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허수경(許壽慶) |
자 | 사경(士景) |
호 | 효의(孝義) |
출생 | 1857년 4월 2일[1] |
경상도
의흥현 소수면 가곡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수리 128번지 집실마을) |
|
사망 | 1920년 4월 24일[2] (향년 63세) |
본관 | 하양 허씨[3] |
가족 | 5대손 허미미, 허미오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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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57년 4월 2일, 경상도 의흥현 소수면 가곡(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수리 집실마을) 128번지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허전(許銓, 1834. 5. 8 ~ 1909. 11. 12.)[4]과 어머니 순천 장씨(順天 張氏, ? ~ 1915. 1. 16.)[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명재상 허조의 후손이며, 삼국유사면 화수리 입향조인 허민(許慜, 1588 ~ ?)의 10대 종손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이미 가세가 지극히 어려워져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줄곧 부모를 도와 농사일에 진력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7월 경술국치를 겪은 후 줄곧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있던 그는 특히 일본인들의 한국 이주가 매년 늘어나고 조선인의 이권이 침탈되어 가는 상황에 분개해 동포들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8년 8월경 군위군 의흥면으로 통하는 마을 근처 도로 곁에 세워진 비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여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충성이란 곧 목숨을 다하고, 마땅히 힘을 다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와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다르지 않는데, 어찌 다른 임금을 섬기겠는가.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나라 일의 주인이 되었으니, 나라 잃은 백성이 어찌 아프지 않으며, 너희들이 어찌 원수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을 멸망시키고자 하지만 우리에게 역량이 없어 어찌해볼 수 없구나.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그 해 2월 고종을 모실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낼 계획으로 터를 잡고 땅을 고르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6]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2일 만기출옥 후 3일 만인 같은 달 24일 결국 옥고의 여독(餘毒)으로 순국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고향 마을인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수리에 '효의공 허석 의사 순국 기적비(孝義公許碩義士殉國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3. 가족과 후손
- 아내: 전주 이씨 (?~1885)[7]
- 아내: 구산 박씨 박화순 (朴花順, ?~1939)[8]
- 장남: 허동도 (許東濤, 1877~1939)
- 손주: 1남 1녀
- 차남: 허동철 (許東澈, 1890~1958)
- 손주: 6남 1녀
- 삼남: 허동만 (許東滿, 1892~1954)[9]
- 며느리: 완산 이씨 이지연 (李泜蓮, ?~1962)[10]
- 손자: 허수열 (許壽烈, 1913~1946)
- 증손: 3남 1녀
- 손자: 허태조 (許泰祚)[11]
- 손자며느리: 인동 장씨 장두순[12]
- 손자: 허용렬 (許龍烈, 1932~1975)
- 손녀: 밀양 박씨 박영진(朴永鎭)과 혼인
- 손녀: 달성 서씨 서해룡(徐海龍)과 혼인
- 손녀: 청도 김씨 김명재(金明載)와 혼인
- 사남: 허동룡 (許東龍, 1899~1947)
- 손주: 4남 1녀
- 장녀: 성주 도씨 청송당공파 도길룡(都吉龍)과 혼인
- 외손: 도상윤(都相允)
- 차녀: 김녕 김씨 충의공파 김암술(金岩述)과 혼인
- 외손: 김형렬(金炯烈)
[1]
음력으로 변환하면 3월 8일인데,
1919년 당시 판결문에는 1857년 2월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하양허씨문경공파세보(1985) 499쪽에는 2월 19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2]
음력 3월 6일.
[3]
문경공파(文敬公派) 20세. 하양 허씨 31세.
[4]
초명은 허명(許明).
[5]
장원조(張原祚)의 딸이다.
[6]
형사사건부에는 1919년 5월 10일 대구지검이라고 오기되어 있다.
[7]
아버지는 이의백(李義柏)이다.
[8]
아버지는 박태모(朴泰模)이다.
[9]
호적에는 1891년 3월 4일생 허만(許滿)으로 되어 있다.
[10]
전주 이씨 이선학(李善學)과 부인 박씨 사이의 삼녀이다.
[11]
1985년판 족보에 등재된 허동만의 세 아들 중 아내가 장씨인 사람은 1921년생인 차남 허주열(許株烈)이 유일하므로, 족보의 허주열을 호적의 허태조와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
[12]
아버지는 장병수(張𬇞洙)이다.
[13]
1985년판 족보에는 허주열의 유일한 아들로 1944년생 허규일(許圭日)만이 등재되어 있다.
[14]
현 경북체육회 소속 유도 국가대표로,
2024 파리 올림픽 개인전 은메달리스트, 단체전 동메달리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