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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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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1D1D,#e2e2e2
<colbgcolor=#FFF,#000><colcolor=#000,#FFF> ~ 843년 갈리아 켈트족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서로마 제국
수아송 왕국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부르군트 왕국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서고트 왕국
843년 ~ 1940년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아키텐 공국 · 노르망디 공국 · 브르타뉴 공국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1식민
제국
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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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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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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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자유 프랑스 비시 프랑스 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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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임시정부
제4공화국
제5공화국 }}}}}}}}}}}}}}}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Cinquième République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장.svg
국기(1976~)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국기(1958~1976)[1] 국장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상징
국가 라 마르세예즈
1958년 10월 5일 ~ 현재
성립 이전
프랑스 제4공화국
지리
수도 파리
인문환경
인구 1958년 44,563,000명
2020년 67,064,000명
언어 프랑스어
정치
정치체제 이원집정부제
국가원수 대통령
정부수반 총리
경제
통화 프랑스 프랑 (1958년부터 2001년까지)
유로 (2002년부터)

1. 개요2. 제4공화국과의 차이점3. 역사
3.1. 드골주의(드골, 퐁피두 치세)
3.1.1. 개헌의 배경3.1.2. 드골주의 전성기 (1962년 ~ 1968년)3.1.3. 68운동(1968년 5월)3.1.4. 샤를 드골의 쇠망(1969년)3.1.5. 조르주 퐁피두
3.2. 70년대 이후의 변곡점3.3. 주요 연표
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 10월 5일부터 현재까지 군림하는 체제이다. 상당히 강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 하원 상원으로 이루어진 의회와 정책을 도입하는 이원집정부제다.

2. 제4공화국과의 차이점

제5공화국은 창설 당시 상당히 독특했던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했다. 제4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소멸한 제3공화국을 모델로 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는데, 고작 12년 동안 총 21명의 총리가 재임하는 등 심각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의원내각제의 특성상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국가수반인 총리는 의회에 좌지우지되었다. 결국 샤를 드골 장군은 1946년 바이유 연설에서 주장했던 헌법을 청사진 삼아, 1958년 국민투표로 행정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새로운 체제의 승인을 요청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총리와 행정권을 분립해야한다는 점에서 미국이나 대한민국 제6공화국 대통령 중심제와 대조된다.[2]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총리가 대통령의 꼭두각시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원집정부제에서 총리는 의회에 책임을 지고, 따라서 의회가 총리를 불신임해 쫓아낼 수 있기 때문에, 총리는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는 정당에서 추천하는 인물을 임명하는게 관행이다. 이러한 특이성 때문에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을 때, 다른 당의 의원을 총리로 임명해 두 당이 “ 동거”(Cohabitation)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3]

제3공화국이나 제4공화국 때는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데 비해, 직접 선거로 임명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선거 제도는 두 차례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결선투표제 (scrutin uninominal à deux tours)를 채택했다. 대통령은 하원 해산권, 사면권, 국민투표 부의권, 긴급조치권, "의회 패싱권" [4], 헌법위원회 위원 1/3 임명권 등을 가진다. 프랑스 헌법은 비교적 느슨하게 작성되어 있어 드골주의에서 현재까지 천천히 현 상황에 적응해 왔다.

자세한 것은 프랑스/정치 참고.

3. 역사

3.1. 드골주의(드골, 퐁피두 치세)

3.1.1. 개헌의 배경

제4공화국 의원내각제 국민의회가 권력을 쥐고 있었고, 합의에 이르지 못해 정체적인 정치를 초래했다. 또 과반을 차지한 당이 행정부를 엎을 수 있다는 점을 사용해 근소한 차이로 야당이 여당을 앞서게 되면 의회가 내각을 뒤집어엎는 등 고질적인 제도적 불안정함이 있었다. 정부는 항시 정치적 혼란에 고통받았고, 일관된 정책 없이 갈팡질팡했다. 이를 문제삼은 샤를 드골은 강한 행정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체제를 꾀한다. 드골 장군의 이러한 요구는 초기에는 묵살되었으나, 5월 13일 식민지 알제리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알제리 전쟁이 격화하자 당시 대통령 르네 코티는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대로 드골을 총리로 추대하여 내전을 막고자 한다. 1958년 6월 1일 총리가 된 드골은 비상대권과 필요 시 개헌을 할 권리까지 위임받는다. 드골은 새로운 헌법을 구상하고 곧이어 9월 3일 헌법의 승인을 국민투표에 부친다. 새로운 헌법은 79%의 찬성과 5%의 반대, 16%의 기권으로 가결된다.

이렇게 제정된 제5공화국의 헌법은 대통령에게 전 공화국에 비해 많은 권력을 양도하고 의회의 역할을 축소한다. 대통령은 하원의원, 상원의원, 지방의원 등 직접선거로 선출된 8만2천명의 대표투표자들이 뽑아, 전보다 의회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대통령은 의회를 통하지 않고 국민투표로 직접 국민들의 결정을 물을 수 있고, 사면권과 군대통솔권, 외교권, 총리와 국민회의장의 건의 후 국민의회 해산권을 발휘할 수 있다. 긴급 상황일 경우 긴급조치권으로 독단적으로 최장 6개월 동안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 입법권은 아직 의회가 쥐고 있지만,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하지 않는 한에는 총리가 독단으로 법을 통과시킬 수 있다. (헌법 49.3조)

1959년 샤를 드골은 헌법을 작성한 미셸 드브레를 초대 총리로 임명한다. 1960년 그는 코모로 소말리아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해방을 선언하고,[5] 1961년 1월 8일 국민투표로 알제리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했고, 에비앙 협정으로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알제리 전쟁을 끝맺는다.

3.1.2. 드골주의 전성기 (1962년 ~ 1968년)

1962년 샤를 드골은 대통령 선거를 직접선거로 전환하는 건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62%의 찬성으로 통과시킨다. 곧이어 열린 국민의회 선거에서 드골주의자들은 233석을 차지하고 드골에게 호의적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위주로 뭉친 자유주의자들이 44석을 차지한다. 드골의 명백한 승리였다.

조르주 퐁피두를 총리로 삼은 두 번째 내각의 구성원으로는 앙드레 말로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처럼 유명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골이 봉착한 첫 번째 문제는 바로 경제였다. 당시 프랑스는 높은 인구 증가율로 경제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경제 성장을 노릴 기회기도 했다. 드골은 산업 개발에 중점을 둔 정책과 도시들의 현대화로 실업률을 줄이는데 전념한다. 또 1964년에는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의 건설을 시작하고 고속도로들을 개통하는 등 인프라 개발에 착수한다. 인프라 개선과 지방 도시들의 삶의 질 개선으로 파리로 집중되는 인구와 산업들을 지방 도시들로 돌리려 한다. 하지만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전쟁에 투입됐던 병사들의 회귀로 실업률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였다. 드골은 퐁피두와 경제부 장관 지스카르데스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플레이션과 국채를 줄이려는 의도의 1963년에 안정화 계획(Plan de stabilisation)을 선택한다. 정부의 장기투자를 줄이고 물가제재로 인플레이션을 잡는데는 성공하나 (2.5%에 머문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1965년에는 10만명에 달했다), 경제성장률이 부진한다.

드골주의의 가장 중요한 신조 중 하나는 미국과 소련에서 독립된 정치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유럽에 속한 이상 소련보다는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미국과 동등한 위치, 혹은 적어도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려 했다. 이를 위해선 군사적 독립은 불가피했고, 군사적 독립은 곧 핵무장을 의미했다. 드골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독자적인 핵무기를 개발한다. 그는 나토에 비교적 적대적인 태세를 취했으며, 멕시코 등 제3세계의 국가들과의 연맹을 통해 제3의 길을 찾으려 한다. 예컨데 베트남전 때 미국의 개전을 비난한다거나[6], 멕시코 방문으로 멕시코와의 외교관계를 다진다. 그는 소련과 관계를 유지했으나,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될 때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1964년)하는 등, 소련과도 항상 일정 거리를 두었다. 유럽 정세에 관련해서는 1957년 창설된 유럽 경제적 연합체 (European Economic Community)의 발달에는 찬성해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나 영국의 가입에 관해서는 영국이 친미 성향으로 유럽이 제3노선을 걷는데 지장을 준다며 반대했다.

1965년 열린 대선에서는 드골과 반드골주의자이자 후일 대통령이 될 프랑수아 미테랑이 출마했다. 드골은 55%를 득표했고, 미테랑은 45%로 패배했으나, 좌파들의 리더로 자리매김한다. 조르주 퐁피두는 경제부 장관의 경제 정책이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들어 지스카르데스탱을 미셸 드브레로 대체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지스카르데스탱은 드골의 계획주의 경제에 대조되는 자신만의 리버럴 우파로 구성된 계열 독립 공화주의자 연맹 (Fédérations Nationale des Républicains indépendants - FNRI)을 구축하고 드골에 반대하는 노선을 걷는다.

3.1.3. 68운동(1968년 5월)

베이비 부머 세대는 미국의 히피 문화와 로큰롤에 심취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성세대와 괴리감을 느꼈다. 또 10년 동안 재임한 드골, 다소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와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다. 이들은 아나키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등 사상으로 무장했다. 이 사회적 변화에 대한 열망은 소르본 대학교 낭테르 캠퍼스에서 발현된다. 사회학을 전공하던 다니엘 콘 베디트는 낭테르 대학생들에게 “ 베트남전이 미 군국주의의 표상이고, 프랑스가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베디트를 선두로 소르본 학생들이 소르본 캠퍼스를 하나 둘 점거하자, 정부는 소르본 대학을 폐쇄하고 진압 경찰로 하여금 운동을 해산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분위기를 격상시켰고, 1000명의 사상자를 유발하는 싸움으로 번진다.

조르주 퐁피두와 정부는 새로운 성격의 운동에 대응할 방법을 강구하나 문제점을 곧이 파악하지 못한다. 이들은 어떤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고, 각자 다른 목표를 갖고 시위에 참여한 것이었다. 정부는 공산당을 선동가로 지목하지만, 이들은 68운동가들이 소련에 불복종하는 점을 들어 이를 부인한다. 정부는 68운동의 성격을 아나키스트적 난동에 불과하다고 결정짓는다.

초기의 68운동은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요구하는 사상적 운동에 가까웠지만 점차 노동자들의 불만과 겹쳐 복합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노동자들은 철도공사인 RATP 르노 공장을 봉쇄하고, 천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역대 최대 규모의 파업을 진행한다. 이들은 일관된 요구사항 없이 각자의 목표를 외치며 운동을 계속해 나갔고, 정부는 뚜렷치 않은 요구사항 때문에 적당한 합의사안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조르주 퐁피두는 노조들과의 협상[7] 끝에 타협안인 “그르넬르 조약”을 제시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대다수 노동자들은 파업을 멈추지 않는다. 프랑수아 미테랑의 좌파들은 혼란을 기회삼아 피에르 멘데스를 대통령으로 삼은 임시정부의 설립을 국민들에게 제안하고, 미테랑은 미리 대선주자로써 출마를 선언한다. 드골은 68운동가들이 공산주의적 쿠데타를 꾀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리고, 사임을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보인다.

하지만 68운동의 과격성에 놀란 중도파들과 우파가 드골주의자들을 선출하면서 1968년 6월 하원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우파가 개헌선을 확보하는 승리를 거두면서 혁명적 불길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8] 하지만 이는 드골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안정을 위해서였다. 후일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 중 대다수가 드골이 너무 늙고 권위주의적이고, 너무 반미적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3.1.4. 샤를 드골의 쇠망(1969년)

샤를 드골은 68운동의 책임을 물어 조르주 퐁피두를 경질하고 모리스 쿠브 드뮈르빌을 총리로 앉힌다. 쿠브 드뮈르빌은 68운동의 주요 요구사항 중 하나였던 대학 개혁을 시행한다. 또 그는 지방 분권화를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이는 지방선거 방식의 개편, 즉 상원 권력의 약화를 뜻했다. 드골은 이 정책으로 정부와 의원들의 남은 인기마저 잃게 되고, 그는 마지막 국민투표에 이 사안을 부친다. 그는 이 사안의 거부 시 사임할 의지를 보였고 국민투표가 53%로 부결되어 결국 사퇴하였다. 드골은 정계 은퇴 이후 1970년에 사망한다.

3.1.5. 조르주 퐁피두

조르주 퐁피두는 골수 드골주의자로써, 샤를 드골이 지향했던 정치적 행보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는 드골 없이도 드골주의적 정치를 해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조르주 퐁피두는 구 드골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과 중도파들의 지지를 얻었고 프랑스 공산당이 2차 투표불참을 촉구함에 따라 포에르를 지지할것으로 보였던 상당수의 좌파성향 유권자들이 투표에 불참하며 드골의 퇴임 이후 임시정부의 수반을 맡았던 알랭 포에르를 58.2%의 득표율로 간단히 누르는데 성공한다. 조르주 퐁피두는 드골 정부의 주요 비판 이유 중 하나였던 권위주의적 면모를 배제하고 의회 친화적인 정치를 해간다. 그와 재무부 장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은 68운동 파업으로 인해 약화된 경제를 회복시키고, 국내총생산과 수출 비율은 상승한다. 비록 실업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인상된 임금과 68운동의 합의안인 그르넬 조약으로 개선된 노동 환경에 만족한다.

대외적으로는 드골보다 유화적인 정치를 펼쳤다. 전임 수상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때 소원해진 서독-프랑스 외교 관계 빌리 브란트 총리와 함께 개선하고, 미국-프랑스 관계도 개선하려 했다. 드골이 반대했던 영국의 ECC(유럽 경제 연합체)의 가입에도 찬성했다. 이로써 조르주 퐁피두는 ECC를 영국, 덴마크, 북아일랜드까지 넓힌다. 이 공헌으로 오늘날도 조르주 퐁피두 유럽 연합의 아버지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권위주의적 우파였던 드골과는 달리 자신과 가까운 자크 샤방델마스를 총리로 임명한다. 샤방델마스(Jacques Chaban-Delmas)는 조르주 퐁피두와 여러 차이점을 보였는데, 우선 제5공화국 성립 이후에서야 정계에 입문한 퐁피두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부터 드골의 최측근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이런 점 때문에 소위 "드골주의의 남작들(Les Barons du gaullisme)"이라 불리우는 다섯 인물들 중 하나였다. 또, 퐁피두가 유화적이나 여전히 전반적인 행보는 전통 드골주의에 충실했다면, 샤방델마스는 드골의 사망 이후로 사회적 진보를 앞세운 좌파 드골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최저임금제도를 도입시키고, 시급으로 주로 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이 월급제로 전환하면서 더욱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대통령과 자연스레 충돌을 일으켰다. 이에 더해 샤방델마스는 제5공화국의 스트롱맨이었던 드골이 죽고 퐁피두가 카리스마가 비교적 떨어진다는 것을 이용해 권력의 중심을 대통력직에서 총리직으로 가져오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의 건의없이 의회에서 사회적 개혁들을 앞세운 새로운 사회(Nouvelle Société)를 이룩할 것을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 결국 드골주의자/우파 지지 기반은 약화되었고, 1972년부터 조르주 퐁피두는 자크 샤방델마스를 국방부 장관이던 피에르 메스메르로 교체하면서 다시 전통 드골주의적 정책으로 회귀한다. 피에르 메스메르는 비교적 순종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로, 드골의 죽음 이후 아직 제도적인 불안정함을 보였던 제5공화국이 완전히 정착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의 영향인 석유파동을 겪으면서[9] 경제호황 영광의 30년이 끝나고 불황으로 접어드는 한편, 10개월 징병제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폭동으로 조르주 퐁피두는 인기를 잃게 된다. 조르주 퐁피두는 1974년 갑작스럽게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이후 실시된 조기 대선에서는 조르주 퐁피두의 첫 총리로 인기가 높았던 자크 샤방델마스,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우파 후보로 출마하고, 좌파 측에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공산당, 사회당등의 지원을 받고 출마한다. 또 선동주의적/인종차별주의적 발언들로 노이즈 마케팅으로 유명해진 극우파 장 마리 르펜이 처음으로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3.2. 70년대 이후의 변곡점

1974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서거는 프랑스 정치사에 큰 전환점을 찍는다. 1958년 공화정의 수립부터 우파 드골주의자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1974년부터는 반드골주의 우파, 중도파와 좌파들이 권력다툼을 시작한다. 1974년 이후 프랑스 역사는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드골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적 우파인 첫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의 임기, 둘째, 1981년부터 1995까지의 좌파 프랑수아 미테랑의 임기와 셋째, 1995년 자크 시라크부터 좌파/우파가 번갈아 군림하는 시기. 넷째, 2017년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중도파들을 모아 앙 마르슈!를 창당하고 국민의회를 장악한 중도파 시대이다. [10]

3.2.1.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1974년, 자유주의 우파 인사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의 엘리제궁 입성은 프랑스 제5공화국사의 첫 전환점으로 보였다. 하지만 국민의회의 과반이 드골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여소야대인 탓에 그는 총리로 드골주의자 자크 시라크를 임명해야 했다. 두 인물은 항시 대립해 결국 자크 시라크는 1976년 사임하고, 지스카르데스탱에 반대하며 스스로를 우파의 리더를 자처한다. 취임식 연설 시 그는 "프랑스가 대대적인 개혁들의 현장이 될 것"이라 말하며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친다. 선거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하향 조정, 몇몇 직업군에 제한되어 있던 복지제도를 전 국민에게 적용한다. 또 중고등학교를 단일화해 지역별 학교 수준 차이를 없애는 하비 법 (Loi Haby, 1975년 7월)을 포고하고, 국영라디오인 ORTF를 TF1, Radio France 등 일곱 개의 기업들로 분리시킨다. 시몬 베유 보건복지부 장관 하에[11] 낙태를 합법화하고, 여성부를 설치, 규율 위반으로만 가능했던 이혼에 합의이혼이라는 사유를 추가해 이혼절차를 간소화시킨다.

1973년 퐁피두 대통령 임기 말부터 프랑스는 석유파동으로 심각한 불황과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원자력발전소를 새로 건설하는 등 토목 공사로 돈을 시중에 푸는 방책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인플레이션은 15%를 찍는다. 그는 경제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를 포함한 G6 (Groupe des 6)을, 이듬해 캐나다를 포함해 G7을 창설한다. 1976년부터 푸조, 시트로앵 등 대기업들의 활약으로 경제적 상황이 약간 완화되기는 했지만 실업률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율은 9%를 벗어나지 못했고 성장률은 미약한 3%에 머물렀다.

자크 시라크 총리는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했다. 그는 대통령의 정책이 우파라고 보기에는 너무 진보적이고 좌파적이라 생각했다. 의회의 과반인 드골주의자들도 대통령보다는 시라크 총리의 정치적 노선을 선호한다. 자크 시라크는 행정부의 분립 원칙을 들어 자신을 대통령과 동등한 파트너라고 주장한다. 자크 시라크는 국민의원 선거를 앞당겨 진행하고, 자신의 경제 정책을 도입해 좌파들이 득세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은 심각하지 않은 문제라며 일갈한다. 결국 둘의 관계는 악화되고 자크 시라크는 사퇴했으며 대통령은 총리를 레몽 바르로 교체한다. 바르는 인플레이션율을 잡기 위해 석유 수입을 줄이고, 물가를 규제해 인공적으로 물가의 변동을 제제(Blocage des prix)하고, 부가가치세를 줄이는 등 “바르 플랜”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국가의 부채만 늘려버렸다. 곧 완전실업자들의 수는 백만 명을 넘기고, 대통령의 인기는 추락한다. 특히 대통령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콜 폴리테크니크-ENA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게 다이아몬드를 받았다는 스캔들과 겹치면서 거만하고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결국 지스카르데스탱은 서민들에게 가까워지려는 시도들과 언론플레이와 텔레비전을 이용한 보여주기식 행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밀리게 된다.

3.2.2.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수아 미테랑의 임기는 제5공화국 초기부터 중도우파 진영이 장기집권했던 프랑스가 제5공화국의 출범 이후 처음으로 좌파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당선 직후부터 "인생을 바꾸기(Changer la vie)" 라고 명명한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로스차일드지사를 포함한 다수의 기업들을 공영화하고, 최저임금을 10% 인상하고, 주 40시간에서 주 39시간 근무제로 근로시간을 감축했으며, 연차 유급 휴가를 4주에서 5주로 인상했고, 또 정년을 62세에서 60세로 줄이고, 부분적으로만 공공재였던 의료를 완전히 공공화했다. 그 외에 바당테르[12] 법으로 사형제 폐지 등 인권보호 증진 위주의 법안들을 여럿 통과시켰다. 대통령의 목표는 프랑스의 경제 정책을 1988년까지 자신의 제의하는 사회주의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의 총리 피에르 모루아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하기보다는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방책으로 방향을 바꾼다.

하지만 양측에서 반대파들이 궐기하기 시작한다. 미테랑을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은 그의 정책이 너무 온건하다며 비판하고, 산업계는 근로시간 감축, 의료 공공화와 사회복지 지출을 떠받치기 위한 세금의 인상을 비판한다. 미테랑의 지지자들은 근로시간의 감축이 실업자들에게 일을 나누어주는 방편이라고 설명하지만, 1983년 종합실업률은 전무후무한 7%를, 청년실업률은 15%를 찍는다. 피에르 모루아는 각료 개편으로 인기율을 유지하려 한다. 심각해지기만 하는 국가 부채로 사회주의 정책이 실현 불가능해지고 철강업 지원을 희생하자 대거 해고당한 철강업 노동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외정에 관해서 미테랑은 조르주 퐁피두의 외교 정책을 계승한다. 미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제3세계와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소련의 탄도탄 SS20을 포격할 시 보복하기 위한 퍼싱 II(Pershing II)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한다. 하지만 미국이 니카라과의 채굴권을 얻는데 반대하는 등 대통령이 미국을 불쾌하게 하는 발언을 하는 프랑스 전통은 여전히 이어간다. 프랑스는 앙골라,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공 등과 수교하고, 알제리와 멕시코와도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대한민국을 방문한 첫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런 수교의 이유는 첫째, 미국과 소련에서 독립된 제3노선을 걷자는 희망[13]이고, 둘째, 믿을만한 원자재 공급처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14]. 셋째 이유는 68운동 이래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제3세계주의 (Tiers-mondisme)가 한몫한다.[15] 이렇듯 이상주의적 사고방식에 불과했던 제3세계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국익과 맞아떨어졌고, 프랑수아 미테랑의 제3세계와 수교 정책은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86년 국민의회 선거에서 우파연맹이 274석을 차지했고, 대통령이 속한 사회당은 215석을 얻었다. 이원집정부제의 특성상, 대통령이 속한 당이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을 경우 반대파 당에 속한 총리를 임명해야 했고, 미테랑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정부 하에 총리를 맡은 이력이 있는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한다. 이것이 첫 동거정부다.[16] 두 인물은 시라크가 내정을, 프랑수아 미테랑이 외정을 맡는다는 합의에 이른다. 시라크는 친기업적인 정책으로, 대대적인 민영화, 부유세 저하 등을 적용한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부진했고, 이로 인해 내정 분야를 탈환해왔던것이 악재가 되어 시라크와 우파는 지지 세력을 잃는다. 한편 프랑수아 미테랑은 유럽 연합의 건설에 착수하고, 독일 수상 헬무트 콜과 군사적, 경제적 협력 조약을 맺는다. 이런 배경에서 미테랑은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쉽게 재선에 성공한다.

이 후 미테랑은 국회를 해산한 뒤 재선거에서 승리하면서[17] 다시 내각을 탈환했고, 사회당 친미파인 미셸 로카르를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로카르는 대통령의 영역인 외정에도 간섭하려 하면서 내분을 일으켰고, 결국 1991년 미테랑은 로카르를 해임하고는 첫 여성 총리 에디트 크레송으로 교체한다. 1992년 미테랑과 크레송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비준해 서/중유럽 12개국으로 이루어진 유럽 연합을 창설했다.

3.2.3. 자크 시라크

1995년 대선에서는 전 총리 자크 시라크가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과 극우파 국민전선의 당수 장마리 르펜을 상대로 승리한다. 시라크는 알랭 쥐페를 총리로 임명한다.

유럽 공동 통화를 창설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엄청난 부채를 해소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크 시라크는 증세정책을 도입하려 하나 1995년 대규모 파업으로 정책을 시행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자크 시라크는 국민의회 총선에서 좌파들이 득세할 것을 우려해, 시간을 버는 목적으로 의회를 해산한다. 하지만 1997년 총선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사회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대통령은 알랭 쥐페를 사회당의 당수 리오넬 조스팽으로 교체한다. 세번째 동거정부다. 조스팽은 새로운 공직들을 창설하고 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제한해 실업률 문제를 풀려고 하고, 실업률은 10% 이하로 줄이는데 성공한다. 한편 자크 시라크는 동거정부가 장기화됨으로써 행정권이 대통령과 총리에게로 완전히 분립되는 것을 우려한다. 그는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줄여, 국민의회 의원들 임기(5년)에 맞추어 동거정부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18] 자크 시라크는 이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73%의 찬성률로 통과시킨다.

자크 시라크는 여느 동거정부의 대통령이 그랬듯이 외정을 맡았다. 그는 나토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는 등 친미적인 행보를 보이고, 유럽 연합의 건설을 주도한다. 그 외에도 샤를 드골 때부터 행해졌던 나치 과거청산[19] 쇼아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연설을 한다.

2002년 대선에는 자크 시라크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리오넬 조스팽,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과 극좌파이자 프랑스령 기아나 출신인 크리스티안 토비라가 출마한다. 리오넬 조스팽은 임기 기간동안 "포괄적인 좌파연맹"으로 다양한 좌파 세력들을 좌파라는 우산 하에 연합시키려 했었다. 리오넬 조스팽의 온건한 정책들은 좌파연맹의 급진좌파들의 반발을 사고, 조스팽의 선거기반을 약화시킨다. 이런 배경에서 자크 시라크 장마리 르펜이 1차 투표에서 승리하게 된다[20]. 장마리 르펜만은 안된다고 보았던 프랑스인들은 자크 시라크에게 모든 표를 실어주고 시라크는 압도적인 82%로 당선된다.

3.2.4. 니콜라 사르코지

2007년 5월 6일, 사회당 소속의 세골렌 루아얄과 맞붙어서 대선에 승리한다.

프랑수아 피용을 총리로 임명하고, 베르나르 꾸슈뇌흐(Bernard Kouchner)를 포함한 좌파들을 내각에 포함시키거나, 장관들을 8남-7녀 비율로 임명하는 등 통합적인 내각을 구성하려고 애쓴다. 내핍정책으로 수입을 축소하고 수출을 증가시키려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60세로 줄였던 정년을 62세로 롤백했다. 국무총리를 여러 번 교체하는 관행과는 달리 프랑수아 피용 사르코지 임기 내내 국무총리로써 그를 보좌한다. 2010년 로레알 기업의 최대주주이자 부호 릴리안 베탕쿠르(Liliane Bettencourt)가 정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베탕쿠르 사건이 퍼지면서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의 집사가 그녀와 자산관리자가 세금회피를 의논하는 대화 내용과, 에릭 뵈르트 (Éric Woerth) 노동부 장관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을 녹음파일을 공개했다. 은퇴 개혁을 포함한 노동부 장관이 추진했던 모든 정책들이 신뢰를 잃어, 사르코지 정권은 약화된다.

대대적인 감세 정책과 자유주의적 정책을 시행한다. 후일 정부들이 부자증세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 부유세(ISF)의 50%이상 징수를 금지시켰다. 초과근무에 부과했던 세금을 폐지하고, 상속세 저하, 요식업에 과세되던 부과가치세를 낮추겠다는 대선 공약을 이행, 19.6%에서 5.5%로 인하하고, 부과할 수 있는 세금의 한계선(Bouclier fiscal)을 저하해 전반적인 세금 축소 정책을 추진한다. 2008년 1월 기업간의 경쟁을, 즉 소비자 위주의 경제를 장려하는 샤뗄 법을 통과시키고, 경제현대화법(LME)으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자영업자라는 분류를 생성한다. 파리 사클레 (Saclay, 프랑스 남부의 위성 도시)에 비즈니스 클러스터를 생성해 대학들과 하이테크 스타트업의 이전을 장려한다.

샤를 드골 시절 떠났던 나토에 다시 가입해 미국의 반테러전쟁을 지지했다. 프랑스 정치인 잉그리드 베탕쿠르가 콜럼비아 무장혁명군의 포로로, 프랑스 간호사들이 리비아 정부의 포로로 잡히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사르코지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과 협상을 통해 후자를 해방하는데 성공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대중의 금융 시스템과 금융 엘리트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자, 사르코지는 주요 경제-금융 이슈를 민영기업들의 손에 방치해두지 않고 정치적 개체가 적극 조정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우선 유로존 국가들과 함께 기업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중에 1.7조 유로[21]를 푸는 정책을 시행한다. 2009년 피츠버그 회담으로 34년 전 설립된 G7에 11개의 신흥국(+ 유럽 연합)을 더한 G20이 개설된다. 2011년에는 그리스를 구원하려 IMF와 유럽연합의 협동으로 금전적 지원을 시행한다.

3.2.5. 프랑수아 올랑드

2012년 대선, 사회당 후보로는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유력 후보로 언급되고 있었다. 물론 프랑수아 올랑드가 당수로 있긴 했지만 그는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비록 무혐의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성추문이 퍼지면서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수 없어진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신중도당과 공화당의 지지를 받으면서 재선을 시도한다. 그러나 선거 결과 올랑드가 근소하게 사르코지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프랑수아 올랑드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낭트 시장 장 마크 에로를 총리로 공천하나, 에로는 국가 차원의 행정적 경험은 전무했다. 그는 리오넬 조스팽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 청년들을 위한 공직들을 15만 개 창출하고 최저임금을 높였으나 실업률 축소에 실패했다. 에로는 대통령과 함께 카리스마의 부족으로 비난받았다.

2014년 프랑수아 올랑드는 총리를 마뉘엘 발스로 교체한다. 마뉘엘 발스는 경제부 장관으로 로스차일드사 금융인 출신인 에마뉘엘 마크롱을 임명한다. 프랑수아 올랑드는 전임 사르코지의 세금 인상 제한을 무시하고 최대 부유세 과세율을 75%까지 올리고, 부가 가치세 또한 19.6%에서 20%로 인상해 급여소득세의 부담을 줄이는 데 사용했다. 마뉘엘 발스는 비협조적인 의회에 맞닥뜨려 총리의 권한 중 하나인 강제 법 시행령을 여려차례 사용한다. 이 때문에 올랑드와 발스는 의원들로부터 권력 남용으로 비판받았다. 이에 유럽 연합 선거 때 사회당은 공화당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마린 르펜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에게도 밀리게 된다.[22] 유럽 연합에 관해서는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과 경제 방면에서 어젠다를 공유했던 사르코지와 달리 긴축안에 비교적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2013년에 크리스티안 토비라 장관이 동성 결혼 합법화를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시켜 보수주의자들의 원성을 샀고, 2015년에 에마뉘엘 마크롱이 사회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하고 일요일에도 일할 권리를 주는 마크롱 법을 통과시켜 좌파들의 원성을 샀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를 시작으로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16년 니스 테러 등 테러에 대한 정부의 미숙한 대응은 또다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자유분방한 문화를 고려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불륜 스캔들이 터져,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또 프랑수아 올랑드는 "변화는 지금이다!(Le changement, c'est maintenant!)"라는 유세 모토가 표방했던 사회주의적 변화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다수의 공약을 이행하지 않아 지지자들을 잃고, 지지율은 기록적인 수치인 4%를 찍는다.

프랑수아 올랑드는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최초로 재선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23] 자신이 속한 사회당의 후보인 브누아 아몽이 아닌 중도 성향 에마뉘엘 마크롱을 지지했다.

3.2.6. 에마뉘엘 마크롱

전 경제부 장관 에마뉘엘 마크롱 국민전선 마린 르펜을 누르고 201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는 이례적으로 프랑스 정치를 주도해 온 사회당이나 공화당이 아닌 겨우 대선 1년 전에 창당된 앙 마르슈! 소속이었다. 앙 마르슈!는 실용주의적 포괄정당을 자처하며 사회적으로는 진보,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인 면을 보였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대대적인 긴축정책들과 친기업적인 개혁들에 착수한다. 우선 부유세를 줄이고 부동산세로 이를 대체하고, 노동법을 개정해 해고와 고용을 쉽게 만들어 실업률이 9.6%에서 8.6%로 하락했다. 12만 개의 공직을 없애 재정부담을 축소하려 했으나 이는 공무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전임자들이 국민들의 비위를 맞추는 공약들을 가장 먼저 시행해 비교적 높은 초기 인기율을 유지했던 것에 비해 (선출 100일 이후 사르코지의 지지율은 66%였고, 올랑드는 55%였다). 마크롱은 처음부터 분열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정책들을 도입해 당선 100일 후 36%라는 참혹한 지지율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2018년 11월부터 디젤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청원서가 기각되어, 68혁명 이래 최대 파업인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11명이 사망, 4천 4백 명이 부상당하고 1만 2천 명 이상이 연행되었으며 극우파나 극좌파들로 구성된 약탈자(Casseur)들이 공공 문화재들과 상가들을 훼손하는 등 심각한 사회적 소요를 유발했다. 노란 조끼 운동은 2020년 은퇴 개혁 반대 운동(기존 62세였던 은퇴연령을 64세로 늘리는 개혁)과 겹치면서 그 강도가 매년 강해지고 있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가 터져 잠시 잠잠해졌다.

2017년 공화당 소속 에두아르 필리프를 총리로 임명했고[24], 2020년 필리프와 마찬가지로 공화당 소속인 장 카스텍스로 교체했다.[25]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사를 결집시키며 침공할 기세를 보이자, 마크롱은 둘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푸틴과 대담에 나서기도 했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하며 무산되었다.

2022년 4월 대선에서 마크롱은 마린 르펜을 다시금 누르고 재선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뤼크 멜랑숑 하에 합당한 좌파 연합인 NUPES 마린 르펜 국민연합의 약진으로 상대로 과반을 상실하였다. 극좌에서 극우에 걸친 야당 간 성향 차이로 인해 자크 시라크 이래[26] 최초로 동거정부를 꾸려야 할 위기는 벗어났지만 소수정부가 출범하여 향후 국정운영에 지장이 생겼다.

2023년 1월 19일부터 연금개혁에 대해 불만을 가진 시민들에 의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또 6월에는 무고한 알제리계 시민을 경찰이 사살하는 사건으로 대규모 시위가 다시 발생하였다.

3.3. 주요 연표

1958년 10월 4일 새 헌법 선포
1962년 제4공화국의 고질적인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알제리 전쟁 종전.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식민지 중 마지막인 알제리의 독립으로 프랑스 제국주의의 종말을 고함.
1968년 5월 68운동. 프랑스 노동자, 지식인, 학생들을 위주로 복합적인 사회적 문제들의 타개를 요구함. 체 게바라 및 세계적인 낭만적 혁명 사조와 사회적 좌경화를 배경으로: 프랑스 대학의 부족한 수용인원 수에 대한 불만, 부족한 노동자 복지, 열악한 노동 환경의 개선, “가부장적인 사회”의 타도를 요구.
1981년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좌우파간 수평적 정권교체 실현.
1986년 198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좌우파 동거정부 수립.
1997년 10월 28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 의해 평시 징병 중단.
2000년 9월 24일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축소
2001년 6월 27일 징병제 폐지
2002년 1월 1일 프랑스 프랑 폐지, 유로화로 교체
2002년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극단주의자 후보가 결선에 진출.
2008년 7월 23일 대통령의 3선 금지
2015년 1월 9일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테러. 극단 이슬람교도들이 현재 프랑스 사회의 주된 문제점으로 대두.
2017년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통해 주요 정당 소속이 아닌 정치인이 최초로 대통령으로 당선.
2018년 대침체 이후 심화된 사회적 불평등이 유류세 인상으로 폭발하여 노란조끼 시위로 이어짐. 사회적 혼란이 극대화됨.
2022년 마크롱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나 2002년 이후 최초로 국회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함.
2024년 2024 파리 올림픽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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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6년에 유럽연합 깃발에 맞추어 연한 파랑으로 바꾸었는데, 2021년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엘리제궁 등 일부 관공서 한정으로 원래의 진한 파란색으로 바꿀 것을 명령했다. 이는 재선을 앞두고 혁명 시대를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2] 대통령제에서는 행정부 수반과 국가원수가 모두 대통령이기 때문에, 헌법 규범상으로는 대통령이 행정권을 독점한다. 대통령제는 대통령에 부여된 권력이 자칫 너무 비대해질 수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3]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자크 시라크, 프랑수아 미테랑 에두아르 발라뒤르, 자크 시라크 알랭 쥐페/ 리오넬 조스팽 [4] 소위 49조 3항. 국무회의 심의 이후 의회 표결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권한. 하지만 주로 의회의 반발 또는 불신임 결의를 촉발시키기에, 정부 입장에서는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주로 지지율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하거나 총선일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때 채택하는 방법. [5] 이 때문에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라고도 불린다. [6] 하지만 정작 베트남전 때는 미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7] 이 협상을 진행하던 인물 중에는 노동부 차관이자 미래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도 있었다. [8] 68운동의 결과로는 포화되었던 소르본 대학교의 13개의 대학으로 분리, 남녀공학은 의무화되었다. 68운동의 기조인 성적 자유주의, 페미니즘, 환경보호, 동성애 존중 등 프랑스의 좌파적 정치관이 문화에 자리잡는 결과를 낳았다. 장폴 사르트르 등 지식인들도 참여하기에 이른다. [9]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는 개입 중단 및 미국의 자국 기지 사용 불허한 대가로 지속적으로 중동산 석유를 공급받았음에도 전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피를 보았다 [10] 우파와 중도파들의 통합당인 공화당(UMP)이 우경화하면서 중도파들이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탓도 있다. [11] 정치인 Simone Veil과 철학자 Simone Weil은 다른 사람 [12] Robert Badinter, 반유대사상과 투쟁했던 변호사 [13] 샤를 드골이 개시했던 자주적 핵개발을 추진하는 등 프랑스의 국력을 확보하려 했다. [14] 당시 프랑스는 우라늄 100%, 니켈 95%, 망간 45%, 카카오원두의 83%를 제3세계에서 수입해 왔다. [15] 장폴 사르트르가 창시자였던 제3세계주의는 60년대 후반부터 좌파적 독트린 중 일부로써 자리잡았다. 이들은 유럽이 제3세계의 발달에 기여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과 유럽의 식민주의가 제3세계의 부진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16]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도 자신의 당에 속하지 않았던 시라크를 총리로 삼았지만, 지스카르데스탱과 시라크는 모두 우파였다. 그에 비해 미테랑은 사회당 출신이었고, 시라크는 공화국 연합당 출신이었다. [17] 대통령 임기는 7년, 국민의원은 5년이었으므로 재총선에서 승리해야만 권력을 온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18] 동거정부는 주로 대통령과 대통령이 속한 당의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총선에서 대통령의 반대파를 뽑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의 임기와 국민의원들의 임기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19] 프랑스의 비시 괴뢰국이 나치를 도왔다는 점에 프랑스인들은 크게 치욕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드골은 이런 민심을 반영해 비시 정부나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증거들의 검열과 비시의 인물들의 숙청으로 감추고 프랑스 국민들 모두가 레지스탕스였다는 신화(소위 "레지스탕스주의", Résistancialisme)를 만들어낸다. 이런 정책은 샤를 드골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하지만 68운동과 로버트 팍스턴(Robert Paxton), 앙리 루소(Henry Rousso) 등 역사학자들의 노력으로 프랑스 나치 협력사는 재발굴된다. [20] 프랑스 대선은 경선에서 승리한 후보들이 1차 투표로 넘어가고, 1차 투표에서 승리한 두 명의 후보 중 한 명이 2차 투표에서 결정적으로 당선되는 방식이다 [21] 당시 환율이 1유로=1765원였으니 무려 3000조 원에 육박하는 돈이다. [22] 마린 르펜은 인종차별주의적/친나치적 발언들을 일삼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을 당에서 제명하고,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걸어 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23] 사르코지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올랑드에게 패배하면서 좌초된 케이스다. [24] 하지만 2017년 12월, 극우 성향 로랑 보키에가 공화당 대표가 되면서 탈당을 선택해 2018년부터는 무소속이 되었다. [25] 총리로 임명되면서 2020년 앙 마르슈로 당적을 옮겼다. [26] 1997년-2002년, 시라크-조스팽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