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 1955년 7월 20일
1.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업인, 지주, 독립운동가, 교육자. 본관은 남평(南平)[1], 초명은 문치명(文致明)이었으나 1905년을 전후해 문재철로 개명했다.2. 생애
1883년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수곡리(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아버지 문군옥(文君玉, 1848 ~ ?)[2]과 어머니 전주 이씨(? ~ 1900. 8. 29)[3]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일가는 암태도에서 바닷물로 소금을 제조하는 염전을 경영하면서 선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갔고, 1897년 목포 개항과 함께 문재철이 목포로 이주하여 대지주가로 성장시켰다.1902년 5월 4일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에 임용되었으나, 그해 6월 8일 사직하였다. 1905년에는 순릉(純陵)의 비각을 짓고 표지석을 세우는 데에 공로가 있어 품계가 기존의 9품에서 6품으로 승급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뒤 식민 통치 자문을 위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중추원이 설치되고, 각 도에는 참여관과 참사관, 각 군에는 참사라는 직책이 신설되었다. 문재철은 지도군 참사(參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무안군 참사를, 1930년대에는 전남도회 의원 및 도평의원 등을 역임하며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 사업도 계속 확대되어 대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19년 목포창고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했고, 1923년 남일운수주식회사 취체역 사장을 지내며 물류업을 겸해, 1920년대 후반 문재철의 지주 경영지는 약 300만 평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 문재철 일가의 본거지였던 암태도를 시작으로 도초도, 자은도, 지도 등에서 계속 대규모 소작쟁의가 일어났는데, 문재철은 농장식 경영으로 이에 적절히 대처하고 1935년 선일척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1930년대 후반 활발하던 간척지 개간사업을 주도했다. 1940년 당시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약 500만 평으로 집계된다. 이와 같은 경영방식은 한국 자본주의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다.
문재철은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의 감소분을 충당하기 위해 소작료를 증수하려 하였고, 암태도에서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소작료는 보편적으로 5할이었던 것에 비하면 과중한 소작료였고, 이러한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9월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에 대하여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문재철은 이윤상의 문제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암태소작회는 문재철 부친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문재철이 고용한 폭력배와 충돌하는 등 사태가 커지게 된다. 암태도 주민들의 단식농성과 처절한 투쟁 끝에 일본 경찰의 중재로 문재철은 암태도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게 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대표적인 소작쟁의로 전국적인, 특히, 서해안 여러 섬의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또한, 근현대사 최초의 성공적인 노사분규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1941년 윤치호가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한 흥아보국단의 전라남도 도위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도 역임하는 등 여러 친일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1941년 목포에 문태학원을 설립해 문태고등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교육[4] 사업을 벌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문재철은 소작인 대표였던 서태석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5]
8.15 광복 후에도 문태중학교와 문태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1955년 7월 20일 목포시 북교동 137번지 문태학원 이사장댁에서 사망했다. 사후 문태학원은 셋째 아들 문영호(文英鎬, 1920. 11. 7 ~ )와 며느리 박서지[6], 문영호의 차남 문익수(文益洙, 1953. 5. 5 ~ )[7]가 차례로 물려받았다.
3. 여담
- 상술한대로, 본디 일제를 등에 업고 농민들의 고혈을 쥐어짜내던 악질 유지였으나 후일 민족교육사업,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금 조달 등의 공로가 인정되어 친일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내세운 '선친일 후항일' 원칙에 따른다면 제외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는 일이다. 항일에서 친일로 넘어간 사례에 비해 친일에서 항일로 넘어간 사례가 원체 적은데다가, 교과서에도 실린 암태도 소작쟁의에서 악질 지주로 묘사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1]
순질공파-경숙공-옹-강진-월파공파 30세 재(在) 항렬.
[2]
족보명은 문태현(文泰炫).
[3]
이용서(李龍瑞)의 딸이다.
[4]
문태고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
[5]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출신의 암태청년회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박복영(朴福永)의 증언에 따르면, 문재철은 벼 200가마, 보리 100가마, 밀 50가마를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1972년 6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6]
밀양 박씨 박용재(朴龍在)의 딸이다.
[7]
고려대 체육교육과 교수 및 체육위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