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경주 손씨[1] |
출생 | 1895년 6월 4일 |
안동부
안동군 임하현 오대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오대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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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4년 3월 16일 |
경상북도 안동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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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손두원은 그의 5촌 당숙이다.
2. 생애
손영학은 1895년 6월 4일 안동부 안동군 임하현 오대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오대리)에서 아버지 손대원(孫大源)과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중순 김정익, 김정연(金正演)과 함께 안동군 길안면 천지 장날인 3월 2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미리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만들어 두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천지에 있는 일본 경찰주재소의 삼엄한 주시를 받았다. 하지만 3월 21일 오후 3시경 계획을 감행한 그는 300명의 군중을 모아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장을 행진하다가 면장과 면서기들도 시위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해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제지하자, 그는 군중을 지휘하여 투석으로 면사무소 입구의 유리와 문짝을 파괴하였다. 오후 7시경에는 방향을 경찰주재소로 돌려 총기를 휴대하고 대기중이던 일본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때 그는 김정익과 함께 주재소를 파괴하기로 협의하고 선두에 서서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나, 일본 경찰이 총격을 가하여 시위군중은 부득이 해산했다. 이에 그와 김정익, 김정연 등 3인은 일단 피신한 뒤 의성읍내 박재하(朴在夏)의 집에 머무르면서 1920년 2월 상해 임시정부로 가기 위한 자금마련을 계획하던 중 경찰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인 1926년 2월 유연복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동하다 재차 체포되어 1927년 2월 3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엔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4년 3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영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