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1:24:04

임규

파일:임규.jpg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1. 개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명.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임규를 취조한 경찰의 1919년 3월 15일자 신문기록에 따르면, 임규는 56세이며 본적지는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산면 동고리이며, 주소는 경성부 원동 61번지라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이를 반영하여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임규의 출생년도를 1863년으로 기재했다. 익산문화재단 발간 도록에도 출생년도가 1863년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후수 한성대 교수는 <우정 임규의 근대문화사적 역할>에서 임규의 문집에 실린 '1944년 78세'를 들어 임규의 출생년도가 1866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평택임씨세보에 따르면, 임규는 1867년 9월 23일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872번지에서 출생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제적등본에는 개국 474년(1865) 9월 24일로 기재되었다. 이 항목에서는 재적등본을 따라 1865년생을 채택한다.

임규의 본관은 평택 임씨이며, 초명은 임정주, 호는 우정이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무관 가문으로, 조부 임상우는 가선대부 중추부사 겸 경희궁위장을 지냈고, 부친 임노상은 정3품 오위장을 지냈다. 임규는 14세 전후에 사서를 배우는 등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과거 시험을 보거나 관직에 나간 적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신부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임종관, 임종완)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임규는 양반 가문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1895년 일본으로 유학갔다. 그 배경에는 정확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정후수 교수는 임규의 제자였던 홍찬유의 증언을 인용해 임규가 익산군수의 통인으로 있다가 군수의 심부름으로 쌀 700석을 한성으로 가져가서 쌀을 매도한 뒤 받은 돈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일본 유학을 선택한 동기는 1929년 1월 1일 잡지 <별건곤>에 임규 본인이 기고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농촌-내집-을 떠나기는 십팔세 때 이엿슴니다. 그 동기로 말하면 결코 집안이 구차하야 먹을 것이 업서서 떠난 것이 아님니다. 내 집에는 넉넉히 먹고 남을 것이 잇슴니다만은 한낫 불평이 늘 가슴에 사못처 잇섯스니 ‘왜 세상은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대한 잔인무도한 착취와 정부가 백성에 대한 혹독한 정치와 세상의 모든 것이 불공평한 것이 그 때의 어리고 조리업는 생각에도 통절히 늣겨젓든 것임니다. ‘오냐 내가 삼천석만 바드면 이 궁경에 빠저서 울고 잇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리라’ (중략) 그러나 한 공상에 지나지 못하는 쓸데업는 생각이고 또 될번이나 한일임닛가 울울하고 내친 거름에 집을 훌적 떠나바렷스나 그러타고 무슨 큰 포부가 잇섯거나 무슨 기회를 엿보아서 뜻을 이루자는 것도 아니며 그저 홀적 서울로 왓섯슴니다. 유유전전하야 그동에 니러낫든 날 이를 다 격고 (중략) 이때까지 유랑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물론 고생이야 말할 것이 업지요
<별건곤>, '인생의 반고개 3040 고개 넘든 감상 제씨-감개무량 계명구락부 임규', 1929년 1월 1일.

이에 따르면, 임규는 유년 시절 유복했지만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을 직접 목도하고, 이에 불만을 품었으나 현실을 어찌 타개하는지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것 같다. 그러나 부조리에 맞서지 못하고 유랑의 길을 나서다 일본행을 택했다.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따르면, 임규는 1895년 도쿄에 가서 게이오의숙 중학교 특별과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한 뒤 귀국했다가 다시 1900년 전수학교 경제과에 입학, 졸업하였고, 1909년까지 도쿄에 있었다고 한다. 일본외무성 문서에는 임규가 1901년 인천을 통해서 한인 김명규·문옥녀 등과 함께 일본어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라현에 들어갔다고 명시했다.

그는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뒤 조선 유학생들을 위해 1905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세운 광무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는데, 그 동안 최린 최남선을 만났다. 당시 일본공사 조민희가 광무학교 교장, 교감에는 이한경, 교사는 임규가 맡았다. 임규는 주로 일본어 문법과 지리를 가르쳤으며, 1907년 9월 초 도쿄에 있는 태극학교, 광무학교, 동인학교의 통합을 시도했으며, 학교 위치로는 도쿄 대한기독교청년회관을 염두에 두었다. 이후 광무학회·공수회·태극학회 등의 한국 유학생 단체들이 통합하여 청년학원을 결성하자, 임규는 청년학원에 가담해 일본어를 주로 가르쳤다. 그는 유학생들에게 일본어 실력을 향상해야만 일본 문화를 이해할 수 있으니 일본어 수준 향상에 매진하라고 강조했다.

1908년 5월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최남선과 함께 귀국한 임규는 최남선이 신문관을 열고 각종 서적 편찬사업에 착수할 때 적극 가담하여 일본어 교재로 쓸 책들을 출판했다. 1909년 2월 <일문역법>을 신문관에서 발행했다. 그는 이 책의 범례에서 새로운 문명을 계발하기 위해서도 일본어는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외국어임을 강조했다. 또한 국가 간의 교류와 소통에서 중요시되고 있는 언어는 국가 존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를 밝히며 일본어학문전편 등 일본어 전문 교재를 발간했다. 그는 호남학회 교육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어 야학연구회의 강사로도 명성을 날렸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14일자 기사에 임규가 1월 14일부터 서울 중부 내상동 삼흥학교 내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니 뜻이 있는 사람들은 삼흥학교 야학사무실로 방문하라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임규는 일본어 문법 출판 활동과 함께 보성학교 등 여러 학교의 교사를 맡았으며, 조선광문회 주요 인사로 활동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성립되었는데, 사라져 가는 한국 문헌을 찾아내고 그것을 간행하는 데 가장 큰 역점을 두었다. 주간에는 최남선, 고문단에는 박은식, 유근, 김교헌, 이인승, 남기원, 주시경이 있었으며, 보조원(종사)로는 김두봉, 이규영, 권덕규가 활동했다. 임규가 조선광문회에서 구체적인 활동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장지연, 한징, 현채 등과 함께 광문회의 사전 편찬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는 잡지 <반도시론>에 문화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는 짤막한 글을 게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는 편에는 조고마한 산이 있다. 찬합집같이 조밀하게 된 산이다. 식전마다 군대의 조련하는 소리가 난다. 모참판옥이라는 어하숙옥에 있는 학생들의 식전운동이다. 나도 작년 겨을에 개 잠에 취한 눈을 억지로 버틔고 몇칠 동안 운동가가 되었다. 골목길을 남쪽으로 공동변소 모통이에서 서쪽으로 향하고 돌층계를 올라서서 여듸를 들어가랴고 하는 듯이 두루막이 자락을 잡어당기는 가시 철망을 뿌리치고 목책을 넘어 늙은 솔나무 서너 주 있는 언덕박이를 한 거름에 올라가면 남산도 여전한 남산이다. 북악도 여전한 북악이다.

이 글은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현실 속의 공간을 그려냈는데, 특히 경성의 도시화와 새롭게 출현한 공동화장실을 부각했다. 이는 조선이 앞으로 근대화해야 한다는 뜻을 은연 중에 드러낸 것이었다.

1919년 당시, 임규는 보성법률상업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2월 24일경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권동진, 오세창, 최린을 만났다. 최린은 임규에게 일본 정부 및 각게에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문서를 가지고 갈 용의가 있는지 물었고, 임규는 승낙했다. 다만 임규는 3월 15일 형사에게 취조받을 때 자신이 직접 청원서 3통을 일문으로 직접 작성했다고 밝혔지만, 3월 17일에는 "최남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명의를 내지 않기 위해" 최남선이 직접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정서한 후 소각했다고 번복했다. 결국 임규가 지닌 통고문과 독립선언서 모두 최남선이 기초한 것이었다.

임규는 임정자가 근무하고 있는 과자점[1]에 딸린 거처에서 조선기독청년회관에 있는 한기악을 불러 함께 독립선언서 200매를 등사했다. 3월 5일에는 통고문과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일본 각 정당과 귀족원, 중의원 및 각 신문사와 관공립 대학에 보냈다. 그의 이같은 행적은 일본 정보원이 1919년 2월 26일 상부에 보고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이미 파악되었고, 임규는 3월 9일 도쿄에서 체포된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3월 12일 일본 언론 <오사카 매일신보>는 임규 체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 대소요 사건에 관여한 천도교의 거괴 임규는 조선에서 이미 기소되었는데, 그는 잠행하여 안세환과 동시에 입경하려는 행적이 있어서 경시청에서 행방을 조사중이었다. 10일 오후 3시 반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도쿄역에 모습을 나타난 것을 잠복한 히비야 서 경찰이 포박하여 히비야 서로 구금시켰다. 그는 신주쿠의 어떤 집에 숨어 있던 사실을 자백하였고 11일 영장을 집행하여 오후 4시반 도쿄역 발로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임규는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혔다. 직접 동기는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판사가 최남선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닌가라고 재차 질문했지만, 임규는 자신의 결정으로 참가하게 되었음을 밝혔으며, 나아가 일본의 한국 병합이 잘못되었으며, 조선의 독립은 동양평화의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제2차 검찰 조서에서 검찰이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일한합병에는 반대하여 10년래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힘이 없어 지금까지 계획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정치에 대해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조선은 5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므로 도저히 일본과 동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은 조선 사람이 스스로 다스려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독립을 희망하였고 또한 조선이 독립되어야만 동양이 평화로울 것이다. 일한합병은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20년 8월 9일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임규는 '봉건 공소 수리 불가' 판결을 받았다. # 검사 측은 이에 불복해 공소했으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공소 기각하여, 임규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임규가 의견서 혹은 통고문 및 선언서 등을 내각 및 제국의회에 우송한 행위가 치안을 방해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손병희 등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서 기타 서류의 초안을 보고 이 계획에 찬동하여 동지자가 되어 치안 방해 행위에 가담했다는 공소는 증빙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른 그는 판결 직후 석방되었다.

임규는 출소 후 평북 정부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25년 봄 부터는 협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보천교에 입교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 그는 민우회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단결과 자력 생존을 제고하고자 했다. 1922년 6월 17일 조선경제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민우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교직과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통해 문맹퇴치와 공존공영을 주창하였으며,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지식인들과 교유하고, 자신의 유학 시절 활동 공간이었던 일본 동경 청년회관이 관동대지진으로 파괴되자 건축후원회의 발기인으로도 활동했다.

1922년 잡지 <개벽>에 '이해합시다. 용서합시다. 그리하야 다가티 삽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며 서로 비방하지 말며, 남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천량의 본심'을 신조로 삼고,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를 강조했으며, 사악하고 시기하는 것을 배척했다. 임규는 1928년 2월 1일 잡지 <별건곤>에 '수상감상, 요새 요때에 새로히 생각키워지는 일들-먼저 조선을 잘 알어야'를 기고하여 조선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의 자아는 자기정신의 발현을 통해서 가능하며, 조선 사람이 조선 것을 가장 잘 알고 익힐 때 비로소 외래의 문화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27년 5월, 임규는 조선문화의 증진을 추구한 계명구락부의 편집부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최남선, 정인보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최남선은 전체 책임을 맡았으며, 정인보는 감독을 맡았고, 한징은 서무 업무를 담당했으며, 임규는 동사와 형용사를 맡았다. 그는 조선어편찬에 관한 글을 게재하여 한글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으며, 10만여 개에 달하는 어휘를 수집했다. 6년간 이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던 중 1932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지원하던 <계명>이 발간을 중지당하자, 곧바로 조선어학연구회 잡지 <정언>을 통해 한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주시경이 이끌었던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글맞춤법안은 편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안이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 정신에 위배되며, 우리 고유 언어형태는 ‘정음’이며,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은 ‘훈민정음’이기 때문에 이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규는 7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잡지 정음에 '조선어학회의 공개장 검토', '박승빈 선생의 조선어학을 읽고'를 게재하며 한글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잡지에 한글 및 일본어 문법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실었다. 8.15 광복 후 1946년 3.1 운동 기념추진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지만, 고령의 나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호라동하지 못했다. 이후 고향 익산으로 낙향한 뒤 여생을 보내다 1948년 3월 7일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향제에서 병사했다. 향년 82세. 동아일보는 1948년 3월 9일자 '임규씨 서거'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임규씨는 일본어학의 조예가 깊었다하여 기미년독립선언 당시에는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등에 제출할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전하고 당지에서 체포되어 조선으로 호송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48인중의 한사람이다.

임규에 대한 추도회는 1948년 10월 24일 중동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최규동이 참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임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1] 기독교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일본 철학가이자 사회사업가 소마 아이조가 신주쿠에 운영한 과자가게 '나카무라야'이다. 소마는 조선솔이 들어간 카스테라와 같은 신제품을 많이 개발하였으며, 당대 일본의 범아시아주의자들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