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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22:25:25

강영승

파일:강영승.jpg
<colbgcolor=#0047a0> 출생 1888년 8월 9일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87년 (향년 99세)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묘소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공원
이명 강지승(康之昇), 강영승(康永承)
가족 배우자 강원신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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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888년 8월 9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6월 13일 하와이로 이주해 가파훌루 농장에서 일하다가 학업을 위해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한인영어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1909년 2월 국미노히 하와이지방총회 시찰로 임명되었고, 1912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한인기독청년회 전도국장, 1914년 동 청년회 회장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선임되어 캘리포니아주정부로부터 북미지방총회 인허를 받아 자치기관으로 공인받는데 기여했다. 1917년 10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 클래몬트 학생양성소 감독, 1919년 6월 시카고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1920년 4월 시카고 대표로 한인유학생회총회결성발기자회에 참석했다.

1920년 6월 3일 중국인들로부터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홍언이 뉴올리언스에서 마약조사당국에 체포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중국인이 그에게 우편물을 보냈는데, 그 안에 마약 1파운드가 들어있던 것을 조사 당국이 확인하고 그를 기소한 것이다. 이에 강영승이 현지에 도착해 홍언이 우편물 속에 마약이 들어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고, 홍언은 그 덕분에 6월 30일에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강영승은 1921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부터 초등 국어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임명되었고 3월에는 <신한민보(新韓民報)> 명예기자로 임명되었으며, 11월에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국민회를 이끌었다.

192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법무원을 맡았고 1924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국어학교 교사, 1926년 1월 신한민보사 명예기자, 1928년 6월 로스앤젤레스국어학교 학무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30년 2월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공동회를 설치하고 7인의 위원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32년 5월 대한인국민총회 상해사변(上海事變) 임시위원부 부장을 맡아 각국에 선전문을 발송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했으며, 1933년 시카고지방회 중국인 교섭위원, 1935년 동 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후원회의 시카고지부를 설립해 활동했으며, 1938년에는 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혁명운동 건의서’를 작성하여 국민회 집행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는 이 건의서에서 7개조의 운동 방략을 제시하면서 국내외 단체가 연합하여 대혁명당을 조직해 군사 행동과 대외 선전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1939년엔 시카고지방회 대표원, 1940년 조선의용대 후원회 시카고지회 선전원, 1943년 시카고지방회 선전위원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시카고 지역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1944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제2차 사우총회에서 편집부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3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 <독립>에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전체를 보자>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시기에 대해 비판하면서 민족혁명당을 확대하여 한국의 독립을 준비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1944년 12월 해외한족연합위원회(海外韓族聯合委員會) 전체회의에 참여하여 외교위원단 대표를 선출했다. 또한 그는 1907년붵 9145년까지 3.1 기념금, 광복군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8.15 광복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용히 살다가 1987년경에 사망했고 로스앤젤레스 시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강영승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여담

아내 강원신(康元信, 1887~1977) 역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해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을 역임하고 재미 한인 자녀들의 국어 및 민족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일본 상품 불매 및 일화 배척 운동과 중국군 지원 모금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녀는 이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