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신국(張信國) |
생몰 | 1900년 ~ 1933년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시 신양동 |
사망지 | 신의주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신국은 1900년생이며 평양시 신양동 출신이다. 그는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여했고, 그해 6월 손정도의 권유를 받아들여 상하이로 건너가서 독립신문 사원으로 근무하다 임시정부가 세운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11월에는 임시정부 평안남도 대동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23년에는 상해상과대학에 재학하면서 임시의정원 서기로 근무했다. 그는 같은 상해대학생인 이화천(李花天)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1926년 5월 27일에는 독립정신사원(獨立精神社員)으로 순종의 인산인을 기해 6.10 만세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이화천과 함께 입국했다가 서울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9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한 그는 신민부(新民府) 및 국민부(國民府)에 가담하여 무장항일 활동을 계속했으며, 신빈현 왕청문의 화흥학교(化興學校) 교장으로 후진양성에 이바지했다. 1929년 3월에는 조선혁명군에 가담했고 흥경, 통화, 환인 일대를 장악한 혁명군의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관으로서 홍익선(洪益善)·임필순(任弼淳)과 함께 독립군기간요원을 양성했다.
1930년 8월에는 왕청문에서 개최된 조선혁명당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1년 12월까지 동당 교양부장으로서 문화·노동·투쟁교육에 기여했다. 1932년 9월 20일에는 조선혁명군의 훈련소장 대리를 맡아 군사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1932년 하반기에 봉천에서 김영길(金永吉)·나형룡(羅亨龍)·강춘봉(姜春逢)·강철환(康哲煥)·이훈호(李勳浩)·윤식변(尹植邊)·최운하(崔雲河)·유인준(劉仁俊) 등 동지들과 함께 헌병대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고, 1933년 2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사망 날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장신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