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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19:50

성만리

성명 성만리(成萬里)
이명 성경현(成庚賢)
생몰 1911년 7월 17일 ~ 1974년 6월 15일
출생지 충청북도 괴산군 상모면 수희리
사망지 경상남도 김해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성만리는 1911년 7월 17일 성인호(成仁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성인호는 독립운동가였다고 하며[1], 그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했다고 한다. 1926년 부친을 찾아 만주로 건너간 그는 길림성의 문광학교에서 수학한 뒤 홍진 지청천을 찾아가 독립전선에 일생을 바친다는 결의를 전달해 두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1930년, 성만리는 북만주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여 당원으로서 오상현지구당(五常縣地區黨)을 조직하고 선전책으로 활동했다. 1932년 12월에는 지청천 휘하에서 중국 구국군과 합작하여 영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상당한 전공을 세웠으며, 1933년 11월에는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국인 특별반에 입학해 중국인 군관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5년 4월 낙양분교를 졸업한 그는 오광선을 대장으로 하는 특동대(特動隊)를 조직하고 그는 참모를 맡았다. 1938년에는 지청천의 밀명을 받고 일제 요인을 주살하기 위해 하북성에 파견되었다. 1939년 6월 9일 일제에 부역하는 한간 인루겅이 열차편으로 거통관(居痛關)을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달리는 열차에 폭탄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동지 김병인(金秉仁)이 사살되고 그는 겨우 몸을 피했다.

이후 수년간 중국군에서 활동하다 만주 독립군을 재건하여 국내에 진입할 사명을 띠고 만주 부여현 삼차하에서 은밀히 활동했다. 8.15 광복 후 국내로 돌아와 김해시에서 조용히 지냈고 1974년 6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성만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지산(志山) 정원택(鄭元澤)이 기술한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에 따르면, 성인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정원택의 길안내를 해줬고 서간도로 망명한 뒤 정원택과 서신을 자주 주고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외의 독립운동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