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채덕승(蔡德勝) |
생몰 | 1898년 6월 4일 ~ 1930년 10월 |
출생지 | 함경북도 경원군 안풍면 금동 |
사망지 | 중국 지린성 혼춘현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연기우는 1898년 6월 4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풍면 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만주로 건너가 중국 관청에 근무했고, 1919년 3.1 운동에 감명받고 황병길, 최경천(崔慶天), 최희순(崔熙順), 정성규(鄭成奎), 백규세(白圭世) 등과 함께 혼춘현에서 의용군(또는 급진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 활동을 했고 1920년 1월에는 경원군 용당 등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박정환(朴政煥), 한경석(韓京錫)[1] 등과 함께 군무부(軍務部)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고 있던 강병일에게 25만 루블을 지불해 300정의 무기를 구입하게 했다.1920년 6월 22일에는 군무부(軍務部)의 취체와 군사탐정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헌병대를 신설하고 헌병을 선발하여 훈련시켰는데 그는 헌병사령관으로서 군무부 중대장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1921년 2월에는 혼춘현 춘화향 남별리를 근거지를 삼아 최경천, 윤낙세(尹洛世), 한경서(韓京瑞) 등과 함께 120여명의 무장독립군을 거느리고 선전문 배포, 일제 밀정처단 등의 활동을 지속했고 혼춘현 6도구 지방에 은신하고 있다가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관헌으로부터 귀순을 종용받자 이를 거부하고 연해주 방면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1921년 5월 14일 토문자 북쪽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국자가로 압송되었다. 이에 일제의 압력에 따라 소요죄로 금고 1년형을 받았으나, 중국측의 협조로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출옥 후에도 무장항일활동을 계속하다가 1925년에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5년 8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4월에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활동했다가 1930년 10월 혼춘현에서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채덕승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03년 8월, 채덕승의 사위 김경태(金暻泰) 옹이 2년 전에 사망한 부인 채숙인(蔡淑仁) 투병 생활 동안 부친 채덕승의 독립운동과 가족사를 중심으로 남긴 회고 글을 엮어 '세월은 가도 그들에게 영원한 빛을'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에는 채덕승의 독립운동 행적,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함께 역경을 딛고 살아온 부인 채씨의 삶이 담겨져 있다. 김경태 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애환과 그 뒤안길에서 고초를 겪으며 한 맺힌 삶을 살다 간 유족들을 위로하고자 회고록을 썼다”며, “독립운동을 직접 한 사람들만큼 유족들도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세상을 떠났다”며 “국가나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 위령비라도 세워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