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09:21:23

김이원

성명 김이원(金利源)
생몰 1878년 ~ 1951년?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수진면 이화동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이원의 전반적인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19년 4월 평양복심법원 재판 기록에는 김이원의 나이가 41세라고 기재되어 있어서 1878년생인 것으로 짐작되며, 평안북도 의주군 수진면 이화동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3.1 운동 발발 후 4월 1일에 의주군 수진면 일대에서 송영보, 김용근, 최세화, 김상려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당시 운청동 동장으로서 헌병주재소장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던 주계주(朱桂柱)의 가옥을 소각했다. 이후 4월 2일에 수진면 사무소 부근에서 2,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검거되었다.

일본 경찰은 김이원 등을 만세 시위 주동 혐의와 주계주 살해 미수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에 대한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 송영보·김용근·김이원·최세화·김상려의 각 상고 취지는 모두 ‘피고가 조선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김두만(金斗萬)·표득복(表得福) 및 백낙현(白樂賢) 등의 주모로써 일어났다’고 신의주지청 및 평양복심법원에서 신립한 바이지만 주계주(朱桂柱)의 집에 방화한 당일 즉 대정 8년 4월 1일은 피고도 김두만 등의 주모자의 유인으로 수진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의 의사를 발표하고 동지 4백여 명과 왔다갔다 했으나 주계주를 살해하거나 가옥에 방화하려는 의사는 당초부터 없었으며 동인을 살해할 의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금번 독립운동을 혐오하는 헌병 등과 주계주의 허구 외설인 것이다.

왜냐하면 동인은 수진면 운천동(雲川洞) 동장으로서 수구진(水口鎭)헌병주재소 헌병 보조원과 사친(私親)을 맺고 혹은 민간에게 그 위력을 빌려 인민의 죄과를 밀고하여 중망을 잃은 자로 자기 집과 인접한 수진면사무소 사이를 피고 등 일행이 왕래함을 보고 중망을 잃고 있음을 알고 있는 해 주계주는 한때 몸을 피하여 집에 없던 때도 있었다. 이것은 피고 등 일행의 피해를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살인미수 죄를 피고 등에 적용함은 부당하다. 동인 가옥에 방화한 것은 당일 일행 중의 주정뱅이, 광인과 같은 차천모(車天模)와 주계주가 금번의 독립운동에 불찬성함에 대해 악감을 가진 백낙현의 양인의 행위로서 피고의 행위가 아닌 것이다.

단, 수구진헌병소에서 심문을 받던 7일 간의 악형에 못이겨 심문관리의 기만적 수단에 넘어가 범하지 않은 일도 범했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지전모(池田某)가 소유한 군복을 태워 없앴다는 것도 평소 지전모와 사혐(私嫌)을 가진 박원석(朴元奭) 및 전기 차천모의 행위이다. 수구진헌병주재소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항의 죄는 이미 본 피고의 죄가 아님이 분명한데 현 범인들이 도망할까바 본 피고에게 그 죄를 뒤집어 씌운단 말인가, 또한 출판법 위반죄에 대한 불복의 이유는 피고 등 일동은 처음부터 한 장의 인쇄물도 인쇄한 적이 없으며 또한 등사한 적도 없다. 따라서 출판법 위반죄도 불복한다.

보안법 위반죄에 대한 불복의 이유는 금번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한 사실은 조선민족으로서 피치 못할 행위로써 공의 인도상 당연지사인 것이며, 하물며 백주에 정정당당하게 한 행위이므로 보안법 위반이라고 함은 부당하므로 불복하는 바라고 하는데 본건 기록을 들추어 조사한 바 수구헌병대에서 피고 등이 취조를 받을 때 피고 등에 대한 악형과 사기 수단을 써서 심문했다는 사적이 전연 인정할 수 없으므로 본 논지 중 피고 등의 주장은 채용하기 어려우며 또 원심은 피고 등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한 것이 아니므로 피고 등에 출행법 위반 사실이 없고 또한 조선독립운동은 정의 인도상 당연한 행위라 하여 죄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점은 원심에 부응되지 않으며 기타의 논지는 증인 주계주의 공술을 운위하고 방화자는 차천모·백낙현으로서 피고 등은 주계주를 살해하고 또는 방화하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논지를 말하지만 원심의 전권에 속하는 증거의 취사판단 및 사실인정을 비난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상고의 이유없다.
독립운동사자료집 5 : 삼일운동 재판기록

이후 김이원은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출옥 후 만주로 망명했고 해방 후에 귀국했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51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이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