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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 <colbgcolor=#fff,#2d2f34>준석(俊錫) |
이명 | 관옥(寬玉) |
호 | 백노(白奴) |
출생 | 1899년 6월 14일[1] |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428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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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8년 5월 28일 (향년 68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604-16번지 자택 | |
본관 | 고흥 유씨[2] |
가족 |
유중권(부),
이소제(모) 유계출(누나)[3], 유관순(여동생), 유인석(남동생), 유관석(남동생) |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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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그 유명한 유관순의 오빠로, 초명은 유준석(柳俊錫), 이명은 유관옥(柳寬玉)이다. 수많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부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업적이 있지만 여동생인 유관순의 인지도가 높아 비교적 알려지지 못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유중권· 이소제 부부는 각각 유우석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며, 유중무는 유우석의 작은아버지이다.
2. 생애
1899년 5월 7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소제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공주군 공주면 대화정(現 공주시 중학동)으로 이주했다.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2일과 3월 15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 이규상(李圭尙), 현언동(玄彦東)과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재학생 오익표(吳翼杓), 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은 3월 24일 밤 9시에 영명학교 사택에 모여 4월 1일 공주면 읍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유우석도 영명학교 재학생 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했는데,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 동원 및 기미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노명우(盧明愚), 강윤(姜沇), 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하고, 이튿날 오후 3시에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베껴 쓰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이던 4월 1일 오후 2시에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서로 나누고 장터에 나아가 군중들에게도 또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준 뒤, 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 경찰이 강력하고 신속하게 저지하여 만세시위는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나고, 이후 유우석은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한편 같은 날 아우내 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여동생인 유관순도 체포되어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나고 만다. 유우석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그곳에서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했다. 1919년 7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8월 29일[4] 공주지방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 영명학교에 복학해 졸업했고,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조국수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이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또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았고, 1934년에는 강원도 양양군· 강릉군을 중심으로 설악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구속되는 등 총 11번에 걸쳐 투옥되면서도 독립운동에 계속 종사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1968년 5월 28일 오후 4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604-16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고, 그의 장례는 그 해 6월 5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사후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지는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있다.
3. 가족
- 부인은 강원도 양양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5]으로, 감리교회에서 많은 청년을 포섭하여 만세운동을 활발히 주도한 조영순의 딸이다. 유우석과는 1925년 4월 18일 교직생활 중에 결혼하였는데, 조화벽이 보호자가 없이 떠돌던 유인석[6]과 유관석[7]을 거두어 키워준 일이 인연이 되었다. 이후 아내 조화벽은 유우석의 가족을 모두 강원도 양양군에 은신시켰고, 어린 시동생인 유인석(柳仁錫)과 유관석을 양육하였다. 유우석의 가족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쓴 애국지사 가족인 셈이다. 후손으로는 외아들 유제충[8], 손자 유덕상[9]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