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석창문(石昌文)[1] |
이명 | 석성국(石成國) |
자 | 성국(聖國) |
생몰 | 1886년 7월 6일 ~ 1908년 9월 10일 |
출생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
본관 | 충주 석씨[2] # |
사망지 | 충청북도 보은군 |
매장지 |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석창문은 1886년 7월 6일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용맹함이 두 사람 몫을 할 만큼 뛰어났다고 하며, 집이 가난해 상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1907년 고종 황제 페위와 정미7조약에 의한 대한제국군 해산 문제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생업을 버리고 속리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봉수(韓鳳洙) 의병장의 참모장이 되었다.1908년 5월, 석창문은 한봉수, 김규환(金奎煥)과 함께 약 40명을 인솔하고 청주 산외일면 초정동(椒井洞)에서 일인기병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 좌우의 산기슭에 매복하였다가 석창문이 선두의 일본 병사를 저격해 사살하고 나머지 일본 병사가 총격전을 벌이다가 달아나자 우편물과 현금 2천여 원을 탈취해 군자금에 썼다.
이후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례 전투를 치르던 그는 1908년 9월경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홀로 의병대를 떠나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적 수십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틈을 봐서 도주했지만 곧 따라잡히게 되자 주머니칼을 꺼내 끝까지 저항했지만 끝내 체포되었다. 일본군이 그를 심문해 의병대의 근거지를 알아내려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이미 사로잡혔으니 내가 죽을지언정 남을 끌어들이겠느냐!"
그의 최후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군은 그를 수차례 고문했지만 그가 혀를 깨물며 끝내 자백하지 않자 보은군으로 끌어내서 살해했다고 한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신낭(腎囊)을 끊어 자살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이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담담하게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사흘 후 몸을 매어 자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석창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현재 그와 아내 성산 이씨의 합장묘가 충북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속리산 자락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