정관 형태로 나란히 제국을 물려주기로 계획한 것과 그 본질이 달랐으며,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존속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공동황제 취임과도 그 결이 다른 국제 개혁 내지 개헌이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역사를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제) 등장부터 설명한다면, 서기 285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이는 로마 제국의 국제 개혁부터 살펴봐야 되는 문제인데다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제국은 서기 395년 이후처럼 극단적으로 두 개의 행정부가 각자의 관할을 가지고 운영되는 형태로 존속하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면, 테트라키아로 불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은 로마 제국이 물리적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는 황제 아래에서 복수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395년 1월 23일 이후부터의 로마 제국은 당대와 후대의 로마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복수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황제의 두 아들이 동부와 서부 정부를 통치한다고 해도 끝내 영구적인 분할처럼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분할 아래 두 개의 정부는 이전부터 서로 다른 언어의 사용 빈도와 경제 기반 등이 조금씩 멀어지면서 하나의 국가 아래 두 정부였다고는 해도, 로마인들의 생각과 달리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항구적인 분단 내지 쪼개진 제국 형태로 인식되었다.

395년 1월,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메디올라눔( 밀라노)에서 사망하자 아르카디우스는 제국 동부를, 호노리우스는 제국 서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제국은 훨씬 이전부터 동-서 양 영역에 각각의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는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 이후, 이미 동-서에 각각 정제와 부제가 있었으며, 한동안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우스 2세, 율리아누스의 치세하에서 통일된 적은 있었지만, 이후 다시 양쪽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일도, 서방 참칭제 에우게니우스를 토벌한 394년 9월부터 그가 사망한 395년 1월까지의 불과 수개월에 불과했던 찰나의 기간이었다. 제국의 분할 통치가 영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395년을 흔히 분열의 시기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후에도 동-서 두 제국은 '하나의 로마'라는 보편적인 인식을 유지했으며, 서기 5세기의 다사다난했던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로마 제국의 분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후대에 역사 서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도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 상실이다.

분할 이전부터 자금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제국 동부와는 달리 제국 서부는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떨어졌고, 게르만족의 대규모 침공에도 항상 시달려야 했다. 동로마를 12세기 말까지 강대국으로 지탱해주던 그리스 및 아나톨리아, '로마의 빵 바구니'라 불리던 이집트 등 알짜배기 지역은 모두 동로마가 가져갔다. 지금이야 서로마 지역(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과 동로마 지역(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튀르키예,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을 비교하면 쟁쟁한 선진국들이 포진한 서로마 지역의 경제력이 압도적이지만, 당시에는 농업 생산량과 교역량이 서방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동방에 비해 국력이 떨어졌다. 영국이나 스페인은 현대에도 농사짓기 썩 좋은 국가가 아니고, 프랑스는 농사짓기 좋은 땅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간이 덜 되어 숲이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양 무역이 활성화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오히려 세계와 더 연결이 잘 된 지역이지만, 지중해 무역과 동방 무역이 대세이던 당시까지만 해도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는 무역로에서 동떨어진 변방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10]

제국 분할 이후 50여 년간 서로마는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11], 아에티우스 같은 걸출한 사령관들의 노력으로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마요리아누스가 중흥을 시도하여 성공했으나, 잠시 뿐이었고 그마저도 권신 리키메르에게 암살당했다. 그후 무력한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오레스테스 등의 실권자가 황제를 쥐락펴락했으며 결국 오도아케르에 의해 어린 황제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수도 밖의 거의 모든 땅이 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수도가 함락되는 방향으로 화끈하고 장렬하게 멸망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은 사뭇 다르고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다. 전통적으로 속국이나 산하 이민족을 다루던 방식인 조약 혹은 동맹(foedus, 포에두스)의 형태가, 서로마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더 이상 이민족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역이용당해서 하나하나씩 지방 속주의 영토와 서로마 군대의 주요 보직이 게르만인에게 넘어가다가 마침내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형식을 빌려서 서로마 황제직 자체를 폐지함으로써 멸망한 것이다. 물론 한때 지중해를 장악한 그 이탈리아 본토는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유지했기에 이를 바탕으로 서로마가 치열하게 이 물결을 막아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그리고 최후의 중흥 황제였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인물들이 이를 토대로 최후까지 노력했으나 결국 이들이 죽은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서로마 제국은 천천히 무너져갔다.

어떻게 보면 서로마는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로마인 스스로 멸망한 감도 있다. 그 말처럼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을 보면 로마인들이 자중지란을 벌이다가 이민족을 막지 못하고 무너진 경우가 너무 많았다.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보니파키우스, 마요리아누스 등 한 사람이라도 성공했다면 서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걸출한 인물들이 이민족을 상대로는 여전히 로마의 힘을 보여줬으나, 정작 죄다 내부의 중상과 내전으로 제명에 못 살았던 걸로 귀결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3. 역사

크게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관해서는 정말 많은 논문과 학자들의 분석이 존재한다. 서로마 멸망사의 연구는 무려 계몽주의 시기부터 이어진 로마사 연구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진 주제였는데 문제는 이런 시기에 연구된 내용에는 정말 시대를 넘나드는 많은 편견과 한계성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인 요인이나 종교적인 요인, 인구적인 요인 등등을 멸망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연구는 굉장히 편향적이고, 객관성이 결여되며 증거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정리하자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군사적 요인을 제외한 다른 설명들은 굉장히 많은 문제점과 비판을 받고 있으며,이 분야의 연구자 대다수가 서구인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또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시사적이고 당파적으로 활용하기 좋은 소재여서 객관성이 결여되었다.

이 분야에 대해 정말 수많은 역사가와 심지어 비 역사전공자들의 주장과 논문 저서가 있으나 가급적 역사적 근거와 사료 분석, 비 편향적 자료들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을 추천한다.

3.1. 역대 황제

자세한 것은 로마 황제 명단을 참조.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후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을 통치하게 된 호노리우스는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스틸리코를 처형하는 등 무능의 극치를 달렸고, 그의 통치 시기에 로마 약탈(410년)이 벌어졌으며, 브리타니아 속주가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게 되었다. 호노리우스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보니파키우스나 아에티우스 같은 능력있는 인물들도 있어서 충분히 중흥을 노려볼만 했으나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와 대립하다 죽임 당했고 아에티우스조차도 발렌티니아누스 본인이 직접 죽여버린지라 기회를 다 날려버렸고 발렌티니아누스 본인도 병사들에게 암살당하며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후 게르만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황제들이 등극하기 시작했다.[12] 진짜 마지막 기회였던 마요리아누스조차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살해당하고 마지막에 어린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가 퇴위당하면서 제국의 서방 통치 체제는 소멸했다.

3.2. 최종 분할 이전의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상황

최종 분할된 것으로 설명되는 서기 395년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동방과 서방이 영구적으로 분열될 것임이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395년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건설되면서 제국의 헤게모니가 동방으로 옮겨지고 있었던 데다가, 당시 군대의 장교들과 여러 지식인들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공동황제 임명을 요청해 2명의 황제가 제국을 분담할 것을 건의한 상황 등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처럼 두 황제가 각자 정부를 거느릴 경우 제국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측하게 했다.

서로마 제국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로마 제국 서방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의 한계와 최종 분할 이전 제국의 상황을 살펴봐야 된다. 이에 관하여 학자들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제국의 멸망은 제정이 가진 국가 체제의 한계와 제국 안팎의 이유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마 제국이 왜 동로마 제국과 비교해 빠르게 쪼개지고 멸망했는지도 직·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이전인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 공화정은 도시국가 로마가 팽창하고 정복국가가 되면서 그 한계에 봉착했고, 공화정 후기인 기원전 2세기 이래로 로마는 일찌감치 큰 내전을 치르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가 양분한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10년 동안의 내전을 시작으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같은 로마군을 사병화한 정치가들이 권력을 쥐거나 정쟁을 벌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원로원파( 옵티마테스)와 민중파( 포풀라레스) 사이의 대립이 여러 형태로 지속되었다. 이는 술라의 개혁,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등을 거치며 점차 특정 개인의 영구 집권이 가능한 형태의 제정화로 흐르게 되었는데,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제압하고 소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방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다시 시작된 내전은 카이사르의 양자로 외종손이 되는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후의 숙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리고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 이래 공화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2년 뒤인 기원전 27년부터 《조정 헌법》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공화정체의 등장과 공화정 수호라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제정을 창설했다. 이것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대적인 개혁 이전까지 존속한 약 300년 동안의 초기 제정, 즉 프린키파투스(원수정)였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만들고 정착시킨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술라의 개혁 이전의 공화정, 술라의 개혁 이후의 공화정과 비교해 확실히 효율적이었고 로마 제국에게 닥친 당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황제가 스스로를 황제라고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형태의 '형식적인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이었다.

로마 황제로 불리는 ' 프린켑스' 혹은 ' 임페라토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여러 권한들(임페리움 등)을 원로원의 승인, 군대의 충성 선언을 통해 합법적으로 수여받아 공화국인 로마를 통치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제정은 동서고금의 일반적인 제정과는 여러 부분에서 그 차이점이 분명했고 이로 인한 한계와 모순도 뚜렷했다. 따라서 황제가 네로처럼 합법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면, 로마법상 주권자인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모임인 로마군 및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에게 탄핵을 당하고 더 나아가면 축출도 가능했다.[13]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지를 받은 로마시민권자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였다.

즉, 쌍두정 형태의 입헌군주정 내지 세습이 가능한 종신 대통령제였던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상황만 된다면 부자 세습 및 형제 세습이 가능하고 황실로 불리는 가문이 생길 수 있는 입헌군주정이면서도, 승인만 되면 누구나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공화정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정은 안정적으로 운영되더라도 동·서양의 다른 제정과는 그 차이점이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된 사람의 능력이 출중하거나, 대가 끊겨 혈통적인 한계가 명확할 경우 그 유연성의 측면에서 다른 제정과 비교해 여러 이점이 존재했지만 온전한 혈통적인 정당성이 있어도 세습군주제의 장점을 가져갈 수 없었던 제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원수정은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처럼 확실하게 탄핵된 황제가 있는 경우라고 해도, 제위를 놓고 여러 군사령관들이 다투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내전이 장기화될 위험요소가 많았다. 물론 서기 1세기 중반인 41년 1월, 20명 남짓의 근위대 병사들과 원로원 일부가 공모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암살 사건( 칼리굴라 암살 사건)처럼 후임자인 클라우디우스 1세를 중심으로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민중과 원로원 내 황제파들이 똘똘 뭉쳐 즉시 반격한 경우에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당대의 요세푸스와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의 말처럼 공화정 회귀를 노린 일부 세력이 온전한 지지 없이 황제를 폭군으로 몰아 암살했다가 스스로 몰락한 사건에 가까웠고, 로마인들에게도 정상적인 상황을 내전으로 몰아갈 뻔한 상황에 불과했다.

어찌됐든 간에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초기 제정(프린키파투스)은 각 왕조가 몰락하거나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된 황제의 암살 등이 벌어질 경우 네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와 같은 내전이 발발할 위험 요소가 많았다. 간단히 말하면 제국은 평화속에서도 황제가 암살될 경우, 자칫 준 내전에 빠질 위험성이 높았다. 문제는 이 내전이 장기화될 경우 그 혼란은 원로원이 가진 여러 권한, 각 속주 총독 및 군사령관들의 현지 병력 장악 등과 맞물리면서 더 큰 내전으로 심화될 상황이 곳곳에 산재했다는 점이다.

이런 불안 요소 속에서 서기 2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국가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넓어지는 국경을 방어할 병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들어갈 돈은 많아졌다. 훗날의 서로마 제국이 들어서게 될 서방에서는 서기 2세기 이래 갈수록 강해지는 게르만족의 침공 빈도 증가로 많은 군인들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네로 시대부터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에서 근무하게 되는 프라이토리아니로의 병역 지원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플라비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 이래로 로마 제국은 속주 태생 로마시민권자들의 속주병 입대를 허가했는데, 그럼에도 제국은 2,400km나 되는 서방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많은 군인들이 필요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많은 병력 수요만큼 들어가는 물자도 많이 필요했고, 게르만족들의 침공 빈도가 높아지는 중에 그 강도까지 커지면서 대규모 전쟁의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 결과, 서기 2세기부터 로마 황제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최전선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고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평화기로 알려진 서기 2세기 중반부터 서기 3세기 초까지의 로마 황제들은 수도 로마와 변경의 최전선을 오가며 격무에 시달렸는데, 우리에게 로마 제국의 현군들로 알려진 이들도 이런 상황을 해결하다가 전선에서 죽었다.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 중 최초로 군 숙영지인 빈도보나(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고,( 마르코만니 전쟁) 철인황제의 동생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게르만족의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내고 귀환하던 중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이는 '제국의 마지막 황금기' 혹은 '평화의 절정'이라고 찬사받은 세베루스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원시적인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를 제시하면서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모순을 개혁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역시 오늘날 영국 요크에서 사망했다.( 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침공)

이런 외부적인 상황 속에서, 제국의 행정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고, 세금 징수와 속주 통치는 여전히 황제와 총독, 황제와 지역유력자 간의 서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단점이 존재했다. 이는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공화정과 전제군주정 사이의 타협점과 같은 국가 체제였던 터라 서기 4세기 이후의 전제군주정(도미나투스)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로마 황제와 엘리트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중 오현제의 끝으로 불린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갈수록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는 속주 행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직접 명령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황제 주도로 국가 운영의 틀을 바꾸려고도 시도했다. 이는 암군 콤모두스의 치세때 방치되는 듯 했지만, 콤모두스 시대의 폐단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금 문제 해결을 위해 황제들은 노력하게 되었다. 세베루스 황실의 황제들은(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지역민들이 기부한 공공건축물들을 모두 황제의 이름으로 짓도록했고 각 속주 간의 통행세 등을 황제의 이름으로 동일하게 징수하도록 했다. 아울러 로마 황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 인재들 외의 기사계급 출신 관료들을 통해 행정 결정을 내리고, 지방에 주둔한 많은 수의 군대를 중앙에서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들은 서방보다는 동방 속주들에서 그 효과가 컸고, 어떤 로마 황제도 동방보다 낙후되거나 비슷했더라도 갈수록 그 한계가 명확해지는 서방에서의 여러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일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포로로 잡은 게르만족을 광산이 아닌 이탈리아 북부나 판노니아 및 갈리아로 이주시켜 농민으로의 정착을 시도했다가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고, 게르만족들이 정착한 일대는 인구가 줄거나 초토화된 곳이 많아 생산력이 낮아서 빠른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 전염병이 돌고, 툭하면 국경 밖의 게르만족들이 침공하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서방 지역에서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즉, 훗날의 서로마 제국에 해당되는 지역들은 동방과 비교해, 제국의 평화가 절정에 다다른 팍스 로마나의 후기에도 많은 군단들이 각 지역의 군사령관 내지 총독들의 명령권 아래 속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에 있어서 상당한 정치력과 군대 장악력이 필요한 지역들이었다.

서로마 제국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지중해 서부와 동부 간의 경제력 차이와 원시적인 세금 징수, 노예 수급 감소,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 시작된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경제력 침체 및 그 한계로 인해 동방과 서방 사이의 경제적과 사회적인 격차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벌어져 있었다. 당장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부터 원로원의 경우, 푸닉,[14] 그리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일대 출신들이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서방에서 잘 나간다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인재들은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거진 동방 출신들에게 밀려나 있었다.[15][16] 이탈리아의 오래된 귀족 가문들도 어려움을 겪거나 재산 규모가 크게 줄어, 공화정 시기의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처럼 살아남았다고 해도 잠시 동안 원로원 의석에 복귀하지 못하는 등 고전하고 있었다. 본국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 다음으로 발전했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일대 및 제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촌놈 동네로 취급된 변경 지역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경쟁력이 동방 속주들보다 떨어졌다. 이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자신을 지지한 발칸 반도(특히 일리리아 지방)와 푸닉 지방, 그리고 처가의 근거지인 시리아 속주 출신들을 대거 등용하면서도 이탈리아 출신들의 특권을 오히려 확고하게 인정해주었고, 서방 출신 인재들의 등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 황제를 비롯한 서기 2세기 이후의 황제들은 로마 제국 서방의 경제적 낙후 문제 해결 및 이 일대 인재들의 육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연이은 대규모 건축물 축조, 세금 감면 등의 시혜책 등이 대개 지중해 동부나 수도 로마에 편중되어, 동·서간의 경제력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해결하려면 일시적인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트라야누스가 활용하고 원로원과 지역 유지들이 지지한 속주 통치 정책과 세금 징수 정책은, 과거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들도 이례적으로 활용했던 방법, 즉 공화정 시기에 원로원이 활용한 세금징수원을 고용해 세금을 징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를 돌리는 운영이었다.[17] 로마 제정은 원로원과 황제가 함께 속주세를 거두었는데, 서기 2세기 경트라야누스 황제의 방향이 간편하고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힘 있는 속주는 속주세를 많이 걷고, 혜택을 많이 보는 방향인데다가 그 중간 과정에서 비리가 많았다. 따라서 낙후된 속주가 많고, 자원은 많이 필요했던 로마 제국 서방에게는 2세기 당시 원로원과 다른 속주의 지역 유지들이 좋아한 세금 징수 정책과 재원 활용 방안이 그다지 유쾌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는 필요한 돈과 인적, 물적 자원이 늘어나는 현실과 맞물리면서 2세기부터 로마 황제들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했고, 그럴수록 서방은 동방과 비교해서 황제들의 능력치를 많이 요구했다. 다행히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위기에 빠진 본국 이탈리아와 갈리아 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경제 규모를 유지시키기 위해 자금을 쏟아붓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국고 잉여금을 확보하는 국고 확장 및 긴축 정책을 활용하여 급한 불을 끄게 되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런 조치들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성장 동력을 잃고 정체된 서방의 도시 경제가, 과거 발전 동력을 갖췄던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시대처럼 재도약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로마 제국과 서방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가 공동황제로 즉위한 그 해부터 자연재해와 외적의 침략 등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부터 제국의 서방과 동방에서 연이어 외적의 침공이 벌어지게 되었고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불리는 대규모 전염병까지 창궐하게 되었는데, 동방에서 서방으로 퍼져나간 전염병과 레누스(라인) 강~다누비우스(다뉴브) 강으로 이어진 최전선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의 끝없는 침공은 제국의 병력 및 국고의 피로도를 가중시켰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행정부가 고도화된 행정과 사법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화되었고, 관료제 아래에서 그 운영이 발전하면서 이에 따른 유지 비용 역시 갈수록 늘어났던 터라 마냥 서방의 경제 문제 해결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제국의 국고 피로도와 경제적인 취약성 속에서 기존 국가 체제의 한계와 위험요소가 대내외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소위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급속도로 제국은 쇠락해지기 시작했다.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황제가 수시로 교체되자 황권은 추락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자 각지에서 반란을 비롯한 불온한 움직임이 심상치않게 가시화되었는데, 이는 당장이라도 제국이 대혼란에 빠질 위험성을 가중시켰다.

결국,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 등으로 불리는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과거 콤모두스 시대를 거치며 겪은 혼란 이상의 난세 속에서 고생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이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집권 이전까지 어떤 황제도 여러 이유로 인해 이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 황제의 경우, 발레리아누스가 에데사 전투에서 참패해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갈리에누스는 건국 이래 맞닥뜨린 최악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제국을 재통합한( 로마 재통합 전쟁)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태양신 솔 인빅투스의 대리인으로 명시될 황제 중심의 강력한 전제군주정 개혁을 추진하던 중 비리를 저지른 측근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되었고,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의 이점을 살려 통치한 프로부스 황제는 원로원과 서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중세 농노제를 연상시키는 경작지 개간과 도시 재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손에 의해 어이없이 암살되었다.

서기 3세기의 내전은 장기화되었는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인물들의 집권과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아이밀리아누스 같은 야심가들의 연이은 등장으로 애매모호한 모순점이 가득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가진 정치적 혼란 증폭 위험도는 높아졌다. 그래서 3세기 동안 중앙에서는 여러 야심가들의 제위 쟁탈전과 각 속주 총독들의 황제 선언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제대로 된 정치가 불가능해졌고, 신병 충원 이후 활용될 병력의 제대로 된 방어 전략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방과 동방 전선에서는 여러 이민족이 침공하면서 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이에 대응하며 제국을 방어해야만 했다. 다행이라면 제국의 각 지역이 모두 이런 준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가 누적된 곳은 제국 동부 일대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서부 일대, 즉 훗날의 서로마 제국 일대였다.

상술했듯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부터, 제국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반도와 그 북부에서 블록경제로 경제적 규모를 키운 갈리아 남부의 경제적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서기 3세기 동안 게르만족의 침공이 갈리아 중심부까지 이어져 피해 규모가 커지면서 치안까지 불안해지게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탈영병들과 유랑 농민들이 무장한 도적이 되었고, 연례 행사처럼 게르만족이 침공하는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동방보다 낙후된 서방의 경제 상황을 갈수록 악화시켰다. 더욱이 영구 분할로 불리는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서로마 제국 관할에 속할 지역들은 풍요로운 그리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를 두루 가진 동로마 제국과 비교해, 푸닉 지방(옛 카르타고 지방) 외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 적었고 서기 2세기 중반 이래 굵직굵직한 권세가까지 배출하지 못하여 중앙정부의 관심에서도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서로마 제국의 상황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이 될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카리누스 황제를 무너뜨리고 단독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연이어 발생하는 반란을 모두 제압하고, 급상승하는 물가를 통제하며 국경 지대의 불안을 해소하고, 고도화된 행정에 대한 통제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를 실행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전제군주정을 실시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거의 50여 년 동안 지속된 혼란 때문에 제국의 경제와 행정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렇기에 군인 황제 시대 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누더기가 된 제국을 테트라키아( 사두정치)를 통해서 통치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황제 한 명이 통치하는건 힘들었기에 제국을 분할해서 2명의 정제와 2명의 부제를 두고 각 지역을 다스리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 퇴위한 후 로마 제국은 부제들간의 내전에 돌입했다.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자진 퇴위한 후 3명의 부제가 추가적으로 더 출현해 제국을 사실상 5등분해 다스렸다. 그리고 이 사두정의 내전의 최종 승자는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쟁쟁한 경쟁자인 4명을 배제하고 313년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단독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비교적 안정화되었지만, 과거의 로마 황제들이 그랬듯 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한들 역시 슈퍼맨은 아니었기에 대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식견 및 능수능란함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은 서방에서의 모든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따라서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들인 콘스탄스 콘스탄티누스 2세 사이에 일어난 내전과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은 서서히 쇠락해졌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단절 이후 짧게 통치한 요비아누스 황제의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황제들이 제국을 양분해서 통치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1세~ 그라티아누스 황제까지는 그래도 서방의 로마군이 멀쩡했다. 오히려 이때는 서방군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개박살난 동방군을 도와주러 발칸 반도 쪽으로 원정을 갈 정도였다. 그런데 383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제국 서방의 양 군대는 루테티아(파리) 인근에서 크게 한판 붙었는데 무어족 기병대의 배신 때문에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붙잡혀서 죽었다. 이어서 4년 뒤에는 이탈리아에 있었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박살이 나 동방으로 망명해버렸다.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반역자들을 무찌르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복위시켰으나 이 와중에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갈등하여 황제를 암살하고 플라비우스 에우게니우스를 제국 서방의 황제로 옹립했다. 에우게니우스는 서방에서 로마 다신교를 부흥시켰고, 이것이 테오도시우스 1세의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바람에 394년 8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끄는 동방군에게 공격받아 서방의 정예군이 개박살이 나고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 역시 참수당해 메디올라눔(밀라노)의 성문에 걸렸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재통합하고, 각지에서 난립하는 부제들을 격파하여 불안정한 정국을 안정화시켰다. 특히 당시 논쟁거리였던 그리스도교 교리 문제를 해결하고, 이교 금지 정책을 확실하게 실시해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 전역의 유일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서방 문제를 해결하던 중 모든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메디올라눔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런 내전을 세 차례나 치렀더니 서방군이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역시 이것을 인지하고 서방군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몇 개월만에 급사해버렸고, 로마 제국의 서쪽 절반의 미래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멍청한 아들이었던 호노리우스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3.3. 스틸리코 알라리크 1세

훈족의 발흥으로 촉발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수많은 이민족들의 이주를 유발했고 이들은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국경 부근에 거주하던 게르만 부족들은 대이동으로 밀려온 부족들에게 밀려 국경 너머의 로마령 속주에 정착했다. 자연스레 정주민인 로마인과 게르만인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지만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부는 각종 부정부패와 내전으로 인해 생긴 극심한 혼란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지방 관리들의 무능함으로 단순한 국경 분쟁이 격렬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게르만족의 봉기가 시작되자 동방의 발렌스 황제는 진압군을 이끌고 나섰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방군이 대패하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부족들이 제국 영내에 정착하는 것을 저지할 여력을 상실했다. 훈족의 위협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 국경을 넘어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그들이 향한 곳은 아직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방 대신 내전과 부패로 약화된 서방제국이었다. 서기 2세기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서방은 일찍부터 곡물 수급량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처지라 기반시설과 자원이 풍부한 동방보다 훨씬 암담한 상황이었고 이는 야만인 문제 해결에 치명타였다.

395년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이후 당시 나이가 어린 호노리우스 황제 대신 선제의 사위인 최고 사령관[18] 스틸리코가 국정 전반의 전권을 쥐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생긴 권력의 공백을 훌륭히 채웠으며, 선제의 아들들이 평화롭게 광활한 제국을 온전히 승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여러 쟁쟁한 경쟁자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대제의 두 아들 중 호노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을 순조롭게 승계할 수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망 시기는 로마 제국에게 불운하게도 게르만인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 시작은 로마 제국의 포에데타리 중 하나로서 다키아 지방[19]에 거주하고 있었던 동게르만계 서고트족이었다. 395년 서고트족은 알라리크 1세를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396년 트라키아 속주를 포함한 일대를 약탈하고 파괴한 알라리크 1세는 아드리아노플을 함락시키며 동로마 제국을 유린했다.(알라리크 1세의 마케도니아 침공)

동로마 제국의 동방 군단들은 사산조 페르시아 에프탈(백훈)을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에 주로 전개되어 있었고, 서방 군단들은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지휘했지만 사후 스틸리코 휘하로 배속되어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라리크 1세의 침공에 대해 동로마 제국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긴급 요청으로 스틸리코는 서로마군을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해 알라리크 1세를 포위했지만 당시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피누스의 간계로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의 휘하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송환하도록 요구해 스틸리코는 결정적인 순간 알라리크 1세를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알라리크 1세는 397년 또다시 거병하여 그리스 반도 전역을 유린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서로마군에 의해 또다시 포위 섬멸당할 뻔 했지만 이번에도 알라리크 1세는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스틸리코 대신 동로마 제국과 협상해 일리리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틸리코도 손쓸 수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전란에 휩싸이자, 398년 북아프리카에서 90,000명의 병력을 규합한 길도가 반란을 일으켰다.(길도의 반란) 순식간에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카르타고를 점령한 길도는 로마에 대한 식량 수출을 금지함으로서 제국이 식량난을 겪도록 유도했고, 식량 수급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서로마 제국은 이 조치에 의해 제국 경제의 전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도의 식량 금수 조치로 서로마 제국 내의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스틸리코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식량들을 사들이도록 명령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스틸리코는 로마 원로원을 통해 길도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했으며, 길도의 정적인 마스케젤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그로 하여금 길도를 저지하도록 했다. 마스케젤은 로마군과 함께 길도를 제거했고,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이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국 전반이 약화된 상황에서 이민족들의 침공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라인 강과 도나우(다뉴브) 강 유역에서 야만족들의 활동이 빈번해지고 있었고, 약해진 제국은 과거와 달리 야만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399년 야만족이 브리타니아 속주를 공격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돌파한 픽트족이 잉글랜드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려왔고, 이에 색슨족과 스코트족이 호응하며 전면적으로 브리타니아 속주를 공격했고 주둔군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섬 전체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결국 스틸리코가 본토에서 군대를 이끌고 섬에 상륙하고 브리타니아 섬의 잔존 병력과 연합해 픽트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스틸리코가 픽트족과 협상하여 국경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로 합의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픽트족의 브리타니아 침공)

서기 5세기에 들어선 401년에는 게르만족들 중 고트족의 세력이 크게 일어났는데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1세는 거병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했다.(알라리크 1세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스틸리코는 이 유래없는 서고트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국경 방위력이 약화되는 걸 감수하고 제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군단들에게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군대가 부족했기에 이민족 용병들과 검투사, 그리고 노예들까지 닥닥 긁어모으고 나서야 간신히 30,000명의 병력을 구성해 서고트족의 침공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틸리코는 이 군대를 이끌고 폴렌티아에서 알라리크 1세를 크게 격파했고 알라리크의 부인과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며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로 이동하면서 약탈한 막대한 재화를 손에 넣었다. 스틸리코는 이 재물과 가족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철군을 요구했지만 알라리크 1세는 거부했고, 양군은 베로나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다.(베로나 전투) 스틸리코는 알라리크 1세를 재차 격파했고 이 패배로 알라리크 1세는 스틸리코와 협상을 통해 가까스로 판노니아로 철군했다.

알라리크 1세는 물리쳤지만 제국 국경 전반에서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405년엔 동고트족의 족장 라다가이수스가 100,000명의 병력을 이끌며 이탈리아 북부로 밀고 들어왔다.(라다가이수스의 이탈리아 침공)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동고트족에 대응하기 위해 서로마군은 얼마 없는 군대를 재차 집결시켰지만 회전이 가능할 정도의 병력을 모으진 못했고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국경수비대와 이탈리아 방위군은 물론이고, 사루스의 고트족 부대와 울딘의 훈족에게도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스틸리코가 군대를 모으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뛸 동안 라다가이수스의 동고트족 부대는 약탈을 지속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플로렌티아( 피렌체)를 포위했다. 하지만 플로렌티아는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성병기가 부족한 동고트족의 침공을 연이어 저지했고, 식량같은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동고트족 부대는 스틸리코 휘하의 서로마군에게 역으로 포위당했다. 라다가이수스는 플로렌티아를 점령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스틸리코는 라다가이수스가 플로렌티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포위당한 플로렌티아에 강을 통해서 물자와 병력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동고트족을 안팎으로 묶어 두었다. 서로마군은 단합되지 못한 동고트족 부족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며 포위를 유지했고, 결국 포위당한 라다가이수스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지만 참패하고 8월 23일에 처형당했다.(플로렌티아 공방전)

406년에서 40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서로마 제국에게 대재앙이었다. 국경에 주둔한 군단들이 본국 이탈리아의 방어 전쟁에 동원되면서 약화된 국경 수비대는 몰려드는 야만족들을 견디지 못했고, 갈리아 내부로 상당한 수의 게르만 부족들이 진입하게 되었다. 이른바 유럽 대륙의 역사를 바꾸게 될 게르만족 대이동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무참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제국 내부 깊숙히 진격했고, 동시에 브리타니아의 참칭제인 콘스탄티누스 3세 또한 갈리아를 침공하면서 당시 서로마 제국의 권력을 쥐고 있었던 스틸리코의 입지 또한 크게 흔들렸다. 이때 스틸리코는 사루스를 보내 반역자 콘스탄티누스 3세를 상대하게 했고, 발렌티아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반란군을 격파함으로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병력이 부족한 탓에 추가적인 공세는 할 수 없었다.

서로마 제국이 흔들리자 알라리크 1세는 또다시 군대를 일으켰고(알라리크 1세의 제2차 이탈리아 침공) 노리쿰을 점령하면서 금을 내놓지 않으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겠다고 로마 원로원에 엄포를 놓았다. 연이은 악재로 여력이 없는 서로마 제국이었지만 야만족에게 금을 지불하는 것을 치욕이라 여긴 원로원은 알라리크 1세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고트족에게 금을 지불하는데 동의했고 이로 인해 원로원과 스틸리코 사이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원로원과 호노리우스의 음모에 의해 스틸리코는 올림피우스의 군대에게 사로잡혔고 이내 처형당했다.(스틸리코의 처형, 4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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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리크 1세에 의한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410년)

그러나 원로원과 호노리우스가 자신들이 멍청한 짓을 했음을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틸리코가 어이없게 숙청된 뒤, 그의 휘하에서 복무했던 서로마군의 중앙 야전군은 스틸리코의 숙청 소식을 듣고 그대로 알라리크 1세에게 투항해 버렸고 이들을 받아들인 알라리크 1세는 408년 10월에 이탈리아 침공을 개시하며 유능한 충신을 숙청한 서로마 지배층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자 했다.

알라리크 1세의 군대는 곧장 로마를 포위해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서고트족이 정착할 땅을 요구했지만 협상의 의지도 없는 황제와 제대로 된 협상이 될리가 없었다. 알라리크 1세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해 평화롭게 땅을 획득하고자 했지만 호노리우스의 명령을 받은 사루스의 기습과 협상 의지가 전혀 없는 로마 사절단에 분노했고 그럼에도 4차례나 협상을 시도했으나 전부 무위로 돌아가면서 410년 서고트족은 로마 약탈을 자행하게 되는데 이는 기원전 390년 켈트계 세노네스족에 의한 로마 약탈 이후 무려 800여 년만의 대재앙이었다.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은 지중해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로마 제국도 로마 약탈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동·서로마 제국 모두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알라리크 1세를 저지할 수 없었고, 약탈을 마친 알라리크 1세는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하면서 도시들을 약탈했다.

하지만 알라리크 1세는 남부 원정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망했고, 처남인 아타울프가 서고트족의 왕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암살당했다. 그래도 남이탈리아까지 다 털리는 상황에서 아무리 멍청한 호노리우스라도 제국이 전쟁에 패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419년에 서고트족의 지도자인 테오도리크 1세와 협상하여 아키텐 지방의 땅을 내주었는데 이것이 서고트 왕국의 시작이다.

3.4. 아틸라 훈족 아에티우스

암군이었던 호노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423년의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된 5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이미 방어 능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 반달족, 고트족, 그리고 서게르만계 프랑크족이 약탈하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럼에도 서로마 제국은 여전히 막대한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었고, 게르만족들도 로마 제국에게 형식적으로나마 복속된 상태였다.

호노리우스 사후 요안네스가 스스로 황제임을 주장하며 군대를 일으켰지만 제압당했고(요안네스의 반란) 원로원은 테오도시우스 황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6살이라는 어린 나이탓에 황제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섭정으로서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이러한 시기 동게르만계 반달족의 왕 군데리크는 대규모 부족들을 이끌고 정착할 땅을 찾아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히스파니아 속주에 도달하고도 이들이 남하를 계속하자 서로마 제국은 알란족과 서고트족과 연합해 이들에게 맞섰지만 422년 타라코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반달족은 히스파니아 속주 깊숙히 진입했다. 또한 반달족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여 서지중해를 장악했다. 서지중해의 무역로가 반달족의 통제 아래 들어가면서 당시 해군이 없았던 서로마 제국은 무역로 주도권을 상실하며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반달족이 히스파니아 남부를 점령하자 갈리시아 부근에 정착한 서게르만계 수에비족 또한 서로마 제국 휘하의 도시를 여럿 정복하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눈에띄게 줄어들었다.

야만족들이 제국의 영토를 서서히 잠식해나가는 악재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의 정치는 극심한 혼란상태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참칭제 요안네스의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아에티우스와 보나파키우스 간의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어린 황제의 섭정이었던 갈라 플라키디아 태후는 요안네스 측에서 복무한 아에티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보나파키우스를 지원했지만 보나파키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편지와 소문이 돌자 당시 카르타고에 있었던 보나파키우스를 라벤나의 궁정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이를 자신을 살해할 음모로 여긴 보나파키우스가 응하지 않으면서 서로마 궁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시기츠불트 장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고 이에 대응해 보나파키우스는 429년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를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이면서 전쟁의 양상은 혼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보나파키우스는 카르타고를 잃고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지만 극적으로 서로마 궁정과 보나파키우스 사이의 오해가[20] 아에티우스의 음모임이 밝혀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보나파키우스가 끌어들인 반달족[21]은 서로마 제국에 있어 큰 위험요소들 중 하나였기에 430년 갈라 플라키디아는 보나파키우스에게 반달족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칼라마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은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고 반달족이 속주 깊숙히 진격하자 보나파키우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히포 레기우스에서 농성전을 펼쳤다. 430년 5월에서 7월까지 이어진 2개월 동안의 공성전 끝에 포위가 풀리자 보니파키우스는 지원군을 이끌고 온 아스파르 장군과 함께 반달족에 맞섰지만 또다시 패배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쫒겨났고, 가이세리크는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하여 14개월에 걸친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켰다.[22](히포 레기우스 공방전) 이처럼 반달족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가이세리크는 435년 2월, 당시 서로마 제국의 군사적 실권자였던 아에티우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며, 이를 통해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의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그 댓가로 매년마다 서로마 제국에 조공을 바칠 것을 합의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후네리크를 서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냈다.

439년 10월, 가이세리크는 서로마 제국과 맺었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는 마침내 북아프리카 속주의 핵심도시이자 중요한 항구였던 카르타고를 점령했다.(카르타고 공방전) 이후 반달족은 잔존한 로마군을 몰아내고 북아프리카 속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카르타고를 차지한 가이세리크는 이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식과 황금을 독식하게 되었다. 반달족은 주요 항구도시들을 통해 지중해 진출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고 가이세리크는 이후로 강력한 함대를 양성하여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해양을 위협했다.

가이세리크가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이자 중요한 세입원이었던 북아프리카 속주를 빼앗아 버리면서 반달족은 서로마 제국에게 수출되던 식량을 통제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곡물과 재정의 부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가이세리크의 북아프리카 정복은 이민족들의 침략과 내부 분열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를 잃었지만 정치는 여전히 암투의 연속이었는데, 갈라 플라키디아 태후는 북아프리카 상실로 신임을 크게 잃은 아에티우스 대신 보나파키우스를 서로마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아에티우스가 보나파키우스를 선제 공격하면서 또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보나파키우스는 432년 라벤나 근교의 아르미니움( 리미니)에서 아에티우스를 격파했지만 전투에서 입은 치명상으로 인해 3개월만에 죽었다.(아르미니움 전투) 뒤이어 세바스티아누스가 전권을 잡았지만 훈족의 왕 루아의 지원을 받은 아에티우스가 세바스티아누스를 몰아내고 총사령관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보호자 노릇을 하면서 아에티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436년 갈리아로 진격한 아에티우스는 동게르만계 부르군트족의 왕 군다케르를 무찌르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다음해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부르군트를 재침공해 20,000여 명의 부르군트족을 살해했다. 그리고 아에티우스는 436년에서 438년까지 히스파니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수에비족 그리고 서고트족과 전쟁을 벌였다. 아에티우스는 대승을 거두며 막대한 군사적 성과를 이뤘으나,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서고트족의 반격으로 서로마군이 참패하고 총지휘관이었던 리토리우스가 전사하면서 전선이 무너지자 아에티우스가 급히 복귀하여 서고트족을 다시 격파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아에티우스는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부근에 정착시켰고, 알란족을 노르망디 부근에 정착시키면서 서로마 제국을 괴롭히던 이민족들의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하고자 계속해서 노력했다.

442년,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는 또다시 서로마 제국과 평화조약을 채결했다. 가이세리크는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속령 두 군데를 서로마 제국에 돌려주는 대신 반달 왕국을 선포하고 그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와 약혼을 맺었다.

한편, 바가우다이[23]의 준동으로 히스파니아 속주가 또다시 공격받자 443년 군대를 파병해 이들을 진압했고 여세를 몰아 아에티우스는 계속해서 세력을 불리는 이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에 추가적인 군대를 파견했다. 446년에는 서고트족까지 공격했지만 이들의 반격으로 크게 패배했다.

447년엔 갈리아 서북부의 아모리카에서 바가우다이가 대대적으로 봉기했지만 알란족의 왕 고어와 서로마군이 연합하여 바가우다이는 진압되었다. 이어서 449년에 히스파니아에서 또다시 바가우다이가 준동해, 사라고사와 타라조나 등 히스파니아 동북부를 파괴하고 점령했다. 그리고 수에비족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타라코넨시스 속주로 진격했고 서로마군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450년엔 아에티우스가 프랑크족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면서 갈리아의 종주권을 확고히 다지고자 했지만 이는 서로마 제국과 국경선을 마주보고 있는 훈족의 경계를 받기에 충분했다. 5세기 중반에 이르자 게르만 부족들을 평정한 훈족의 세력권이 서로마 제국의 국경선에 다다랐고 결국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호노리아 황녀의 청혼[24]을 빌미로 갈리아와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25]

서로마 제국은 아틸라의 침공때 갈리아의 중심지인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을 내주면서 무력하게 무너지는가 했지만 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 연합군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의 주력부대를 격파하면서 일시적으로 침공이 주춤해졌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물리쳤지만 서로마군도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고 친 로마파인 서고트족도 왕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서로마군이 입은 피해가 극심했기에 이듬해인 452년, 아틸라의 이탈리아 북부 침공때 서로마 제국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 침공군은 아퀼레이아를 불태우는 등 여러 도시를 파괴했지만, 아틸라가 당시 교황인 레오 1세와 담판을 벌여 결국 철수했다.

아에티우스는 대 훈족 전쟁의 승리자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455년 3월, 혹여나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살해당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로 당대의 로마 원로원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스스로 오른팔을 자른 격이라고 비난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곧이어 황제 역시 아에티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뒤를 이어 서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 내부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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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세리크에 의한 반달족의 로마 약탈(455년)[26]

아에티우스도 죽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죽자, 반달 왕국의 왕 가이세리크는 이 기회를 노려 로마 약탈을 계획했다.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전에 평화조약의 조건이었던 후네리크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 사이의 약혼이 무산되었으니, 평화조약 또한 무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455년 6월 2일, 함대를 거느리고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 로마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하고는 2주에 걸쳐 약탈을 자행했다. 이로써 가이세리크는 서고트 왕국 알라리크 1세에 이어 제정 시기 로마를 약탈한 두 번째 야만족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던 교황 레오 1세[27]는 가이세리크와 협상을 시도했고, 그 결과 가이세리크는 저항하지 않는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숨긴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건물에 방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2주 동안 로마를 약탈한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인 에우도키아 · 플라키디아 등을 사로잡아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당초의 약속에 따라 후네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인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게 되었다.[28]

이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데리고 로마를 탈출하려 하다가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었다.

3.5. 최후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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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에티우스의 암살 이후 서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군은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했고,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를 빼앗겼다. 게다가 히스파니아 갈리아 곳곳에 게르만족의 세력이 눌러 앉았고, 그 바람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갈리아 북부, 달마티아, 그리고 본거지인 이탈리아 반도뿐이었다.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마지막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해된 뒤 마지막 20년은 스틸리코나 아에티우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어떻게든 지탱해나갔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사실상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족 출신 권신들의 입김을 받은 9명의 황제가 연달아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무력하게 몰락해 가는 시절이었다. 다만 이걸 외세에 의해 망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게르만족 출신이었던 권신들의 대부분은 오도아케르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간신들이지, 외세는 아니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29], 브리타니아[30], 히스파니아[31], 북아프리카의 '변경'에 서게르만계의 프랑크족, 수에비족, 앵글로색슨족과 동게르만계의 서고트족, 부르군트족, 반달족 등이 잇따라 침공해 정착함에 따라 군사력이 계속해서 약해졌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와 맞물려, 점차적으로 이탈리아와 몇몇 속주들의 일부분을 다스리는 수준까지 제국의 영토가 축소되었다.

물론 최후의 순간까지 갈리아 북부[32] 그리고 발칸 반도 일부 지역, 달마티아 지역[33]을 영유하고, 수백만 명의 인구를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개혁과 정치적 안정에만 성공했다면 건재할 수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서로마 제국은 예전부터 안정된 물자와 자원을 뽑아낼 수 있었던 이탈리아 본토를 중심으로 재건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영민한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통치로 구체화되었다.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도중 당시 황제였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살해되자 차기 황제로 갈리아 주둔군과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아비투스가 등극했다. 갈리아 사령관이었던 아비투스는 주둔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으며 동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키아누스에게 자신의 황제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은 아비투스는 이탈리아에 잔류한 반달족들을 몰아냈지만 해군이 빈약한 서로마 제국을 노린 반달 왕국의 침공은 계속되었다. 이후 아비투스 황제는 456년 캄파니아의 카푸아에 상륙한 반달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서게르만계 수에비족과 동게르만계 서고트족의 혼혈이었던 플라비우스 리키메르를 카푸아로 파견하여 반달족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카푸아 전투)

하지만 아비투스는 그의 본거지였던 갈리아 출신의 인물들을 등용했고, 라틴계 인물들이 주류였던 로마 원로원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리키메르는 이 기회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 456년 파죽지세로 라벤나로 진군한 리키메르와 그의 친구인 마요리아누스는 아비투스를 쫓아버리고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34]이었던 레미스투스(Remistus)를 처형했다. 갈리아로 달아난 아비투스는 군대를 모아 반격을 시도했지만 피아첸차 전투에서 리키메르-마요리아누스군에게 대패하면서 폐위되었다. 그나마 리키메르는 아비투스를 바로 죽이지는 않고 전투가 벌어졌던 피아첸차의 주교로 임명했는데, 이후 아비투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1년 만에 사망했다. 리키메르는 모든 군권을 장악했는데, 과거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가 황제의 음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참고 삼아 실권을 자신이 가졌다. 리키메르는 제위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권력을 자기가 통제하고자 했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1년이 지난 457년에 친구였던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 레오 1세 마요리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정식 황제로 인정했고, 능력이 있었던 마요리아누스는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에 맞서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458년 여름 반달족의 침공군을 격퇴하면서 숙적 가이세리크의 처남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마요리아누스는 함대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동쪽 아드리아 해 라벤나와 서쪽 티레니아 해의 미세눔에 함대를 재건했다. 또한 매우 약해진 군단의 전투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게르만 부족과 훈족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며 제국군을 강화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아비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35] 서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2세가 아비투스 황제의 폐위에 크게 반발하며, 서로마 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첫 번째 원정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당시 히스파니아에서는 이민족들이 눌러앉기 시작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도시와 정착지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고, 마요리아누스의 치세에 와서는 완전히 세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속주의 대부분과 갈리아 남부에 이르는 강대한 왕국이었지만 서고트족 뿐만이 아닌 다른 야만족들이 왕국 아래로 복속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기에 결속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마요리아누스의 서고트 원정군은 루그두눔( 리옹)을 점령하면서 부르군트족을 복속시켰고, 서고트 왕국과 결전을 벌여 갈리아 남부를 수복한 후 히스파니아 본토 깊숙히 진격했다.

긴 공성전을 거치며 사라고사를 점령한 원정군은 타라코를 거쳐 남하했고, 반달 왕국의 증원군을 격파하면서 서고트족이 처음 호노리우스 황제에게서 받은 갈리아 남서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탈환했다. 원정군은 여세를 몰아 수에비 왕국으로 진격했고, 수에비족 또한 최초의 영토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국에게 몰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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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0년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이끈 서로마 제국 최후의 중흥 당시의 판도

성공적인 황제의 원정에 의해 광대한 영토를 수복한 서로마 제국의 국력은 다시금 상승하기 시작했다. 갈리아의 군정장관 시아그리우스의 지휘 아래 몇십 년 간 버티고 있었던 갈리아와 제국의 중심부가 연결되었고, 히스파니아의 수복된 영토는 제국에게 다시 상당한 세입을 안겨주었다.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서로마 제국 내에서 여러가지 개혁 정책을 단행했고, 부정부패를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원로원과 적대하지 않도록 인선에도 신경을 써서 로마계 인물들을 주로 중용했고, 서로마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정치적 분열 또한 봉합하고자 노력했다.

국경 지대를 안정시킨 마요리아누스는 이번엔 북아프리카 속주를 재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집결시켰다. 북아프리카 원정을 위해 서로마 제국은 재건한 함대와 군대를 대거 카르타고 노바(현 스페인 카르타헤나)에 집결시켰지만 첩자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간 탓에 가이세리크의 기습적인 화공을 받아 함대와 군대가 대패하고 말았다. 결국 대 반달 원정이 참사로 끝나자, 실의에 빠진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복귀했고, 그의 활약으로 자신의 권력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했다. 황제가 살해된 후 기껏 수복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들은, 리키메르가 반역자인 자신을 물리치려는 옛 친구이자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충신이었던 아에기디우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서고트 왕국과 부르군트 왕국에 팔아 넘기면서 서로마 제국은 유럽에서의 입지가 더욱 더 좁아지게 되었다.

그후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했으나 동로마 제국과 서고트 왕국은 물론이고, 반달 왕국도 그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세베루스는 4년 후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차기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줬고,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대 반달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엔 서로마 제국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대규모 원정군을 꾸렸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국력 차이 때문에 원정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468년, 양국 합쳐서 무려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이 편성되었고, 카르타고로 진격했지만 레오 1세의 처남이었던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가이세리크는 평화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원정군의 함대를 주둔시킬 것을 권했고, 바실리쿠스는 그의 말을 믿고 항구에 대함대를 정박시켰다. 그러자 가이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했고 함대의 대부분이 그대로 불에 타버렸다. 원정군이 참패하며 후퇴하자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을 지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로마 황제의 지원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국력이 더욱 쇠락해지면서 외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본 곶 해전) 동·서로마 제국의 대함대가 전멸한 후 가이세리크는 무력화된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면서 서로마 제국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본 곶 해전의 참패로 서로마 제국에는 더 이상 대외 원정을 할만한 여력의 군사력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468년에서 470년 사이에, 그나마 명목상으로 로마 제국의 봉신국임을 자처하던 게르만계 왕국들이 서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제국 영토의 대부분에 눌러앉아있었던 이민족들이 제국에서 이탈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와 아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별다른 저항조차 없이 서고트 왕국이나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계 왕국에게 넘어갔다.

결국 안테미우스 황제는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의 음모로 살해당했고 472년 올리브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의 암살 배후에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올리브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지 40일 후 최악의 권신이었던 리키메르가 급사하면서 그가 옹립한 황제 올리브리우스의 권위는 바닥을 쳤고, 게르만계 장군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적인 암투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내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올리브리우스를 암살한 동게르만계 부르군트족 출신의 군도바트(군도바두스)는 4개월 후인 473년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무기력한 황제는 이탈리아 반도로 동·서고트족이 침공해오자 황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갈리아를 약탈하도록 권할 정도였고, 군도바트의 꼭두각시라며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그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레오 1세는 율리우스 네포스에게 군대를 지원해 글리케리우스를 퇴위시키도록 했고, 동로마의 원군을 등에 업은 율리우스 네포스는 라벤나를 포위했다. 이에 글리케리우스가 항복하면서 율리우스 네포스가 황제로 등극했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레오 1세의 지원 아래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한때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부역했다가 리키메르의 부하가 되었던 로마인 오레스테스와 서로마 제국 귀족들의 반란으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 달마티아로 피신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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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로마 제국의 군대는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민족 출신 용병들은 금전 대신 봉급으로 땅을 요구했지만 오레스테스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분노한 오도아케르를 필두로 한 이민족 용병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로마를 초토화시킨 이들은 오레스테스를 향해 진격했고, 오레스테스는 몸을 피해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뒤따라온 오도아케르의 군대에 잡혀 참수되었다. 476년 9월, 오레스테스가 죽은 후 오도아케르는 수도인 라벤나로 진격했고, 오레스테스의 형이자 어린 황제의 백부였던 파울루스가 남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러 갔지만, 라벤나 근교에서 패배한 후 라벤나에서 농성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틀 뒤 성문이 돌파당하면서 파울루스는 병사들과 함께 오도아케르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라벤나 함락)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36]와 제국의 실권자인 오레스테스[37]가 내전을 벌인 끝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형제인 파울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제거되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가 오도아케르의 군대에게 함락됨으로써 오레스테스가 세운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고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38] 물론 동로마 황제 제노의 눈치를 본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의 폐위 직후, 황제의 '어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면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39]

동로마 황제 제노는
"일찍이 오레스테스가 쫓아낸 율리우스 네포스(로물루스 황제의 전임자)가 아직 (달마티아에) 건재하지 않느냐"
며 네포스 복위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정작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방치하여[40] 사실상 서방 제국의 소멸을 인정했다. 그래도 달마티아에서 기반을 닦아 온 전임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복귀하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중 480년에 암살되었고, 같은 해 오도아케르의 침공으로 달마티아가 무너지면서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끝이 났다.

로마 왕정의 건국자인 로물루스 및 로마 제정의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와 최후의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이름이 같았는데[41], 건국 1,229년 만의 멸망이었다.[42][43]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에 해당되는 지역[44]들을 게르만족에게 뺏긴 것이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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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6년 말의 유럽 대륙
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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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오도아케르 왕국 동고트 왕국
수에비 왕국 율리우스 네포스 동로마 제국
·
반달 왕국

4. 멸망 이후

로마 제국의 서방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서유럽 전역에는 크나큰 정치적, 문화적 혼란이 발생했다. 당시 브리타니아(영국)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도시 인구가 감소하는 모습도 나타나게 되었다.[45] 특히 브리티니아의 경우 로마계 엘리트들과 그들이 가진 자산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바람에, 6-7세기 칠왕국이 정립되어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기 전까지 브리티니아의 경제력은 시망 상태가 되었을 정도였다. 브리티니아가 아니더라도 로마 제국의 이름 하에 하나로 묶여있던 지중해 무역 체계가 해체되어버리는 바람에, 약 100-200년간 동고트 왕국 정도를 제외하면[46] 서로마 제국을 계승한 거의 모든 국가가 파멸적인 대외무역 감소를 맛보아야 했다. 그 피해가 워낙 막대해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세력들의 충돌이 완화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체계를 이룬 1~2세기 정도 지난 다음에서야 회복세를 이룰 정도였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잔존세력들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수아송 왕국(Regnum Syagrii)은 서로마 제국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로, 최후의 갈리아 총독이었던 아에기디우스가 통치했고, 그의 아들이었던 시아그리우스가 마기스테르 밀리툼 자리를 계승했다. 하지만 486년 프랑크족의 남하로 시작된 전쟁에서 패배한 수아송 왕국은 멸망했고 시아그리우스는 이듬해에 처형당했다.

다른 로마계 왕국들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중앙 정부의 붕괴에서 살아남은 예로 북아프리카 서쪽에 살아남은 로마 전초기지들이 있었다. 물론 서로마 정부는 소멸해 무방비로 노출되었지만 반달족 주변의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 나가면서 로마-무어 왕국 등 국가도 세우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옛 고토를 수복 중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 다시 합치기도 한다.

오도아케르는 17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와 달마티아를 지배하다가 이후 493년, 동로마 제국 황제인 제노의 명령을 받고 이탈리아를 침공한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에게 살해당했고 동고트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탈리아 본토는 동고트 왕국의 지배하에서 서로마 제국의 행정체계와 문화를 유지하며 한동안 평화롭게 존속했으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인해 동고트, 동로마, 랑고바르드로 주인이 계속 바뀌던 6세기 중·후반부에 고대 로마적인 이탈리아는 결국 종말을 맞고 말았다.[47]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조지타운 대학교의 고전주의자 교수인 제임스 J. 오도넬의 견해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로 제국 서방에 대한 지배력은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더 야만적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오도넬은 서방이 북쪽과 동쪽의 야만적인 이웃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로마의 집정관들 대부분은 "제국"의 명목상의 경계 밖에서 태어났다. 제국의 시민들과 그들의 표면상 야만적인 이웃들은 그 수로들을 가로질러 많은 교류를 했다. 제국과 가까운 부족들은 제국 내 사람들의 많은 관습, 복장, 제도, 습관을 받아들였다.

오도넬은 제국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과 부족들의 이동을 약간 혼란스럽지만 대부분의 서양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것보다 더 평화로운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훈족의 왕 아틸라를 서양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된 악당으로 평가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훈족들은 전투에서 격퇴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호 인정된 우월한 문화에 동화된 것이었다. 로마는 455년에 반달족에 의해 약탈당했을지도 모르지만, 빠르게 재편되었다. 오도아케르는 서부 제국의 지도자가 되어 황제가 아닌 "왕"의 칭호를 맡았지만, 476년부터 493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아 현명한 지도력과 안정을 제공했다. 493년부터 526년까지 그의 영역을 이어받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은 로마 제국의 법적인 행정과 학문적인 문화를 지지했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주요 건축 계획을 추진했다. 505년에 그는 발칸 반도로 확장했고, 511년에 부르고뉴 반달 왕국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따라서 오도넬은 서로마가 5세기 중반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526년까지는 고트족과 훈족의 후손들에 의해 잘 통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국을 통일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을 정복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군대를 출발시켰으나 그들이 한 짓이라고는 제국의 서부를 망치고, 서쪽의 로마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동부의 제국에서 이탈시킨 것 뿐이었다. #

따라서 오도넬은 동고트 왕국 시기까지 서로마의 게르만족은 사실상 로마인이나 다름 없었고 오히려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에 인해 유지되고 있었던 서로마의 잔재를 붕괴시킨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이에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단적으로 포카스의 재위 기간인 6세기 말~ 7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시기에 로마시의 원로원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이는 로마적 전통을 규정할 수 있는 로마적 엘리트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붕괴했음을 뜻한다. 동로마 제국의 이런 만행으로 인해 이때쯤 가면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해당 단어를 사용한 로마 시 주민들과 일부 동로마령 이탈리아인들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마 제국의 남은 잔재까지 붕괴하고 동로마 제국의 환관 나르세스가 옛 이탈리아 본토를 일개 속주마냥 취급하며 쥐어짜자 이탈리아의 라틴 로마인들이 가혹한 통치에 대해서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은
"차라리 그리스인[48] 당신들보다 동고트인을 모시는 게 낫겠다."
고 했을 정도였다.[49] 훗날 동서대분열 4차 십자군으로 파국을 맞는 이탈리아 라틴인들과 동로마 그리스인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월계관을 받으면서 서로마 제국의 후계를 잇는다고 공언했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된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80년 뒤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이탈리아 전역과 북아프리카, 안달루시아를 수복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장기간의 전쟁과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제국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나머지 서방 영토를 수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수복한 이탈리아는 불과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으로 걸레짝이 되었고, 나중에 이슬람 제국이 흥기하면서 북아프리카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레반트, 시리아 등 동방 영토 상당수도 잃고 말았다.

한편 언어에 있어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기 쯤에 식자층의 그리스어 지식이 빠르게 쇠퇴하고, 라틴어가 학술어에서 단독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5. 관련 문서

6. 관련 창작물


[1] 그나마 국력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던 395년 동·서 분할 때의 강역이다. 이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서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속주의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끝내 서로마 전 지역을 되찾지는 못했다. [2] 사두정치 시절 로마의 동·서 분할통치 기준 [3] 로마의 최종적인 동·서 분할통치 기준 [4]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퇴위 기준 [5] 율리우스 네포스의 사망 기준 [6] 수아송 왕국의 멸망 기준 [7]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멸망 기준 [8] 황제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라벤나로 이사를 간 후에도 관념적으론 로마를 수도로 취급했다. [9] 공화정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로마 고유의 전제정이었다.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은 황제를 제위 세습이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으로 기술하고 있다. [10] 다만 갈리아는 이탈리아의 도시들 보다도 잘사는 지역도 많았다. [11]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 421년). 서기 421년 호노리우스와 공동황제로 통치한 인물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서 410년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서고트와 연합해 스페인의 알란족과 반달족을 공격하여 스페인의 상당 부분을 탈환했다. 이 사람과 갈라 플라키디아 황녀 사이의 아들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였다. [12] 이들의 재위 기간은 길어도 채 1년이 못 되었다. [13] 유념할 부분이 있다면 대중들에게 폭군 내지는 암군으로 알려진 가이우스( 칼리굴라)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는 네로처럼 불법을 악용해 암살된 황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도리어 이들의 암살은 원로원의 카이사르 이전으로의 공화정체 회복 시도와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생긴 음모로 급박하게 황제가 암살된 형태였고, 그들은 네로와 달리 현대 이후 로마사가 재정립되면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중이다. 실제로 두 황제는 수에토니우스 및 디오 카시우스 등의 편향된 주장과는 달리 암살 이후에도 그 통치 형태가 비난받았을지언정, 네로처럼 함량 미달의 황제로 공인되어 정통성을 부정받지는 않았으며 그들 가문이 멸문한 이후에도 후임 황제들에게 여전히 로마 제국의 정통성있는 황제로 평가되었다. [14]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 북부 [15] 로마 원로원의 입회 조건은 기본적으로 재산 규모 및 출신 후보들의 추천을 해줄 인맥이었다. [16] 이 부분을 현대적인 로마사의 관점으로 연구한 해먼드의 1957년 발표에 따르면, 이탈리아 출신 원로원 의원들의 비중은 베스파시아누스 시대까진 80%를 상회했고,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는 동로마 출신들을 총애한 도미티아누스 시대조차도 늘 70% 중후반을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는 50%대로 추락하더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즉위 직후에는 높게 잡아봐야 44%까지 줄어든 상태가 되었다. [17] 필요할 때마다 속주세를 쥐어짠 네로 황제를 제외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네 황제들의 속주세 징수 방향은 훗날의 트라야누스처럼 세금징수원을 보내 징수했다고는 해도, 지역 유지가 세금징수원과 연합해 징수하는 방법보다는 속주 총독과 파견 관리를 통해 징수하고 이를 산출해 재분배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당시 갈리아에서 한동안 카이사르의 해방노예 출신인 율리우스 리키누스를 동원해 트라야누스 방법으로 운영한 전례가 있긴 했다. 그런데 그 비리가 엄청났던 데다가 지역 유지끼리도 속주 총독과 어울려 파벌이 갈리는 문제가 생겨나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런 까닭에 갈리아의 유력자들까지 로마를 찾아와 불만을 토로했고, 아우구스투스가 망신까지 당하며 이를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리키누스를 즉시 소환하고, 자신의 양자인 대 드루수스를 총독으로 보내 총독과 중앙 관리가 세금을 산정해 징수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는 지역 유지와 연합한 관리 및 세금징수원들의 횡포를 줄이는 방법을 점차 확대시키면서, 수확량을 토대로 한 속주세를 중앙에서 징세하는 방향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18]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크 밀리타이 [19] 루마니아. [20] 보나파키우스가 북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참칭할 것이라는 소문. [21]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심하게 엇갈려서 상세한 것을 알기 어려운 형편이다. 동로마 제국 측의 기록에서는 보니파키우스가 갈라 플라키디아 태후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이세리크를 초청하여 반달족을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서로마 제국 측의 기록에서는 이런 묘사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일설에는 이미 북아프리카 속주와 서로마 황제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만한 기록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가이세리크가 당시의 어수선한 정황을 틈타 거의 모든 반달족들을 거느리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2] 당시 이곳에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성인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공성전이 시작된 지 2개월 후인 8월에 사망했다. [23] 서기 3세기의 위기때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준동한 농민 반란군. [24] 호노리아 曰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주겠다."였다. [25] 제1차 원정에서 아틸라는 갈리아의 오를레앙까지 진격했고, 제2차 원정에서는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군했다. [26] 19세기 경 러시아의 화가인 카를 브률로프(Karl Briullov)의 그림이다. 좌측의 검은 말을 타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가이세리크이다. 중앙에는 서로마 제국의 황후와 황녀들, 우측에는 로마 교황인 레오 1세가 그려져 있다. [27] 참고로 동시대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공존했다. [28] 이때 가이세리크는 결혼을 핑계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참금을 뜯어내어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에우도키아의 여동생 플라키디아는 후에 다시 서로마 제국으로 귀환했다. [29] 일단 408년에 라인 강이 돌파당한 이후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부르군트족이 갈리아에 정착했고, 410년 로마를 약탈한 서고트족이 아퀴타니아 지방에 정착했다. 노비오드눔(현재의 프랑스 수아송으로 서로마 시대엔 노비오드눔으로 불렸다.)을 중심으로 한 갈리아 북서부는 여전히 서로마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고,( 수아송 왕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인 486년에 메로베우스(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30] 383년부터 현재의 웨일스 지역은 서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407년 마지막 로마군이 반역자 콘스탄티누스 3세와 함께 갈리아로 떠나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에 대한 사실상의 포기 선언을 내리면서 브리타니아는 서로마 제국에서 반강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31] 서게르만계 수에비족이 북서부의 갈리시아 지방에 정착했고, 동게르만계 반달족이 한때 이 지역에 정착했으나 아퀴타니아 지방에서 밀고 들어온 동게르만계 서고트족에게 쫓겨나 북아프리카로 다시 이주했다. [32] 이 지역의 로마 세력은 서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도 이른바 수아송 왕국으로 남아 상당 기간 세력을 존속했다. 갈리아 지역에서 로마 세력이 완전히 말소된 건 487년 메로베우스(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수아송 왕국이 멸망하고,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시아그리우스가 처형된 뒤의 일이었다. [33] 율리우스 네포스가 지배하는 반독립 영역. [34] 로마군 총사령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군 통수권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행정과 사법까지 장악했다. 즉 오늘날의 합참의장 + 국무총리 + 대법원장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문·무로 구분했을 때 거의 1:1로 대응되는 최상급의 문관직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아니도 서로마 제국에 있었지만 난세였던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문민 통제의 퇴조로 유명무실해졌다. [35] 아비투스가 황제가 되기 이전 테오도리크 2세에게 지지를 조건으로 히스파니아 속주로의 서고트족의 확장을 용인했었다. [36] 동게르만계 스키리족 출신이다. 부친은 한때 훈족의 왕 아틸라의 신하였던 에데코였다. [37] 로마인이었으며, 오도아케르의 부친인 에데코와 함께 훈족의 왕 아틸라의 신하로 일했었다. [38] 엄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황제가 건재했기 때문에 서방 영토의 상실일지언정, 로마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39]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 황제가 엄연히 군림하는데 이탈리아의 황제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도도 있었다. [40] 당시 동로마 제국도 국내외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방관했지만 황제 제노를 포함한 어떠한 로마인들도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반도 지배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몇 년 뒤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에 주둔하던 동고트족을 테오도리크의 지휘하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로 보내 오도아케르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을 세워서 반독립세력이 되어 버려 이탈리아 탈환에는 실패했다. 사실 이것은 영토 수복보다는 두 게르만족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의 목적이 더 강했다. [41] 참고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여 새 시대를 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 [42] 동로마는 이후에도 1,0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속하다가 건국된지 2,206년 만에 멸망했다. [43] 로마 건국의 연도가 기원전 753년이라는 기록에 따라 계산한 것인데,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이라서 실제 연도와는 다를 가능성도 있다. [44]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이탈리아 반도 [45] 물론 이건 초기 중세인들이 특별히 무식해서 그런 건 아니다. 게르만 정치인들 역시 그리스-로마 문명을 애호했고, 로마인 인텔리들을 포섭했다. 도시 인구의 감소는 거대 제국의 붕괴와 정치적 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도시 쇠퇴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인 브리타니아(영국)는 애초부터 로마 제국의 변방으로 도시화율이 다른 지역보다 낮은 지역이었다. 브리타니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군사도시 아니면 속주 행정과 관련된 곳이었으니, 제국이 붕괴하면 같이 쇠퇴하는게 당연한 현상이었다. [46] 동고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를 통치한 랑고바르드 왕국의 경우 비잔티움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킬 때 워낙 이탈리아가 피폐해지는 바람에 경제 재건에 조금 더 시간이 걸려야 했다. [47] 학계에서도 이 시기에 고대 이탈리아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서적이 있다. (《 Imperial Tragedy: From Constantine’s Empire to the Destruction of Roman Italy AD 363-568》) 그리고 프랑스 사학자인 Bertrand Lançon 또한 저서 《 Rome in Late Antiquity: AD 313-604》에서 이 고트 전쟁 시기가 로마 시에 있어서 고대 후기 중 가장 암흑기였다고 했다. [48] 이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49]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 [50] 고대 로마 후기 + 서로마 제국의 로마 보병과 기병의 모습을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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