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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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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태석
徐邰晳[1]晳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고, 徐邰로 오기한 자료도 종종 보인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해사(海舍)
본관 이천 서씨[2]
출생 1884년[3] 6월 17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1번지)
사망 1943년 6월 2일[4] (향년 58세)
전라남도 무안군 압해면 장감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장감리)
종교 제우교[5]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715호
상훈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첫 번째 투옥2.3. 암태도 소작쟁의 주도2.4. 세 번째 투옥2.5. 최후2.6. 사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서창석은 7촌 재종숙(再從叔), 서상렬은 8촌 삼종제(三從弟)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884년 6월 17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1번지)의 자작농가에서 아버지 서두근(徐斗根, 1866. 4. 27 ~ ?)[6]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남리(朴南里, 1864. 2. 27 ~ ?)[7]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서민석(徐岷晳, 1902 ~ 1931. 11. 7)[8]과 여동생 서계초(徐啓肖, 1908 ~ ?)가 있었다. 7살 되던 1890년부터 18세 되던 1901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사서삼경을 비롯해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서적을 섭렵했다. 이후 지도군 하의면 옥도리로 이주해 얼마간 의원 행세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했다.

1913년부터 무안군 암태면장을 역임했으며, 임기 동안에 구황작물로 무상 분배된 메밀 씨앗을 팔아먹은 관리들을 고발하는 등 부정척결에 앞장섰다. 1919년 11월 면장직을 사임한 뒤 12월 중화민국 봉천성 심양현(瀋陽縣)[9], 대련시[10], 여순시(旅順市)[11] 지방을 시찰차 여행했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로 내려와 제우교(濟愚敎) 신도들과 함께 12월 23일 만주보민회사(滿洲保民會社)[12] 창립을 위한 준비회를 개최해 이날 회장에 취임했고, 경성부에 임시 사무소를 두었다. 이후 심양현으로 돌아가 그곳에도 임시 사무소를 두었으나, 1920년 1월 30일 신병을 이유로 귀국해 4일간 경기도 경성부 죽첨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 44번지 만주보민회사 사무소에 숙박해 이 기간 동안에 회사 관계자인 양정묵(梁正默), 최병기(崔炳基) 등을 만났다. 이 사이 2월 5일 열린 발기인 총회에서 총무에 임명되었다.[13] 그리고 전라남도 목포부(現 목포시)로 내려와 3일간 체류하다가 2월 20일 고향 무안군 암태면으로 돌아갔다.

2.2. 첫 번째 투옥

1920년 2월 28일 무안군 안좌면 원산리(現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 북진마을에서 지인인 잎담배 상인 박종선(朴鍾瑄)[14]과 함께 목포부로 다시 떠나 영정1정목(現 영해동1가) 해안과 보정3정목(現 보광동3가) 등에서 체류하다가 헤어졌고, 대정정(現 목포시 명륜동) 13번지 경남(慶南)여관 내 김운재(金云宰)의 방에 숙박했다. 이날 밤 12시에 만주보민회사 발기인 중 한 사람인 표성천(表聲天, 1857 ~ 1950)[15]을 만났는데, 표성천은 일전에 경기도 경성부 인사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21번지에서 하숙 중이던 중동학교 생도 장병상(張柄祥)[16]을 만나 ' 기미독립선언 제1주년을 기념해 각 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전개하고 상가는 폐점해 조선인은 일제히 자유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는 내용의 「대한국 독립 一주년 기념 축하 경고문」 200장과 태극기 2장을 신문지에 싸여 있는 채로 건네 받은 상태였다. 표성천은 이때 장병상과 협의한 대로 이튿날인 2월 29일 아침에 서태석에게 위 경고문과 태극기가 들어 있는 가방 및 가방의 열쇠를 서태석에게 건네 주었다. 이후 남교동 우편소에 가서 전주공립보통학교(現 전주초등학교) 앞으로 경고문을 싼 소포우편을 발송했다.

그리고 그날 오전 9시, 보정3정목 3번지에 있던 박종선의 집에 찾아가 "내일은 3월 1일로서 조선독립을 선언한 1주년 기념일에 해당하는 날로서 일반 조선인들에게 배포할 문서가 있다. 자네도 원조해서 배포하여 달라"며 힘을 보태줄 것을 권유했으나, 박종선은 이에 "지금 직업을 쉬게 되면 생계와 관계된다"며 거절해 결국 숙소로 돌아왔다. 오전 11시에는 숙소에서 김운재를 비롯해 행정(現 행복동) 재봉기회사 출장소에 근무하는 김귀현(金貴鉉)을 만나 앞서 언급한 경고문 배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후 다시 외출해 오후 4시, 명치정(現 대안동) 13번지 김영수(金永洙)의 잡화점을 방문해 직원 김재식(金在植)에게 금건(金巾)을 자른 천을 건네주면서 태극기 4장 제작을 의뢰했다. 이때 김재식에게 이 국기는 3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를 때 필요한 것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혹시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누설되면 때려 죽일 것이며, 목포 사람들도 내일은 전부 만세를 불러 조선독립을 기약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라, 또 목포에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경기도 경성부에서 여러 사람이 와서 여기에 있는 직원들 전부가 피살될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했다. 이어 5시에 다시 와서 태극기를 찾아 20전을 지불하고 떠났다.

이후 오후 6시에 숙소로 돌아와 김운재와 김귀현, 송정리(松汀里)의 정문국(鄭文國) 등에게 위 경고문을 건네면서 옆 방에 있는 주병진(朱炳晉)에게도 경고문을 보여주었고, 주병진은 그 경고문을 보고 두 손으로 뭉쳐서 버렸다. 이어 오후 6시 25분에 집을 나서면서 김운재에게 경고문 30장을 건네며 배포를 부탁했고, 경찰관에게 발각되면 좋지 않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때 김운재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되돌아 서서 "자네는 숙박업 영업을 하기 때문에 곤란한 점이 있을 것이지"하면서는 경고문을 되돌려 받았다. 이후 남교동 김종승(金宗勝) 댁을 들렀다가 오후 7시에 다시 박종선의 집에 찾아가 "오늘 이야기한 문서를 오늘 밤중 목포의 조선인들에게 배포할 예정이니 꼭 자네도 배포해달라"고 권유했고, 박종선이 이에 문서 내용을 묻자, "이 문서는 조선독립 1주년 기념일의 경고문으로서 조선인의 상점이라면 폐점 휴업하고, 학교 생도들은 휴교할 것을 썼다."고 말하자 재차 거절당했다. 이때 박종선은 "그런 일을 하면서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며 주의를 당부했다고 한다.

결국 박종선의 집을 나와 홀로 행정, 영정에 있던 조선인 상점마다 위 경고문을 한 두 장 또는 4, 5장씩 몰래 배포했고, 동선에 있던 마루오카(丸岡) 상점 앞, 죽동 배종구(裵鍾九)의 집, 창평정(現 창평동) 곽도순(郭道順)의 집[17], 명치정 최한홍(崔漢洪)의 잡화점 앞에도 위 경고문을 배포했다. 이어 바로 옆집인 김영수의 잡화점에 방문해 김재식 등 당시 근무하고 있던 점원들에게 위 경고문 6장을 배포했다. 이때 직원 김재식에게 돌아다니면서 배포하면 위험하므로 가게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만 배부하라고 당부했다. 이후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호남정 목포역 철도정거장 내에 있던 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송도정(現 목포시 동명동) 송도공원에 올라가서 저수지가 있는 남쪽 소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3월 1일 목포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2.3. 암태도 소작쟁의 주도

출옥 후 192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으며, 귀국 후에는 서울청년회에 가입해 전라남도 책임자로서 목포부에서 활동했다. 그 뒤 1923년 8월 고향 암태도에서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했고, 문재철, 나카시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천후빈(千后彬, 1870. 5. 9 ~ ?. 5. 15)[18] 등 암태도의 대지주들에게 소작료를 기존 70~80%에서 40%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카시마 세이타로와 천후빈은 암태소작인회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합의했으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해 암태소작인회에서는 추수 거부 및 소작료 납부 거부 투쟁을 벌이며 문재철에 대항했다. 또한 암태도와 목포부를 연결하는 연락선의 운영 수익금으로 500여 명의 소작인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고, 암태청년회에서 주최하는 민중극 공연을 통해 암태도 소작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에 문재철은 목포경찰서 소속 경찰들을 동원해 소작인들을 위협하며 강제로 소작료 징수를 집행하고자 했으나, 소작인들의 집단적인 항쟁은 계속되자 소작인들을 개별적으로 회유하거나 협박해 기어이 소작료를 징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암태소작인회에서는 자체적인 순찰대를 조직해 문재철 측의 강압에 무력으로 대항하면서 1924년 봄까지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다. 1924년 3월 27일에는 암태면민대회를 개최해 소작인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소작인의 요구를 주장했는데, 이때 만약 5월 15일까지 문재철 측이 소작료 인하 등의 요구에 불응하면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의 아버지 문군옥(文君玉, 1848 ~ ?)[19]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문재철의 아버지 문군옥, 문재철의 4촌 동생 문응창(文應昌, ? ~ ?. 6. 27)[20], 문재철의 5촌 종질(從姪) 문명호(文明鎬, 1888 ~ 1950. 9. 20)[21]를 비롯한 문재철의 일족 55명은 암태면 와리리 산기슭에서 이날 면민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서태석과 박종유(朴宗有)·서동오(徐東五) 등 암태소작인회 간부들을 습격해 구타했고, 암태면민대회에서의 결의사항에 대해서도 묵살했다.

이후 암태소작인회에서는 신문이나 노동단체에 소작인의 요구를 직접 호소했고, 1924년 4월 15일 열린 전조선노농대회에 암태도 대표를 파견해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하여 상경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제지를 받았고, 곧 체포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1924년 7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 상해 혐의에 대해 구류 갱신 처분을 받았다. 192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했으나,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주거침입, 훼기,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한편, 서태석이 투옥된 뒤 암태도 소작쟁의는 기존에 주체가 됐던 암태소작인회 외에도 박복영(朴福永)이 이끌던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의 여론까지도 환기해 그 결과 암태도 전 주민들이 가담하게 되었고, 전국 각계각층의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종래에는 전라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코가 쿠니타로(古賀国太郞) 경부의 중재하에 문재철과 소작인 대표인 박복영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등의 성과를 내었다. 당시 합의 내용은 소작료를 40%로 인하할 것, 지주는 암태소작인회에 2,000엔을 기부할 것, 1923년에 미납된 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 상환할 것, 구금된 쌍방의 인사들은 재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할 것, 파괴된 문군옥의 송덕비는 암태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할 것 등 주로 소작인들에게 유리한 내용들로서 1년간의 소작쟁의가 소작인들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자세한 것은 암태도 소작쟁의 문서 참조.

2.4. 세 번째 투옥

한편, 서태석은 출옥 후 암태소작인회를 '농민조합'으로 개칭하고 기존의 경제적 투쟁노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신간회로 대표되는 조선민족단일당 조직을 촉구하고자 했다. 1926년 12월에는 정우회 선언에 따라 ML파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전라남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에 선임돼 활동했다. 1927년 9월 9일에는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돼 활동하다가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었고, 1928년 4월 평안북도 신의주부(現 신의주시)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1929년 7월 1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2.5. 최후

출옥 후 귀향했으나 수 차례에 걸쳐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고, 정신질환 및 일제의 감시로 인해 폐인이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주변의 냉대를 받으며 각지를 떠돌다가 여동생 서계초가 살던 무안군 압해면(現 신안군 압해읍) 장감리로 이주해 여동생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3년 6월 2일 압해면 장감리의 어느 논둑길에서 벼 포기를 움켜쥔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2.6. 사후

8.15 광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서태석이 과거 조선공산당원으로서 활동한 공산주의자 경력을 들어 적대시했고, 암태도의 이천 서씨 일가친척에까지 면사무소 서기 자리 조차 맡지 못할 정도로 연좌제를 적용하며 갖은 핍박을 가했다. 이천 서씨 집안 사람들이 목포시로 넘어가는 배를 타면 곧바로 경찰 계통으로 무선연락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기도 했다고 한다. 암태도 주민들은 1976년 압해도에 안장돼 있던 서태석의 묘소를 암태면 기동리 선산에 이장했고, 이어 서태석을 기념하는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려 했으나 정부 당국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79년 가까스로 서태석의 묘 옆에 추모비를 세우긴 했으나 한동안 공식적인 제막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 뒤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7년에서야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장고마을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건립되었고,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고향인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3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2]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익롱공파(益聾公派)-난정공계(懶亭公系) 32세 상(相) 항렬. 족보명은 서상용(徐相龍). [3] 1989년 10월 13일 한겨레 기사에는 1885년생으로 기재돼 있다. [4] 대전현충원묘적부와 1989년 10월 13일 한겨레 기사에는 6월 12일로 기재돼 있다.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82쪽에는 1958년 7월 20일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돼 있다. [5] 濟愚敎. 서태석 검사신문조서. 서태석 검사신문조서(제2회)에 의하면 제우교는 원래 시천교 신도 김동춘(金棟椿)이 1919년 10월 창시한 시천교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김동춘은 1916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만주로 건너와 줄곧 시천교를 포교하고 있었는데, 1919년 3.1 운동 당시 천도교 교주 손병희 등 천도교 신자들이 대거 참여함에 따라 시천교 또한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로 민간에서 천도교와 비슷한 성격으로 간주될 것을 우려해 새롭게 제우교를 창시하고 그 본부를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에 두었다. 1920년 3월 당시 조선 전체의 신자는 1만명, 이 중 전라남도에는 2, 300명, 만주에 2,000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었다. [6] 족보명은 서두수(徐斗洙). 이명 서홍일. [7]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82쪽에는 박중화(朴中華)로 등재돼 있다. [8] 이명 서병석(徐丙晳, 徐邴晳), 족보명은 서상택(徐相澤),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83쪽에는 1897년 5월 2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9]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시. [10]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시. [11]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12] 서태석 검사신문조서(제2회)에서 밝힌 설립취지에 의하면, 만주보민회사는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에 대한 완전한 보호와 통제를 함에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여 개간하고 주택을 건설해 조선인들을 입주시키는 등 조선인들의 생활안정을 꾀하고, 제우교 신도들과 조선인 독립운동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을 조정, 화해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태석 경찰신문조서(제4회)에 의하면, 창립취지서에 한족회(韓族會), 독립단(獨立團), 의용단(義勇團) 등 독립운동단체의 명칭이 언급되므로, 회사 또한 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13] 만주보민회사의 발기인은 서태석을 비롯해 이인수(李寅秀)·김택현(金澤鉉)·표성천(表聲天) 외 5, 6명이 있었다. 발기인들은 회사 창립을 위한 사무소 설치, 직원의 급여, 직원들의 시찰 여행 비용을 위해 1,000원을 납부하게끔 협의했는데, 서태석은 이 중 300원만 납부했다. [14] 목포간이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5] 전라남도 무안군 자은면 출신. 자는 성대(聲大), 족보명은 표임학(表琳鶴). 독립유공자 표생규는 10촌 지간의 족제(族弟)이다. [16] 1920년 3월 6일 서태석 신문조서(제5회)에서 '독립단(獨立團) 관계자'로 지칭된다. [17] # [18] 영양천씨대동보 현감공편 1권 60쪽에는 천두학(千斗學)으로 등재되어 있다.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7촌 재종증조부(再從曾祖父)이다. [19] 족보명은 문태현(文泰炫). [20] 족보명은 문재순(文在純). [21] 문재철의 큰아버지 학우당(學愚堂) 문여옥(文汝玉, 족보명 문진현文振炫, 1829 ~ 1904. 1. 6)의 장손자이다. 남평문씨인터넷대동보에는 文鎬로 등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