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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5대 군주 Hunéric | 후네리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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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후네리크 |
라틴어 | Hunéric 또는 Hunericus | |
그리스어 | Ὁνώριχος | |
생몰 년도 | 420년경 ~ 484년 12월 23일 | |
재위 기간 | 477년 1월 25일 ~ 484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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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달 왕국 5대 군주. 부친의 정교 박해 정책을 이어가면서 분란을 초래했다.2. 행적
420년경 가이세리크의 아들로 출생했다. 동생으로 겐토가 있었다. 429년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크 1세의 딸과 혼인했다. 442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가이세리크가 평화 협약을 맺은 후 인질로서 라벤나에 보내졌다. 이때 황제의 딸 에우도키아와 약혼했고, 얼마 후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444년, 가이세리크는 며느리가 아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코와 귀를 잘라버린 뒤 서고트 왕국으로 돌려보냈다.455년 3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면서 약혼이 취소되자, 가이세리크는 이를 빌미삼아 로마와의 평화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선포했다. 455년 6월 2일 로마로 항해한 가이세리크는 14일 동안 로마를 약탈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인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 등을 사로잡아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당초의 약속에 따라 에우도키아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힐데리크가 태어났으나, 472년 에우도키아는 남편의 광적인 아리우스파 신봉이 혐오스럽다며 예루살렘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477년 1월 25일 가이세리크가 사망한 뒤 반달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왕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두 형제 겐존과 테오도리크 및 그들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추종자들을 살해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사절 알렉산드로스와 교섭한 뒤,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정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했다. 아버지가 카르타고 상인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돌려줬으며, 정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 정책을 철회했다. 480~481년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노가 24년간 공석이던 카르타고 주교를 새 주교로 선출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그렇게 할 의향이 있지만 그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른 동방 속주에 있는 아리우스파 교회가 정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해달라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의 왕국의 모든 주교를 "무어인의 땅"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제노가 받아들이자, 그는 공의회를 실시해 에우제니오를 새 주교로 선출했다.
그러나 주교 선출 직후, 그는 다시 정교 박해 정책을 실시했다. 정교 건물들을 모조리 헐려 하다가 동로마 황제의 항의를 받자 건물은 놔두되 많은 정교 신자를 먼 지방으로 추방하기로 하고 484년 2월 24일 그들을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몇몇 총독은 아리우스파가 되기를 거부했다가 하드루메툼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후 모든 정교 신자에게 아리우스파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의 코, 귀, 또는 팔을 잘랐다. 여기에 마니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고 끝까지 따르지 않는 자들을 변방으로 추방했다. 이렇듯 혹독한 박해 정책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하자, 가이세리크 치세 때 반달 왕국에 복종했던 베르베르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북아프리카 해안지대를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렇듯 정교 박해 정책으로 인한 분란이 심했지만, 내치에 힘을 쓰기도 했다. 480년경 ' 아르키메데스 나사'를 이용했다고 알려진 코클레아(coclea)라는 기계를 제작하여 해안의 한 부분을 배수하는 작업을 수행해 농경지를 새로 확보하게 했다. 카르타고에 거주하던 로마 시인 카토는 이를 칭송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484년 12월 23일 병사했다. 정교 수도자 빅토르는 그가 괴저로 인해 사망했으며 해충들이 시체를 갉아먹었기 때문에 온전히 묻히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인육을 모아서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는 정교를 박해한 그에 대한 증오심이 발현된 악의적인 기록일 것이다. 사후 조카 군타문드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