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서장환(徐章煥) |
성명 | 서성준(徐聖濬) |
생몰 | 1890년 10월 3일 ~ 1970년 5월 28일 |
출생지 |
경상도 대구도호부 화현내면 설화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
사망지 | 대구광역시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서장환은 1890년 10월 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화현내면 설화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에서 서광용(徐光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일병합 이후 이재희(李在熙)와 노응규 의병장의 아들 노수덕(盧修德) 등과 함께 비밀결사 상의회(商議會)를 조직하고 부친 서광용과 김기홍(金箕鴻) 등이 기부한 돈 8,000원으로 의병 가족 후원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17년 9월 노수덕과 이현수(李賢壽)를 각각 만주와 상하이로 파견해 이시영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했다.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대구 소재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 출판부에 근무하고 있던 그는 독립선언서와 전단을 인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또한 1920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 정해민(鄭海珉)으로부터 임시정부 독립공채 모집위원으로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임명장을 받고 공립공채 1,000원을 포함한 약 5,500원을 모금해 정해민을 통해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서장환은 1920년 10월경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와 접촉하고 대구 재전당서포와 정덕진의 자택을 근거지로 삼아 이현수가 가지고 온 임시정부 포고문과 일본인 및 관헌에 대한 경고문 등 수십 종의 독립운동 관계 인쇄물을 복사했다. 그 후 그는 1921년 2월 말까지 곽종해, 정덕진 등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서, 자산가들에게 배송하는 한편 대구 시내 상점과 도로 상에 살포해 민족의식 고취와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여기에 1921년 10월에는 이현수와 함께 등사문 통신문 형식의 지하신문 <자유신보(自由申報)>를 발간해 각 언론기관에 보냈으며, 영문판을 따로 제작해 외국인에게 일제의 식민통치의 야만성을 폭로하려 했다. 그리고 1923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대구, 평양, 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냈으며,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이 발각되면서 1923년 1월에 체포되었지만, 그는 사전에 증거를 인멸했기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상하이로 망명하려 했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 그러지 못하고 계룡산에서 동흥의숙(東興義塾)이란 이름의 서당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시키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하고 은거했다. 8.15 광복 후에는 대구로 돌아왔고 1970년 5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장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