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경희(韓敬禧) |
이명 | 한영삼(韓榮三) |
생몰 | 1881년 11월 5일 ~ 1935년 1월 4일 |
출생지 |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남시리 |
사망지 | 북만주 우수리 강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장로회 목사.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경희는 1881년 11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남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7월 창신학교 속성과에 입학해 6개월 만에 졸업했고, 191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15일에 졸업했다. 이후 평북장로회에 의해 만주 중동선 일대로 파견되어 1년간 선교 활동을 전개했고, 같은 해 10월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에 예배당을 설립했다. 그는 1917년부터 평북노회의 선교 활동을 그만두고 삼원보 일대 다섯 교회의 목사로서 목회활동을 전개했으며,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삼원보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만세시위를 주도했다.1924년 8월 이래 정의부 계통 학교인유하현 삼원보 소재 동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28년 음력 6월 사임할 때까지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목회 활동과 민족교육을 병행하다 1929년 1월경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3월 22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국장로교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이때 친구들은 그 일대는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
이후 북만주 일대에 부임한 그는 한인 동포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1935년 1월 1일, 그는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다. 그러다가 1월 4일 우수리 강변을 지나던 중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한경희를 붙잡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고문했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하자 그와 4명의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음물 속에 집어넣었다. 이 사실은 그의 둘째 아들 한순옥이 삼촌에게 보낸 편지가 한국장로교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에 의해 기독신문에 게재되면서 알려졌다.
한경희의 첫째 아들 한청옥은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삼원보를 중심으로 공산 활동을 전개했고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수차례의 정치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회의 도중 한 청년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둘째 아들 한순옥도 처음에는 공산당원이었지만 부친이 참살당한 후 교회로 돌아왔고, 1944년 만주신학교를 졸업한 뒤 평북 양시교회의 부목사로 봉사했다가 8.15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공산당원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한경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