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주일(周一) / 성호(城湖) |
출생 | 1873년 3월 16일[1] |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북면 신성리 (現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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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년 7월 20일 (향년 67세) |
본관 | 달성 서씨[3] |
묘소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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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3년 3월 16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북면 신성리(現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아버지 서찬성(徐鑽成, 1846 ~ 1922. 8. 22)과 어머니 함안 조씨(? ~ ?. 12. 9)[4]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지시로 의병진을 창설하려고 준비하자, 이에 가담해 남석구(南錫球)· 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함께 청송군 지구의 의병 모집 책임을 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창설되자 후봉장(後鋒將)에 임명되었다. 곧 의병진의 총 병력이 2천 명을 넘자 북진을 계획해 영덕군의 신돌석 의진과 협력하에 청하군 현내면 읍내를 공격했고, 이어 영천군 자양면과 청송군 현북면 신성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후 산남의진은 잠시 휴식기를 가졌고, 1907년 4월 다시 거병해 청하군 죽남면 매현리에 장영도소(將營都所)를 정했으나 기밀이 누설돼 정용기와 이한구· 권규섭 등 주요 간부진이 모두 전사했다. 그 뒤 정환직이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나 정환직 또한 같은 해 12월 11일 영천군 남쪽 교외에서 순국했다.
이후 은거하다가 1908년 신돌석의 영덕의진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과거 동지였던 남석구와 함께 의병진을 재구성해 의병진의 동쪽을 맡았다. 서종락의 의병진에는 최세윤(崔世允)·이구옥(李舊玉)·이만파(李萬波) 등이 참여했으며, 각각 50명에서 1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성군, 청송군 안덕, 안동군, 연일군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1908년 말에 경주군, 영천군, 의흥군, 청송군 등지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의 합동 토벌대와 격전 끝에 청송군 현북면 고와동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의병진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이후 은거하다가 1940년 7월 20일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