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설진삼(薛鎭三) |
족보명 | 설진영(薛鎭永) |
자 | 도홍(道弘) 또는 이수(而修) |
호 | 율재(栗齋), 남파(南坡) |
본관 | 순창 설씨[1] |
출생 | 1869년 12월 8일 |
전라도
순창군 금동방 동전리 (현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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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년 5월 19일[3]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 |
묘소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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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설인수 전 국회의원은 그의 9촌 삼종질(三從姪)이다.
2. 생애
설진창은 1869년 12월 8일 전라도 순창군 금동방 동전리(현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에서 아버지 설상기(薛相基, 1833. 1. 17 ~ 1911. 8. 1)[4]와 어머니 탐진 최씨(1847. 6. 21 ~ 1934. 5. 2) 최덕순(崔德淳)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그는 기우만의 문인으로, 1895년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여했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왜적과 상대할 수 없다며 외부인의 출입을 금했고 고향 미산의 남쪽에 서실을 짓고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항일사상을 고취했다. 1922년 일제가 조선호적령(朝鮮戶籍令)을 실시하여 본명인 설진창(薛鎭昌)을 호적에 기재하자, 그는 왜적이 만든 호적법에 자신의 이름이 실린 것을 극도로 혐오하여 이름을 설진영(薛鎭永)으로 고쳤다.
그 뒤 1940년 5월 19일 일제가 창씨개명을 단행하자, 그는 "천세 백세(天世百世)를 이어 내려온 민족전통이 무너지니 무슨 면목으로 살 수 있겠는가"하며, 절명시 2수와 유서를 남기고 집 앞의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설진창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